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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상실은, 때로는 우리 안의 더 큰 세계를 열어준다. 지붕의 콘크리트 기와가 들썩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빛이 어렴풋하게 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셔텨를 열고 내다보니 나무 우듬지들이 우악스런 손아귀에 잡힌 머리채처럼 마구 휘둘리고 있었다. 투닥- 투닥- 무언가가 떨어지고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산타나 윈드였다.
건조한 사막을 거쳐 불어오는 동풍 산타나는 사막만큼이나 메마르고 잔혹하다. 바람 날 끝이 얼굴에 닿기만 해도 피부가 바싹거리고 입속까지 말라버린다. ‘이런 날엔 제발 불이 나지 않아야 될 텐데’하는 불안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나 어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지나 않은지, 재 냄새가 나지 않는지 마당에 나가 하늘을 살폈다. 그때까지는 하늘은 푸르고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각, 북쪽에서는 이미 산불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한 시간쯤 운전해 가면 있는 퍼시픽 펠리세이즈 동네가 불타는 장면이 TV에 나왔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곳은 내 고등학교 동기동창 친구가 사는 동네였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름다운 저택들이 불소시게처럼 순식간에 타서 허물어지고 있었다. 시뻘건 불길은 바람을 타고 이집에서 저 집으로 미친 듯이 훌쩍훌쩍 뛰어다니며 타올랐다.
항상 물 부족으로 시달리는 남 가주, 특히 로스엔젤러스는 날뛰는 화마를 무기력하게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한두 채도 아닌 수많은 집들이 한꺼번에 타는 그 상황에서는 설사 물이 있다고 한들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틀 동안 계속된 불바다의 결과는 처참했다. 천 가구가 넘는 주민들이 불시에 보금자리를 잃었다.
“차를 타고 동네를 빠져 나오는데 길 양쪽에서 집들이 불에 타고 있더라. 무시무시했어. 바로 여기가 지옥이구나 싶더라” 간신히 불을 피했다는 동기친구로부터 온 소식이었다. 그래도 그 친구는 다행히 차를 타고 빠져나왔지만, 많은 주민들은 도로가 막혀 차를 길에 새워둔 채 버리고 맨몸으로 뛰어서 불길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한 고등학교 후배는 이미 집이 전소되었다고 전하며 “불덩어리가 마치 화살로 쏜 것처럼 날아다녔다” 고 했다.
가족이나 친지가 없는 주민들은 호텔이나 공공기관에서 마련한 대피 처로 향했다. 사회 단체, 신문사, 교회 등에서도 주거할 곳을 제공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우리 고등학교 동창회에서도 단체카톡방을 통해 신속하게 모금을 해서 신문사에 전달했다.
며칠 후, 마침내 진화가 된 지역으로 주민들이 돌아가도 안전하다는 발표가 티비에서 들려왔다. 잿더미가 된 집터를 뒤지던 한 여인이 티비 기자에게 활짝 웃는 얼굴로 뭔가를 내밀었다. 불에 거슬리고 재가 묻었지만 형체가 분명한 도자기 나비였다. 자기가 만든 것을 찾았다며 기뻐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결연한 얼굴로 “집을 다시 지을 거예요. 우리의 추억이 담긴 보금자리를 다시 만들어갈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폐허가 된 집터를 서성거리던 이웃들이 군데군데 옹기종기 모여 반갑게 껴안고 위로하며 등을 토닥였다. 잿더미에서 찾아낸 정원일 손 삽이나 깨어진 화분, 누렇게 타버린 종이가 말려 올라 너덜너덜해진 책등을 서로에게 보여주며 웃음꽃을 피웠다.
너무나 큰 상실을 겪고도 꿋꿋하게 서있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한 다발의 꽃이 되어 가슴으로 다가왔다. 그 꽃은 화마도 태워버릴 수 없는 꽃,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끈질긴 생명력이자, 삶에 대한 끝없는 믿음이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꽃, 잿더미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고 일어서려는 의지의 표징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아름다운 저항이자 삶에 대한 경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동기동창 친구는 화재동안의 전전긍긍하던 시간을 끝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해 와서 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에 더해, 집이 전소된 동창은 안도를 넘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뒷마당에 조그만 채소밭도 있는 집을 구했다고 했다. 아무도 원망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고 있는 지혜로운 한국의 딸, 화마도 꺾을 수 없는 튼실한 줄기와 향기를 가진 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