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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유태후,1911년 대청제국의 막을 내리다
1911년은 신해혁명이 일어난 해이다. 수천년동안의 왕조교체와 달리, 도태되는 청황실은 ‘연착륙’을 실현한다. 이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점은, 신해혁명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성공적인 정치적 변혁을 이루었고, 신구사회집단이 교체하는 가운데 사회변혁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신해혁명은 단순히 1911-1912년에 걸쳐 일어난 혁명사건일 뿐아니라, 하나의 시대를 긋는 사건이다.
시대는 인물을 낳는다. 소위 영웅이 시대를 만들고,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것이다. 보통사람의 운명은 시대에 휩쓸려 가고, 시대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13년 2월 22일 새벽, 마지막 황제 부의의 명목상 모친인 융유태후가 장춘궁에서 병사한다. 당시 민국총통을 맡고 있던 원세개는 즉시 전국에 명을 내려 반기를 달고 3일간 을 애도일로 선포했다. 문무관리들은 27일간 상복을 입었다. 참의원은 반기를 걸었을 뿐아니라, 이월 이십육일에 1일간 휴회하고, 이월이십팔일은 제사일로 정했다.
이뿐아니었다. 원세개는 친히 팔에 검은 완장을 차고, 제사에 참석했다. 당시의 군정요인들은 속속 전보를 보내어 명의만 남아있던 청황실에 애도의 뜻을 전했다. 부총통 여원홍은 전보에서 융유태후에 대하여 “덕지공고(德至功高), 여중요순(女中堯舜)”이라고 칭송했다.
그후, 참의원 의장 오경렴의 창의하에, 삼월십구일 당시 정부는 태화전에서 국민애도대회를 개최한다. 영당에는 ‘여중요순’이라는 백색의 횡폭이 걸려 있었다. 영당의 정중앙에는 융유의 상을 모시고, 모든 바깥의 기둥은 흰색천으로 감쌌다. 전당내에는 만련, 화환이 가득했다. 청나라식 상복과 현대군복을 입은 의장대는 영당의 앞과 좌우에 시립해 있었다.
과거 역사가의 눈에, 융유태후는 왕왕 ‘혼용(昏庸)하고 우준(愚蠢)한 투부(妬婦)”라는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청사고.후비전>>을 보면, 융유태후에 대하여는 겨우 167개 글자로 기록했는데, 간단하게 그녀의 신분을 언급했다: 서태후의 조카딸이자, 광서제의 황후, 부의의 모친. 그리고는 선통제의 퇴위조서를 내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진실한 융유태후의 면목은 모호하다. 그러나, ‘혼용하고 우준한 투부’라면 왜 청나라가 정권을 상실한 이후에도 이렇게 많은 애도를 받을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1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12년 2월 12일, 268년간 지속되던 대청왕조는 융유태후가 반포한 퇴위조서 하나로 역사의 무대를 떠나게 된다.
퇴위조서를 초안한 사람은 광서20년 은과장원인 장건(張?)이다. 장건은 백년실업의 전통을 개창한 청나라말기의 장원으로 경세제용의 두뇌를 갖추고 있을 뿐아니라, 문장력도 뛰어났다. 조서에는 완곡하고 생동적으로 대청왕조가 ‘병에 들어 사망했다’는 내용을 잘 기록해놓았다.
“짐은 융유태후의 의지를 받들어 이 조서를 내린다. 이전에 민군(民軍)이 의거를 일으키고 각 성에서 호응했으며, 구하(중국)가 들끓었고, 생령이 도탄에 빠졌다. 그리하여 특별히 원세개에게 명을 내려 사람을 보내어 민군대표와 토론하게 하였고, 국회를 열어 정치체제를 공적으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두 달동안, 확실한 방법을 내놓지 못했다….국가체제는 하루라도 결정을 미루면, 민생은 하루 더 불안해진다. 이제 전국인민의 마음이 공화제로 기울었고, 남부와 중부의 각성에서는 이미 전자를 주장하고, 북부의 여러 장군들은 후자를 주장한다. 인심의 향배를 보면 천명을 알 수 있다. 나는 어찌 우리 집안의 영광을 위하여,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못본척 할 수 있을 것인가. 밖으로는 대세를 보고, 안으로는 여론상황을 보아, 특히 황제를 이끌고 통치권을 전국의 백성들에게 건네주고 공화제의 입헌국체로 정하고자 했다….원세개는 자정원의 선거를 거쳐 총리대신이 되었고, 신구교체의 시기에, 납북통일을 선포했다. 원세개는 공화정부를 구성할 전권을 가지고, 민군과 협상하여 방법을 통일하라….여전히 한,만,몽,장,회의 오족의 영토가 완전한 ‘중화민국’이 되게 하라. 나는 황제와 물러나서 편안히 쉬고 세월을 보내겠다…”
이 두달전인 1911년 12월 29일, 1894년부터 흥중회를 설립한 손중산이 17성대표에 의하여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선임되었고, 이틀후인 1912년 원단, 남경임시정부는 정식성립을 선포했다. 두 가지 전후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은 모두 신해혁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퇴위조서의 반포는 융유태후로 하여금 큰 시대의 화룡점정의 마지막 눈을 그리게 한 것이고, 그녀로 하여금 죽어도 영광을 얻도록 한 것이다. 만일 1911년의 초점인물이 손중산과 원세개라면, 조서 한장으로 융유태후는 1912년에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 때의 융중한 장례식은 융유에 대한 애도라기보다는 원세개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원세개는 세상사람들과 아직은 세력을 온존시키고 있는 청나라의 유신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의 지위는 대청이 부여한 것이고, 대청에 대하여 그는 아직도 옛정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융유가 그래서 필요했던 것이다. 그녀의 일생을 보면 그녀는 남에게 끌여다니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퇴위조서라는 역사사건 이외에, 융유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대부분 야사와 전설이다. ‘투부’(질투하는 부인)라는 이야기는 그녀가 진비와 궁중투쟁을 벌였다는 소문때문이다. ‘혼용하고 우준하다’는 것은 청나라가 그녀의 손에 망했다는 것때문이다.
그러나 그 장례식을 보면, 융유에게 씁쓸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년후 융유가 죽었을 때, 곁에는 선통제 부의, 총통 원세개, 내무부대신 세속(世續)과 궁녀 2-3명이 있었을 뿐이다.
융유는 죽기 전에 세속에게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고아과부는 천고이래로 마음아픈 것이다. 궁중의 황량함을 보니, 혼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부의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황제집안에 태어나서, 한가지 일도 하지 못했고, 나라가 망하고, 모친이 죽는데도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내가 너를 떠날 때가 되었다. 앞으로의 길은 네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원세개에 대하여 그녀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었다. 대청왕조의 막을 내렸다는 짐을 등에 지고, 융유태후는 우울하게 마지막 일년을 보냈다. 사실, 대청왕조는 이미 병들어 있었다. 이는 융유태후때문이 아니다. 심지어 그녀가 황궁의 문을 넘은 이후로 한참동안은 그녀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사학자인 모해건은 <<천조의 붕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청나라의 멸망은 아편전쟁때부터 이미 치명적인 화근이 심어졌다. 그후의 청나라정부는 계속 변화하고 강해지고자 했다. 의화단운동의 충격과 팔국연합군의 침입을 당하고, 특히 반청혁명운동이 일어난 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1901년 1월 29일, 당시 청나라정부의 실제집권자인 융유의 친고모 서태후는 아직 서안에 있었다. 그는 변법조서를 내렸다: “세상에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상경(常經)은 있지만, 만들어지고 나서 변하지 않는 치법(治法)은 없다. 바뀌지 않는 것은 삼강오륜이고 이는 해와 달처럼 세상을 비춘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법령들이고, 이는 금슬이 줄을 갈 듯이 바꾸어야 한다” 서태후는 여기에서 ‘외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의 단점을 버린다’ ‘일의진흥(一意振興)’등의 말을 했다. 청나라를 부강하도록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후 10년동안의 변혁은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청말신정(淸末新政)’이라고 불리운다.
청나라말기 10년동안 원세개는 ‘신정’을 추진한 가장 대표인물이다. 많은 ‘신정’조치는 왕왕 직예에서 먼저 시험실시하고, 그 후에 장정을 만들어 각성에서 널리 시행했다. 예를 들어 신군편제, 순경창설, 학당개설등이 그러하다. 원세개는 바로 이 과정에서 자신의 세력을 급격히 확대한다. 만청정계에서 가장 실력있는 정치스타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후 개혁을 심화시키면서 통치를 연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작이 좀 늦었다. 이때 진보적인 혁명세력이 이미 성장하고 있었다. 혁명역량의 영향하에, 청나라조정 내부에서 입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입헌파의 가장 유명한 영수는 융유를 대리하여 퇴위조서를 기초한 장건이었다.
1904년, 입헌파는 실제행동에 나선다. 장건은 이해 5월 친히 나서서 호광총독 장지동과 양광총독 위광도를 설득하여, 그들로 하여금 입헌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고, 그들을 위하여 초안까지 만들어준다. 그러나 온건하게 처신한 장지동은 그에게 당시에 권세가 가장 컸던 원세개의 의중을 탐문하도록 요청한다. 그리하여 장건은 원세개에게 서신을 써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 러시아의 승부는 입헌과 전제의 승부였다.” 그렇게 그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이타가키등을 본받아 입헌을 촉진하여 위기국면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원세개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직은 조금 더 늦추어야 할 때이다”
입헌사조의 영향하에, 대청의 집권자들은 마침내 이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1905년 12월, 청나라정부는 재택을 우두머리로 한 다섯 대신을 외국으로 보낸다. 일본, 영국, 미국, 독일과 프랑스로 가서 그들 정부를 고찰하고, 중국에서 입헌정체를 실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세히 검토한다. 1906년 7월 이 사절단은 귀국하고, 모든 구성원들은 입헌정체를 추천한다. 1906년 9월 1일, 광서제는 서태후의 지시하에, 경사와 지방관리로 하여금 헌정의 준비업무를 시작하도록 지시한다. 이 문제는 이렇게 결정되었고, 준비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입헌개혁이 온건하게 추진되던 1908년말, 사십년간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서태후가 세상을 떠난다. 그녀와 동시에 세상을 떠난 사람은 대청왕조의 명의상의 권력자인 광서황제, 즉 융유의 남편이 있다. 그들이 함께 세상을 떠나자, 그들을 둘러싼 모든 은원도 가져가버렸지만, 또한, 대청왕조의 개혁이 더욱 험난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서태후가 죽은 후 융유가 황태후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치제의 세 명의 후궁도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마지막 황제는 비록 광서제를 겸조(동시에 승계)하기도 했지만, 먼저 동치제의 계승자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서태후의 장례를 마친 후, 동치제의 세명의 후궁은 동릉에 남아서 서태후의 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묘를 지킨다는 것은 겉으로 내세운 말이고, 실제로는 융유태후의 입장을 난감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융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따. 태감 소덕장이 들고 일어나서 세 명의 후궁에게 말했다. 만일 그럴 거면 황태후께서 즉시 여러분을 위하여 동릉에 건물을 지어서 여러분들이 묘를 지키겠다는 효심을 이룰 수 있게 해주겠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융유가 소덕장에게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 이는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소덕장이 시키는대로 했다거나 소덕장을 무서워했다는 것을 과장된 것이다.
융유는 서태후가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는 소덕장밖에 쓸 사람이 없었다.
융유가 새로운 황태후가 되면서, 그녀는 역사의 무대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녀와 함께 역사의 무대로 나선 사람들은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서태후는 죽었다. 개혁은 아직 계속된다. 세 살에 등극한 부의는 여전히 허수아비 황제였다. 진정 정권을 장악한 것은 서태후가 생전에 정해놓은 후계자였다.
재풍은 부의의 생부이다. 이 26살된 섭정왕의 혼인은 형인 광서제와 마찬가지로 서태후가 지정해준 것이다. 형과 마찬가지로, 재풍은 서태후가 정해준 혼인에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형보다는 유연했다. 그가 정권을 장악한 기간동안, 암살 풍조가 돌연 혁명당내에서 성행하기 시작한다. 1910년, 이 섭정왕은 그와 같은 나이의 혁명당인 왕조명(왕정위)의 목표가 된다. 섭정왕은 암살을 피했고, 왕조명을 체포된다. 대청의 율법에 따르면, 이는 멸문지화를 당할 중죄였다. 섭정왕은 대리원이 그에게 ‘공공연히 법률을 짓밟았다’는 항의도 무시하고, 그에게 법외적인 은혜를 베푼다. 재풍이 생각한 것은 중하게 처벌하게 되면 혁명당인들의 원한만 가중될 것이고,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 관대하다는 명성을 얻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 결정으로 청나라조정은 국내외에서 호평을 듣게 된다. 유연하게 처신한 섭정왕도 청나라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는 절대로 느슨하게 다루지 않았다. 1909년, 세력이 이미 커지기 시작한 원세개를 다루기 힘들어지자, 그를 죽이려는 마음까지 가진다. 혁광이 만류하여 원세개를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원세개의 하야는 일세에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는 사건이 된다. 이 사건은 나중에 원세개가 다시 기용되었을 때 다시는 청나라조정을 위하여 전력을 다해서 일을 하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섭정왕이 조직한 황실내각은 후세사가들에 의하여 ‘임인유친(任人唯親, 가까운 사람만 등용함)’의 사례로 규정되고 재풍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 당시의 섭정왕은 이미 황실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믿을 사람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청나라말기의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은 그다지 젊지 않은 내각총리대신 혁광이었다. 그는 서태후의 신임을 깊이 받고 있던 ‘사조원로(四朝元老)’이고 서태후가 집권중일 때 그는 원세개의 개혁을 지지했던 사람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혁광의 탐욕은 국내외에 유명했다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내외관리의 뇌물을 받았다. 뇌물을 주는 자는 붉은 봉투에 은표를 넣어서 직접 건네면서: “왕야께서 나중에 상으로 내리시는데 쓰십시오(請王爺備賞)”이라고 하면 혁광이 살펴본 후에 “네가 신경써야할 일이 있다”고 답하면서 봉투를 방석 아래로 밀어넣으면 거래가 끝난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담여재주인’이라고 불렀는데, 스스로를 물처럼 담백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고처불승한(高處不勝寒, 높은 자리에 있으니 추운 줄을 모른다)’의 혁광은 재물을 탐하는 이미지만 있을 뿐,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한때는 효율적이고 청렴한 정부를 만들려는 개혁에 앞장섰던 인물이, 국내외에 유명한 탐관으로 전락하다니, 대청왕조의 운명도 다한 것인가 보다. 융유는 태후가 된 후에, 역사는 그녀가 나설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의 불행은 바로 이 정권을 장악한 모든 핵심인물이 그녀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서태후가 그녀를 선택하여 입궁시킨 때로부터, 그녀는 이 왕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과거에 서태후가 융유를 선택한 것은 그녀가 친조카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는 어느 정도 오해이다. 서태후가 여러 조카딸들 중에서 융유를 선택한 것은 어렸을 때 융유가 일처리에 과감하고 주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일찌감치 융유의 부친인 계상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희자(융유의 아명)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지 말라.” 그리하여 그녀는 언니와 동생이 모두 시집을 가고 나서도 집안에서 광서황제에 시집가기를 기다렸다. 서태후가 선택한 후, 어린 융유는 몸이 약했던 남동생에게 무술을 연마시키라고 부친에게 권하고, 부친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 동생이 바로 나중에 광서의 어전대도시위가 된다. 그후 융유의 과감성은 여기저기서 발휘된다. 예전에 소문처럼 나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이 왕조가 마지막으로 발버둥치는데, 융유가 거리를 두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융유의 마지막 일생에서, 그녀와 가장 미묘한 관계인 것은 원세개이다. 나중에 황제를 칭하다가 패가망신당하는 개혁자는 1909년에 하야한 후, 국내의 정치정세를 계속 주시해왔다. 무창의거의 다음 날, 즉 10월 11일은 원세개의 52세 생일이었다. 시국이 어지러우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가 다시 일어날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생일축하를 위하여 온 심복들이 예전보다 더욱 많았다. 조병균, 장석란, 예사충등이 모두 모여들었다.
양수원에서 주연을 베풀고 있는데, 무창의거 소식이 전해져 왔다. 손님들이 모두 대경실색했다. 원세개는 즉시 생일축하활동을 멈추게 했다. 동시에 그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재기의 기회가 왔다고 깨닫는다. 그는 이 난은 홍양의 난(태평천국 홍수전, 양수청의 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냥 두고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서 이 난국을 수습할 사람은 나 말고 없다는 뜻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원세개는 재기를 결심한다. 그러나, 언제 어떤 명분을 가지고 하여야 가장 타당하고, 가장 유리할 것인가? 이것은 그가 계속하여 고민한 문제였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재풍에 대하여 원세개는 여전히 불만이 컸다. 그러니 그를 지지할 리는 없었다. 서세창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에 예사충등이 극력 간언했다: 천하가 대란에 빠졌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다. 발빠른 사람이 먼저 얻는다. 그러나, 원세개는 거절한다. 서세창의 분석에 따르면, 원세개의 고민은 다섯가지였다:
첫째, 대대로 청나라의 은덕을 입었는데, 고아과부의 수중에서 천하를 빼앗는 것은 후세에 욕먹을 짓이다.
둘째, 청나라조정의 옛신하들이 아직도 많다. 예를 들어, 장인준(양강총독), 조이손(동삼성총독), 이경희(운귀총독), 승윤(섬서순무)가 모두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북양의 군권을 장악한 자들 예를 들어, 강계제, 풍국장등이 아직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넷째, 북양군벌의 세력이 장강이남에는 미치지 못한다. 설사 황제를 칭하더라도, 북양의 반벽강산밖에 되지 않고, 남방은 여전히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
다섯째, 남방의 백성은 발달정도가 얼마인지 아직 모른다. 인심의 향배를 아직 알기 힘들다” 그래서 그는 표면적으로는 청나라황실을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
원세개의 내심은 지금으로서는 알수가 없다. 황제를 칭한 사실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황제를 칭하기 전의 자료를 보면, 그는 사람들의 앞에서건 뒤에서건 조그만치도 황제를 칭할 생각을 드러낸 적이 없다. 14일, 옛상사이자 옛친구인 혁광의 서신이 북경에서 도착한다. 그는 원세개에게 호광총독을 맡으라고 권한다. 원세개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동시에 양도도 북경에서 도착한다. 그는 원세개에게 명을 받들지 말라고 권한다. 막료인 왕석동도 양도의 의견을 적극 주장한다.
하루는 왕석동이 원세개에게 말한다: “공께서 나서는 것은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청나라조정은 친척귀족만 등용하고, 뇌물이 공공연히 제공되니, 무창의 사건이 없더라도, 나라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원세개: “안된다. 천하가 버렸는데, 누가 다시 일으킬 수 있겠는가?”
왕석동: “그런데 공은 어찌 명을 받들려고 합니까?”
원세개: “탁고수명(託孤受命), 국궁진췌(鞠躬盡?)”
왕석동: 전제국가에서는 대신의 공이 주인을 누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가족도 지킬 수 없습니다. 전왕조의 사례도 많습니다. “
원세개는 얼굴색이 변하며 말했다: “나는 혁명당이 되지 않겠다. 내 자손도 혁명당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던 원세개가 이후의 형세를 내다보았는지 아닌지를, 그러나 원세개의 심복 조병균이 분석한 것처럼, “항성(원세개)는 원래 웅심이 있었다. 그리고 시기를 잘 파악했다. 무창의 사건이 일어나자 온 조정이 당황했고, 항성을 기용했다. 그에게 전국군대의 전권을 맡겼다. 이는 크게 시기를 만난 것이고 포부를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교섭을 거쳐, 원세개는 청나라정부로부터 충분한 수권을 얻고는 강호에 다시 나선다. 원세개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하늘이 버렸는데, 누가 다시 일으킬 수 있겠는가?”
자료에 따르면, 1911년에서 1912년 사이에, 혁명군이 불처럼 일어났을 뿐아니라, 각종 항의운동도 연이어 일어났다. 이들 항의운동은 비록 혁명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공화국으로 청왕조를 대체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1911년의 중국은 이미 통일된 중국이 아니었다. 그해 연말에, 17개 성시는 청나라정부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선포한다. 다음해에 남경임시정부의 성립은 더더구나 청나라정부의 존재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일찌감치 청나라조정에 기용될 때, 원세개는 남북의 국면을 수습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양사이에게 말했다: “남방의 군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북방의 정치는 두서가 없다. 연손(양사이)이 모든 기획을 해주어야 겠다. 당소천(당소의)와 함께 처리해달라.” 이때 국면은 이미 원세개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우대조건을 재풍에게 흘린다. 그의 지지를 받은 후에, 융유태후에게 글을 올린다. “민군의 뜻은 만중일심으로 공화를 지지한다.” 정부는 “군수물자를 조달할 수도 없고, 병력를 보낼 수도 없다. 재정이 곤란하니 돈을 마련할 길이 없다.” “이대로 시간을 끌게 되면 반드시 내부적으로 궤멸될 것이다. 그 지경이 된다면, 주나라왕실을 본받아서 살아남으려 해도, 이미 남은 땅이 없게 될 것이다.” “신은 국무대신과 같이 재삼 의논해봤는데 국체개혁이 아주 중요하다. 병력을 내세워서 생령을 도탄에 빠지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함부로 변경하여 국체를 상하게 할 수도 없다.” 그저 ‘황태후, 황상께서 황족을 소집하여, 비밀리에 회의를 개최해서 결정해달라.” “속히 방침을 정해달라.”고 한다.
융유가 나설 때가 온 것이다. 그녀는 청나라의 평화로운 사후처리의 책임을 맡았다.
부의황제의 회고록을 보면, 융유가 원세개를 마지막으로 접견한 때를 묘사하고 있다: “나는 태후의 뒤에 앉았다. 아주 심심했다. 두 어른이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대전에는 우리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주 조용했다. 뚱뚱한 늙은이는 한편으로 코를 만지면서, 한편으로 말을 했다. 말하는 것을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야 나는 알았다. 그 뚱뚱한 늙은이가 바로 원세개였다. 이는 내가 원세개를 만난 유일한 한번이다. 또한 원세개가 마지막으로 태후를 접견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 말한 것이 아니라면, 바로 이번 접견때, 원세개는 융유태우에게 직접적으로 퇴위문제를 제기했다.”
퇴위는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엇다. 비록 황실내부에서 여러 번 토론이 있었고, 여전히 논쟁은 계속되었지만. 융유태후로 하여금 퇴위조서를 결심하게 한 것은 1월 26일, 가장 굳건한 종사당의 영수인 양필이 혁명당인 팽가진에게 폭사당한 것이다. 종사당은 우두머리를 잃었다. 조정의 황족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북양군벌의 문관 무관들의 전보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속속 북경에서 도망쳐서 천진조계나 대련, 청도 등지로 가버린다.
융유태후는 즉시 원세개에게 1등작을 수여한다고 반포하고, 이런 방식으로 원세개가 청나라를 도와서 망하지 않게 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바로 이때, 남방혁명당이 약속한 대총통의 지위가 원세개에게는 더욱 유혹적이었다. 원세개는 영전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태후에게 “혁명당은 아주 무섭다”는 소식을 계속 전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당시의 원세개를 이렇게 평가한다: 당시의 원세개는 만주족을 끼고 국민당을 어렵게 만들고, 국민당을 가지고 청나라조정을 압박했다. 당시 사람들은 신식 조조라고 평가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원세개에게 전권을 부여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결정된 운명하에서 청나라황실에게 비교적 유리한 우대조건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남북쌍방이 밀고 당기는 협상과정에서, 청나라황실의 퇴위조건은 매번 바뀌어갔다. 이는 모두 융유태후에게 보고되었다. 태후는 글자 한자 한자 살펴보고는 결정했다. 이 우대조건을 초안한 사람은 바로 재풍에게 목숨을 건진 왕정위였다. 퇴위후의 대청황실은 여전히 황궁안에 머물렀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