밥도 잘 안먹고 100원짜리 과자만 사달라고 조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커서 대학생이 되고 키 178cm에 ROTC가 되어
내일모레는 멋진 대한민국의 초급 장교가 되겠구나.
최근 할머니 할아버지 회혼례때 단복 입은 너를 보니 너무 의젓하더라.
지금 작은아빠 책상에는 네 엄마(나로선 형수이지)로부터 받아온,
네가 2년전 여름방학때 만리포 군사훈련중 엄마아빠에게 보낸 엽서 한 장이 놓여 있다.
너는 작은아빠가 이 엽서를 읽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를 것이다.
글은 잘쓰고 못쓰고가, 글씨를 잘쓰든 삐뚤빼뚤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글(편지)을 쓰는 사람의 ‘진실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꼈다(작은아빠가 늘 강조하는 지론이다).
22년동안 크면서 몇 번이나 부모께 편지를 쓰거나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간단한 엽서 한 장에 털어놓은 너의 마음이 진실되기에 감동을 주는 것이다.
네 편지를 받고 엄마는 얼마나 울었을까, 생각해보았느냐.
전문을 다시 읽어보마.
부모님!
만리포에서 인생경험을 호되게 치루고 있는 아들 00입니다.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나약한 아들이었나를 만리포에 와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특히 어머니께 지금까지 셀 수도 없는 많은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만리포에 비하면 임금님 밥상인 어머니의 정성스런 음식을 투정하는 등
철모르는 행동이 지금 와서 많이 후회가 됩니다.
음식투정은 제가 저지른 수많은 불효에 1억분에 1도 되지 않지만
앞으로는 효도만 할 거라고 다시한번 다짐합니다.
지금 전 제가 지금껏 단 한번도 예상하지 못하는
지독하고 사람을 죽여놓는 훈련의 연속입니다.
과장된 예기(얘기)이긴 하지만 실미도에 온 듯한 기분을 들게 할 정도입니다.
하루 하루가 이렇게 깊고 힘들게 느껴지는 날은 단 한차례도 없었습니다.
남은 훈련기간 동안은 단순히 죽을 것같다는 생각을 버리고
저를 더 성숙하고 그동안 썩어빠진 정신력을 재무장할 기회로 삼겠습니다.
그동안 저의 어리광을 다 받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앞으로 정말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효도에 대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그런 아들이 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죽을만큼 싸랑합니다.
2006년 혹독하고 지독하고 끔찍하지만 정말 다녀와서 효도하고 싶은 아들 00 올림
기분이 어떠냐? 너도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어쩌면 이런 편지를 썼나? 잊어버릴 수도 있겠구나.
작은아빠도 네 편지에 ‘한 감동’하고 가슴이 먹먹했는데,
네 엄마 아빠는 어땠을까?
그렇게 다짐한 ‘효도의 약속’은 네가 쓴대로 1억분의 1이라도 실천하고 있는 거니?
앞으로 닥칠 수많은 고비들,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지옥훈련’을 받으며 흘렸을 눈물, 느꼈을 가족애,
이 편지를 쓸 때의 심정을 떠올리기 바란다.
각설하고,
너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쓰는 까닭이 있다.
엊그제 우리집에 와서 “작은아빠, 책 좀 빌려가면 안돼요?” 물었지.
그런 것 보고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고 한단다.
원하고 있는데 요청을 하니 소원을 이룬 것이라는 뜻으로 새겨라.
“물론이다. 네 마음대로 골라 가라”
미국사람들은 이럴 때 어깨를 으쓱이며 “sure"라고 하겠지.
“1주일마다 작은집 와서 빌려가고 읽은 후 반납할 게요.
작은집 서가는 학교 도서관보다 훨씬 좋은 것같아요.
도서관은 쓸데없는 책도 많은데,
작은집엔 맨 읽고싶고 쓸데없는 책이 하나도 없는 것같아요. 신간도 많고”
“뭐, 1주일에 3권씩 읽겠다고? 정말 환영한다. 그 약속만 지키면 내가 한번 크게 쏘겠다”
어떤 책을 고르는가 가만히 지켜보니, ‘공부의 즐거움‘
(교수 등 우리시대 공부달인 30인이 공부의 즐거움에 대해 써놓은 책. 위즈덤하우스 간)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시다-앨런 싱어 지음. 한국경제신문 간. 당신의 ’오늘‘을 특별한 ’내일‘로 만드는 지혜가 담긴 책)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 지음, 문학동네 간. 자기 안의 ’神‘을 찾아가는 영혼의 연금술에 대한 이야기) 등 3권이었다.
그러더니 정확히 열흘 만에 3권을 반납하고 7권을 골라 가지고 간 너를 보고
얼마나 대견했더니, 기분까지 좋아졌다.
2번째 빌려간 책의 목록을 보자.
‘젊음의 탄생’(이어령 지음. 대학생이라면 꼭 보아야 하는 책이다.
창의적인 사고방식이 무엇이고, 사회현상이든 학문이든 왜 널리 깊게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초보 직장인인 네 누나에게도 꼭 읽으라고 해라)
‘책만 읽는 바보’(책벌레 이덕무이야기란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책세계에 빠져 나중에 큰 학자가 되었다. 실사구시 학문의 선구자라 하겠다)
‘인연’(피천득 지음. 주옥같은 수필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작은아빠가 권한 책이 허영만 그리고 김세영이 글을 쓴
장편만화 ‘사랑해’ 1∼12권(패밀리만화로 이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너에게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부모세대들에겐 얼마나 재밌고 유익한지 모른다.
배꼽은 또 몇 번이나 빼게 만들고. 10만원이 아깝지 않다)이었다.
만화도 아주 중요한 매체이다. 언젠가 권한 ‘전두환’ ‘박정희’ 만화책을 보았겠지.
그림을 잘 그리고 못그리고를 떠나서 한국 현대사의 얼룩진 군홧발정치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두 ‘정치가’의 행로를 담은 인물만화를 보고 느낀 소감은 어떠냐?
작은아빠는 한 권에 9천원이니 3만6천원을 들여 샀지만 그 돈이 조금도 아깝지 않더구나.
만화든 소설이든 학술서든 교양서든 ‘제대로’ 된 것이라면 허겁지겁 읽어야 할 일이다.
자, 네가 소위로 임관하기 전까지 1주에 한두어 권이라고 계속 읽는다면
1년에 몇 권을 읽는 거냐?
작은아빠와 한 네 자신의 약속만 지킨다면,
장담컨대 너는 네 동료들보다 몇 배나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을 것이다.
책은 마음의 양식糧食이라는 말이 있다.
몸은 밥을 먹어야 되지만, 마음은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하면서 자란다는 말이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생각하다보면 글이 써지는 법이다. 네가 일주일마다 도서관보다 더 좋은 것같다는 작은집에 와 서너 권씩 빌려다가 읽는 습관을 붙인다면,
네 인생에 파란불이 켜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스로 결심한 일이니, 꼭 실천하기 바라는 뜻에서
너에게 처음으로 긴 편지를 쓰는 것이다.
더구나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가을이 아니냐.
너는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는 말을 사전辭典적인 의미로만 알고 이해하겠지.
등불을 가까이 하여 글읽기에 좋은 가을철이라는 뜻이다.
호롱불, 등잔불, 이런 불들을 민속박물관에서나 구경했을까.
작은아빠만 해도 고등학교때까지 시골집에 전기와 전화가 들어오지 않았다.
35년전 일이이다. 밤이면 호롱에 불을 켰고 등잔불에 불을 비췄다.
실제로 호롱불이나 등잔불 밑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아침에 코밑이 그을음으로 시커멓게 되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숯으로 삽등에다 한글을 쓰며 글자를 배웠다고 한다.
세대차이 나는 옛날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가을은 그만큼 책읽기에 좋은 계절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너의 성취成就 있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긴 편지인만큼 새겨읽어주었으면 좋겠다.
건강하게 잘 지내기 바라며 줄인다.
어느 가을날 토요일 집에서 작은아빠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