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지가 불쌍해 타락죽을 금지시킨 영조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 뒤편에는 낙산(駱山)이 있다.
오래 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약수터가 있어 산책길로 많이 이용되는 이곳은
산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해서 낙타산 또는 낙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바로 조선 왕실의 우유를 공급했던 조달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 말기에 우유를 조달하는 관청인 유우소(乳牛所)가 생겼는데,
그것이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궁궐 살림을 담당하는 사복시 아래의 타락색(駝酪色)으로 바뀌었다.
타락색이 위치한 곳은 지금의 동대문 부근의 동산이었다.
이후 그 산은 타락색이 위치하고 있다 해서 타락산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의 낙산이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볼 때 낙산이란 명칭은
원래 낙타 낙(駱)자가 아니라 우유 낙(酪)자에서 유래된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조선 왕실의 우유를 공급했던 관청인
타락색이 있었던 낙산
타락색에서는 우유를 공급하는 소를 경기영(京畿營)으로 하여금 각 읍에 분량을 정해주어
내의원에 진상하게 했다. 물론 이 소는 항상 우유를 생산하는 젖소가 아니었기에
새끼를 낳은 어미 소의 젖을 모아 우유를 진상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타락색에 소속된 소에게서 태어난 어린 송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어미 소의 젖을 잘 먹지 못하고 굶주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의 핵심인 소들이 그 모양이니 농사에도 지장이 많았다.
이 같은 어미 소와 송아지의 애닮은 처지를 측은히 여겨 타락죽을 올리지 말라고 명한 임금이 있었다.
소의 모성애를 헤아린 그 임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무참히 죽였던 영조였다.
봄갈이를 위해 타락죽을 금지시키기도...
1749년(영조 25) 10월 6일자의 영조실록에 의하면
내의원에서 전례에 따라 우유를 올렸는데, 하루는 영조가 암소 뒤에 송아지가 따라가는 것을 보고
매우 측은히 여겨 타락죽을 정지토록 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53년(영조 29)에도 영조는
“다섯 주발의 타락죽을 위해 열여덟 마리의 송아지가 젖을 굶게 하는 것은 인정이 아니다”며
원손궁에는 책봉 후에 타락죽을 올리게 하는 등 타락죽의 진배를 줄이는 조치를 취했다.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에 의해 28세의 나이에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은 것이 1762년의 일이었으니, 이때만 해도 영조는 어미 소의 자식사랑까지 헤아렸던 감수성이 풍부한 성품이었던 듯싶다.
영조는 송아지가 젖을 못 먹는 것을 염려해 타락죽을 정지시키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에도 영조는 몇 차례 타락죽을 올리지 말라는 명을 내리곤 했는데, 그때는 봄을 맞아 소를 본래 고을로 돌려보내 봄갈이에 사용하도록 한 조치였다.
인기 드라마 ‘대장금’에서 타락죽으로 인해 비소에 중독된 것으로 그려졌던 중종도 1511년 외방 수령들이 타락죽을 많이 사용하여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친다는 이유에서 타락죽을 금하게 하는 조치를 취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외에 다른 이유로 타락죽을 거부한 임금들이 있었다.
선조는 선대 왕 명종의 비였던 인순왕후가 1575년(선조 8)에 승하하여 상중에 있을 때 계속해 곡을 하여 목이 상하고 원기가 쇠약해져 주위에 걱정을 끼쳤다.
이에 삼정승이 선조를 문안하여 타락죽 같은 음식물을 자주 드셔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선조는 타락죽을 올리지 말도록 명했다.
인조는 중전이던 인열왕후 한씨가 1635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뒤
왕비를 애도하여 30일 넘게 평상시 먹던 음식은 물론 타락죽도 올리지 말게 했다.
이처럼 선조와 인조가 상중에 타락죽을 거부했던 것은 상례(喪禮)에 따른 조치였다.
상복을 입는 기간에는 고기가 든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우유도 육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