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눈길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아내가 미국을 다녀오는 길에 재봉틀을 사왔다. 웬 재봉틀이냐고 했더니 한국보다 많이 싸기도 했지만 며늘아기가 교회 아카데미에서 옷 리폼 수강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배우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30여년의 직장생활을 접었으니 시간적 여유도 조금은 생길 것 같아 취미로 배워 손녀들 옷도 만들어주고 싶나보다. 재봉틀이라고 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싸아해 진다. 그래서 가져온 재봉틀 포장을 바로 뜯어보니 미국은 우리와 전압 체계가 달라 그냥 사용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해서 아내가 외출한 다음 날 변압기를 사다 당장이라도 쓸 수 있도록 장치를 해 주었다. 한데 금방이라도 시작할 것처럼 하더니 재봉틀은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만져볼 생각조차 않는다. “아니 당장에 할 것처럼 하더니 해보기도 전에 싫증부터 난 건가?” 내 핀잔에도 아랑곳 않고 마냥 여유롭기만 하다. 어머니의 유품에 싱가 미싱이 있는데 광주에 사시는 막내 이모님이 보관하고 계신다. 육십년도 넘은 물건이다. 지금도 사용이 가능할런 지는 모르겠으나 이모님은 유일한 내 어머니의 물건이라고 혹여 내가 가져가겠다고 할지 모른다며 이날토록 보관하고 계시단다. 나도 마음이 있으면 그걸 가져오면 될 텐데 쓸 일이 없기도 했지만 이모님 댁에 그렇게 있다는 것이 더 위안이 되고 안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는 베도 잘 짜셔서 인근에 소문이 났었지만 손바느질도 잘 하셨고 재봉질도 잘 하셨다고 한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어머니는 손재주가 좋으셨던가 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여성들이 갖고 싶은 목록 1위는 단연 '미싱'으로 불렸던 재봉틀이었다. 특히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던 '싱가 미싱'은 가히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막내 이모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시집을 갔다. 이모 역시 싱가 미싱을 혼수로 가져가고 싶었을 테지만 형편은 그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언니가 쓰던 것이어도 가져가고 싶었겠지만 완고하신 외할아버지께서 내 어머니가 쓰던 것을 이모가 가져가도록 허락하실 리도 만무다. 재봉틀은 의자를 놓고 앉아 발로 굴러 피대를 통해 동작이 되는 발재봉틀이었다. 그걸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가 가끔씩 쓰셨는데 나중엔 자리만 많이 차지하고 불편하다며 다리 부분을 없애고 앉아서 할 수 있게 개조를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할머니의 눈이 어두워져 재봉틀 바늘에 실을 끼울 수가 없게 되자 구석으로 밀쳐놓게 되었고 그걸 이모가 가져갔던 것 같다. 들은 얘기로는 어머니의 성격이 여간 깐깐한 게 아녔나보다. 해서 당신의 물건을 동생이라도 손을 댔다간 크게 혼이 났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집 갈 나이의 처녀로 언니가 앉아 밟는 재봉틀에 얼마나 앉아보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바깥출입이 거의 없는 어머니였기에 이모가 재봉틀에 앉아볼 기회는 더욱 없었을 것이다. 나는 방학이면 가끔 이모댁에 놀러갔다. 그러나 이모가 쓰던 그 재봉틀이 어머니가 쓰던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고 사실 남자이고 보니 더욱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핸가 이모가 “이 재봉틀은 네 엄마가 쓰던 것인데 할머니가 안 쓰셔서 내가 가져다 쓴다만 이젠 자꾸 고장이 난다.” 하셨다. 사람도 세월엔 장사가 없다는데 하물며 기계인데 오래 쓰면 고장 나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이모부의 손만 가면 또 얼마간은 멀쩡하게 잘 된다 했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재봉질을 하며 앉아있는 이모의 모습에서 얼핏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것 같다. 그리고 재봉질에 몰두하고 있는 이모의 눈길에서 어머니의 눈도 본 것 같다. 틈만 나면 재봉틀에 앉기를 좋아 하셨다는 어머니는 내 형의 산후조리에 실패해 불편해진 다리 때문에 재봉질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큰 낙이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어머니는 무엇 하나 함부로 하는 게 없었다고 한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했고 하는 것마다 누가 봐도 놀랄 만큼 마음에 들도록 해냈다고 한다. 재봉틀을 보자 이상하게 마음의 동요가 일고 서둘러 쓸 수 있도록 손을 봐 준 것도 어쩌면 이모님의 재봉질에서 어머니를 보았던 것처럼 아내가 재봉질을 하는 모습에서 옛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한 편 생각하니 이모님 댁에 있는 싱거 미싱을 가져올 길이 더욱 멀어진 것 같아 죄스럽기만 하다. 가져와 봐야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것 외에 옛 물건이라는 장식용 임무나 더해질 텐데 이 새 재봉틀로 인해 그 자리마저 쉽지 않을 것 같아 씁쓸해 진다. 어느 해였던가. 할머니는 그 재봉틀로 모시 반바지를 만들어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시원하고 멋스럽기 이를 데 없는 것이련만 어린 내게는 그게 어찌나 창피하고 싫었던지 할머니께 입지 않겠다고 떼를 마구 썼었다. 사실 그 모시 베도 어머니의 유품이었을 게다. 할머니께선 한 여름 시원하게 입히려는 뜻도 있으셨겠지만 제 어미가 짠 베로 제 어미가 쓰던 재봉틀로 만든 옷을 입혀보고 싶으셨을 것 같다. 그런데 난 그런 뜻을 모르고 남들은 사서 입는데 나만 만들어 입힌다고 투정만 냈다. 모시바지가 시원하긴 해도 편한 건 아니었다. 특히 빳빳이 풀을 매겨 다림질을 한 것이라 살갗에 닿으면 쓰라리기도 했었다. 어른들이야 조심스럽게 입으니 시원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이라 얼마나 부삽하게 뛰어노는 때인가. 한나절만 입어도 접힘 자국이 많이 생겨 더 입을 수 없게 되곤 했다. 거기다 흰색도 아니고 누런빛이 나는 그 색깔도 싫었다. 그걸 두 개나 만들어 번갈아 입게 하셨으니 어린 내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그 해 여름은 모시 반바지로 인해 정말 길고도 힘들었다. 지난 것은 하나같이 그리움이 된다. 몇 해 전 여름 아내가 칠 부쯤 되는 모시 파자마를 하나 사왔었다. 집에서 시원하게 입으라는 것이었다. 보니 모시 같기는 한데 화학섬유가 섞인 모양만 모시인 짝퉁이다. 그런데도 아내가 고마웠다. 그 해 여름은 집에 오면 그걸 실내복으로 입었는데 주물주물 빨아 툭툭 털어 널면 금방 마르기도 하여 계절 내내 입었던 것 같다. 그 또한 어린 날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모시 반바지에 대한 속죄와 그리움이 작용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아내는 언제쯤 재봉틀을 사용할까. 아내는 재봉틀로 무얼 처음 만들어 낼까. 그러나 내겐 무엇을 만들건, 잘 만들건 못 만들건 그것보단 재봉틀 앞에 언제 아내가 앉을 것인가가 더 기다려진다. 앉아 있는 아내의 모습에서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재봉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눈길을 보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내 아이들은 내 눈을 많이 닮았다는데 내 눈도 어머니의 눈을 닮았을까. 그렇다면 시집 간 딸아이의 눈에서 어머니의 눈길이나 모습을 찾는 게 더 쉬울 텐데 왜 아내에게서 일까. 아내의 새 재봉틀을 보는 내 마음 한 편에선 이모님 댁에 있는 어머니의 유품 그 재봉틀 앞에 아내가 앉아있는 모습을 더 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일 것 같다. 잘만 하면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딸에 이제 손녀까지 보았으니 5대가 재봉틀 한 대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한 핏줄이니 어디에서도 내겐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의 눈길이 느껴질 것 같은데 말이다. <현대수필> 2010년 여름호 특집 계절에세이 최원현 http://essaykorea,net 《한국수필》에 수필, 《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수필문우회원.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사)한국수필가협회 연수원장·공영이사, 한국수필작가회장(역임). 강남문인협회 수석부회장. 크리스천문협 수필분과회장, 수필문학진흥회 이사. 수필세계․좋은문학․건강과생명 편집위원. 허균문학상․서울문예상․한국수필문학상. 동포문학상대상.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문학에게 길을 묻다> <행복이 사는 곳> 등 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