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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코헬렛의 말씀 11,9―12,8
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10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12,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3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들은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잃는다.
4 길로 난 맞미닫이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줄어든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노랫소리는 모두 희미해진다.
5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8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루카 9,44)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9,45 참조).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라는 말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순명’, ‘순종’을 표현할 때, 구약성경은 히브리 단어 ‘쉐마’를 사용하는데, 이는 단순히 청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는 것보다, 말씀하시는 분의 명을 ‘마음의 귀에 담아 행동에 옮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
(신명 28,1)
그래서 말씀은 ‘믿음의 순명’과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 본문이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알아듣기 어려운 성경본문을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장애라고 여겼던 대목들이 실로 크고 거룩한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필로칼리아)
또한 사막의 마카리오는 역시 믿음으로 먼저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십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 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이 아니면>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코헬 11,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라’는 번역이 과연 잘 된 번역일까요?
색안경을 끼고 보면 이 번역은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즐기라’는 것이 퇴폐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의미라면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지금의 번역보다 앞선 공동번역성서를 보면 사실 오해를 살만한 면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아, 청춘을 즐겨라.
네 청춘이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겨라.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아라."
그러나 즐기라는 말이 영어로 ‘Rejoice’라고 하고, 개신교 번역에서는 ‘즐거워하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환호하라’, ‘크게 기뻐하라’, ‘크게 즐거워하라’라는 뜻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에서 쾌락주의도 나쁜 것이 아닌데 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얘기하는 쾌락은 일시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오히려 절제하고 어떤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곧 아타락시아의 경지이며, 고통의 부재 또는 고통의 극복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젊은이가 우울증에 빠지거나 비관주의적이거나 고통에 함몰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이 얼마나 불행입니까?
더 쉽게 얘기하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때 유행했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든 즐겁게 살려는 ‘태도’입니다.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라는 저의 행복론과도 통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제가 무조건 행복하려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행복이 조건에 의해 좌우돼서는 안 되겠다는 저의 의지이고 태도지요.
가난하면 불행하고 부유하면 행복하다면 그것은 돈에 좌우되는 행복이라는 것이고, 그만큼 불완전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코헬렛서는 근심에 머물지 말고, 고통에만 머물지 말라는 뜻으로 이렇게 얘기하지요.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그러니 더 큰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근심과 고통이 마음 안에 머물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수난과 십자가의 길에는 발을 내딛지도 말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라>
학창 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셨고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루카 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말씀하신 이유는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불완전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우리 손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될 때 하느님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를 일깨우는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야고 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보 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 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 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경청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만하게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 10,17)
말씀 안에 굳건한 믿음을 더하고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97)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젊은이 여러분,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
코헬렛 저자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그는 인생의 산전수전과 우여곡절을 다 겪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현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이 세상을 초월해서 살던 사람, 인생의 지혜와 경륜으로 충만했던 스승이었습니다.
그런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후배들에게 건네는 조언과 권고는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빛나는 보석 같습니다.
두고두고 마음에 새기고, 틈만 나면 연필로 꾹꾹 눌러 필사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코헬렛 말씀을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크게 반성하게 됩니다.
나는 나름 인생을 좀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 어려운 시대 갈팡질팡하는 후배들에게 지혜와 경륜을 갖춘 선배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때 그따 적절한 조언과 행동으로 젊은이들에게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지?
오늘 우리가 봉독한 코헬렛 말씀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참으로 요긴한 말씀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읽고 마음에 새길 명언입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편도나무:
아몬드 나무라고도 합니다.
성막의 등잔대가 아몬드 나무의 꽃 모양으로 만들어집니다.
*참양각초:
근동 지방에서 서식하는 생존력이 강한 나무, 케이퍼 나무로 추정됩니다.
건조한 광야에 뿌리를 내리고 어여쁜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연어 요리를 먹을 때 이 열매를 절여 곁들여 먹곤 합니다.
젊은 형제 자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
순식간에 세월은 흐르고 마치 번개처럼, 섬광처럼 인생이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오늘 하루에 충실하십시오.
젊은 시절부터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께서 기뻐하실 삶을 추구하십시오.
오늘은 다시는 오지 않는 축복과 은총과 구원의 날입니다.
부디 오늘을 허송세월하지 마시고 충만히 누리고 만끽하십시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파스카의 신비>
1)
오늘 복음 이야기는 ‘현장 기록’이 아니라, 사도들의 ‘회상’입니다.
“우리는 그때 그랬었지.” 라는 회상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 라는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기록했습니다.
복음서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부활 신앙’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 부활의 ‘놀라움’과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인류 전체를 비추는 ‘영광의 빛’이라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무지의 그림자’입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제자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하나로 묶어서 ‘파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살아 계시는 분으로 오셨기 때문에 ‘파스카’이고,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신비’입니다.
2)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17,23; 마르 9,31).
그런데 지금 루카복음에는 부활 예고 말씀이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생략한 것인지,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을 세 번 하셨는데, 세 번 다 수난과 죽음만 예고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도 예고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놀라겠지만 믿음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말씀이고,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넘겨지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라는 말은 '그 일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이어서'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하였다.' 라는 말과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라는 말은 제자들의 머리가 나빴음을(지능이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아직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또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을 알아듣고 이해하려면, 우선 먼저 믿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수난 예고 말씀을 무서워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말씀을 듣는 것을 싫어했다는 뜻입니다.
생각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으니까, 묻는 것도 싫었던 것입니다.
3)
우리 인생도 ‘파스카의 신비’의 연속입니다.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 계속 찾아옵니다.
죄를 지어서, 그 죄 때문에 겪는 고난이라면, 그것을 보속으로 알고 견디면 됩니다.
그러나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래서 보속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고난들이 많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베드 1,6ㄴ-7)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난과 시련은 하느님 나라에 잘 들어가기 위한 ‘단련’과 ‘정화’ 라는 것입니다.
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야고 5,10-11)
‘파스카의 신비’는 고난과 죽음 너머에 부활과 생명과 참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에 관한 신비입니다.
그 믿음이 있으면 고난과 죽음을 정면 돌파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신앙인들이 고난과 죽음을 향해서 나아간다고만 생각하겠지만, 믿는 우리는 부활과 생명과 참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인생을 즐겨라 - 그러나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여라>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90;1,14)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고개를 돌려 내가 지나온 길을 확인하면 걷는 자세가 곧아진다.”
<다산>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요 새로운 각오입니다.
“행했는데도 얻지 못했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며 원인을 살펴라.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자기에게 돌아온다.”
<맹자>
자신이 바르면 하느님은 친히 보호자와 방패가 되어 도와 주십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추하게 ‘늙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가을 열매들처럼 곱게 ‘익어가는’ 인생이면 좋겠습니다.
바로 지혜가 그렇게 품위있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겸손한 자요, 겸손의 지혜가 아름답게 빛나는 익어가는 인생이 되게 합니다.
오늘로서 코헬렛 제1독서는 끝납니다.
오늘 내용 역시 얼마나 풍부하고 좋은 자극이 되는 지 모릅니다.
역설적으로 허무주의의 병(病)이자 약(藥)임을 깨닫습니다.
허무의 가시가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허무는 바로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기억하라는 신호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하느님뿐입니다.
시종여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같은 하루 꽃같이, 시같은 하루 시같이,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하며, 아름다운 선물 인생을 살 일입니다.
우리 인생의 의무요 권리요 책임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보답입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은 어느 하나 생략하기가 아깝습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며 단숨에 읽혀집니다.
코헬렛 성서가 아니곤 어디서 누구에게 이런 교훈을 들을 수 있을까요?
참으로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코헬렛이요 이래서 지혜문학에 속합니다.
비단 젊은이뿐 아니라 늙은이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깨우침이 되는 코헬렛입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알고 보니 코헬렛은 순수한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요 현실주의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이를 입증합니다.
젊음의 날은 물론 늙음의 날에도 읽고 배우고 깨달아야할 코헬렛의 지혜입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이 닥치기 전에,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한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늙음이요 죽음입니다.
코헬렛은 참으로 지혜로운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입니다.
결코 꿈속에 사는 낭만주의자가 아닙니다.
젊은이는 물론 늙은이도 배워고 익혀야 할 지혜입니다.
이래야 늙은이는 늙은이대로 치매에 걸리지 않고, 가을 단풍처럼, 저녁 노을처럼, ‘곱게’,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레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늙어가면서 심신이 서서히 무너지기 전, 철이 남으로 창조주를 기억함이 유비무환이겠지만, 무너지는 중에도 당황하지 말고 사랑의 생명줄인 창조주 하느님의 끈을 놓치지 말고 꽉 잡고 살라는 것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아주 오래 전 피정지도 시 묘비명을 미리 써보라는 과제에 이 구절을 택한 수도자로 인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허무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나는 코헬렛,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로 살라는 각성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코헬렛 독서에는 없는 마지막 부분 말씀이 코헬렛 현자의 충고 말씀이 참 정답고 고맙습니다.
“내 아들아,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하느님 지혜이신 영원한 최고의 현자,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참 귀한 지혜의 가르침이 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 후, 또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 절정에 있고 사람들은 모두 들떠 있어 제정신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할 때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듯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못 알아 들었고, 묻는 것 조차 두려워하였지만,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평생화두가 되었을 말마디입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없는 부활의 영광은 환상일 뿐이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영성이 진짜 영성이자 참지혜이며 우리 삶을 날로 깊게 하기 때문입니다.
파스카 예수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의 일치와 더불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 이상주의자, 현실주의자로서의 삶이겠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시편 90,1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 식별>
오늘은 2024년 9월 28일입니다.
이 시간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로부터 2024년이 지나간 날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 생활합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현대사회는 이 물리적인 시간의 틀 속에서 바쁘게 돌아갑니다.
시간은 돈처럼 여겨집니다.
평균 시급은 시간당 15$ 정도 합니다.
주차하는 경우에도 시간당 주차비를 계산합니다.
시간은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육상 경기에서 시간은 순위의 기준이 됩니다.
9월 28일이 뜻 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이 결혼기념일, 생일, 축일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9월 28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이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의미의 시간에 가족들이 만나고, 연인이 만나고, 이웃이 만납니다.
74년 전 9월 28일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빼앗긴 서울을 되찾은 날입니다.
‘9.28 수복일’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런 의미의 시간들이 모여서 문명이 되었고, 문화가 되었고, 역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약속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시간은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신앙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신앙인들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한 시간을 찾으려 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에서 우리는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의미의 시간에서 우리는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시간은 우리를 부활의 문으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리적인 시간, 의미의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사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치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영원의 시간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하느님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입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한번 써보고, 살아봐야 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식별의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고, 결실이 있으면 영적 식별을 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고,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악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위로와 고독’이 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결과는 늘 기쁨과 평화입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도 ‘위로와 고독’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 결과는 늘 불평과 불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영적 식별을 잘 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적 식별을 잘 하는 사람은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도 충분히 듣습니다.
누군가 영적 식별을 잘 했는데, 교만하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둘째는 진중함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과 탓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때, 교회를 비판하고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영적 식별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루에 책 한 권을 목표로 책을 읽습니다.
맞습니다.
다독합니다.
물론 많은 분이 이것저것 많이 읽는 다독보다는 한 권의 책이라도 정독하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정독보다 다독이 맞다고 판단됩니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오랫동안 한 권의 책만 읽는 것보다는 여러 장르의 책을 다양하게 읽으면서 깊이가 부족해도 넓게 지식을 갖추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질보다는 양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 안에서도 질보다 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실패라는 ‘양’입니다.
이런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도자기 공예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학기 과제를 내면서 반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평가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50개 이상을 만들면 A, 40개 이상이면 B, 그 이하는 C”라고 했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몇 개를 만들든 가장 잘 만든 한 점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어느 그룹에서 최고의 작품이 나왔을까요?
첫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만들면서 실패의 과정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완성도 높은 최고의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양보다 질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질 높은 ‘나’를 만들려면 양적으로 많은 실패가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려고 하지만, 이 실패는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양적으로 많은 실패에 질적으로 높은 성공을 가져올 확률도 높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던 예수님이고, 예수님에 대한 평가 역시 대단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상은 정치적 메시아입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힘 있는 임금님, 개선장군처럼 늠름하게 들어오는 영광의 임금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없이는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다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활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실패처럼 보이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 끝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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