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재옛길을 걸으며
조경진
그리 급하지 않은 때도 급한 것처럼 서두르게 되고 현재라는 시간에 매달려 허
덕이는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옛길을 찾는다 호젓한 옛길을 걷노라면 답
답하던 가슴이 후련해지고 마음이 편안해 진다. 어머니 젖내 같은 산 내음을 담뿍
맡으며 돌부리 초목이 발길을 붙드는 오솔길과 벗하는 정겨움이 있고, 내달리는
계곡물과 새들의 지저귐이 자유로운 곳이면 더욱 좋다 빠르고 편안한 새로운 길
에 역할을 물려주고 소임을 다한 흐믓함으로 유유자적하며 안식을 취하는 옛길이
내게 손짓을 한다.
옛길은 되바라지지 않고 어수룩하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 영광
과 비극의 역사가 시간의 주름 속에 잠들어 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며
길섶 하찮은 돌멩이 하나에도 발길의 역사가 녹아있는 옛길이 진정 사람을 위한
길이라 생각된다.
옛길은 오솔길에서 시작되고 맨 땅을 밟는 길이다 오솔길은 외롭고 호젓하다.
그래서 그 길은 외롭고 쓸쓸한 흔적이 발길에 묻어난다. 고산준령을 넘는 길이라
도 인공을 가해 길을 넓혀놓은, 그래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함께 걸을 수 있는 길
은 오솔길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 오솔길은 점차 사라지고 깊은 사색에 방해받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걸으며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참된 삶의 의미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오솔길이 흔치 않다. 문경 새재 옛길만 해도 그렇다 물막이와 확장공사
를 부자연스럽게 해서 옛 오솔길의 모습을 잃었으나 옛길의 모습을 찾으려 애쓴
자취가 남아 그런대로 마음의 여유와 운치를 갖게 한다.
새재의 명칭 유래를 문헌에서 찾아보면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 재와 이우리 재 사이 새로 된 고개 등의 뜻으로 새재라
는 이름이 지어졌다 새재의 다른 이름으로 조선 초에 편찬된 신 동국여지승람'에
는 조령으로 기록되어있고 예부터 영남과 한양을 잇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라- 57
해서 중부 내륙지방을 남북으로 잇는 역할을 하다가 이화령에서 수안보를 통하는
3번 국도가 개통된 후 기능을 잃고 사적지로 남게 되었다.
9월 하순의 숲길은 상쾌함 그대로이다 한 여름 산의 짙음이 조금 가시고 단풍
들기 전 간극의 빛깔이 좁은 어정쩡한 느낌을 주었으나 가끔 귓전을 울리는 이름
모를 새소리, 경쾌한 계곡물 소리가 가슴속을 터놓는다 솔바람이 가볍게 볼을 스
쳐가는 데도 괜스레 마음이 여려지고 왠지 모를 쓸쓸함 몇 백 년을 두고 가장
귀하고 영광스러운 때로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때로는 절망과 분노를 삼키며 수많
은 사람들이 오갔을 이 길에 서서 잠시 시간을 과거로 돌려놓고 상념에 잠겨본다.
새재 옛길에는 옛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유추해볼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 옛날
에는 3관문으로 이어지는 길에 길손들이 쉬어갈 주막이 있고 역과 원을 비롯하여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생계를 꾸리는 민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
아 꽤 번성한 듯싶다 그러나 지금은 성문과 관가 터, 마방의 흔적만 있을 뿐. 대
로를 곁에 끼고 옛길이란 푯말이 붙은 오솔길로 들어서 본다 한 사람의 발길만
허용할 뿐 나무뿌리가 들어난 대로 계곡의 물줄기가 하얗게 거품을 품는 오솔길
이다 대로를 지나는 사람들의 시끌 한 소음이 귀에 박히나 그런대로 호젓함을 맛
볼 수 있다. 돌부리를 차는 고역을 자초하다 목이 마른가 싶던 차에 주막 간판이
나타났다 겉모습은 옛것을 살리려 애쓴듯한데 전혀 볼품이 없다 그런대로 이 길
을 오가던 선비들의 흉내라도 내 볼 겸 주막 평상에 앉았다 술 한 잔 놓고 깊은
계곡을 바라보던 아내가 갑자기 신립장군 이야기를 꺼냈다 민간 야화로 회자되던
파랑새 얘기다 신립을 흠모하던 여인이 비정하게 돌아서서 가는 신립을 바라보며
자신을 불사르고 넋이 파랑새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녀의 원혼인 파랑새가 신립을
항시 따르다 임란 시 왜군의 북진을 새재에서 막지 않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
게 하여 전몰시켰다는 야화를 들려준다 사랑과 미움은 한 탯줄에서 태어난 쌍생
아로 한 여인의 사랑이 저주로 나타난 결과가 아니겠냐며 전례 없이 말이 많아졌
다 나는 그냥 허허 웃었다 신립장군의 허망한 전술과 애석한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흠을 가려주기 위한 민중들의 배려에서 그와 같은 야화를 만들지 않았겠는
가로 대꾸 했다 사실 나는 그때 내 젊은 날의 한 때를 떠올리며 과거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춘기를 지나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익어갈 무렵 꽤나 좋아하던 소녀가 있었
다 그녀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헤어짐이 예고된 것으로 가슴앓이를 하다가 한해가
막을 내리려는 11월 중순 둘만의 여행으로 문경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새재를 넘
어 헤어진 아린 추억이 있다. 그날의 날씨는 무척이나 음산하고 쌀쌀했다. 진눈깨
비가 내려 시린 가슴을 마구 파고들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고 아무도 없는 제2
관문을 지나면서부터 입에 침이 마르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이 시간에 꼭
해야 할 말을 서로가 잘 알면서도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입을 열면 울컥
울음부터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눈깨비가 볼을 타고 흘러 눈이 녹은
물인지 눈물인지 모른 채 새재를 넘었었다. 끝내는 잡았던 두 손을 놓고, 추억은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음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
하고 그 속에 아픈 상처가 남아 있더라도 시간은 색 바랜 쓸쓸함으로 녹여 꿈꾸
듯 흘려버리게 한다. 그래서 인생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주는가 보다.
동화원을 지나 고갯길 막바지에 이른다. 오후의 햇살을 비스듬히 받고 서있는
조령관이 다가선다. 산새도 넘기 힘들던 고개, 이화령이 국도로 닦이면서 더 이상
영남대로의 관문으로서 쓸모가 없어져 옛길로 돌아앉은 새재. 하지만 주흘관에서
조령관에 이르는 시오리 새재 길은 비록 옛날의 기능과 영화는 잃었지만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어우러진 역사 문화사적 가치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이제 새재 정상
을 넘는다. 지치는 길은 아니었는데 이마에 땀이 송골 맺는다 고개 마루 누각에
올라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드는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며 나도 자유인이 된다.
젊은 날의 추억도 신립장군의 파랑새 원혼도 고개 마루에 내려놓고 아내의 따뜻
한 손을 잡고 힘차게 팔을 흔들며 고갯길을 내려갔다. 새재 옛길을 걸으며 잠시
과거의 시간 속을 거닐다 돌아서서 멀리 펼쳐진 일상의 길로 발길을 내딛는다.
2005/22집
첫댓글 끝내는 잡았던 두 손을 놓고, 추억은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음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
하고 그 속에 아픈 상처가 남아 있더라도 시간은 색 바랜 쓸쓸함으로 녹여 꿈꾸
듯 흘려버리게 한다. 그래서 인생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주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