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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제1독서 : 창세 18,1-10ㄴ
제2독서 : 콜로 1,24-28
복 음 : 루카 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 - 사랑의 방법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농민 주일입니다.
교회는 열심히 일하는 농민들의 피땀 흘리는 수고를 기억합니다.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의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오늘 복음인 루가복음 10장 38-42절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로 묵상을 나눕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남을 제대로 사랑한다는 것과 바르게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를 청합시다.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다니아라는 마을의 마르타의 집입니다.
평화로운 시골의 아담한 집을 상상하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사랑하는 친구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합니다.
라자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지금 그는 집에 없고 두 자매만 있나 봅니다.
두 자매가 똑같이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했지만,
주님께 사랑과 존경을 표시하고 섬기는 방법은 서로 달랐습니다.
마르타는 식사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를 본 마르타는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동생에게 직접 화를 내지는 않고 예수님께 대신 청하며
자신이 주님을 더 잘 모시고 있음을 은근히 드러냅니다.
‘주님,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작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귀 기울이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마르타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느껴지십니까?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계시지만 위로하고 달래는 목소리이기보다는
타이르고 잘못된 것을 깨닫게 하려는 목소리로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을 잘 대접해 드리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마르타가 자기식대로 예수님께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음식을 잘 대접해 드리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주님의 식사 준비에 정신없이 바쁘고 힘든데,
마리아는 부엌에 들어오지 않고 혼자 주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들으며
행복한 모습을 보이자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났고 또 그런 마리아를 지지하는 예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어쩌면 마르타의 불평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르타의 마음을 깊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르타도 마리아 못지않게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마르타는 손님으로 오신 예수께서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예수님께 잘해드리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마치 충고하는 듯이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원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마리아는 충분히 헤아려서 행하고 있는데 그것을 빼앗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생각할 때 항상 그 사람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마르타도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했습니다.
사람들을 자기중심대로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까이 지냈던 친구의 집에 들르신 것입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러 가는 길입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당신을 맡겨야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갈등을 헤아려야 했습니다.
인간이셨던 예수께서 겪으실 죽음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인간적인 외로움을 당신이 사랑하는 친구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 필요한 것은 진수성찬의 음식이 아니라
오롯이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여 주는 것이었지요.
그런 주님의 마음을 마리아는 충분히 헤아렸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힌 마르타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제 가만히 두 눈을 감으십시오. 잠시 고요 안에 머물면서 찬찬히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마리타와 마리아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모습입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섬길 때,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마르타의 모습에서 혹시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습니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베풀고 있지는 않는지요?
교만을 열정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지는 않는지요?
자기중심적으로 사람들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지요?
이웃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풀고 섬길 때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중심대로 겉으로 보여지는 사랑 대신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정으로 겸손하게 베푸는 모습을 지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섬김입니다.
예수님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어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겸손하게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겸손을 잃은 마르타를 향해 너 자신을 진정으로 알라고
따끔하게 이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겸손을 청하며 기도를 마치기로 해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잘 지내시죠? 어떻게 지내세요?” 등의 말로 묻곤 합니다.
이 물음에 “너무 잘 지내고 있죠. 아주 좋아요.”라고 답하시는 분도 있지만,
이렇게 대답하시는 분도 참 많습니다.
“요즘 너무 힘들어요. 마지못해 살고 있어요. 그저 그래요….”
이 둘의 표정을 비교하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다며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는 사람 대부분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사의 효과는 실험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 그룹은 감사한 일을 기록하고
다른 그룹은 골치 아프고 힘든 일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3주 뒤, 감사한 일을 기록했던 사람이 힘든 일을 기록한 사람보다
의욕이 충만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잠도 깊이 자는 것입니다.
또 감사한 일을 기록한 사람이 이웃을 향한 사랑 실천에서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결국 감사하는 사람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감사할 일을 찾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자기를 더 안 좋은 쪽으로 이끌 뿐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여기서 ‘모셔 들였다’라는 성경 구절은 그저 ‘손님을 대접한다’라는 정도의 뜻이 아니고,
‘주님을 모시고 모든 봉사를 한다’라는 신앙적인 뜻을 지닙니다.
즉, 마르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와 반대로 여동생 마리아는 명상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새기는 영성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 여성의 지위는 높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식적인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고,
오로지 가사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탈무드에서도 여성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을 볼 때,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을 보고서 그 누구도 좋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마르타가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질투의 마음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시선을 염두에 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딱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것들에 이것저것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경청하는 사람은 그만큼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선지가는 선을 쌓은 집안.
곧 일과성으로 그치는 선행이 아닌 생활의 가치가 선행(善行)을
실천에 옮기는 자세를 지닌 집안과 그 구성원의 행위를 뜻합니다.
필유여경은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곧 경사스러운 복(福)이 자신의 세대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결과를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의 선행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한 번만 선행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늘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사라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셨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번성하게 해 주셨고,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을 것입니다.
적선지가필유여경의 본보기를 경주 최부자의 가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경주의 최부자는 몇백 년 동안 부를 유지하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재물을 채우려고만 하지 않았고, 재물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의 며느리들은 시집오면 3년간은 무명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비록 부유할지라도 사치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흉년이 들면 곳간을 열어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소작인들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흉년에는 헐값에 땅을 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곡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땅은 농부들의 생명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을 베풀었기에 민란이 났을 때도
최부자 집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일본에게 넘어가 망하자 최부자 집은 재산을 처분해서 독립자금에 보태었다고 합니다.
나라가 독립되어야 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선을 베풀어 복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지금 강도당한 이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였고 그의 행위는 성경에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자캐오의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갑절로 갚겠다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는 집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선을 베풀어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선을 베풀고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선을 베푸는 것을 넘어,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환대의 축복
-사랑하라, 경청하라, 훈련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환대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좋습니다.
분도회의 정주서원과 직결된 환대의 영성입니다.
그래서 환대에 대한 강론도 참 많이 하면서
환대의 집인 수도원에 환대의 사람인 수도자라 많이도 강조했습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축복입니다.
따뜻한 환대의 추억은 길이 잊지 못하는 반면, 냉대의 상처 또한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규칙서에도 환대의 의무가 명시되고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성규53,1)
수도원은 문이 둘이 있어 앞문은 세상에 열려있고 뒷문은 사막에 열려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앞문을 통해서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고
뒷문을 통하여서는 하느님과 부단히 친교를 깊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주 서원을 살아가는 분도 회원들은 밖에 나가 선교하기보다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함으로의 존재론적 선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수도원은 선교의 장이 됨과 동시에 환대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환대의 영성은 비단 분도회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의 전통적 덕목이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환대의 정신이 살아 있어 신자 가정이라면
불시의 방문객을 위해 양초와 마른 빵과 담요를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환대는 역시 우리 민족의 전통적 덕목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라던 조선 사람들은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라 하여
손님 환대를 조상에게 제사 올리는 것처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한국식 전통 가옥에는 반드시 사랑방이 있어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였고
이는 제가 어렸을 때 수없이 목격한 일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손님을 맞이하고 면담 고백 성사를 주는
수도원 제 집무실은 수도원의 사랑방이기도 합니다.
東西古今,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던 참 아름다운 환대의 전통이
거의 사라진 작금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다시 환대의 영성, 환대의 정신을 회복해야 할 절박한 시절입니다.
예전 써놓고 자주 나눴던 ‘환대’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찌푸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 날이든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주차장 앞 코스모스꽃 무리들
피곤한 기색 전혀 없다
볼 때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지금도 곳곳에서 끊임없이 폈다지는 무수한 꽃들이
흡사 하느님의 환대를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축복입니다.
어떻게 하면 환대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겠는지 그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환대의 사랑입니다. 환대의 원조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입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모두 내게 오라 환대하시는 주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의 환대의 사랑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사제의 변화와 쇄신은 미사 거행하는 마음과 태도에 달려 있다 합니다.
참으로 주님 친히 환대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라면
본인은 물론 신자들에게 이보다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잠시 공동의 집인 지구에 머물다 가는 우리 모두는 순례자들이자 손님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환대의 은혜와 축복의 사랑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진짜 농민들은 환대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누구보다 잘 깨달아
하느님을 환대하고 섬기듯 땅도 농작물도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아마 가장 하느님 가까이 살아가는 하느님을 닮은 참 수행자가 농민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한결같이 사랑하고 환대하여
늘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꽃처럼 환한 얼굴로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환대의 모범이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를 환대하여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그리스도 안에서’ 날로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깊어 갈 때,
비로소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환대의 축복에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필수 전제 조건이 됩니다.
둘째, 경청입니다.
환대의 경청입니다. 참행복도 참기쁨도 환대의 경청, 관상의 경청에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경청을 사랑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가 환대의 모범입니다. 환대의 경청입니다.
내 식대로, 내 좋을 대로의 환대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환대입니다.
마르타 역시 환대의 사람이었지만 환대의 우선순위를 잊었습니다.
분별의 지혜가 부족했습니다. 우선적인 것이 환대의 경청입니다.
귀 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두 자매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흡사 관상가 마리아, 활동가 마르타의 대조 같습니다.
관상과 활동, 모두가 주님 사랑의 표현으로 우열의 관계이기보다는 상호보완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환대에도 우선순위가 있으니 우선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귀 기울여 경청하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환대의 경청, 관상의 경청에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미사도 말씀 전례 후에 성찬 전례가 있고,
수도원의 식당에서의 세 끼 식사에 앞서 성당에서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마르타를 사랑하고 계신 지 불평하는 마르타를 다독거리며
충고하시는 말씀을 통해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의 무지를 일깨우는, 영적 삶의 우선순위를 주지시키는
주님의 자비로운 충고 말씀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심중을 헤아려, 또 진리에 목말라
주님의 생명과 빛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는 경청을 선택하여
주님을 환대했고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삶의 중심과 질서가 잡힐 때
삶은 단순해져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지만,
관상의 경청이 사라질 때 끝없는 활동에 중독되어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삶으로
복잡하고 혼란한 삶중에 참나를 잃을 수 있습니다.
얻은 것은 소유인데 잃은 것은 존재라면 이보다 어리석고 허망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토마스 머튼은 단호히 현대판 이단은 ‘활동주의(activism)’라 말합니다.
셋째, 훈련입니다.
환대의 훈련, 경청의 훈련입니다. 평생 배우고 훈련해야 할 환대와 경청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환대와 경청에서 평생 학인이자 평생 훈련병입니다.
참으로 근면과 겸손의 덕이 요구되는 환대와 경청의 배움이요 훈련입니다.
주님의 환대는 좀 추상적이고 막연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환대하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이들은
보이는 사람들을 주님처럼 환대하며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 경청합니다.
정현종의 방문객이란 시는 늘 읽어도 공감하며 그 깊이에 감동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도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사람이 온다는 것이 참으로 어마어마한 일임은 주님께서 함께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사람을 통해 주님이 방문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정현종 시인은 이점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바로 이래서 환대와 경청의 훈련입니다.
우리의 직무는 섬김의 직무 하나라 했습니다.
막연한 주님의 섬김이 아니라 환대의 섬김, 경청의 섬김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마르타는 주님께 환대와 경청의 중요성을 잘 배워
큰 깨달음을 얻었음이 분명합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과연 환대의 달인이요 환대의 대가입니다.
그가 얼마나 환대와 경청이 잘 훈련되어 있는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지극 정성의 극진한 환대인지 사람들을 대접했는데
하느님과 두 천사들을 대접한 것입니다.
혹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계시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사람 환대가 바로 주님 환대에 직결되는 참 신비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환대의 축복입니다.
환대 자체가 이미 참행복의 축복인데 이에 더하여 주님은 축복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환대에 감격한 주님은 그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거라 말씀하시면 축복을 약속하니 말 그대로 환대의 축복입니다.
“내년 이 때에 내가 반드시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축복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환대의 영성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늘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이웃을 통한 주님 환대와 경청의 훈련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환대의 축복이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해 주시며
또 환대의 사람으로 우리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말씀은 제1독서의 아브라함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주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인 마르타와 마리아에 관한 일을 보여주면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손님 접대의 의무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이 손님 접대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주님의 모습 자체를 알아보도록 해야 한다는
신앙의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누구이든 간에
모두가 다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메시지 표지로 삼으신 그들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그네, 가난한 이, 굶주린 사람 등으로 나타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이는 단순히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 하나를 대접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느님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거나,
베타니아에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환대를,
카파르나움과 예리코에서 마태오와 자캐오의 환대를,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의 초대를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않으셨던
그리스도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사랑과 우정의 축제를 지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과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새로운 아브라함의 천막이 될 수 있고, 또한 진실한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바로 그분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새로운 베타니아의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는 정성과 사랑으로 가득 찬 나그네 대접의 표본이 되고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보이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두 자매의 서로 다른 태도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자매는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그분께 자신들의 사랑을 바쳐드리고자 한다.
마르타에게 중요했던 것은 갑작스럽게 오신 주님께 훌륭한 식사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도와주지 않는 것이 짜증이 났다.
그래서 주님께 제 뜻을 거들어 달라고 청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40절)
그러나 마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으로 자신을 풍요롭게 채우는 것이었다.
그분이 찾아오시는 것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순종하는 자세로 진리와 사랑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말에 마리아를 옹호해 주신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절)
“필요한 것은 한 가지”(42절),
예수님을 통해서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되면 식사나 음식은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그가 선택한 것은 상해버리거나 없어져 버리지 않는 그러한 몫을 택한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완성될 실체이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주님을 맞아들이는 데 두 자매의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보완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마르타의 잘못은 주님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데 몰두한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41절) 하여 그 일의 결과를 돌려드려야 할 대상인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떨어지기 쉬운 위험은 행동주의에 빠져
“내 활동이 모두 기도다.” 하면서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자기 자신만 찾게 된다.
반면에 오직 귀 기울여 들으려는 자세와 자신을 비울 수 있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내용과 가치 있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마르타는 스승의 메시지를 우선 내면 깊숙이에 새겨듣는 제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분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분을 알리고 그분을 특별한 상황에 있는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안에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마르타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려면 더 깊은 관상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42절)임을 알게 되면 쓸데없는 일들에 시간을 덜 낭비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예수님께서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신다는 사실을 알아,
그분으로 자신을 채울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습을 닮고 그 모습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통해 그분도 채워드려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도 주님의 뜻을 헤아려
우리가 그분으로 채우는 동시에 그분의 모습인 우리 이웃들을 통하여
그분의 배고프심과 목마르심을 채워드리는 손님 접대, 이웃 사랑의 삶이 되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청하며 살아가도록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를 예수님이 방문하신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분주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마리아가 자기를 돕도록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냐,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오빠인 라자로가
예루살렘 근방 베타니아에 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복음서들은 그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이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 체험입니다.
복음서는 초기 그리스도 신앙 체험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꾸미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으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복음서는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들은 이야기 안에 잠시 등장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체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사라집니다.
그들은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도 그리스도 신앙 체험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무대에 올라온 두 인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두 자매는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그 갈등을 해결해 달라고 예수님에게 청합니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분주한 언니를 돕지 않고,
예수님 앞에만 앉아 있는 동생 마리아를 마르타가 예수님에게 비난하였다면,
그들의 갈등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르타가 청한대로 마리아를 타일러 두 자매를 화해시켜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르타가 많은 일 때문에 부산을 떨고 있지만,
마리아는 필요한 한 가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셔서
자매간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지혜나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신통력이
그분에게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현명하게 살기 위한 지혜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르친 예수님은 유대교 실세들의 마음을 받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마르타와 같이 우리는 여러 가지 세상일을 염려하고 바쁘게 살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가장 좋은 몫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는 우리가 해석해서 알아들어야 하는 옛날 문서입니다.
인간의 말은 시대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람들은 오늘의 복음을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도 생활보다는
觀想하는 수도 생활을 예수님이 더 높이 평가하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마르타는 사도직에 종사하는 소위 활동 수도자들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아 있는 마리아는 관상 수도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보이는 이웃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몸을 움직이는 노동보다는 앉아서 고요히 하는 관상을 한 차원 더 높은 것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세상을 위한 사도직 보다는 하느님을 관상하는 수도자들이 더 돋보이는 시대였습니다.
옛날 세상에서 중대한 일은 모두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결정하였습니다.
황제나 왕은 일반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사람들은 戰禍에 휘말렸습니다.
그들이 세금징수를 결정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여건은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눈 감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이웃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보이는 이웃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맞아들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수도원 밖의 세상이 난폭하고 비인간적이었던 유럽 중세 사회에서
수도자들은 세상과 결별하고 수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세상을 외면하면,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관상이 활동보다 우월하고, 앉아서 일하는 선비가
농사짓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그런 것의 우열을 논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 다양할 뿐입니다.
오늘은 사람이 세상을 외면하여 자기를 성취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정보를 받아 일하고,
세상을 위해 헌신하면서 사람답게 삽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외면하고 하느님만을 생각하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행하신”(사도 10,38) 분으로 제자들이 기억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3,35)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권합니다.
세상의 잡다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권합니다.
교회도 옛날 유럽 중세 사회에서 얻은 사고방식,
곧 서열을 중요시하고, 신분에 따른 권위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다교라는 과거의 사고방식이 만들어 놓은 우월감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起源이시며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행적에서 그 은혜로움을 알아듣고,
이웃을 위해 은혜로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나라와는 다릅니다. 우리나라에는 차별과 서열과 우월감이 있습니다.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관상하는 사람과 활동하는 사람,
우리는 그런 차별들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우리의 나라에 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차별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며 극복하고,
섬김으로 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