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는 단순히 우주만물의 창조와 인간 창조에 대한 글을 시작으로 되어 자연과학과 인류사를 담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사실은 영적 사실에 대한 개론을 담은 책으로 어떤 목적으로 삶 속에 이끌어갈 지침서로 여길 수 있다. 특히 네 족장에 대한 언급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도했던 인물로만 여기고 있다.
아브람은 신앙의 열국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사상으로 양육된 것을 자기에게 적용하는 존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한 이유는 삶의 현실에서 자아를 정복하여 하나님의 사상과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개방하는 작업을 펼쳐왔기 때문에 열국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반면 이삭(이자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아버지 아브라함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사상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생명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는 존재였다. 야곱의 옛 사람의 표상으로 간사하여 남을 속이며 하나님을 속이고 저주아래 있는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보려고 별별 방법을 동원했지만 발견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려고 할 때 마다 자신의 이름과 같이 옆으로 밀어낸 자로서 자신의 죄과를 거두는 결과를 초해했다. (27:42, 43) 얍복 강나루에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이기는 삶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아들 요셉이 형제들의 협박으로 애급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과 시므온을 잃어버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37: 28, 42:36)
옛 사람인 야곱이 죽고 새 사람인 요셉으로 이어져 가야만 창세기를 기록한 목적과 이유가 되는 것이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이름대로 하나님과 싸워서 이기지 못한 것을 이겨온 존재인 것을 요셉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영적으로 민감하고 섬세하며(37:2) 지혜롭고 신중하며(41:38~49) 감정이 풍부하고 강렬하다. (43:29~ 31) 타인에게 관용적(50:19~21) 하나님의 섭리를 철저하게 믿어온 존재다. (히 11:22)
요셉은 야곱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채색의 옷을 입고 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 제일 높은 사람을 만나 차후에는 애급을 총괄하는 총리가 되고 애급 전지를 사서 바로에게 바치는 등,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새 사람의 표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근원과 믿음의 뿌리가 된 것이다.
요셉은 차후에 이름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데 사브낫바네아(세상을 구원하는 존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혼자만 구원을 받아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자기와 관련된 가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온 민족을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존재로서 이러한 신앙생활을 유도하는 책이 바로 창세기인데 한낱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 네 족장의 일대기로만 여기고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 중에 영적 훈련과정에서 모델로 삼아야 되는 선별하는 책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저주아래 풀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안내서다. 누구를 닮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야곱이 주님 안에서 죽어야만 요셉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가는 길이 아니다. 야곱으로 살지 않겠다고 해서 안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요셉을 살아가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살아가는 길을 보여줬건만 야곱은 그 방법을 취하지 않고 다른 방법인 자신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사람은 저주에서 망가진 상태인 옛 사람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영이 죽어있다. 따라서 영으로부터 오는 힘이 없기 때문에 혼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을 가진 인물들이 성경에서 여실히 찾아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인간들이 이러한 저주를 풀어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만 헛돌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면 그러한 저주를 푸는 줄로 착각하고 있으며 마귀 사탄을 좇아내는 줄로 오해하고 있다. 저주를 풀어보려고 기도하다가 안 되면 좌절과 실망을 받아 나중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감각해져 가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렇게 안 되는 것을 신앙으로 우기며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 것이 이단이다.
올바른 논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데 비딱한 논리에 따라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을 펼쳐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죄의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직관력이 단절되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무수히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음성만 의지하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음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말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생명의 울타리를 쳐져 있지만 울타리 안에 필요 없는 각종 냄새나는 것을 내면세계에다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다. 그런데 울타리 밖에는 휘황찬란한 것을 비치해 놓고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전시하고 있는 상태다.
내 안에 쓸데없는 생각들과 내면에 숨어 있는 악취 나는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강으로 형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상으로 씻겨나가야 한다. 자연에 썩어져 있는 것을 홍수로 정리하는 것처럼 영적 쓰나미와 영적 태풍이 몰려와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도 않지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영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혼도 육에 스며들어 엉망진창 구제불능의 상태다. 이에 따라 마귀사탄은 내 생각 안에 들어와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며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 옛 자아의 생각이 무럭무럭 일어나도록 부추는 일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 마귀사탄이 해야 할 일이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는 생각으로 의식주에 가득 차게 만드는 것이다. 아니 그런 생각으로 완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것을 마귀사탄이 응당해야 될 일이다. 이런 생각을 정리해서 기도하게 된다면 주님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날까?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 자아, 겉 사람의 상태에서 생각을 정리하여 기도하거나 찬양하지 말아야 한다. 새 사람의 생각에 사로잡혀야 하는데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유치하게 보이고 몰상식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새 사람, 속사람의 상태에서 생각을 모아서 기도해야만 직관력을 갖게 되어 판단할 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사상과 세상의 사상의 물이 합쳐진 상태가 바로 홍수다. 하나님께서 과거 노아의 홍수를 보내신 것은 썩여있는 사상의 물을 정화하는 작업이다. 이런 홍수의 상태에서는 방주에 들어감으로 인해 구원받은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정화가 되지 않으면 방주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뭍이 드러나고 살아갈 수 있는 땅이 없다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옛 사람, 겉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안인 생명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야만 된다.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내 안에 쓸데없는 것을 완전히 소멸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 내주할 수 없으며 임재할 수 없는 것이다. 염려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흑암 중에 있는 것이다.
영적 쓰나미와 태풍이 와서 걱정근심과 염려와 고민을 싹 쓸고 거두어가야만 된다. 그런데 그것만 정리정돈만 되면 되는데 새 사람, 속사람이 갖고 있는 것까지 싹쓸이로 가져 가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인 방법을 이미 성경 안에 제시되어 있다. 이에 대한 언급은 칼럼으로나 다른 방법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아쉬움뿐이다.
영적 제로의 상태가 되어버린 많은 분들을 빼앗긴 것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기도를 강화시키거나 금식, 특별 기도를 해야만 되는가? 영적 쓰마니와 태풍으로 인해 삶의 자리를 송두리째 사라진 것을 어떻게 보수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미 제시된 방법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가를 다음 칼럼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