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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하는사람들의 인생 원문보기 글쓴이: 서울인
간증: 1667. [역경의 열매] 김동해 (1-20) “안과의사 부족한 아프리카에 선한 사마리아인 될 것”
***간증: 1667. [역경의 열매] 김동해 (1) “안과의사 부족한 아프리카에 선한 사마리아인 될 것”
가난한 집안 살리려 진학한 의대
한때 세속적 성공 맹목적으로 좇다
하나님 인도하심 따라 한 걸음씩
해외 의료 선교 사명의 길로
숨이 턱턱 막히는 섭씨 40도의 열기. 코를 찌르는 시큼한 땀 냄새와 흙먼지가 뒤엉킨 진료소. 빛을 잃은 이들이 누군가의 소매를 붙잡고 끝이 보이지 않게 줄을 서 있다. 수술용 현미경 너머로 그들의 희뿌연 수정체를 마주할 때마다 곱씹는다. ‘이 일은 내가 시작한 것도 아니고 내가 끝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님이 시작하셨으니 마무리도 주님이 하실 것이다. 이건 사명, 사명이다.’
아프리카엔 인구 100만명당 안과 의사가 한 명뿐이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이기에 안과의사가 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시력을 잃고 외상이나 선천성 백내장으로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부지기수다.
상상조차 안 했다. 어린 시절 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는 천문학자를 꿈꿨다.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등 떠밀려 의대에 진학했지만…. 의대생 시절에는 사회를 향한 분노로 최루탄 연기 속을 방황했고, 어머니 몰래 오토바이를 샀다가 들켜 호되게 꾸중을 들은 철없는 청년이었다. 안과 의사가 된 뒤에도 한때 명동 한복판에 병원을 개원해 세상 성공에 취해 세속적인 성공을 맹목적으로 좇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의 교만과 욕망을 번번이 꺾으셨다. 버림받은 환자들이 모인 충북 음성 꽃동네로 나를 부르셔서 매일 죽음 곁에서 생명의 존엄을 배우게 하셨고 병원 개원 후 성공보다 큰 좌절을 통해 내 힘을 빼셨다. 더군다나 2001년 9·11 테러의 참상을 목격한 뒤 증오의 땅 파키스탄을 찾아 평화와 사랑의 도구가 되겠다고 결단했을 때도. 해외 사역을 넓혀갈수록 병원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가족조차 의료 선교를 지지하지 않았다.
완전히 무너져 내려 두 손을 들고 엎드렸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됐다. 공항 세관에 억류됐던 수술 장비가 선교사들의 눈물의 중보 기도로 기적처럼 통관되고, 사역을 포기하려던 순간에는 익명의 후원자가 편지와 함께 후원금을 보내왔다.
어떤 이들의 눈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룩한 길을 걸어온 희생의 아이콘일지도 모른다. 2002년부터 40개국을 돌며 무료 안과 수술만 수만 건을 했으니까. 하지만 흙먼지 날리는 아프리카에서 내가 뼈저리게 깨달은 진실은 전혀 다르다. 이 모든 기적과 열매는 결코 내 개인의 의지나 능력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등을 떠미실 때 두려움 속에서 억지로 내디뎠던 한 걸음, 그 걸음걸음은 주님의 섭리로 이어졌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한 인간의 낡은 성공담으로 치부될 수 없다. 앞으로 나눌 이야기의 상당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집을 부렸던 나의 부끄러운 실패의 기록이다. 하지만 간증이 꼭 빛나는 성공담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오히려 철저히 실패하고 부서진 자리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평범한 의사가 어떻게 그분의 부르심 앞에 항복했는지, 상처 많던 자아가 어떻게 빚어져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됐는지. 그 은혜의 발자취를 나눈다.
* [역경의 열매] 김동해 (1) "안과의사 부족한 아프리카에 선한 사마리아인 될 것"
* [역경의 열매] 김동해 (2) 고난 속 어머니 기도, 지구촌 오지 의료봉사 밀알 돼
* [역경의 열매] 김동해 (3) 중등부 수련회서 수줍음 무릅쓰고 소리 내 '결단의 기도'
* [역경의 열매] 김동해 (4) 천체물리학자 꿈꿨지만 등 떠밀려 지원한 의대 떨어져
* [역경의 열매] 김동해 (5) 대학생활 방황 중 금식수련회… 소명의 나침반을 찾다
* [역경의 열매] 김동해 (6) "1년을 하나님께 드리자" 음성 꽃동네서 보건의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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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64년 출생 △가톨릭대 의과대 △가톨릭대 의과대학원 △국제실명구호기구 비전케어 이사장 △명동성모안과 원장
정리=이현성 기자 sage@kmib.co.kr
***[역경의 열매] 김동해 (2) 고난 속 어머니 기도, 지구촌 오지 의료봉사 밀알 돼
아버지 사업 실패 후 극심한 가난
어머니 생계 감당하며 3남매 돌봐
청록파 시인 박두진 할아버지
‘동쪽 바다’ 축복의 이름 지어줘
김동해 비전케어 이사장이 4살 때 서울의 한 공원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모습.
내 이름 ‘동해(東海)’는 아버지가 무척이나 따르셨던 외삼촌, 곧 청록파 시인 박두진 할아버지께서 직접 지어주신 것이다. 동쪽 바다와 동쪽 하늘처럼 맑게 살라는 뜻과 함께 그 바다를 건너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축복이 담겨 있었다. 어릴 적 묵향이 가득했던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갈 때면 어린 마음에도 그 이름의 무게와 기대감이 왠지 모르게 가슴에 맴돌았다.
하지만 내 유년기의 현실은 이름처럼 넓고 푸르지 못했다. 1971년. 초등학교 1학년이던 해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서울 이태원에서 화양리로, 이어 경기도 광명의 가건물 주택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 신촌으로 이사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신촌은 서울에서 진학열이 가장 높은 학군이었다. 부모님은 팍팍한 살림 속에서도 장남인 내가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맹모삼천지교를 택하신 듯하다.
똑똑하셨던 아버지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일하다가 사업에 뛰어드셨지만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거듭된 실패와 빚보증으로 집에는 빨간 딱지가 덕지덕지 붙었고 부모님의 다툼도 잦아졌다. 골목 어귀에서 술에 취해 큰 소리로 유행가를 부르며 귀가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하며 두려움을 달래야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단상에 올라가 상을 여러 개 받았지만 사진사 아저씨가 찍어준 사진 값을 치를 돈이 없어 사진을 돌려보내고 펑펑 울었던 기억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아린 상처로 남아 있다.
결국 아버지는 중동 건설 붐을 타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셨다. 그곳에서 5~6년간 청춘을 바치며 집안의 빚을 갚아 나가셨지만 아버지의 오랜 부재 속에서 삼남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뼈아픈 장면이 있다. 학교에서 나눠준 갈색 육성회비 봉투에 아로새겨진 도장. 그리고 회색 표지에 매일같이 찍히던 어머니의 일수 도장이다.
어머니는 쉬는 날 하루 없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빚을 갚으며 일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지친 걸음으로 퇴근길을 돌아오시면서도 늘 크림빵 3개를 들고 오셨다. 삼남매를 먹이려 당신의 몫은 남겨두지 않았던 그 빵. 30대 후반의 젊은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떠올리면 지금도 목이 멘다.
가난과 우울 속에서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뿐이었다. 밖에서 뛰어놀기보다 방에 틀어박혀 닳고 닳도록 위인전과 SF소설을 파고들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천문학자를 꿈꿨다. 비록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묵묵히 가정을 지켜낸 어머니의 뒷모습은 내게 가장 위대한 인생의 교과서였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어머니의 굽은 등을 보며 가슴에 새겼던 이 철칙은 훗날 척박한 아프리카 오지에서 수많은 환자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울 수 있는 강력한 삶의 자산이 됐다. 눈물로 크림빵을 사 오시던 어머니의 기도가, 훗날 아프리카의 메마른 땅에 생명의 빛을 틔우는 거름이 될 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3) 중등부 수련회서 수줍음 무릅쓰고 소리 내 ‘결단의 기도’
초등 4·6학년 때 담임 선생님
부끄럼 많던 날 사랑으로 품어줘
화단 가꾸며 창조 섭리에 눈떠
고등부 때부터 소식지 제작에 열정
김동해 비전케어 이사장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책에만 파묻혀 지내던 내게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를 주신 분들은 초등학교 은사님들이었다. 4학년 담임선생님과 6학년 담임선생님 두 분은 모두 월남전에 참전하셨던 보이스카우트 지도 교사셨다. 선생님들은 유독 부끄러움 많던 나를 넉넉한 사랑으로 품어주셨다. 새 학기 환경미화를 할 때면 항상 나를 불러 함께 교실을 꾸미셨고, 숙직하실 때는 김치찌개 끓이는 법을 가르쳐 주시며 따뜻한 저녁을 차려주시곤 했다.
특히 선생님들은 4학년부터 6학년까지 3년 내내 내게 봉사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기셨다. 그 어린 나이에 매일 아침 일찍 등교해 혼자 학교 화단에 물을 주고 청소하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때 그 고요한 아침의 시간은 내 평생의 자산이 됐다. 철 따라 피고 지는 식물들,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보이던 마른 가지에서 봄빛을 따라 푸른 새잎이 돋아나는 경이로운 생명력을 지켜보며 나는 천지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어렴풋이 배우고 있었다. 3년간 묵묵히 화단을 가꾸던 그 작은 순종이 훗날 척박한 아프리카 환자들을 돌보는 섬김의 근육을 키워준 것 같다.
신앙의 뿌리 역시 이 무렵 깊게 내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친구를 따라 나가게 된 신촌교회는 내게 영적인 고향이 됐다. 주일마다 정성껏 우리를 가르쳐주시던 주일학교 선생님들 덕분에 힘든 학과 공부와 집안 사정 속에서도 믿음의 꿈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내 평생 잊지 못하는 순간은 중등부 여름 수련회 마지막 날 밤이었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눈을 감고 결단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시면 누구나 기도를 시작하십시오”라는 인도자의 말에 침묵이 흘렀다.
평소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던 내가 침묵을 깼다.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내 삶에 늘 함께해 달라고 생애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어 간구했다. 내 안의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입술을 열어주신 순간이었다.
그 무렵 친구 어머니셨던 한 권사님의 손에 이끌려 중학생 신분으로 어른들만 모이는 부흥회에 참석하곤 했다. 국어 교사 출신이셨던 권사님은 내게 설교 말씀을 글로 정리해 볼 것을 권하셨다. 그때부터 시작된 설교 노트 기록은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후 나는 교회 고등부와 대학부에서 주보와 소식지를 만드는 일에 푹 빠졌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은혜로운 간증과 자료를 모으고 글씨를 잘 쓰는 친구들을 섭외해 마스터 인쇄로 찍어낸 갱지 소식지를 나눌 때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공동체를 한마음으로 묶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청록파 시인이셨던 외할아버지 박두진과 국어 교사이셨던 아버지의 피가 내 안에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꽃피우고 있음을 느꼈다.
아침마다 화단을 가꾸던 꼬마 봉사부장, 그리고 밤을 새워 교회 소식지를 만들던 문학 소년. 하나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당신의 도구로 빚어가고 계셨다. 훗날 비전케어를 설립하고 소식지 ‘꿈꾸는 사람들’을 창간해 세계에 나눔의 비전을 전하게 될 줄, 잉크 냄새 가득했던 그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4) 천체물리학자 꿈꿨지만 등 떠밀려 지원한 의대 떨어져
고교 3년 성가대 서며 주일 성수
합격에 대한 믿음 깨지자 낙담
재수 시절은 따뜻한 기도·격려 속
교만 꺾고 장래 성찰한 훈련의 시간
김동해 비전케어 이사장이 고등학생 시절 서울 서대문구 신촌 자택 책상에 앉아 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천체물리학자를 꿈꾸던 문학 소년에게 고등학교 3학년의 현실은 매서운 폭풍우와 같았다.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고생 끝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확실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며 공대나 의대 진학을 강권하셨다. 평생 가난과 거듭된 사업 실패에 시달렸던 아버지로서는 장남인 나에게 안정적인 삶을 물려주고 싶은 절박함이셨겠지만 내게는 그 강요가 숨이 막힐 듯한 압박이었다.
당시 나는 입시 스트레스와 부모님과 팽팽한 갈등 속에서도 신앙의 끈만큼은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신촌교회 고등부 성가대를 섬기며 3년 내내 주일 성수를 생명처럼 여겼다. 주중에 하루를 온전히 내어 성가대 연습을 하고 주일 아침 일찍 교회에 가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시간을 쪼개 썼다. 교회 선배들이 보여준 ‘신앙과 학업 모두에 충실한 모범’을 나 역시 따르고 싶었다. 이렇게 헌신하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내가 원하는 대학과 원하는 학과에 당당히 합격시켜 주실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 물리학과 커트라인은 웬만한 의대보다 훨씬 높았다. 원하던 성적이 나오지 않자 결국 부모님과 선생님의 거센 권유에 등 떠밀려 원치 않던 의대에 지원서를 냈다.
결과는 참담했다. 1차 지망 대학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2차로 지방 의대에 합격하긴 했지만 상처받은 자존심과 부모님을 향한 깊은 반항심에 결국 합격증을 찢고 재수의 길을 택했다.
재수 학원에 등록하던 날부터 내 마음은 캄캄한 광야로 내동댕이쳐졌다. 부모님과 친구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무엇보다 내가 철석같이 믿고 매달렸던 하나님을 향한 배신감과 원망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하나님, 제가 주일을 어겼습니까. 남들 공부할 때 성가대 연습하며 주님을 찬양했는데 돌아오는 결과가 고작 이것입니까.’
마치 마귀가 귓가에 대고 “그것 봐라. 네가 잘난 척하며 유별나게 신앙생활 하더니 무슨 소용이냐”라고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내 인생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으신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앉아있었지만 내 영혼은 차갑게 식어갔고 깊은 회의감 속에서 방황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처 입고 반항하는 나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들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곁에서 묵묵히 기도해 주던 교회 선배들과 어머니의 따뜻한 격려였다. 그들의 위로 속에서 나는 서서히 원망을 거두고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처절했던 재수 시절은 실패와 좌절의 시간이 아니라 내 교만을 꺾고 장래를 향해 깊이 성찰하게 하신 하나님의 훈련기였다. 내 고집대로 천체물리학과에 갔더라면 평생 밤하늘의 별만 바라봤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꺾으셔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가난한 이들의 눈망울을 보게 하시려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것 같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의대 진학을 준비했다. 알 수 없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내 삶의 방향키를 내어드리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5) 대학생활 방황 중 금식수련회… 소명의 나침반을 찾다
학업보다 세상 부조리·교회 집중
사회 비판 소식지 만들다 연행도
금식수련회 조별 모임 대화 나누다
의사의 소명 눈뜨고 새로운 출발
김동해(오른쪽) 비전케어 이사장이 가톨릭대 의과대학 졸업식에서 아내와 함께 찍은 졸업사진.
1984년 우여곡절 끝에 의대에 입학했지만 캠퍼스의 낭만은 없었다. 매일같이 신촌 거리는 최루탄 냄새로 진동했다. 당시 나는 의대 공부보다는 세상의 부조리와 교회 일에 더 마음이 쏠려 있었다. 교회 대학부 회장이었던 시절 사회 비판적인 소식지를 만들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닭장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경찰서로 달려와 도장을 찍고 나를 빼내 오셔야 했다. 1987년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백골단에게 두들겨 맞아가며 거리를 누볐지만 그해 겨울 치러진 대선 결과는 깊은 좌절감만 안겨줬다. 무력감에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싶었다.
자연스레 학업은 뒷전이었다. 과외로 번 돈을 모아 어머니 몰래 오토바이를 샀지만 며칠 만에 교회 집사님에게 들켜 일주일 만에 반품했던 철없는 시절이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의학도였지만 속은 텅 비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았다. 결국 본과 2학년 겨울, 월말 재시험과 과락 발표 명단에서 간신히 이름이 빠지며 유급을 겨우 면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인생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추운 겨울, 다른 의대에 다니던 고교 동창이 내게 수련회에 가자고 손을 내밀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본부에서 열리는 금식 수련회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따라나선 그곳에는 전국에서 모인 1000여명의 대학생들이 있었다. 3박 4일 동안 열 끼를 굶으며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는 혹독한 일정이었다.
내 인생의 항로가 바뀐 기적은 조별 모임 시간에 찾아왔다. 10여명의 다른 전공 학생들과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는데, 다들 내가 의대생이라는 사실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해부학 실습은 어떻게 하는지, 앞으로 어떤 과를 전공하고 무슨 일을 하는 의사가 될 것인지 묻는 그들의 눈엔 의사라는 직업을 향한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아, 나는 그저 성적에 맞춰 등 떠밀려 온 것이라 여겼는데 세상 사람들은 나를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의사로 바라보고 있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 길로 인도하셨구나.’
세상일과 오토바이에 정신이 팔려 정작 내게 주어진 의술이라는 거룩한 달란트를 탕진하고 있었음을 뼈저리게 회개했다. 오랜 금식 끝에 텅 빈 위장 대신, 내 가슴은 생명을 살리는 진짜 의사가 되겠다는 소명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 지식을 주님의 뜻대로, 헐벗고 병든 자들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결단했다.
수련회에서 돌아온 뒤 내 삶은 180도 달라졌다. 남은 2년의 본과 생활 동안 곁눈질하지 않고 무섭게 학업에 매달렸다. 입학 동기 중 상당수가 유급의 고배를 마셨지만 그토록 밖으로 겉돌던 내가 6년 만에 무사히 의대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캄캄했던 내 인생의 나침반이 비로소 정확히 하나님을 향해 정렬된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십자가의 부르심을 안고 가장 낮고 어두운 곳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6) “1년을 하나님께 드리자” 음성 꽃동네서 보건의 근무
교회서 함께 신앙생활 해온
아내와 수련의 시절 결혼 약속
작은 옥탑방 신혼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생명의 빛으로 충만
김동해(왼쪽) 비전케어 이사장이 1992년 아내, 첫째 아이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의대를 졸업하고 강남성모병원(현 서울성모병원)에서 시작한 인턴 생활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일터라 믿으며 버텼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내과 인턴 시절, 이른 아침 임상병리실에서 급히 검사 결과지를 찾고 있던 내게 사복 차림의 한 노인이 다가와 비키라며 밀쳤다. 회진 전 보고가 급했던 나는 누구냐고 따져 물으며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거친 다툼으로 이어졌다.
얼마 후 나는 병원이 발칵 뒤집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맞붙은 노인은 다름 아닌 인턴과 전공의 수련을 총괄하는 수련위원회 위원장이자 임상병리과 과장이셨다. “넌 이제 전공의 하긴 글렀다.” 선배들의 탄식 섞인 걱정이 쏟아졌다. 사과하러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교수님 댁 앞에서 밤 11시까지 떨며 기다려야 했다. 앞날이 캄캄했다.
하지만 그 절망의 순간 나는 오히려 마음을 비웠다. ‘어차피 쫓겨날 몸이라면, 남은 기간이라도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자.’ 전공의가 될 희망을 접고 나니, 오히려 하루하루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에 정성을 쏟게 됐다. 매달 과를 옮길 때마다 “곧 쫓겨날 불쌍한 친구”라는 소문 덕분에 선배들은 내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 애썼고 나는 그 연민을 배움의 기회로 삼아 밤낮없이 현장을 누볐다. 그렇게 포기하고 있던 인턴 성적표를 받았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낙제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우수한 성적이었다. 하나님께서 닫혔던 문을 다시 열어주셨다.
이 무렵 나는 신촌교회 대학부 시절부터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온 아내와 결혼을 약속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한 청년 의사였지만 군의관 관사가 나온다는 말만 믿고 용감하게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훈련소 퇴소 날, 내게 떨어진 배정지는 예상을 깬 ‘공군 공중보건의’였다. 관사의 꿈은 사라졌고 우리는 당장 살 집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통장 잔고는 단 200만원. 은행원이었던 아내가 직장 대출 800만원을 끌어모아 1000만원을 마련했다. 충북 청주 무심천변의 낡은 주택가의 건물 외벽 계단으로 올라가는 작은 옥탑방을 신혼집으로 구했다.
옥상 평상에 앉아 서로를 위로하던 그 가난한 시절, 나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공중보건의 배치 시험에서 전체 2등을 차지해 편한 곳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나는 모두가 기피하는 충북 음성 ‘꽃동네’에 자원했다. ‘인생의 가장 젊은 시절 1년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리고 싶다’는 다짐과 함께.
화려한 선교지가 아닌 버림받은 이들의 종착역에서 주님과 함께 걷겠다는 가난한 청년 부부의 첫 서원이었다. 아내는 어렵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내 결정을 묵묵히 지지했다. 옥탑방에서 천 기저귀를 빨며 첫아들을 키우던 시린 겨울이었지만 우리 마음만은 생명의 빛으로 충만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옥탑방에 갇힌 초라한 시작이었으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전 세계를 품을 위대한 비전의 씨앗을 싹틔우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7) “가장 외롭고 아픈 이들 돌보자” 꽃동네 보건의 근무 연장
꽃동네 가족들 임종 전 장기기증
안과 전공의 탈락 후 공중보건의로
안구 적출 수술 통해 많은 경험
근무 마칠 즈음 안과 전공의 합격
김동해(뒷줄 오른쪽) 비전케어 이사장이 1997년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공중보건의 생활을 1년쯤 했을 무렵 다른 보건소로 근무지를 옮길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아픈 그들을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 그리고 헌신적인 자원 봉사자들과 수사, 수녀님들과 함께하는 생활이 좋았다. 결국 공중보건의 3년을 온전히 그곳에서 보내기로 결단했다.
공중보건의 2년 차,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를 안과 의사의 길로 이끄셨다. 당시 꽃동네 가족들은 세상을 떠날 때 대부분 각막 등 장기 기증을 서약했다. 보통은 시신을 구급차에 실어 서울 강남성모병원(현 서울성모병원)으로 보냈는데 마침 모교인 그곳의 안과 교수님들이 꽃동네로 백내장 의료 봉사를 오셨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인사를 드리며 과거 안과 전공의 지원에서 떨어졌던 뼈아픈 실패담을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시던 교수님들은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김 선생, 매번 시신을 옮기기 힘드니 우리가 안구 적출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네. 자네가 여기서 직접 적출해서 보내게.”
그렇게 나의 길고 고독한 안구 적출 수술이 시작됐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종 소식이 들려오면 홀로 수술 도구를 챙겨 영안실로 달려갔다. 며칠 전까지 내 손을 잡고 온기를 나누던 환자들,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그들의 눈동자를 메스로 떼어내는 일은 매번 뼈를 깎는 듯한 심리적 고통을 동반했다. 하지만 나는 차가운 영안실에서 떨리는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분의 육신은 고단하게 스러지지만 이분의 각막이 흑암에 갇힌 누군가에게 새로운 생명의 빛이 되길 원합니다.’
돌이켜보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다. 안과 전공의 시험에 낙방해 밀려나듯 온 곳이었는데 나는 정식 안과 의사가 되기도 전에 국내에서 가장 많은 안구 적출을 경험한 의사가 돼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수시로 안과 교수님들, 전공의 선배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깊은 신뢰를 쌓았고 공보의 복무를 마칠 즈음 기적처럼 꿈에 그리던 안과 전공의로 합격할 수 있었다. 나의 실패조차도 완벽한 훈련의 도구로 사용하신 주님의 은혜였다.
어렵게 시작된 전공의 생활은 육체적, 경제적으로 무척 혹독한 시기였다. 성모병원과 꽃동네의 생명 존중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인위적인 가족계획 대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꽃동네에서 첫째를, 전공의 1년, 3년 차에 둘째와 셋째를 품에 안으며 세 아이의 아빠가 됐다. 한데 전공의 월급으로 다섯 식구가 살아가기란 턱없이 부족했다. 언제 헐릴지 모르는, 재개발을 앞둔 낡은 아파트를 전전하며 밤낮없이 병원 당직을 서야 했다.
하지만 고단한 퇴근길, 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잠든 세 아이의 뺨을 어루만질 때면 내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새 힘이 솟아났다. 밖에서는 쫓기듯 바쁘고 가난한 전공의였지만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광야 같은 전공의 시절, 낡은 아파트 단칸방은 내게 가장 따뜻한 피난처이자 생명의 숭고함을 가르쳐준 또 다른 성소였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8) 안과 근무 시절 무의촌 진료봉사… 의료선교 현장 체험
첫 직장 실로암 안과 거쳐
서울 명동에 병원 개원했지만
동업자에 속아 거액 빚 떠안아
되레 소송 당하고 세무조사까지
1999년 4월 명동성모안과 개원 당시 김동해 비전케어 이사장.
전공의 4년차이자 안과 의국장을 맡았던 시절, 의국 재정 처리 문제로 과장님과 새로 부임한 주임 교수님의 미움을 사게 됐다. 주임 교수님은 내 진로와 관련된 모든 지원 서류에 서명을 거부하셨다. 하루아침에 갈 곳 없는 백수 신세가 됐고 낙담한 심정으로 의사 신문의 구인 광고를 뒤적였다.
다급한 마음에 구인 광고를 보고 무작정 전화를 걸었던 곳 중엔 ‘실로암 안과’가 있었다. 한데 다음 날 목사님께서 날 부르시더니 당신이 실로암 안과 이사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목사님 소개로 실로암 안과에서 곧장 진료를 시작하게 됐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적처럼 이어지는 것 같다. 돌아보면 실로암 안과에서의 시간은 훗날 비전케어 사역을 탄생시킨 완벽한 예행연습이었다. 매월 버스를 타고 전국 무의촌을 도는 이동 진료를 도맡으며 척박한 국내 의료 선교의 현장을 온몸으로 배웠다.
무엇보다 이곳은 내게 수술대 앞의 영성을 가르쳐준 곳이다. 전공의 시절 수많은 응급 수술을 경험했지만 막상 전문의로서 오롯이 내 책임하에 혼자 메스를 잡게 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우리 할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과거 백내장 수술 실패의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으셨다. 그 아픔을 곁에서 지켜봤기에 내가 자칫 누군가를 내 아버지처럼 만들지도 모른다는 짓눌림이 있었다.
이때부터 수술대 앞에 설 때마다 반드시 환자의 눈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의 한계를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수술하는 동안 제 손끝을 친히 주관하시고 회복되는 동안 이 환자와 함께해 주셔서 생명의 빛을 허락해 주옵소서.” 기도는 환자를 위한 간구인 동시에, 부족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생명줄이었다.
이후 실로암 안과의 운영 주체가 바뀌면서 병원을 떠나 지인의 소개로 명동에 ‘명동성모안과’를 개원했다.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나는 동업자에게 속아 부도난 건물에 거액의 빚을 떠안은 채 병원을 열었다. 벼랑 끝 상황이었지만 때마침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점차 회복되는 경기와 국내 처음으로 새로운 장비로 라식 수술을 시작하면서 병원은 금세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의 빚을 갚아 드리고 신촌에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하는 기쁨도 누렸다. 매일 아침 직원들과 말씀 묵상(QT) 모임을 함께하고 서울역 노숙인 진료를 시작하며 정직한 예수님의 제자로, 선한 청지기처럼 살려 애썼다.
하지만 세속적 성공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개원 2년 차에 동업을 깬 쪽에서 소송을 제기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달 내내 국세청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까지 받게 됐다. 경찰과 검찰, 세무서를 오가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정직하게 진료하면 그만이라 여겼는데…. 법과 원칙이라는 매서운 회초리를 맞으며 나는 철저히 부서졌다.
하지만 이 혹독한 세상 공부는 훗날 재정 관리 기준을 잡고 병원과 비전케어 활동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돈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또 돈을 얼마나 버느냐보단 어떻게 올바르게 쓰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눈물로 배운 이 진리는 나를 더 넓은 광야로 밀어내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9) 9·11 충격 속 움튼 중동선교 소명… 가슴에 뜨거운 떨림
“증오를 예수 사랑으로 갚아야”
현지 백내장 수술 의료선교 위해
파키스탄에 간호사 파견, 사전 조사
비전케어 사역 여정의 첫걸음
2002년 파키스탄을 방문한 김동해 비전케어 이사장.
2001년 9월 11일, 세계가 거대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영상을 보며 인류의 평화가 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병원 경영과 소송, 세무조사라는 나만의 좁은 ‘역경’에 매몰돼 있던 나에게 그 사건은 열방을 향한 커다란 창을 열어줬다. ‘하나님, 저 증오가 가득한 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연일 이어지는 긴박한 보도를 접하면서 나는 이슬람 국가와 중동 정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이슬람 세미나에 참석해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수고를 배웠고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선교사들이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운영하는 ‘선한 사마리아 병원’의 사역 설명회에도 참석하게 됐다. 복음을 직접 전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된 이슬람권에서 병원을 통한 의료 선교는 그들의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안과 의사인 내가 할 일이 있겠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떨림이 시작됐고, 나는 마침내 2002년 파키스탄행을 결심했다.
당시 미국이 테러 배후를 잡겠다며 아프가니스탄을 대대적으로 공습하던 때라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 역시 언제 폭탄 테러가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화약고였다. 주변에서는 목숨을 내놓는 일이라며 모두가 뜯어말렸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보다 ‘저들의 증오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그저 한번 다녀오는 봉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과거 국내외 단기 의료 선교에 참여하며 느꼈던 해묵은 회의감 때문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환자 수백명을 모아놓고 일회성 안약을 하나씩 쥐여주며 돌려보내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의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 의료진이 돌아간 뒤 그들은 다시 캄캄한 어둠 속에서 평생을 절망해야 하니까. 나는 반드시 현지에서 메스를 들고 탁해진 백내장을 제거하고 새로운 렌즈를 넣어 다시 보게 하는 진짜 수술을 하고 싶었다.
마침 우리 병원 직원 중 선교사로 헌신하겠다는 뜻을 밝힌 김 간호사가 있었다. 나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김 간호사, 기왕 선교지로 갈 거면 파키스탄에 두 달간 먼저 가서 현지 상황을 샅샅이 조사해 주게.” 언제 내전이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이슬람 국가에 젊은 간호사를 홀로 먼저 보내는 것은 큰 모험이었지만 무책임한 사역을 피하려면 현장 데이터가 필요했다.
이것은 훗날 비전케어 사역의 굳건한 표준이 된 철저한 사전 조사의 출발점이었다. 카라치에 입국한 김 간호사는 선한 사마리아 병원의 시설과 현지 안과 진료 환경, 백내장 환자들의 수준과 상황을 정밀하게 정리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9·11 테러가 남긴 짙은 흙먼지를 뚫고 장차 세계 40여개국을 품게 될 ‘비전케어’라는 위대한 여정의 첫 페이지가 그렇게 펼쳐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10) 파키스탄 세관에 묶였던 안과 장비… 기도 끝에 통관
치밀하게 준비한 의료선교
핵심 장비, 통관 못해 발동동
함께 기도 중 기적같이 풀려
노인들 시력 찾은 은혜에 감격
김동해(오른쪽 두 번째) 비전케어 이사장이 2002년 파키스탄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2002년 설 연휴, 설레는 마음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파키스탄 카라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9·11 테러 여파로 세계가 술렁이던 때였지만 내 마음은 오직 하나, ‘증오의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단순히 약을 나눠주는 봉사에 그치지 않고 현지에서 직접 수술을 집도하기 위해 병원에 사활을 걸었고, 1억5000만원 상당의 첨단 안과 수술 장비를 미리 파키스탄으로 보냈다.
그런데 카라치 공항에 도착하기도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치밀하게 준비해 보냈던 현미경과 초음파 수술기 등 핵심 장비가 파키스탄 세관에 묶여버린 것이다. 이슬람 국가의 까다로운 행정 절차와 테러 경계령이 맞물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세관의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안과 수술은 정교한 장비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장비가 없으면 수천㎞를 날아온 의료진도, 빛을 기다리며 모여든 수많은 빈민촌 환자도 모두 허탈하게 발길을 돌려야 할 상황이었다.
‘하나님, 장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사역, 주님이 시작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카라치의 ‘선한 사마리아 병원’에 모인 선교사들과 우리 팀원들은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기도뿐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손을 맞잡았다. 인간의 계획이 철저히 무너진 자리에서 우리는 처절하게 하나님을 찾았다. “주님, 저들의 닫힌 눈을 열기 전에 먼저 굳게 닫힌 세관의 문을 열어주옵소서.”
기적은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 온전히 엎드렸을 때 일어났다. 소식을 듣고 함께 기도하는 분들이 외교부와 전 파키스탄 대사님까지 돕게 했다. 마치 비행기 문이 닫히기 직전 같은 긴박한 순간에 세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장비 통관이 허락됐다는 소식이었다. 현지 인맥이나 노련한 행정 처리로 해결된 일이 아니었다. 오로지 밤새워 부르짖은 기도의 응답이자 하나님이 친히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표였다.
마침내 도착한 장비를 수술실에 세팅하던 순간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흙먼지 날리는 카라치 빈민가의 작은 병원은 금세 거룩한 성소로 변했다. 나는 수술대 앞에 서서 다시 한번 기도했다. ‘주님, 이 기적의 장비들로 저들의 육신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 너머에 계신 주님의 빛을 보게 하옵소서.’
캠프 며칠 동안 수백 명의 환자가 몰려들었고 나는 쉴 새 없이 메스를 움직였다. 평생 어둠 속에 갇혀 살던 무슬림 노인들이 수술 후 붕대를 풀고 “슈크리아”(감사합니다)를 말하며 환하게 웃을 때 내 가슴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로 벅차올랐다.
그곳에서 나는 선교의 가장 소중한 원칙을 배웠다. 선교는 의사의 실력이나 돈으로 하는 게 아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1억5000만원짜리 장비보다 기도의 능력이 더 강하다. 세관의 굳게 닫힌 문을 기도로 열어젖힌 그날, 비전케어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11) 의료봉사 재정난 하나님께 맡기자 오병이어 기적이…
불어나는 적자, 잦은 해외 봉사
고민 끝에 사역 포기하려 할 때
익명의 후원자 감동적인 후원에
회개하자 곳곳에서 지원 이어져
김동해 비전케어 이사장이 2006년 2월 미얀마에서 안과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파키스탄 카라치에서의 첫 비전케어 아이캠프가 남긴 은혜의 여운은 강렬했다. 빛을 되찾고 환호하던 현지인들의 얼굴이 눈에 밟히고 파키스탄에서 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너도 가서 행하라”는 말씀이 떠올라 도저히 사역을 멈출 수 없었다. 캠프 횟수는 점차 늘어났고 2005년에는 공산권과 이슬람권에서 합법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 ‘비전케어’를 정식 비영리 민간단체(NGO)로 등록하고 사역의 지경을 넓혀갔다.
하지만 하늘의 비전이 커질수록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의 현실은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해외 의료 봉사는 막대한 재정이 드는 일이다. 매달 일주일씩 병원을 비우고 사비를 털어 비전케어 아이캠프를 다니는 일정도 쉬지 않았지만 2007년 금융위기까지 겹쳐 명동성모안과도 서서히 적자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직원들의 월급을 걱정해야 할 만큼 재정 압박이 심해졌다.
매달 해외 오지로 떠도는 남편이자 아빠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고통도 무시할 수 없었다. 1000만원짜리 옥탑방 시절부터 곁을 묵묵히 지켜준 아내였지만 잘나가던 병원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와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커가는 세 아이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는 날이 잦아졌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내 가족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돕겠다는 게 너무 큰 교만은 아닐까.’
사역의 무게에 완전히 짓눌려버린 나는 캄캄한 진료실에 홀로 앉아 무너져 내렸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 거대한 수레바퀴를 굴릴 수 없었다. 결국 비전케어 사역을 모두 접고 평범한 의사의 자리로 돌아가길 고민했다.
절망의 끝자락에 있던 날, 병원으로 한 통의 연락과 함께 거액의 후원금이 도착했다. 자그마치 1000만원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익명의 후원자였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결혼을 앞두고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죽다가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그 1000만원은 결혼을 위해 피땀을 흘려 저축한 준비 자금이었다. 입금 내역과 함께 적혀 있던 짧은 메시지는 이러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으로부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이 메시지는 하나님의 매서운 채찍이자 나를 부둥켜안고 우시는 주님의 뜨거운 위로였다. 나는 그제야 나의 가장 큰 죄악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포장했지만 속으로는 내 돈과 내 희생으로 이 사역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끔찍한 교만에 빠져 있었다. 내 지갑이 비었으니 사역도 끝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얄팍한 믿음이 철저히 무너졌다.
그날 밤의 회개 이후 나는 재정에 대한 모든 염려를 주님께 온전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부르심이 있는 그 땅으로 짐을 챙겨 떠났다. 그러자 오병이어의 기적이 거짓말처럼 릴레이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하던 SC제일은행, LG전자 등 기업 후원이 연결됐고 이름 없는 성도들의 1만원, 2만원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금융 위기도 서서히 좋아졌다. 내 힘을 완전히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당신의 풍성한 곳간을 열어주셨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12) 현지 동역자와 갈등, 협력 사역의 방향 깨우친 성장통
수술 장비 넘기고 지원만 요구
안과의사, 자원봉사자들 상실감
교회 전체 품는 사역 지침 세워
새 파트너들과 연합 사역 시작
김동해(맨 뒷줄 오른쪽 세 번째) 비전케어 이사장이 2006년 2월 미얀마에서 의료 봉사를 마친 뒤 현지 의료진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익명의 후원자가 보낸 ‘옥합을 깬 헌금’을 계기로 재정적 부담을 부르심과 소명으로 넘기자 사역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단체가 커지고 지원 규모가 늘어날수록 예기치 못한 곳에서 파열음이 들려왔다. 가장 뼈아픈 시련은 돈이나 환경이 아니라 다름 아닌 믿었던 동역자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2005년 초창기부터 파키스탄에서 동고동락했던 일부 현지 선교사들이 뜻밖의 요구를 해왔다. “이제 안과 수술 장비를 넘겨주고 재정만 지원해 주십시오. 사역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우리는 동역을 원했는데 그분들은 선교를 주도하기 위해 우리의 장비와 돈만을 원했던 것이다. 매년 피 같은 휴가를 반납하고 자비량으로 날아와 수술대 앞에 섰던 한국의 안과 의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은 깊은 상실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의료 선교는 물건을 주고 실적을 챙기는 비즈니스가 아니었다. 현지 파트너와의 갈등 속에서 “우리는 단순한 선교 후원자가 아니다. 우리도 평신도 선교사, 동역자다”란 외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사역의 본질이 통째로 흔들리던 그 절망의 늪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피난처를 예비해 두셨다. 마침 파키스탄 북부 라호르의 한인교회와 선교사회가 간절한 도움을 요청해 왔다.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기존의 사역지를 떠나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라호르의 한 병원으로 장비와 인력을 모두 이전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파트너들과 연합 사역을 시작하며 과거 실로암안과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충북 옥천 무의촌 진료에서 어렴풋이 깨달았던 선교의 진리를 다시금 명확히 되새기게 됐다. 한 교회 중심으로 환자를 데려와 그 교회만 부흥시키도록 돕는 방식은 결국 현지 교회들 사이에 불필요한 경쟁과 병폐를 낳았다. 반면 옥천에선 지역 교회들이 연합해 특정 교회가 아닌 동네 보건소에서 모든 교회 교인들이 협력해 진료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참된 선교는 한 선교사가 주변의 100명을 수술하는 것보다 100명의 선교사가 각자 품고 있는 가장 절박한 환자 1명씩을 데려와 함께 치료하는 것이다. 이는 특정 개인이나 교단이 아니라 그 지역의 선교사회와 현지 교회 전체를 품는 것이며 선교는 협력 사역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비전케어가 나아가야 할 연합의 길이였다.
쓰라린 성장통을 거치며 비전케어는 단순한 동정심에 기대는 봉사단체에서 벗어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을 ‘4대 핵심 원칙’을 굳건히 세웠다. 첫째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하는 자원봉사. 둘째 대충 안약이나 쥐여주는 것이 아닌 최고의 의료 기술을 제공하는 전문성. 셋째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철저히 현지인들을 세우는 현지 중심. 넷째 독단적으로 일하지 않고 연합해 선을 이루는 협력 사역이다.
상처받고 부서지는 아픔이 없었다면 결코 세워질 수 없었던 단단한 뼈대였다. 의료 선교는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아니라 철저한 원칙과 시스템 위에서 움직여야 함을 뼈저리게 배웠다. 4대 원칙이 마음에 확고히 자리 잡자 얽혀있던 사역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준비된 우리를 더 척박하고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으로 향하게 하셨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13) 파키스탄·동남아 넘어 아프리카로 비전케어 사역 첫발
질병·고난의 땅 스와질란드
100만 인구에 안과의사 1명
늦은 밤까지 백내장 수술하며
배고픈 자 외면했던 교만 회개
김동해(왼쪽) 비전케어 이사장이 2007년 스와질란드(현 에스와티니)에서 스와질란드 왕자를 진료하고 있다.
비전케어 사역이 파키스탄과 동남아시아를 넘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2007년, 하나님은 우리의 시선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돌리셨다. 아프리카였다. 당시 내게 아프리카는 미지의 땅이자 질병과 빈곤의 두려움이 앞서는 곳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강권적으로 우리를 아프리카 남부의 작은 나라, 스와질란드(현 에스와티니)로 이끄셨다. 제22차 비전아이캠프는 비전케어가 아프리카에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현지 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마주한 현실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당시 스와질란드는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률이 40%에 육박할 정도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나라였다. 질병과 가난에 신음하는 이 땅에서 눈을 치료한다는 것은 사치처럼 여겨졌다. 현지 병원을 방문한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 인구 100만명이 넘는 이 나라 전체를 통틀어 안과 전문의가 단 1명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임시 수술실이 꾸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환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며칠을 걸어온 노인, 지팡이에 의지해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온 맹인 청년…. 더구나 그 나라 왕의 형인 왕자까지.
그들의 눈을 진찰하면서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한국이라면 동네 안과에서 10분이면 끝날 백내장 수술조차 받지 못해 평생을 흑암 속에 갇혀 살아온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제때 수술만 받았어도 시력을 잃지 않았을 ‘피할 수 있는 실명’(Avoidable Blindness)의 잔인한 비극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늦은 밤까지 백내장 수술을 하면서 수술대 앞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토록 무심하십니까. 왜 이 땅의 사람들은 이토록 무서운 어둠의 형벌을 받아야 합니까.’
하지만 그 원망은 이내 나 자신과 세상을 향한 뼈아픈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생명의 떡을 움켜쥐고도 배고픈 자들을 외면했던 영적 교만이 낱낱이 드러나는 듯했다. 주님은 수술대 앞의 내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셨다. ‘그래서 내가 너를 이곳에 보내지 않았느냐.’
그제야 파키스탄에서 겪었던 뼈아픈 배신과 눈물로 세웠던 ‘4대 원칙’(자원봉사, 전문성, 현지 중심, 협력 사역)의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히 선교지의 한 병원을 돕는 일이 아니라 ‘가서 행하라’는 주님 말씀에 따라 진정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척박한 아프리카 대륙의 수많은 생명을 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치밀한 영적 시스템이었다. 철저한 원칙이 없었다면 이 거대한 대륙의 필요 앞에서 우리는 감정적으로 소진돼 금세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스와질란드의 붉은 흙먼지 속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 새로운 서원을 드렸다. ‘주님, 이 생명의 빛을 아프리카 끝까지 전하겠습니다.’ 짐바브웨, 말라위, 에티오피아, 우간다 등 아프리카 16개국으로 이어질 길고도 가슴 벅찬 여정은 그렇게 스와질란드의 짙은 어둠 한가운데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14) 희망봉에서 우간다까지 8000㎞… 오토바이로 종단 대장정
아프리카 주민들 눈 수술하며
선교지·병원 연결, 후원 위해
리빙스턴 탐험한 길 따라 도전
생애 가장 아름다운 광야 체험
2016년 비전루트에 오른 김동해 비전케어 이사장이 짐바브웨에서 잠비아로 이동하고 있다.
2016년 여름, 내 나이 쉰을 넘긴 시점에 나는 인생에서 가장 무모하고도 거대한 도전에 나섰다. 이름하여 ‘눈을 떠요 아프리카, 비전 루트’.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남단 희망봉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동부 9개국을 가로질러 우간다까지 오토바이로 8000㎞를 종단하는 대장정이었다. 여정의 목적은 아프리카 주민들의 눈을 수술하고 선교지와 병원을 연결하며 후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주변에선 “의사가 손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나이 생각도 해야지” “길도 없고 너무 위험한, 목숨을 건 도박”이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내겐 작지만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영국 선교사이자 의사,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도 갔던 길이다. 주님이 인도해 주시리라.’ 차가 다니기 힘든 험한 길일지 몰라도 그 길 없는 곳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하는 환자들을 만나야 했다.
오토바이 양옆에 태극기와 비전케어 깃발을 단단히 매달았다. 한국인 의사란 자부심이자 하나님이 준 소명을 끝까지 완주하겠다는 결연한 약속이 담긴 표지였다. 하지만 희망봉을 떠나 본격적인 여정에 오르자마자 상상도 못 한 시련이 닥쳐왔다. 바로 아프리카의 지독한 추위였다.
한국은 찜통더위가 한창인 7월이었지만 남반구인 아프리카는 이때가 한겨울이다. 온몸에 핫팩을 붙이고 가진 옷을 다 껴입었지만 해 질 무렵이면 아프리카 고원의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옷깃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내내 이가 덜덜 떨렸다. 핸들을 잡은 손은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어붙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힘든 건 아프리카 국경을 넘는 일이었다. 인내의 끝을 시험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비자 문제와 수술 장비 검사 등으로 매번 국경에서 10시간 넘게 차디찬 길바닥에 앉아 세관원과 씨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꽉 막힌 행정 절차 앞에서 시계만 들여다보며 발을 구를 때마다 주님은 내게 나지막이 말씀했다. “동해야, 서두르지 마라. 길은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는 것이다.”
그 척박한 길 위에서 나는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하나님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오토바이가 비포장도로에서 전복돼 아찔한 순간을 맞을 때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나타나 도움의 손길로 위기를 넘길 때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꼈다. 길에서 만난 형제들은 외모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엄연히 우리 이웃이고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도 새삼 느꼈다.
모잠비크와 짐바브웨의 먼지 날리는 대륙을 달리며 구석구석 하나님이 지은 세계를 눈에 담았다. 바람을 타고 오는 신선한 향기를 맡으며 헬멧 속에서 찬양도 흥얼거렸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빛을 보지 못하는 누군가의 눈을 뜨게 할 거란 상상을 하면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희망봉’은 단순히 아프리카 끝자락에 있는 바위 언덕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부른 그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순종의 발걸음이 시작된 비전의 상징이었다. 8000㎞의 비전루트는 하나님이 창조한 아프리카에 눈을 뜨게 된,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광야였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15) 생전 처음 빛을 본 사람들, 덩실덩실 기뻐 춤추며 찬양
목 디스크 통증 간신히 버티며
더위 속 열악한 장비로 수술 중
흔들리는 날 위로하는 찬양에
순종의 길 깨닫고 눈물 쏟아
김동해(왼쪽) 비전케어 이사장이 2016년 아프리카 종단을 마친 뒤 권구현 선린교회 목사와 악수하고 있다.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지르는 8000㎞의 ‘비전루트’는 매 순간이 한계와의 뼈를 깎는 싸움이었다. 육체적 피로가 극에 달했던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어느 오지 마을, 우리 팀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험난한 여정을 함께 견디며 팀의 영적 지주 역할을 해주시던 권구현 선린교회 목사님이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현지에서 내려진 의심 증상은 급성 신부전증. 제대로 된 의료 시설조차 없는 척박한 시골 마을에서 자칫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나도 모든 팀원도 흙먼지 날리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곳을 예배당 삼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주님, 이 땅의 눈먼 자들을 살리겠다고 생명을 걸고 왔는데 어찌하여 주의 종이 이 먼 타국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 합니까.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수술실 바닥이 눈물로 얼룩졌다.
간절한 부르짖음의 응답이었을까. 정밀 검사 결과, 다행히 앞선 진단에 오류가 있었음을 알게 됐고 기적적으로 목사님의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음 사역지인 잠비아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사실 내게도 고비는 있었다. 예전에 말라위 캠프에서 심각한 목 디스크 통증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진통제로 간신히 버티며 수술대 앞에 앉았지만, 열악한 장비와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목이 끊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메스를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던 그때, 누군가 틀어놓은 찬양 한 곡이 흘러나왔다.
“조금씩 보인 그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었지. 인생의 끝에 내 삶을 반겨줄 이 기다리고 있으니, 내게 주어진 길을 걸으리. 담담하게 이 길에 나서리.”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아, 주님이 이 험한 아프리카의 길 위에서 비틀거리는 나를 보고 계셨구나.’ 내가 걷는 이 길이 나의 알량한 의지가 아니라, 주님이 조금씩 보여주신 순종의 길이었음을 깨닫자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훌쩍이며 환자의 눈동자에 조심스레 새 인공 수정체를 밀어 넣었다. 통증도 피로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환자들의 안대를 푸는 시간은 그간의 모든 고통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천국 같은 순간이었다. 평생 처음 색깔을 보고 수줍게 미소 짓던 스와질란드(현 에스와티니)의 14세 소녀 디바인, 시력을 잃어 제 나이보다 한참 낮은 학년에 머물러야 했던 탄자니아 소년 압둘리, 한국어가 적힌 낡은 구호 조끼를 입고 붕대를 풀자마자 “이제 다시 가장 역할을 할 수 있다”며 펄쩍펄쩍 뛰던 짐바브웨의 62세 존 아저씨.
빛을 되찾은 그들은 병원 앞마당에서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이 말씀이 아프리카에서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수술실에서 흘렸던 내 땀과 눈물도 어느새 환희에 찬 춤사위로 바뀌어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16) 한 명이라도 더 혜택을… ‘한쪽 눈 수술’ 가슴 아픈 원칙
한정된 자원 탓 연소자에 우선권
학교에 못 가고 농사 짓던 청년
백내장 아버지 잘 모신 딸 위해
원칙 깨고 양쪽 눈 수술 예외도
탄자니아의 한 소년이 지난해 비전케어를 통해 무료 개안 수술을 받은 모습. 비전케어는 한정된 자원 속에서 더 많은 이들에게 빛을 전하기 위해 한쪽 눈만 수술하는 원칙을 세웠다.
아프리카의 아이캠프 현장은 늘 빛을 간절히 원하는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우리가 현장에 가져갈 수 있는 수술 장비와 시간은 철저히 제한돼 있다. 특히 수술에 필수적인 인공수정체와 안약 등 소모품은 한쪽 눈 기준으로만 해도 비용이 100달러에 달했다.
비전케어엔 수술 현장에서 눈물을 머금고 지켜야만 하는 원칙이 있다. ‘한쪽 눈 수술’이다. 두 눈이 모두 안 보이는 사람을 먼저 수술하되 한정된 자원 속에서 단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한쪽 눈부터 수술을 해주는 것이다. 비록 한쪽 눈일지라도 수술을 받으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또 안타깝지만 노인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고 한창 공부하고 일해야 하는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수술 우선권을 준다.
합리적인 원칙을 세웠다곤 하지만 며칠을 걸어온 환자의 반대쪽 먼눈을 그대로 남겨둔 채 돌려보내야 하는 의사의 마음은 늘 천근만근 무겁다. 때로는 이 차가운 원칙을 무너뜨린 자리에서 평생 잊지 못할 기적 같은 예외가 생기기도 한다.
우간다에서 만났던 23살의 청년 요셉이 그랬다. 선천성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그는 학교조차 가지 못한 채 밭에서 농사만 지으며 살아왔다. 인상이 참 반듯하고 성실했던 그 청년에게 우리는 원칙대로 한쪽 눈만 수술을 진행했다. 하지만 수술이 끝난 뒤에도 요셉의 얼굴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시력을 잃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쳤을 텐데….’ 남은 한쪽 눈이, 아니 남은 그의 인생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결국 모든 캠프 일정을 마치고 짐을 싸서 떠날 준비를 하던 마지막 날, 나는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원칙을 깨고 요셉을 다시 불렀다. 그리고 그의 남은 반대쪽 눈까지 수술했다. 수술이 끝난 뒤 그는 내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며 다음번에 다시 오면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카사바와 고구마를 꼭 가져다주겠노라 약속했다. 내가 되찾아 준 것은 단순한 시력이 아니라 한 청년의 남은 삶 전체였다.
원칙을 잠시 내려놓았던 또 하나의 따뜻한 기억은 스와질란드(현 에스와티니)에 있다. 두 눈 모두 백내장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딸이 모시고 왔다. 그는 아버지가 수술을 기다리는 아이캠프 기간 내내 병원에서 지내며 다른 환자들의 통역을 돕고 배식까지 거들었다. 마침 캠프 마지막 날 여러 사정으로 수술 자리 하나가 비게 되자 우리 팀은 만장일치로 그 착한 딸을 둔 아버지의 반대쪽 눈까지 수술해 드리는 선물을 안겨드렸다. 수술을 마친 아버지는 딸의 부축을 받지 않고 혼자 걸어서 퇴원하셨다.
한쪽 눈만 수술한다는 원칙은 아프리카의 열악한 현실 앞에서 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세운 냉정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원칙 속에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스와질란드의 아버지 같은 예외를 허락하시며 의료 봉사가 차가운 제도가 아니라 뜨거운 긍휼임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셨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17) 의료선교 끝나도 희망 이어지도록… 수술하는 법 전수
스승 곤야마 교수에 배운 대로
지속가능한 의료 가능하도록
말라위 선교병원에 장비 기증
현지 의료진에 사용법 알려줘
김동해(오른쪽) 비전케어 이사장이 지난해 7월 탄자니아 현지 의료진에게 백내장 수술 방법을 교육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오토바이로 누비며 수많은 백내장 환자에게 빛을 찾아줬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풀리지 않는 무거운 숙제가 있었다. 우리가 캠프를 열면 일주일 동안 수백 명의 환자가 빛을 찾고 환호하지만, 우리가 짐을 싸서 떠나고 나면 그 땅은 다시 절망적인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 의료 선교를 시작했을 때는 오직 내 앞의 환자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리가 잠시 방문해서 환자를 수술해 주는 것만으로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우리 힘만으로는 수없이 많은 아프리카의 실명 환자를 다 고쳐 줄 수 없었다.
현장의 목소리도 다르지 않았다. 모잠비크 마푸토에서 만난 보건국 총책임자 닥터 마리야모의 간곡한 부탁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는 “수술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안과 의사들이 백내장 수술을 직접 할 수 있도록 교육해 달라”고 호소했다.
인구 2400만명의 모잠비크에 안과의사는 25명뿐인데, 그중 8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인 의사라는 충격적인 현실 속에서 그들은 자립을 위한 기술 전수를 요청했다. 이 일을 계기로 환자 치료(70%), 현지 의료진 교육(20%), 보건국 관계자들과의 정책 개발(10%)로 사역의 비중을 나눠 장기적인 자립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런 사역의 패러다임을 확립하는 데는 15년 전 내게 글로벌 헬스의 개념을 처음 가르쳐 주셨던 스승, 일본의 곤야마 교수의 영향이 컸다. “단순히 수술만 해주는 아이캠프에 머물지 말고 저개발국 의사들을 교육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라”는 그의 충고는 지금도 귓가에 선하다. 태국 북동부 농촌 지역에 중간 수준의 안과 진료 요원을 교육하는 코랏 코스(Korat Course)를 정착시켰던 그의 가르침은 비전케어가 나아갈 명확한 나침반이 됐다.
의료 교육과 자립의 희망을 내 두 눈으로 생생하게 확인한 곳은 말라위의 은코마 선교병원이었다. 100여년 전 네덜란드 선교사들이 세운 이 병원은 헌신적인 영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닉이 이끌고 있었는데, 4년 만에 다시 찾은 그곳에서 닉은 안타깝게도 말라리아로 인한 뇌 손상으로 병석에 누워 있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지만, 기적은 뜻밖의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떠나거나 병든 그 빈자리를 말라위 현지인 여성 안과의사인 타마라가 훌륭하게 이어받아 병원을 총괄하고 있었다.
외국인 의사가 없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말라위 사람들의 땀방울에 의해 계속 진행 중이었다. 나는 4년 전 약속했던 고가의 후발성 백내장 치료 장비를 병원에 기증하고, 닥터 타마라와 현지 의료진에게 직접 사용법을 꼼꼼히 안내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을 넘어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 우리가 짐을 싸서 떠난 후에도 그 땅의 현지 의사들이 스스로 동족의 눈을 밝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지속 가능한 사역’이었다. 말라위의 뜨거운 흙바람 속에서 나는 이 진리를 가슴 깊이 새겼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18) 현지인 의사 양성 힘겹지만 생명 살릴 영구적 해결책
10년전 교육 훈련 받은 아피오
비전케어 사역팀 떠난 후에도
우간다 오지 지키며 환자 돌봐
인적 네트워크 구축 통해 정착
우간다 안과의사 아피오가 지난해 8월 우간다 비전아이캠프에서 백내장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내가 언제까지 짐을 싸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내가 오지 못하면 이들의 눈은 누가 고쳐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분명했다. 우리가 수술을 계속해 주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 의사들이 스스로 수술할 수 있도록 가르쳐 세우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고도 영구적인 해결책이었다. 물론 현지 의료진을 직접 교육하고 훈련해 자립하는 과정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힘겨운 훈련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지난해 8월 우간다에서 만난 현지 의사 아피오를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진정한 지속의 의미를 일깨워준 소중한 제자이자 동역자였다.
아프리카에서 안과의사는 매우 인기 없는 직업이다. 가난한 환자들이 치료비를 낼 수 없어서 의사 개인의 생계유지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가 돼도 돈을 벌 수 있는 대도시나 해외로 떠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10여년 전 우리가 교육하고 훈련했던 아피오는 달랐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그의 병원은 여전히 낡은 장비와 부족한 약품으로 텅 비어 있는 척박한 환경에 놓였지만 그는 묵묵히 환자 곁을 지키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세상을 보게 하겠다는 굳은 일념으로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 차로 10시간이나 걸리는 오지 소로티에 남았다.
우리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피오는 수술이 필요한 현지 환자 수백 명을 미리 모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전아이캠프가 열린 첫날에만 50건의 수술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숨이 턱턱 막힐 만큼 고된 일정이었지만 환자를 향한 아피오의 진심 어린 열정은 현장에 있던 우리 팀 전체의 마음을 뜨겁게 움직였다.
열악한 수술대 곁에서 땀 흘리며 환자를 돌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지난 10년간 이역만리를 오가며 흘린 시간과 노력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진정한 봉사의 완성은 끝까지 남아 수술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떠난 자리에서도 생명을 살려낼 제자를 남기는 훈련에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아피오가 있는 소로티의 병원을 비전케어의 추가 지원 대상으로 정하고 수술에 필요한 장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수도에서 10시간이나 떨어진 그 먼 길은 절대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우리가 기꺼이 그곳을 향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는 진짜 의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척박한 땅을 버리지 않은 아피오의 끈기와 믿음은 비전케어가 지금까지 우간다에서 가장 많은 수술을 진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이제는 어엿한 의사가 된 제자 아피오를 비롯해 보건국 관계자, 한인회, 현지 병원 관계자들까지 참여하면서 전 세계에 촘촘한 인적 네트워크가 구축돼 비전케어의 사역이 지속 가능한 구조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떠나야만 비로소 온전히 완성되는 사역, 그것이 하나님께서 비전케어에 허락하신 지속가능한 나눔의 진짜 모습이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19)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들에 안과 수술로 보은
강뉴부대 용사들 감사의 경례
변함없는 한국 사랑에 눈시울
많은 이들 합력하여 선을 이뤄
지속 가능한 나눔 곳곳서 열매
김동해 비전케어 이사장이 지난해 5월 서울 중구 서울신라호텔에서 삼성호암상 사회봉사상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지금까지의 공로를 인정받아 삼성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세상은 화려한 시상대 위에 선 내 모습에 주목할 수 있겠지만 난 이 상이 결코 나 개인의 업적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호암상 수상은 누군가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수많은 자원봉사자, 현지 선교사들, 한인사회의 협력, 기업과 공공기관의 손길과 사랑, 정성이 한데 모여 엮어낸 ‘협력하여 선을 이룬 기적’이었다.
내가 이 협력과 연대의 힘의 숭고함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곳은 에티오피아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 가까이 지난 2010년, 현지에 참전용사들이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수도 아디스아바바 시립병원에서 수술하면서 참전용사들을 만났고 마지막 날, 귀국을 앞두고 수술 결과를 확인하던 자리에 군복 차림의 노인들이 천천히 걸어 들어와 우리 앞에 정중히 거수경례했다. 한국의 자유를 위해 피 흘렸던 강뉴부대(Kangnew Battalion) 출신의 용사들이었다.
한 노병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한국 사람을 다시 만날 줄 몰랐습니다. 한국 의사에게 수술을 받게 될 줄은 더욱 몰랐습니다.” 그는 꼿꼿한 자세로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에 전쟁이 나면 내가 다시 참전하겠습니다.” 그 깊은 울림에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벅찬 만남 이후 우린 이 인연을 결코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았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에 사업을 제안해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아디스아바바의 라스 데스타 담테우 기념병원에서 현지 안과의사 양성과 자선 수술을 꾸준히 이어갔다. 사업이 끝난 뒤에도 병원을 지원하고 지난해에는 병원 외벽을 다시 칠하고 내부 보수도 진행했다. 경기도 국제개발협력사업과 연계해 약 2억원 규모의 안과 장비도 교체했다.
지난해 10월에는 동료 이승재 선생님의 주도로 생존 참전용사 54명과 그 후손들을 대상으로 한 달간 전수 안과 검진과 수술이 진행됐다. 현장을 직접 방문한 경기도의회 미래과학협력위원회 관계자들은 “참전용사와 그 후손을 위한 이 사업은 단순한 원조를 넘어 역사적 책임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이어가고 있는 비전아이캠프 역시 2007년 이진학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 교수님의 요청에서 시작됐다. 20여년간 40개국을 돌며 395차 비전아이캠프를 열고 28만명이 넘는 환자들을 진료했으며 3만명 이상에게 무료 개안 수술을 시행했다. 각 국가의 의료 자립을 위해 수차례 현지 의료진을 교육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작은 인연에서 시작해 거대한 연대로 자라난 결과였다. 진심이 연대를 만들고 그 연대가 이어질 때 수술실의 조명이 켜지고 세상의 어둠은 걷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연한 인연을 소중한 관계로 키워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가 지속 가능한 나눔으로 이어지는 일. 삼성호암상 수상은 이 아름다운 연대의 끈을 굳게 붙잡아 앞으로 더 멀리, 더 깊이 생명의 빛을 이어가라는 격려일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동해 (20·끝) “동역자들과 시각장애인 돕는 빛의 여정 걸어갈 것”
1등 한 적 없고 실패 거듭한 삶
꽃동네서 공동체의 삶을 배우고
시력 찾아주는 의사 소명 품은 건
빛의 도구로 이끈 하나님의 큰 그림
김동해(왼쪽 두 번째) 비전케어 이사장이 지난달 23일 가나의 마가렛 말쿼트 가톨릭병원에서 395차 비전아이캠프 참가자들과 함께 손을 흔들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단 한 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다. 반장이나 회장 같은 감투를 써본 적도 없다.
내 인생은 뜻대로 된 것보다 실패하고 돌아간 적이 훨씬 많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꿈도 의사가 아니라 천문학자나 물리학자였다. 하지만 내 성적으로는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갈 수 없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 선생님의 권유로 의대에 지원했고 보기 좋게 낙방했다.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재수해서 간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과정을 마친 뒤 내과나 정신과를 가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안과가 좋다는 말에 휩쓸려 지원했다. 그러나 전공의 시험에서 다시 떨어졌다. 결국 군대(공중보건의)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그 낙방 덕분에 나는 충북 음성의 꽃동네, 가장 낮고 소외된 곳으로 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공동체의 삶을 배우고 안과 선생님들을 만나 각막 적출을 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시력을 찾아주는 안과 의사의 소명을 갖게 됐다.
전문의가 된 뒤 대학교수에 지원했지만 또 떨어졌다. 다른 병원에 취업했지만 그마저 병원이 어려워져 나와야 했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서울 명동에 등 떠밀리듯 개업을 하게 됐다. 정말이지 세상 사는 게 내 뜻대로 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 모든 게 하나님 은혜였다. 만약 내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면, 내과나 정신과에 갔다면, 단번에 대학교수로 임용됐다면. 나도 모르게 남들이 좋다는 것을 무작정 따라갔다면 내 인생에 비전케어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파키스탄과 아프리카의 수많은 환자와 현지 의사들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진정 원하는 일을 발견하게 했다.
어린 시절 한 선생님이 “세상에는 ‘없었으면 하는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그리고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1등에서 밀려난 숱한 실패의 자리들은 결국 나를 세상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도구로 빚어가시려는 하나님의 완벽한 ‘큰 그림’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 서서히 변해 갔다.
세상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이웃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1등이 아니어도 괜찮다. 비록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실패의 자리일지라도,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묵묵히 실천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가장 아름다운 도구로 빚어내신다.
그런 여정엔 동역자가 있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비전케어가 전 세계 수십만 명의 눈을 밝힐 수 있었던 것도 결코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이름 없이 땀 흘려준 자원봉사자들과 척박한 오지를 지키는 현지 동역자들, 그리고 기도로 마음을 모아준 후원자들이 손을 맞잡았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시각장애로 고통받는 이웃이 있는 한,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끝까지 이 빛의 여정을 걸어가려 한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보시며 함께 울며 웃고 기도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