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날 밤, 내리는 빗방울에서는 발소리가 들린다. 어머니의 첫 기일이다. 제상에 올린 메에 꽂힌 오목한 술잎. 마주 앉은 나를 담고 물구나무를 섰다. 아홉 숟가락을 뜰 시간쯤 빈 괄호처럼 열린 귓속에서 나직한 소리가 난다.
어머니는 출산하면서 큰 병을 앓았다. 갓 눈뜬 아가에게 애닳게도 초유조차 먹일 수 없었다. 엄마는 불은 젖을 먹이지 못해 젖몸살을 앓고, 젖배 고픈 아기는 단잠을 못 자 보챘다. 아기를 업고 동네 젖어미네로 젖을 빌러 가면, 꿀떡꿀떡 마른 논에 물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젖 맛을 알아버린 아기는 젖어미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으려고 떼를 썼다. 그도 모자라 입을 오물거리면 밥물을 넘겨 떠먹이고, 끓인 쌀죽을 입안에서 녹여 먹였지만 아기는 통 여물지 않았다. 검부러기 마냥 해깝아서 안을 때마다 어머니는 애가 달았다.
아버지는 나무를 다듬어 숟가락을 만들어 주었다. 처음 손에 쥐어준 나무 숟가락. 아기는 애착이 없었다. ‘오로로 까꿍’ 한 술 꼴딱. 까르르 웃을 때마다 ‘아’ 한 입 꼴딱. 포로롱 날아가는 새를 보며 벌린 입으로 무른 밥을 떠 넣었다. 아가는 제가 싫으면 입속에 들어온 숟가락을 꽉 물고 놓지를 않았다.
“어여, 한 숟가락만 딱 묵자. 그래야 고까옷 입고 우야 놀러 가지.”
그렇게 들어간 밥이 등가죽에 붙은 배를 일으켜 세웠다.
“인자 쑥쑥 크겠네, 배가 봉곳한 게 사람 구실하것구나.”
살도 덜 여문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꼬옥 안아주었다. 조금씩, 그렇게 막내딸은 자랐다.
“야가요. 지금 무신 짓이고. 니 숟가락, 이리 가지고 오이라.”
국민학교 시절, 저녁상 머리에서였다. 아버지, 오빠 다음으로 쌀밥을 담아주던 밥그릇에 보리쌀이 섞였다고 투정을 부렸다. ‘오늘은 그냥 묵어라.’ 어머니가 달랬다. 나는 되레 밥을 헤적이던 숟가락으로 두레상 끄트머리를 탁 쳤다. 그때 어머니의 호통이 날아왔다.
“이날꺼정 저를 먹여 살려 논 걸 모리모 밥 묵을 자격이 없는 기라. 평생 지니고 소중하게 간수해야 되는 명줄이여. 명줄. 야한테 아무도 뭐 주면 안 된대이.”
서럽다고 훌쩍이는 나를 보며 언니, 오빠에게 엄포를 놓았다. 다음날, 아침 밥상에 내 숟가락이 없었다. 나는 골을 내며 학교로 갔다. 저녁에도 없어진 내 숟가락을 찾는 나를, 어머니는 말없이 정지간으로 앞세워 갔다. 두 손에 숟가락을 맞잡아 들려놓고 살강 앞에 한참을 꿇어 앉혔다. 정지문 틈으로 후루룩 짭짭 맛있는 소리와 유리창 너머 어머니의 눈빛이 엄했다. 멸치 똥 같은 밤. 알전구의 붉은빛에 숟가락이 내려앉았다.
“바짝 높이 올리거라.”
들던 숟가락을 놓았다.
“낯설고 물 선 곳에 너 혼자 내 보낼 수 없으니 그리 알아라.”
아버지는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이 타지라는 이유로 허락지 않았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으로 시위했다. 언니가 ‘니 굶으면 에나로 죽는기다. 어서 문 열어봐라.’ 나는 귀를 막고 눈도 감았다. 오기로 버티다 열병이 나 온몸이 불덩이로 달아올랐다. 사흘째 저녁, 문짝 떼는 소리에 정신마저 놓았다.
“야야, 니가 아부지를 우찌 이기것노. 일어나 봐라.”
어머니는 찬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며 낼로 봐서라도 한 숟갈만 먹으라며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소반에 멀건 죽 한 그릇, 간장 종지가 아버지를 피해 윗목에 들어왔다. 나는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거봐라. 니 눈물은 내리 와야 되고, 이 숟가락은 올라가야 산다 아이가. 묵는 게 제일 중한기라.”
어머니는 내 등을 토닥거렸다.
결혼 혼수에 은수저 한 벌이 들었다. ‘복’과 ‘수’를 새겨 넣었으니 항상 염두에 두고 잘 간수하라 일렀다. 늘 맑은 빛이 나야 집안이 환하다고 당부했다. 살림을 났지만 어머니는 딸네 집에 오지 않았다. 가까이 사는 탓도 있었지만, 일이 있으면 친정으로 불러 들였다. 따뜻한 밥을 차려 주면서 때를 거르지 마라며 당부하고는 은수저의 행색을 묻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무렵, 느닷없이 지나던 길이라며 들렀다. 황급히 미역국을 끓여서 점심상을 차렸다.
“지금 너거 집에 무슨 일이 있나.”
갑작스런 물음이었다. 나는 잘못하다 들킨 아이가 되어 “아니예.”라고 했다. 사실 풀리지 않는 문제로 속을 끓이던 참이었다. 어머니는 몇 술 뜨던 은수저를 들어 내 눈앞에 보이다 식탁에 엎어 놓으며 말했다.
“나는 잘 모린다, 그런데 야가 니가 마음을 더 크게, 요래 덮어주모 사는거는 암시랑타 쿠거만.”
점심상을 물린 후, 볕바른 마루 끝에 앉아 은수저를 윤이 나게 문지르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야야. 요 옴팡한 데다 밥만 얹는 기 아이다. 꽃도, 세월도, 너른 하늘도 척 걸쳐서 편케 살아라.”
어머니가 입원을 하셨다. 병원에서는 그냥 검사나 한번 해 보고, 조여대는 심장을 다스려 일주일 있다가 퇴원하라 했다. 혼자 화장실을 다니고, 당신 손으로 식사를 했다. 그 사이 심장이 더 나빠졌다. 한 달이 지나면서 속이 더부룩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밥이 죽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더 지나니 숟가락이 무겁다고 했다. 옻칠한 나무 숟가락으로 바꾸었다. 이젠 미음도 먹기를 거부했다. 한 입 멀건 물도 입안에 물고 있었다. 제발 한 숟가락만, 한 번만 넘겨야 된다고 애원을 했건만, 손을 내저었다. 그게 먼 길 가는 인사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제 몸을 내 준 빈 숟가락으로 산자락을 엎고 가셨다.
어머니는 닳고 닳은 숟가락이다. 어두운 질곡 속에서도 뜨거운 정을 퍼 올리던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숟가락. 그 옴팡진 안식은 내 목숨과 생의 복록을 선물했다.
“맛나게 먹고 간다.”
곶감 하나, 어머니가 내 손에 잡혀준다. 제사상을 물린다. 창 밖에 먼 들길이 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