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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5일(수)
누가복음 2:1~14
낮은 곳에 임한 기쁨의 복음
하늘사랑교회 성탄절 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오늘은 구주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아침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마도 성탄절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크리스마스트리, 흰 눈, 구세군의 자선냄비, 산타클로스 같은 단어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즐겨 부는 찬송 중에 찬송가 109장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우리가 즐겨 애창하는 성탄 찬송입니다.
이 노래의 발상지는 오스트리아의 음악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약 2km 떨어진 ‘오베른도르프’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습니다. 1,800년대 초반, 이 마을에는 조셉 모어(Joseph Mohr)라는 천주교 신부님과 프란츠 그뤼버(Frantz Grueber)라는 학교 음악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모어 신부는 음악도시인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이 마을의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부 사제로 재직했습니다. 그뤼버 선생님은 이웃 마을인 아른스도르프에서 재직하면서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오르간 반주를 맡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신부로, 또 다른 한 사람은 성당의 반주자로 일하다 보니, 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818년 성탄 축제를 앞두고, 당시 26세였던 모어 신부가 그뤼버 음악 선생님에게 성탄에 모두가 함께 부를 캐럴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모어 신부는 가사를 쓰기로 했고, 그뤼버 선생님은 작곡하기로 했습니다.
모어 신부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Still Nacht, Heilige Nacht)으로 시작되는 노랫말을 지었습니다. 원래는 6절까지 되어 있었는데, 그 노래의 1절을 작시 된 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모두가 잠들었고
오직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부부만이 조용히 깨어 있네
곱슬머리의 귀여운 아가는
천국의 평화 속에 잠자고 있네
천국의 평화 속에 잠자고 있네
모어 신부는 이 노랫말을 성탄 전날인 12월 24일 그뤼버 선생에게 전달하면서 합창곡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뤼버 선생님은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그 날 밤에 곡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다음 날 성탄 예배시간에 이 곡을 연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만 성당 오르간이 고장 난 겁니다. 유럽 교회는 전통적으로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만든 오르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탄절을 맞아 오르간 수리공이 휴가를 가는 바람에 고장 난 오르간을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두 사람은 오르간 대신 기타를 들고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오르간 수리공이 눈길을 헤치고 달려와 오르간을 가까스로 수리했습니다. 오르간 수리공은 단지 오르간만 수리하는 게 아니라 전문적으로 오르간을 연주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수리공이 그 곡을 연주해보니 너무 좋은 겁니다. 그래서 수리공은 많은 사람 앞에서 이 곡을 연주해 이 곡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1937년 8월 15일. 성 니콜라우스 성당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지은 모어 신부와 그뤼버 선생님을 기념해서 성당 이름을‘고요한 밤 교회’(Stillle Nacht Kapelle)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교회는 오스트리아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고요한 밤 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입니다. 교회 내부에는 촛대가 놓인 제단과 10여 개의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벽에는 모어와 그뤼버의 이야기, 그리고 당시의 악보가 조그맣게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교회는 이 노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서, 이 노래를 1년에 딱 한 번, 성탄절에만 부른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성탄 전야예배 시간에 성찬식을 마치고 모든 조명을 끈 후에 촛불을 켜고 이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런 분위기를 상상하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1절만 두 번 반복해서 함께 불러볼까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두 번 반복).
참 좋지요? 성탄의 평화스러움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실제 성탄의 밤이 그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웠을까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아기를 그런 곳에서 낳을 수 있느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현실입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온 유대 땅에 명령을 내려, 모든 사람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소위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이려는 조치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서 호적을 하도록 명령했던 거지요.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도 이 명령에 따라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도착한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자 아이를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낳기 위해 여관을 찾아다녔겠지요? 만삭이 된 아내를 이끌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해산할 곳을 찾는 요셉의 마음은 얼마나 타들어 갔겠습니까?
“혹시 빈방 있습니까? 제 아내가 지금 급하게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데 제발… 작은 방이라도 좋으니 방 하나만 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매년 성탄절 시즌이 되면 성극 “빈방 있습니까?”가 무대에 오릅니다. 어느 교회의 고등부에서 성탄절 성극을 준비하는데, 지적 장애가 있는 덕구가 여관 주인 역을 맡게 되면서 일어난 일화를 다룬 작품입니다. 연극을 연출하는 교사는 덕구에게 자신감과 성취감을 고취하려고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덕구를 연극에 참여시켰습니다.
지적 장애가 있던 덕구는 눈물겨운 연습으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해 갑니다. 그러나 공연 그날, 덕구는 큰 사고를 치고 맙니다. 빈방이 없다고 해야 할 여관 주인이 자기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따뜻하게 해 놓겠다는 엉뚱한 대사를 한 것입니다. 덕구는 아무리 연극이라도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낳으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출처: 임준형,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12월호), 237쪽.
그러나 연극과 달리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낳을 빈방을 구하지 못해 마구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기를 낳아 여물통 위에 포대기를 깔고, 아기를 뉘었습니다. 각박한 이 세상은 해산할 여인을 위해 방 한 칸도 내어주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평화니, 고요함이니 이런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 대왕은 자신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베들레헴에 있는 2세 미만의 남자 아기들을 전부 죽였습니다. 끔찍한 유아학살범죄가 저질러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백성들은 자기를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로마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힘 있는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마치 유럽을 정복하기 위채 어깨에 붉은 견장을 달고 흰 말을 탄 용감한 나폴레옹처럼,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기사로 이 모든 불의를 심판해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합니다. 그들은 오매불망 메시아가 빨리 와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시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염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뜻밖에도 한적한 목자들에게 들려졌습니다. 그들은 배운 것도 적었고, 예루살렘의 부자들에게 고용되어 자기 양이 아닌 부자들의 양을 치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가난의 상징인 말구유에 누워 동방박사들과 양 치는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장차 세상을 구원할 평화의 왕이십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부귀와 권세를 가진 자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기적과도 거리가 멀고, 지혜와도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주는 교훈은 역설적입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을 버리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촉구합니다.
저는 끝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 이듬해에 제가 썼던 묵상 글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작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 우리는 베들레헴에 있는 ‘목자들의 들판교회’를 방문했었습니다. 이 교회당은 한밤중에 들판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던 일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당입니다.
우리를 인도해 주었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히브리대학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분이셨는데, 그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유대 땅에서 목자들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목자들에게는 거짓말 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고 합니다. 목자들이 치던 그 양들은 자신들의 양이 아니라, 주인들에게 위탁받은 양이었습니다.
혹시 양이 다치거나 죽게 되면 목자들은 주인에게 양 값을 변상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목자들은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늘 거짓말로 둘러대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간해서는 목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작품이었다면,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이 거짓말쟁이로 알려진 목자들에게 알려졌다고 결코,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연 누가 거짓말쟁이의 말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심으로, 이 사건이 사람들의 창작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건, 또 얼마나 학식이 있고,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건 관계없이,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성지순례단 일행이 베들레헴 목자들의 들판교회당 안에서, 기쁨에 찬 합창을 드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새 찬송가 123장.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천사들이 전하여 준 주 나신 소식 들었네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저 동방의 박사들이 새아기보고 절하고
그 보배 합 다 열어서 세 가지 예물 드렸네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강포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것은 표적입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을 찬송했듯이, 우리 모두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찬송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아멘.
♤ 베들레헴에 위치한 <목자들의 들판 교회당> 내부 사진입니다. 2019년 대전서지방 교역자회 성지순지순례 때 한 목사님이 찍은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