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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지인 둘이 최근에 사이가 틀어졌다. 사소한 이야기 끝에 던진 농담이 화근이었는데 진노가 생각보다 거세었던 것은 진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내게는 농담이든 진담이든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였지만 감정이 개입된 난처한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똑같은 말로 서운함을 토로한다. 자기가 무척 긍정적인 사람인데 상대방이 몰라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 역시 알아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삼자인 내 관점에선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느 한편으로 마음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다만 정말 긍정적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소중한 추억의 한 장면으로 오래도록 회자하는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최고의 긍정적인 멋진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것은 마치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 앞에 나타난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왕자를 만난 것 같은 신선한 착각과 충격이었고 설렘을 동반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날의 그 짧은 시간은 내가 만든 생각의 틀에도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수많은 관계에서 파생하는 불협화음 때에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관계가 순조롭게 풀리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십여 년 전 한낮의 더위가 지면을 달구며 이제 막 여름으로 들어서던 때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차에 탄 아들은 “엄마! 나, 6등 했어” 내가 건넨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쓱 문지르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6등? 뭘?” 입가에 묻은 허연 침을 닦던 녀석은 엄마의 궁금증을 단박에 해소해 주었다. “달리기했는데 내가 6등 했어. 엄마, 나 잘했지?” 의기양양한 아들의 표정이 어찌나 밝고 씩씩하든지 “자알 했어!” 내 답변도 늘어지며 하늘 높이 올라간 아들의 기세만큼 목소리가 높아졌다. 몇 명이 뜀박질했나 물어보려던 차에 “6명이 뛰었는데 얼마나 애들이 잘 뛰는지 힘들어서 난 죽을 뻔했어” 체육 시간에 달리기 시합을 6명씩 조별로 나눠서 했고 자기 조에서 6등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아들의 이야기였다. 6명이 뛰고 맨 마지막에 들어왔으니 사실 6등이라는 아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의 셈법으론 우리 아들이 꼴등이라는 단어를 모르나? 한국말보다 영어가 편하니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어찌 저렇게 당당하지? 혼잣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궁금한 것을 숨기지 못하고 꺼내었다.
“제임스, 6명이 달리기해서 맨 나중에 들어오면 꼴등 아니야?” 능청스럽게 묻는 내가 속물처럼 느껴졌다. “맞아!” 짧고 간결하게 무엇보다 의연하고 단호하게 대답한 아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말을 이어갔다. “엄마! 꼴등이라고 하면 웃기잖아. 친구들이 정말 달리기를 잘해. 윙~ 소리가 나는 것처럼 엄청나게 빨라. 나는 달리기를 못하니까 6등이지. 들어오는 순서대로1등, 2등, 3등… 6등! 그러니까 나는 6등이 맞잖아. 엄마, 그렇지?” 뭔가에 홀린 듯이 내가 잠시 대답을 주춤하는 사이에 아들은 이어서 물었다. “달리기를 잘하는 애가 있고, 나처럼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잘하는 애가 있잖아. 그렇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해맑은 아들의 표정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순간 내 마음에 드리웠던 혼탁한 무언가를 걷어 내고 있었다. 꼴등과 마지막 6등의 차이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나는 오십을 코앞에 두고서야 처음 알았다. 인생 겨우 십 년도 채 안 된 아들의 긍정적인 생각이 어찌나 심오하고 멋지든지.
그날 그 시간에 우주 최강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지닌 소년을 보았고 그의 앞날에 향긋한 냄새가 가득한 꽃길이 펼쳐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올해 스물여덟 살이 되는 아홉 살 소년은 지금까지도 매사에 밝고 긍정적이며 다정하고 친절해서 이웃에게 사랑받는 청년으로 좋은 기운을 여지없이 뿜어내며 살고 있다.
아들과의 일화를 떠올리다가 불현듯 두 지인에게 화제를 전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우리 아들에 대해 매우 좋은 시선을 가지신 분들이니 들려주는 이야기에 박장대소하며 화해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본인들이 스스로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더욱 쉽게 내가 전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를 깨달으리라. 분노하고 기억하는 것은 분쟁을 가져오지만, 용서하고 잊는 것은 평화를 가져온다는 말이 있듯이 나 또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라는 성경 구절을 마음에 새기며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나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도 가져 보아야겠다. 특히 긍정적인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