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한 약속
조순희(해당화)
늙는 탓일까 아니면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진 탓일까? 가시나무에 앉은
새처럼 마음이 편치 않고 허상에 사로잡히듯 번민만 쌓여갑니다.
누가 오라는 것도 아닌데 울적한 마음에, 요즘은 공연히 시골서 남편하고
살던 생각이 부쩍 떠올라 잠도 못 이루는 것이 앉으나 서나 반복이 됩니
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저 눈에 밟히고 애절하게 남편이
그리워집니다.
이제야 내 앞을 내다보니 젊은 날의 내 삶은 찾을 수가 없고 보이는 것
은 오로지 행복한 모습을 한 부부가 삶의 목표를 향하여 즐겁게 나아가는
모습뿐입니다 어찌 부럽지 않으랴! 애써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이리저리
사방으로 둘러보아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움의 함정에 빠진 듯 초조
한 마음을 감당하기엔 너무 힘에 부쳐 화제를 좋은 쪽으로 돌립니다. 잊
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흙과 함께 묻혀 살던 생활과 손때 묻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떠올라 마음과 가슴속에 파고듭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꾸만 그
무언가에 대한 미련으로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고향을 떠나올 땐 야무진 꿈을 안았었지요 아이들 교육을 다 마치면
늙어서 다시 돌아와 인생의 끝자락을 멋지게 꾸미자고 말이지요. 퇴직 후
에는 자가용 구입하여 못 다 이룬 삶의 여유 노후 여행으로 마무리하자
고 굳은 맹세로 수차례 서로 듣기 싫도록 약속을 했지만 운명은 참으로
심술도 궂은 것이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비통한 심정으로 홀로서 약속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지만 주인 없는 공
사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허탈감에 멍하니 바보가 된 듯 습관처럼 방
벽에 기대 앉아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만 남편처럼 바라보기 일쑤였습니
다 이루지 못한 '약속'은 평생의 슬픔을 좌우 할 뿐이요 첩첩이 쌓인
삶의 곡절 속에서 쓸쓸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자식
들이 어머니 살아가는 생활의 애달픔을 위로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과 방
법으로 돈, 좋은 옷 맛있는 음식으로 즐거운 만족을 준다 한들 그 마음은
잠깐 스쳐가는 기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약속을 지킬 수 없는 너무나 뻔한 이유 남편의 부재가
새삼 다가옵니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하던가요. 반쪽짜리 약속을 지
키게 만듦에 한없이 밉고 보기 싫어, 숨겨 놓았던 남편의 사진을 십여 년
이 흘러버린 아주 오랜만에 찾아 꺼내어 들고 많은 원망을 했습니다.
계절이 메말라 가는 탓인지 내 마음이 변한 건지…. 불현듯 보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며 미웠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슬픔이 먼지처
럼 뽀얗게 내려앉은 사진마저 변하지는 않았나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남편
의 품인양 못 다 이룬 정으로 가슴팍에 힘껏 꼭 끌어안았습니다 털퍼덕
방바닥에 주저앉아 뒹굴며 눈물범벅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너무 일찍 버렸나이다. 조금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가정
의 윤택은 물론이요 가꾼 새싹들이 활개를 치며 자라는 모습에 흥이 돋았
을 겁니다. 오늘도 당신과 내가 물주며 가꾸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 이
사회의 밑바탕이 되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또 다른 씨앗을 발아시키느라
분주히 날갯짓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있었더라면, 동반자로서 같이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혼자 느끼기엔 그 기쁨이
너무 아깝습니다.”
절로 나오는 신세 한탄에 섞여 흐르는 눈물이 쏴아 하며 크게 소리를
내는 듯합니다 눈물이 사진에 쌓인 녹록찮은 세월의 더께를 닦아 내립니
다.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유리 안에 드러나는 얼굴을 보고 나니 분통이
터져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몸부림을 쳐보지만 사진 속 당신은 너무나
태연하게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사느라 힘들었지’하는 한
마디 말이라도 나의 귓전에 들려온다면 슬픔과 고통의 세월들을 말끔히
씻을 텐데…
그리워도 소용없고 보고 싶어 울어도 소용없고 살아 있는 한 내 인생
접을 때까지는 쓰라린 아픔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과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이 몇 년 만인가요? 그것은 한낱 낡은 흑백사진
과의 만남일망정 살아 있는 것처럼 잠시나마 너무 푸근 해져옵니다.
나는 사진을 품에 끌어안은 채 고향 속 살던 집에 머물러봅니다. 정겨
운 고향 스쳐가는 모든 풍경이 눈에 아쉽게 맴돕니다 가뭄에 물 만난 고
기처럼 살며 지내던 옛 시절을 영상의 한 장면으로 돌아다봅니다. 전형적
인 시골의 전경이 갖추어진 이 고을, 어느 누가 본들 탐내지 않을까. 높은
지대에 남향을 바라보는 조리터에, 집 앞에 고요하게 펼쳐진 평야로 속리
산 물줄기가 졸졸 노래하듯 소리 내어 흐르고, 수문장처럼 늠름히 선 높
은 건산에 주령의 기슭으로 야산이 마을을 포근하게 둘러싸 싱그런 산내
음이 고을을 향기롭게 하고, 우람하게 뻗은 몇 백 년 된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서 변함없이 고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느티나무정자 밑의 냇물을 내려다보니 남편이 무척이나 좋아하던 매운
탕 싫증이 나지 않는 올갱이국 바지런함의 노력만 있으면 무공해 식품으
로 조리되어 식탁 위에 오르던 매운탕의 그 맛! 어찌 그 맛을 잊어버리겠
나이까? 나의 손맛은 아직도 그 향기의 맛을 감추지 못하고 사위들에게
대물림을 하고 있습니다 사위들이 맛있게 먹는 보람에 당신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지요 차가운 냇물에 놓아 거둔 그물에 주렁주렁 많이 매달린
고기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던 당신의 그 모습, 눈을 감은들 잊을
수가 있을까요.
반쪽짜리가 되어버린 약속 이루지 못한 약속이지만 당신이 있는 사진
과 함께 하니 이미 나는 고향엘 갔다 왔군요 당신과 함께.
2005/22집
첫댓글 눈물이 사진에 쌓인 녹록찮은 세월의 더께를 닦아 내립니
다.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유리 안에 드러나는 얼굴을 보고 나니 분통이
터져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몸부림을 쳐보지만 사진 속 당신은 너무나
태연하게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사느라 힘들었지’하는 한
마디 말이라도 나의 귓전에 들려온다면 슬픔과 고통의 세월들을 말끔히
씻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