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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明齋) 윤 증(尹 拯) 특별전-예술의 전당 書藝박물관 (3-2)
藝 術
(30) 藝術
(31) 왕희지의 필진도[王羲之 筆陣圖] -明齋 尹拯 -연대미상 -개인소장
明齋 尹拯이 아들 行敎를 가르치려고 직접 쓴 王羲之의 筆陣圖. (*羲: 복희씨 희)
*筆陣: 글을 쓰는 陣營이란 말로, 글씨 쓸 때 필요한 붓·벼루·硯滴 등을 갖추는 일을 軍陣에
비유하여, 종이는 陣, 붓은 칼, 먹은 鬪具와 갑옷, 벼루는 城池, 마음의 뜻[心意]은
將軍이라고 하며, 筆陣圖는 글씨 쓰는 법에 대하여 설명한 글.
*王羲之(307~365): 東晉 사람으로 漢나라 때 생긴 楷書, 行書, 草書의 實用書體를
예술적인 서체로 승화시킨 중국 최고의 書藝家. (*楷: 본보기 해)
(32) 동토부군유묵(童土府君遺墨) -童土 尹舜擧 -연대미상 -개인소장
童土 尹舜擧의 親筆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遺墨帖.
童土 尹舜擧(1596~1668)는 明齋 尹拯의 둘째 큰아버지로 沙溪 金長生의 門人이다.
遺逸로 薦擧되어 宜寧縣監, 寧越郡守, 掌令(司憲府의 正四品職) 등을 역임하였다.
尹拯에게 ‘明齋’라는 雅號를 직접 지어주었으며 明齋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글씨에 뛰어나 童土가 쓴 병풍 <尹舜擧 草書 武夷九曲歌>는 보물 제1671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掌: 손바닥 장)
*遺逸: 조선시대 草野에 隱居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登用策.
(33) 석호필첩(石湖筆帖) -石湖 尹文擧 -1665년 -개인소장
石湖 尹文擧의 親筆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筆帖.
石湖 尹文擧(1606~1672)는 明齋 尹拯의 넷째 큰아버지로 1633년 文科에 급제하여
堤川縣監, 東萊府使, 吏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坡平 尹氏 魯宗派 ‘擧’字 항렬(行列) 중에서
유일하게 科擧에 급제했으며 著書는 <石湖文集> 4冊이 있다. 當代의 名筆이었으며
동생 美村(魯西) 尹宣擧의 墓標와 넷째 아버지인 庶尹公의 碑文(宋時烈 지음)을 썼다.
(34) 四 先生 중 明齋 尹拯 친필 -尹拯 -연도미상 -개인소장
童土 尹舜擧, 石湖 尹文擧, 魯西(美村) 尹宣擧, 明齋 尹拯 등 4명의 遺筆을 모아 만든
筆帖 중에서 중국 宋나라의 學者·詩人인 安樂先生 邵雍의 詩를 明齋 尹拯이 親筆로 쓴
글씨이다. (*邵: 땅이름 소 *雍: 화할 옹)
(35) 시고(詩稿) -八松 尹煌(1572~1639) -1628년 -개인소장 (*煌: 빛날 황)
石潭 李潤雨(1569~1634)가 任地로 떠날 때 보낸 送別 詩. (*潭: 못 담)
石潭이 秋城(潭陽) 任地로 떠나기에 송별 시를 짓는다.
늑대와 龍이 대열을 같이하매 잘 합해서 어그러지지 않고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도리어 계획된 것이 아닌데도 놀랍다.
東華에서 書와 劒 몸이 우뚝하고 남쪽으로 가는 깃대에 말이 잘도 달리네.
낮에는 鳳閣에 막혀 고삐가 근심스럽고 봄에 金山에 이르니 興이 일어난다.
丈夫가 눈물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지 말게나
늘그막에 서로 헤어지며 떨어지는 눈물에 옷이 젖는구나
戊辰(1628년) 仲春 下旬에 八松居士가 쓴다.
(36) 시고(詩稿) -魯西(美村) 尹宣擧 -1657년 -개인소장
同春堂 宋浚吉이 퇴직하려고 하자 나라에서 안거(安車)를 주어 서로 이별하게 되자
魯西(美村) 尹宣擧가 보낸 詩稿이다.
魯西(美村) 尹宣擧는 明齋 尹拯의 아버지로 1633년 生員, 進士가 되었으나 丙子胡亂 때
아내와 친구를 잃고, 學問에 몰두하여 性理學 全般의 大家가 되었다. 尤庵 宋時烈과
白湖 尹鑴가 對立하자 중립적 입장을 취하였다. 市南 兪棨와 함께 <家禮源流>를
집필하였으며, <魯西集> 등을 남겼다. 文敬의 諡號를 받았으며 후에 明齋 尹拯과 함께
官爵 削奪과 復官을 반복하였다. (*鑴: 솥 휴 *棨: 창 계)
*家禮源流: 家禮에 관한 여러 글을 분류∙정리한 책.
(37) 이백 시(李白 詩) -童土 尹舜擧 -연도미상 -개인소장
(38) 친필 초서(親筆 草書) -童土 尹舜擧 -연대미상 -개인소장
(39) 친필 병풍(親筆 屛風) -明齋 尹拯 -연도미상 -개인소장
明齋 尹拯이 宋나라의 晦庵 朱子, 退溪 李滉, 靜庵 趙光祖, 南宋의 南軒 張栻 등의 詩를
草書로 쓴 병풍이다. (*晦: 그믐 회)
明齋 尹拯 家系
(40) 明齋 尹拯의 家系
(41) 尹拯 家系
(42) 明齋 尹拯의 肖像 -年度 未詳 -개인소장(원본; 해외소재)
–影印本
(43) 친필 병풍(親筆 屛風) -明齋 尹拯 -연도미상 -개인소장
宋나라의 安樂先生 邵雍의 詩를 明齋 尹拯이 草書로 쓴 병풍이다.
(*邵: 땅이름 소 *雍: 화할 옹)
(44) 4선생 필적탁본(四 先生 筆跡拓本) -1716년 -개인소장
童土 尹舜擧, 石湖 尹文擧, 魯西(美村) 尹宣擧, 明齋 尹拯 등 4명의 遺筆을 모아 만든
筆帖으로 四先生의 글씨뿐만 아니라 龍西 尹元擧, 西溪 朴世堂, 玄石· 朴世采. 恥菴 李之濂,
存窩 崔錫鼎, 李墩, 東岡 趙相愚 등 當代 이름난 인물이 남긴 跋文으로도 유명하다.
(*恥: 부끄러울 치 *濂: 물 이름 렴 *窩: 움집 와 *墩: 돈대 돈)
(45) 尹行敎의 簡札 (위) – 尹東涵의 簡札
=윤행교(尹行敎)의 簡札 -尹行敎 -1698년 -개인소장
金堤郡守인 작은아버지 農隱 尹推에게 보낸 答信이다.
尹行敎는 明齋 尹拯의 큰아들로 文科에 급제하여 忠淸監司,
大司憲 등을 지냈다. 尹拯 死後 <明齋文集>을 출판하는 등 부친의
爲先事業에 열중하였다. 淸白吏였던 작은아버지 農隱 尹推가 尹行敎가
비단옷을 입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꾸짖자,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力說한 答信 간찰이다.
*爲先事業: 다른 것에 앞서 우선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祖上을 위하여 일함.
=윤동함(尹東涵)의 簡札 -尹東涵 -1752년 -개인소장 (*涵: 젖을 함)
明齋 尹拯의 손자 尹東涵의 친필 간찰이나 受信人은 알 수 없다.
尹東涵은 尹行敎의 셋째 아들로 薦擧로 벼슬에 나아가 井邑縣監,
靑松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46) 윤충교(尹忠敎)의 간찰 (위) – 윤동원(尹東源)의 간찰
=尹忠敎의 간찰 -1738년 -개인소장
尹忠敎가 南平(현 羅州)에 사는 鄭生員에게 보낸 簡札이다, 尹忠敎는 明齋 尹拯의
둘째 아들로 生員試에 합격하여 侍直, 副率 등을 역임하였다.
=윤동원(尹東源)의 간찰 -1738년 -受信人 不明 -개인소장
一庵 尹東源은 明齋 尹拯의 長孫이며 尹行敎의 長子로, 科擧를 포기하고 家學을
계승하였다. 學脈上 明齋 尹拯의 學問的 嫡統을 이어받은 인물로, 薦擧를 통하여
韓山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47) 간찰(簡札) -윤광집(尹光緝) -1754년 -개인소장 (*緝: 모을 집)
明齋 尹拯의 曾孫子 尹光緝의 친필 간찰이다. 尹光緝은 明齋 尹拯의 生前에 태어났으며,
童土 尹舜擧의 家學을 계승하여 學問을 연마했다. 1752년 儒賢의 後孫으로 參奉에
除授(*왕이 벼슬을 내리는 일)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8) 지헌부군유고(止軒府君遺稿) -윤광안(尹光顔) -연도미상 -개인소장
明齋 尹拯의 再從(六寸)이며 門人인 晩霞 尹游의 曾孫 尹光顔의 遺稿이다.
尹光顔은 1786년 文科에 급제하여 慶尙監司, 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慶尙監司 시절 英陽에 있는 雲谷書院을 철거했다가 암행어사 李愚在의 彈劾을 받아
斯文亂賊으로 몰려 함경도 茂山에 유배되기도 했다. (*霞: 노을 하)
*雲谷書院: 南宋의 晦庵 朱文公(朱熹)과 尤庵 宋時烈을 祠享하였다.
(49) 간찰(簡札) -윤추(尹推) -1672년 -개인소장
農隱 尹推는 尹煌의 손자이고, 尹宣擧의 아들로, 明齋 尹拯의 동생이다.
遺逸로 천거되어 懷德縣監, 金堤郡守, 司憲府 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淸白吏에 선발되었으며, 著書는 <農隱集>이 있고, 金堤의 龍巖書院에 배향되었다.
(*煌: 빛날 황)
尹推의 甥姪 定齋 朴泰輔가 “세상사람들이 明齋 있는 줄만 알고, 農隱 있는 것은 모른다.”며
農隱 尹推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明齋 尹拯과 달리 사촌 형 德浦 尹搢과 함께 尤庵 宋時烈에
대하여 强硬한 立場을 취했다. 尹推의 문집 <農隱集>을 後孫들이 國譯하였다. (*搢: 꽂을 진)
*遺逸: 조선시대 草野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薦擧하는 人材 登用策.
(50) 주자(朱子)의 시(詩) -童土 尹舜擧 -연대미상 -개인소장
勝日尋芳泗水濱(승일심방사수빈) / 좋은 날씨에 泗水 물가에서 꽃을 찾으니
無邊光景壹時新(무변광경일시신) / 끝없는 광경이 일시에 새롭네.
等閑識得東風而(등한지득동풍이) / 한가로운 동풍을 얼굴에서 느끼니
萬紫千紅總是春(만자천홍총시춘) / 만까지 자주 빛 천 가지 붉은 빛이 모두 봄이네.
(*尋: 찾을 심 *泗: 물 이름 사 *濱: 물기 빈 *紫: 자줏빛 자)
(51) 叔父 進士公 尹時擧 墓誌 -明齋 尹拯 -影印本
明齋 尹拯이 아버지의 막내 동생 進士公 尹時擧가 1684년에 他界하여 1687년에 쓴
墓誌銘으로 <明齋文集> 卷35에 수록되었다. 尹時擧는 1612년에 태어나 進士試에
합격했으며 1684년에 타계하였다.
進士公 타게 3년후 明齋는 이 묘지명을 지어 叔父의 죽음을 哀悼하였다.
(52) 宗兄 윤절(尹晢)에게 보낸 간찰 -明齋 尹拯 -1662년 -개인소장
明齋 尹拯(1629~1714)이 33세때인 1662년 4월, 東萊府에 있는 坡平 尹氏 魯宗派 宗孫인
修撰公 寒松 尹晢이 보낸 두 節句詩에 화답하여 또 다시 보낸 ‘身字’韻 二首이다.
‘忠孝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제 몸을 恭敬하는데 있는 것’이라며 ‘東萊의 외로운
客館에서 일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분이 되었는가’라고 했는데 결국 修撰公 寒松 尹晢은
그 해 8월에 殞命하였다. (*晢: 밝을 절 *殞: 죽을 운)
(53) 사마방목(司馬榜目) (위) – 문과방목(文科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1633년 (*榜: 방 붙일 방)
조선시대에 일년 동안 실시된 生員 ∙進士試의 합격자 명부로, 明齋 尹拯의 부
친 魯西(美村) 尹宣擧의 生員 ∙進士試의 합격을 확인 할 수 있다.
=문과방목(文科榜目) -1630년
조선시대 文科에 及第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 책으로, 石湖 尹文擧의
文科 급제를 확인할 수 있다.
(54) 강도지(江都誌) -저자 및 연도 미상 -개인소장
江都(江華島)의 地誌로 明齋 尹拯의 모친 李氏가 丙子胡亂 때 自決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江都: 몽고군의 침입으로 江華縣으로 首都를 옮겼을 때 江華縣.
*1636년 12월 丙子胡亂이 발발하자 美村(魯西) 尹宣擧는 어머니ㆍ부인 등과 함께 江華島로
피난했다. 그는 거기에서 權順長ㆍ金益兼ㆍ金尙容 등과 殉節하기로 약속했으며,
이듬해 1월 그들과 尹宣擧의 夫人 李氏는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그러나 尹宣擧는 처음의 계획을 바꿔 南漢山城에 포위되어 있는 부친과 함께 죽기로 하고,
어머니와 함께 江華島를 빠져 나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한산성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절개를 꺾고 살아남았다.
(55) 파평 윤씨 족보(坡平 尹氏 族譜) -1634년 -개인소장
明齋 尹拯의 家系를 확인할 수 있는 坡平 尹氏 族譜이다.
尹拯이 5세때 발간된 족보로 아버지 尹宣擧와 尹拯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56) 동토 윤순거(童土 尹舜擧)에게 써준 시고(詩稿) -龍西 尹元擧 -1666년 -개인소장
一別寒泉春四會可堪飛盡滿(일별한천춘사회가감비진만) / 寒泉에서 한 번 작별한 후에 봄이
네 번 돌아왔으니
庭梅今年不負歸田計先往(정매금년불부귀전계선왕) / 뜰에 가득 찬 매화가 다 떨어지는
슬픔을 감내할 수 있겠습니까? 금년에 돌아 올 계교를 저버리지 아니하신다면
尼丘且待來(니구차대래) / 저 먼저 니산 언덕에 가서 형님 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57) 영당기적(影堂紀蹟) -보물 제1495호 -작성자 미상 -1885년
-개인소장(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寄託 보관)
<影堂紀蹟>은 明齋 尹拯의 肖像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筆寫本으로, 1711년 卞良이
尹拯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린 사례부터 1744년 張景周, 1788년 華山館 李命基,
1885년 希園 李漢喆이 模寫할 때까지 4번의 제작사례를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제작일정 및 제작된 肖像의 數, 舊本 및 新本의 奉安過程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조선시대 思想史에서 明齋 尹拯이 차지하는 비중과 함께 현존하는 張景周와 李命基가 그린
尹拯 肖像은 조선후기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繪畵的 格調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작품ㅇ다.
아울러 '影堂紀蹟'은 초상화 제작과 移模過程 그리고 세초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明齋 尹拯의 肖像畵 5점과 함께 2006년 보물 제1495호로 지정되었다.
明齋 古宅
(58) 논산 명재 고택(論山 明齋 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190호- -조선시대 가옥 2동
-소재지: 충남 論山市 魯城面 魯城山城길 50 (校村里)
조선 肅宗 때의 학자인 明齋 尹拯(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으로, 後代에
수리한 것 같으며 그 細部技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論山 魯城山城(사적 제393호)이 있는 魯城山의 산자락에 魯城鄕校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圓形의 섬(天圓地方)을
만들어 庭園을 꾸몄다. 안채 뒤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兩班住宅으로 중요한 건물이다.
(59) 논산 명재 고택(論山 明齋 古宅) 全景 -국가민속문화재 제190호-
*國家民俗文化財: 衣食住·生業·교통·交易·信仰·오락 등 민간생활과 관련된 風俗과 慣習 중
중요한 것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중 하나이다.
1962년 文化財保護法이 제정될 때 ‘重要民俗資料’라는 용어가 사용되다가 2010년 2월
문화재보호법이 개정(2011년 2월 시행)되면서 ‘重要民俗文化財’로 변경되었으며,
2017년 3월 ‘國家民俗文化財’로 변경되었다.
(60) 논산 명재 고택(論山 明齋 古宅) 사랑채
(61) 논산 명재 고택(論山 明齋 古宅) 안채
- 명재(明齋) 윤 증(尹 拯) 특별전-예술의 전당 書藝박물관 (3-3)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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