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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혁명과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나 (Ⅰ)
李 秉 華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농경영학ㆍ경제학 박사
(2013. 8. 16.)
지난 8월 7일 김동태 前농림부 장관과 모처럼 만나 차 한 잔을 나누었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을 뒤덮을 때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아 새마을 운동을 진두지휘하고 이론을 정립했던 박진환 경제특보님을 김동태 장관은 4년, 필자는 만 8년을 뫼셨습니다.
이날 김 장관께서는 저에게 “박 특보님도 고령이시고, 당시 새마을 운동에 관여했던 관계 인사들도 고령으로 한 분, 두 분 저 세상으로 떠나시고 하니, 김해 출신인 당신이 왜 박 대통령과 박 특보를 뫼시고 경기도 지역에서 백색혁명인 비닐하우스 농업을 지도 공급했으며, 중단 되었던 주한 미 8군 농산물 납품을 재가동 시켰는지, 또 새마을 1호 주택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왜 지키고 있는지 등과 신갈농민학교는 무슨 일로 시작되었으며, 1987년 전두환 정권에는 왜 넘겨주었는지 등 모든 역사적인 내용의 기록을 남겨야 되지 않겠느냐? 꼭 기록하여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백색혁명(비닐하우스 농사)의 진원지인 김해에서 태어나다
백색혁명의 시작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된 후 미군 전투병력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한국산 채소류를 구매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공업용 비닐 필름조각으로 묘종상을 만들고, 소형터널도 만들어 토마토와 오이를 영리 재배한 원예 선구자는 김해의 박해수(朴海洙) 선생과 마산의 여대기(余大基) 선생 두 분뿐 이었는데, 박 선생은 훗날 제1회 5.16민족상을 받으셨고, 여 선생은 <토마토 재배기술>이라는 책을 만들어 농민들을 선도 하였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두 분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았는데, 이들보다 배운게 적어 남에게 기술전수는 못하고 오로지 농사에만 매진했습니다.
1957년 처음으로 락희상사(LG그룹의 전신)가 폭 1.8m, 길이 99m의 농업용 필름을 생산했고 본격 비닐하우스 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그린-빈스(풋강남콩)’를 재배하여 부산 흥아해운의 정기화물선 <부산↔시모노세키> 연락선편에 위탁판매를 시작으로 일본 수출창구를 개설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이른 새벽길 두 번째로 많은 물량의 토마토를 비닐하우스 속에서 수확한 부친은 김해공병학교에서 불하받은 화물차로 개조한 3/4톤 스리쿼터를 한 달간 용차하기로 하고 그 차에 상자당 12관(45kg)이 들어가는 토마토를 27개 박스를 싣고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부산중앙도매시장 경매장에 팔려고 갔으나 3일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네 애비가 토마토를 잘 판 모양이다. 그 돈으로 기생집, 요리집을 돌아다니다가 돈 떨어지면 집에 오겠지”라고 하였는데, 그 날 부친은 부산입구 가야 고갯길에서 혁명군에게 붙들려 불법개조한 군용차 차주라는 누명과 함께 싣고 간 토마토를 몽땅 혁명군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당시 토마토는 순수 우리말로 ‘일년감’이라고 불렸는데, 고급 요리집에만 등장하는 불요불급의 사치품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비타민이 풍부한 소득 높은 농산물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3일후 아버지는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고, 사치품인 토마토는 한동안 혁명정부는 거래를 중단시키는 바람에 익어가는 토마토는 팔지 못하여 지나가는 동네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부친을 대신하여 토마토 비닐하우스에 압력충진형 분무기로 농약을 뿌리다가 폭발하여 5m 바깥으로 튕겨나가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한나절이 훨씬 지나 깨어나 보니 할머니는 은하사(銀河寺)절에 스님을 불러 손자가 죽었다고 광목으로 차양을 치고 초상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이웃마을 처녀는 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저는 갈비뼈 7개가 금이 가고 심장을 크게 다쳐 한 달간 큰 병원에서 요양을 한 후, 혁명정부 요체인 국가재건회의 박정희 의장 앞으로 장문의 항의 편지를 등기로 보냈습니다. 보름 후에 저는 혁명정부 부산ㆍ경남지역 위수사령부가 있는 부산 대신동 소재 상무대로부터 호출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부친이 당한 피해보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혁명정부의 주선으로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 원예과에 비록 청강생이었지만 근로장학생으로 등록시켜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혁명정부가 건국대 설립자이고 대학총장이신 유석창 박사에게 부탁한 결과라는 사실을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 김해지역은 1960년대에 이미 새마을을 실천했다
1966년 10월 24일, 저는 비무장지대 내 영농부대에서 북파공작원의 안내조 임무를 수행한 공적으로 생명수당 대신 복무단축 혜택을 받고 입대 전우들과는 달리 만24개월을 복무하고 제대했습니다.
그 해 겨울 김해중심부와 우리 동네인 삼방동(三芳洞)에 태권도(당시에는 ‘당수도’라고 했음) 도장을 2개나 개관하여 약간의 용돈을 충당하고 있었습니다. 다음해인 1967년 가을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와 신정을 겨냥한 토마토 재배에 도전했습니다. 일본에서 건너온 비닐하우스 관련 원예서적에서 무사시노(武藏野) 종묘사의 <보관2호> 토마토 종자로 겨울 재배를 성공한 일본 독농가의 기사를 보고 저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큰돈도 벌었습니다.
저는 그 돈으로 1968년 생애 처음으로 기아산업과 일본 마쓰타 회사에서 공동 생산한 2톤 삼륜차를 구입했습니다. 이 사실은 KBS 등 중앙언론에 “젊은 농민이 고등채소 재배성공으로 자동차도 사고 서양채소를 일본에 수출도 한다”라는 내용으로 보도되었습니다.
내친 김에 자동차를 한 대 더 구입하여 동네 꾸미기를 시작했습니다. 돌담골목길 자연석은 전부 부산에 실어다 팔고, 대신 벽돌과 시멘트 블록을 가져와 새 단장을 하고 전기와 전화도 넣고 골목길 시멘트 포장도 했는데, 이끼 낀 자연석을 판매한 돈으로 모든 것이 커버되었습니다. 또한 저희 집에 제일 먼저 TV와 전기를 넣었습니다.
겨울철 김해평야는 그야말로 은색비닐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저는 차 2대를 이용하여 3백여 가구의 농가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위탁받아 책임지고, 출하ㆍ판매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농가들에게 농산물을 수확하여 버스정류소처럼 동네 한 곳에 모아 두게 하였고, 태권도 도장 관원들을 동원하여 도난 당하지 않게 철저히 보초를 서게 했습니다. 요즘의 농협공동출하를 저는 1968년도에 이미 시작했습니다. 부산에서 빈 차로 올라올 때에는 연탄을 싣고 와서 집집마다 원가로 팔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소문이 나면서 원예농업 선구자들을 만나려 김해지역 비닐하우스 농장을 방문하신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양상추와 샐러리를 싣고 미 8군 납품을 가려고 핸들을 잡고 있는 저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날 저는 영광이라고 하루종일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이즈음 한ㆍ미 정례훈련인 <포커스-레티나>작전 참석차 방한한 미 태평양지구 사령관을 안내하던 박 대통령께서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김해평야의 비닐하우스 군(群)을 보고 공장으로 착각한 사령관에게 “저 비닐하우스 속에서 자라는 농작물을 한국 주둔 미 장병들과 이번 작전에 참여한 모든 장병들도 먹는다”면서, “농한기를 이용한 고등채소 재배로 부자마을이 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1970년도 전후 김해평야의 비닐하우스는 김해읍, 대저면, 가락면, 장유면, 진영읍, 대동면 등에 3,100여 동(1동은 약 100평)이 가을에 벼 수확 이후 대나무로 만들어졌다가 이듬해 6월말이면 철거되곤 했습니다.
한편, 전라북도 조병규 부지사(훗날 경기지사와 경남지사를 재임함)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면서 전주시 인근 마을도 김해와 같은 비닐하우스 농촌을 만들기 위해 젊은 미혼 청년 11명을 대동하고 우리 농장에 나타났습니다. 의논결과 작물별 지역농장에 각각 배치하고 저녁에는 저희 집 차량으로 전부 소집하여 2개월 동안 비닐하우스에 임시 교실을 만들고 원예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공부보다 연애에 더 관심을 가져 추궁해 본 결과, “비닐하우스 농사짓는 신진 농가집 처녀를 데리고 와 결혼하면 영농자금과 혼례비용을 도지사가 전부 부담하기로 했다”고 하면서 오히려 중매 주선을 부탁했습니다. 그후 이들 중 5명은 연애 끝에 김해 아가씨와 결혼했고, 이후 전주시 인근의 용진과 삼례 등이 원예단지로 부상했습니다.
● 소득과 절약을 동시에 안겨준 백색혁명은 새마을 운동의 시작이었다
1971년 가을 고향 선영에서 시제(時祭)를 지내고 산을 내려오면서 형님되시는 농림부 이득용 차관이 뜸금없이 “박정희 대통령 뫼시는 자리가 하나 생기는데 네가 가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얼마전 박진환 특보를 만났더니 박 대통령께서 중부 이북지역에 김해처럼 비닐하우스 농사기술을 공급하여 농사소득을 올리면 좋겠는데, 농진청 공무원들보다는 실제로 김해출신 원예기술자를 선발하여 대통령과 같이 파종부터 수확과 판매까지 전과정을 확인ㆍ분석하는 시범농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생산한 채소류를 직접 잡수시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하면서 ‘네가 가장 적임자’라고 판단하고 추천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주먹도 세고, 운전도 잘하고, 군대경력도 특별하고, 서양채소 최고 재배기술자에 주한 미8군 납품도 잘하고 있으니 제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972년 1월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고매리에 있는 산림청 임업육종연구소 토지 5,400평을 사용료를 지불 조건으로 임차후 개간하면서 박진환 특보님을 처음 만났고, 비닐하우스를 짓고 원예시험장에서 육묘한 양상추, 적채, 샐러리 등을 본포에 옮겨 심는 2월에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또 5월에는 육영수 여사님과 당시 대학생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농장을 방문했습니다. 저를 따라 같이 온 보조기술자 2명과 같이 그해 봄 작물로 재배한 브로컬리, 콜리플라워, 레디쉬, 파슬리, 샐러리, 피망, 헨넬, 콜라비 등은 용산 미8군 PX와 장교클럽에 달러결제 납품을 했고, 남은 물량으로 당시 한국 최초의 외국인 전용 슈퍼인 한남체인에 유통시켰습니다. 박 대통령께서는 서양채소가 높은 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알고 계셔도 막상 잡수시는 것은 우리 재래 농산물인 아욱, 근대, 호박잎, 쇠비름, 질경이 등을 주문하여 저는 농장에서 재배도 하였지만 들판에서 채취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김종필 국무총리께서 주말에 벤츠 승용차를 직접 몰고 혼자 농장을 찾아오셨습니다. “자네들이 만약에 유리온실용 머스크멜론인 얼스 계통을 비닐하우스인 이곳에서 당도 13도 이상으로 재배ㆍ생산한다면 진정 한국 최고의 기술자로 인정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총리께서는 미8군 PX에서 머스크멜론을 자주 구입한다면서 일본산이었다고 했습니다.
그해 크리스마스와 신정에 얼스계통 머스크멜론과 토마토, 수박, 적색 물고추, 딸기를 수확하여 기술을 자랑한다고 대통령께 올려 보냈더니, 이 추운 겨울에 누가 수박을 사먹는지 알아보라는 호통이 전달되었습니다. 반면에 김종필 총리에게도 대통령과 똑같이 보냈는데, 이것을 다시 미8군 사령관에게 전달하면서 “한국도 일본 이상으로 비닐하우스에서 청정재배를 하니, 미8군의 장병들에게 종전처럼 한국산 농산물이 납품되도록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하면서 빠른 시일내에 미8군 장성들에게 농장을 보여주자고 했습니다.
한 해전인 1971년 4월 27일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 김대중씨는 일본에서 “한국 농산물은 <옐로우존 : 황색 오염지대>에 해당되므로 주한미군이 먹는 것은 수치”라는 이상한 논리를 주장하여 새로 부임한 태평양지구 사령관은 상당 물량을 일본산으로 교체하였습니다.
1973년 3월 조병규 경기도 지사(1월에 전북에서 경기도로 영전했음)는 총리의 명을 받았다면서 미8군 사령관과 군수참모를 대동하고 헬기 2대를 나눠 타고 농장을 방문했습니다.
이들은 깨끗하게 꾸민 농장과 새마을 1호 주택과 지하수 수질검사 합격증 등을 확인한 후 일본산을 중지하고 한국산 농산물을 전량 주한미군에 납품하도록 조치해 주었습니다.
고향에서는 김해 사람이 독점하던 미군 납품을 전국으로 분산시켰다고 항의차 저희 농장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이때부터 대관령 고랭지 서양채소 재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해 4월 5일 식목일날, 식수행사를 끝내고 농장을 방문한 박 대통령께서는 “경기도 지역 논감자 재배도 작년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경기도를 비롯하여 추풍령 이북지역에 비닐하우스가 많이 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날 대통령께서 왜 그토록 비닐하우스 농사를 강조하셨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한 비닐하우스 농사는 소득도 중요하지만 추운 겨울동안 따뜻한 비닐하우스 속에서 일함으로써 노름판의 도박도 없어지고, 술 마시고 싸움하는 것도 없어지고, 방학을 이용한 자녀들도 열심히 부모님의 일손이 되는 가족 화목과 근검절약을 뿌리내리자는 의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마을이고, 이에 따라 근면ㆍ자조ㆍ협동이 새마을 운동의 근간이고 주념(主念)이라는 것을!
● 환금성 높은 서양채소 재배교육을 위한 새마을교육장으로 신갈농민학교를 개교하다
1974년 이른 봄, 한 해전에 서삼릉에 있는 농협대학 독농가연수원에서 행하던 새마을지도자 교육을 수원 농민회관으로 옮긴 후 전국민 새마을운동 참여 및 교육의 일환으로 새마을지도자와 환담하던 박 대통령께서는 새마을지도자들로부터 환금성(換金性)이 높은 서양채소(고등채소라고도 불렀음) 교육의 필요성을 권유 받고 곧장 농장으로 오셔서 소득을 전문으로 하는 새마을교육장을 만들어 볼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며칠 후인 4월 1일, 농장의 돼지사료창고를 개조하고, 인근에 있는 정보사령부 교육대에서 제공받은 간이 책걸상과 흑판으로 교실을 꾸미고 2층 침대 기숙사는 분임토의장을 활용하여 개교하였습니다.
대학진학을 하지 못한 농고생 졸업반과 군입대를 앞둔 농촌출신 장정과 해병대에서 제대 1개월을 앞두고 사고친 문제사병을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이외에 새마을지도자들은 마을단위로 단체 입교시켰습니다.
1976년 12월 10일,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때 새마을연수원의 김준 원장은 정신교육 공로로, 신갈농민학교장인 저는 소득증대교육 공로로, 각각 새마을 훈장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수여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 경회루의 기념만찬에서 담당 경호관은 “우리들은 각하의 명을 받고 이병화 교장과 부인이 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몰래 지켜보았다. 부인께서 50여명이나 되는 교육생들을 도우미 없이 혼자 밥과 반찬을 준비하는 것과 둘째 아기가 전봇대를 엄마 등으로 알고 자라는 것도 보았다. 이것을 영부인에게 보고하였더니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하면서, “영부인께서 살아계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오늘의 새마을 훈장은 그 동안의 노력에 대한 각하의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운영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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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동
개대중이는 한국산 먹지말고 일본산으로 먹으라고 주한미사령관한태 말했다고하니,,
개대중이 이 악마의 새끼가 한국의 대통령까지 ???
한심한 국민들~~
물론 영삼이의 작품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