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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욥기의 말씀 1,6-22
6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
7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사탄이 주님께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8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9 이에 사탄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당신께서 몸소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리셔서, 그의 재산이 땅 위에 넘쳐 나지 않습니까?
11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12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이에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갔다.
13 하루는 욥의 아들딸들이 맏형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14 그런데 심부름꾼 하나가 욥에게 와서 아뢰었다.
“소들은 밭을 갈고 암나귀들은 그 부근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15 그런데 스바인들이 들이닥쳐 그것들을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6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 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7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8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나리의 아드님들과 따님들이 큰아드님 댁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19 그런데 사막 건너편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서리를 치자,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20 그러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21 말하였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22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한 큰 사람'>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어제 복음과 병렬구문으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8)
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요, 동시에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 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은 큰 사람’이란, 단지 ‘작은 이’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라기보다, ‘작은 이’를 받아들여 ‘같이 작아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크기 때문에 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작은 이인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이’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큰 것을 비우는 바람에 ‘작은 이’가 된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낮아져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표상하며,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력함과 낮아짐, 동시에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작은 이’, ‘무능하고 비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리 2,3)
사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되, 허물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나아가서,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겸손한 마음>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하면서 포장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8)
스스로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 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2)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 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 하든지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필리 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하늘 나라의 자리를 결정한다>
오늘 복음에서 누가 높으냐는 것으로 제자들이 다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겸손은 곧 포용력입니다.
사람을 품으려면 자기만 크고 옳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모든 동물과 사람들을 정말 잘 받아들입니다.
물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봅니다.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이다가는 큰코 다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된다고 하십니다.
요한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대답하십니다.
웬만하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틀리면 어떻게 하라고 무작정 다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린이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의 잘못을 바로잡아줄 해답지인 부모가 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 원이 예금된 통장과 1억 7천만 원 가량의 주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생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 쌀을 사다 먹고 남이 주는 채소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온 나뭇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만 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사느냐고, 자신을 위해 돈 좀 쓰면서 살라고 말하는 이들이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200살까지 살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아껴둬야 할 필요가 있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답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정답지는 부모입니다.
이것이 포용력의 차이, 곧 하늘나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의 차이를 만듭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교만해지기에 십상입니다.
특별히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이 망하게 된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과 긴 보급선이 재앙적인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고문과 장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812년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무적이라고 믿으며 완고하게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그동안의 성공으로 나폴레옹이 얼마나 교만해졌는지를 상기시킵니다.
나폴레옹의 오만함과 전략 조정 거부는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초기 병력 중에서 약 10만 명만이 캠페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재난으로 그의 제국은 심각하게 약화됐고 결국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묻고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맞히는 즐거움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해답지가 있어야 합니다.
대본을 들고 연기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과 행동, 대사가 맞는지 끊임없이 대본과 자신을 맞춰갑니다.
그러면 맞히는 즐거움에 틀리는 아픔을 잊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이들만이 이러한 겸손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해답지가 부모인 것처럼,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해답지로 여기면 틀리는 게 두렵지 않고,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이 향상됩니다.
그러니 주님을 진리로 받아들입시다.
그런 사람은 묻기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내가 틀릴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나의 삶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포용력도 향상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걱정이나 근심, 유혹이 다가올때면 즉시 성경을!>
언젠가 진심으로 성경에 매료되어 목숨 걸고 성경을 공부하던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교구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이런저런 성경 공부 과정을 빼놓지 않고 수료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2년 과정의 가톨릭교리신학원까지 졸업했습니다.
제가 그분께 여쭈었습니다.
“형제님, 평생토록 산업현장의 역군으로 죽기살기로 일하셨으니, 이제는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시고, 운동도 나가시고, 좀 여유있게 지내시면 좋을텐데, 어찌 그리 성경을 파고드십니까?”
형제님 왈,
“그동안 제 안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사방천지를 헤매다녔지만 찾지 못했는데, 성경 안에 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 유혹과 갈등을 떨치는 데는 성경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예로니모 사제 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좀 놀았습니다.
이교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도 빠졌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다 보니, 삶의 균형이 무너져 중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지 하면서, 지난 삶을 반성하며 은둔 수도 생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맛을 본 세속의 유혹은 수시로 떠올라 예로니모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로니모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그는 유혹을 물리치는 방편으로 그 어려운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유혹은 예로니모를 흔들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본문을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번역하고 연구하고, 그것이 그의 하루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날 그는 하루 온 종일 성경 번역에 매달렸었는데, 잠깐의 휴식은 다름 아닌 성경 읽기였습니다.
탁월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예로니모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습니다.
대단했던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대적 성경 번역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장장 2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깔끔하게 번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학자였던 예로니모였지만 늘 겸손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도 사제직에 부당하다고 생각했던지 한동안 한사코 미사 봉헌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로니모는 보다 정확한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신구약성경에 대한 번역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를 위해 새롭게 카르데아어를 배웠고, 또 다시 20여 년간의 세밀한 번역 작업 끝에 그 유명한 '불가타 성경' 번역을 완성시킵니다.
예로니모의 탁월한 지적 능력, 성서에 대한 열정은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교부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조금도 의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자 예로니모였지만 그에게도 십자가는 있었습니다.
과거 영위했던 세속생활의 유혹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죄책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쉼 없이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던 노력, 어려울 때마다 인간적인 위로를 찾기보다 하느님의 보화가 담겨있는 성경에로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했던 그 노력으로 인해 그는 끝까지 자신의 성소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로니모는 사자 같은 용기로 교회를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강인함으로 자신을 잘 다스렸습니다.
자신을 극기했었고, 자신의 결점이나 악습 같은 가시들을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예로니모의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로 모르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자기 자신을 어리석은 바벨탑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1)
‘가장 큰 사람’은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아직 서열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마태 16,18) ‘가장 높은 사도’로 임명하신 일로는 생각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서열 문제로 논쟁을 한 것은 잘못한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가장 높은 사도’로 임명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옳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도’로 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도들을 교회의 주춧돌로 표현하는 것은(에페 2,20; 묵시 21,14)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주춧돌은 건물의 가장 밑에서 건물을 떠받치는 돌입니다.
교회에서 사도들의 위치는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위치가 아니라 섬기는 위치입니다(루카 22,25-26).
흔히 교황을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세속적인 생각일 뿐이고, 교황들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교황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입니다.
2)
여기서 ‘그들 마음속의 생각’이라는 말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명예욕, 권력욕, 자존심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명예욕이나 권력욕이 더 컸던 것은 아니고, 그것은 그냥 인간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래도 그 욕망은 위험한 함정입니다.
더 큰 죄로 인간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높아지고 싶어하는 욕망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욕망대로 높아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끝없이 높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 보면 하느님의 위치까지 가게 될 텐데, 로마 황제들처럼 스스로 자신을 신격화 하게 되면 결국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바벨탑으로 만들어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사탄은 처음에 하와를 유혹할 때에 바로 그 욕망을 자극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창세 3,4-5)
사탄의 말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으면 선악과를 따서 먹어라.” 라고 유혹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것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욕망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인간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명예욕, 권력욕, 자존심 등은 바로 그 욕망에서, 즉 그 원죄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피조물이 조물주 위치로 올라가고 싶어하는 욕망은 하느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고, 반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바벨탑이 무너지듯이 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타이르신 것은 그런 어리석고 허무한 욕망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그들이 파멸당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3)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로서 나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나를 섬기듯이’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를, 또는 ‘가장 작은 이’를 뜻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려면,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적선을 행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아래로 내려가서’ 주님을 섬기는 것과 똑같이 ‘가장 작은 이’를 섬기라는 뜻입니다.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섬길 수 없습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 당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낮춤’과 ‘섬김’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지 말고, 낮은 자리로 가려고 노력하는 ‘선의의 경쟁’을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진심으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 다 똑같이 하느님께서 높여 주신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 자체가 ‘높아지는 일’입니다.
만일에 자기 혼자서만 높아지고 싶다고 고집 부린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찬미 - 경천애인(敬天愛人)>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 때에 열매를 맺으리라.”
(시편 1,2-3)
교황님의 제46차 해외 사목 방문중 루벵 학생들에게 한 감동적인 강론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추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공부는 권력의 도구가,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이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나가라.
이념들의 이분법에 들어가지 마라.”
엊그제 수도원 ‘자캐오의 집’, 피정집에서 단체 피정지도 중 제의방에서 불암산을 바라볼 때 저절로 흘러나온 고백에 행복했습니다.
뜻밖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같은 시입니다.
흡사 주님 앞에 서있는 듯 행복한 체험이었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당분간 10월은 이 시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역시 지인에게 시화(詩畫)를 부탁해서 받았습니다.
수도원에서 가장 불암산 바라보기에 전망좋은 ‘자캐의 집’ 3층에서 탄생된 시입니다.
아마도 성인들 역시 주님 앞에서 늘 사랑의 찬미에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역시 지혜문학에 속하는 욥기의 시작입니다.
욥기 역시 앞서의 코헬렛 못지 않게 깊고 아름답습니다.
욥의 시련에 앞서 똑같은 그에 대한 묘사가 2회 나옵니다.
‘그 사람은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하느님도 인정한 욥이었고 시련에 앞서 사탄 앞에서 욥을 자랑했고, 사탄은 이의를 제기하자 하느님은 사탄의 제의를 수락합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위에 다시 없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새삼 우리 생명은 하느님의 고유 권한에 속해 있음을,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1차 사탄과의 게임은 극한의 고난과 시련중에도 솟아난 욥의 다음 감동스런 찬미의 고백으로 하느님의 승리로 끝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평소 사랑의 찬미로 일관된 삶임을 입증하는 고백입니다.
더불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서 찬미받으소서.”
오늘 9월 순교자 성월 마지막날 9월 30일, 우리는 참으로 자랑스런 성인 예로니모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역시 순교적 삶에 한결같았던 성인으로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사대교부에 속하는 분입니다.
당대 성인의 학문의 깊이는 성 아우구스티노 외엔 아무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합니다.
성인의 가장 큰 업적은 불가타(일상적, 대중적이라는 뜻) 성서 번역이요, 391년부터 406년까지 1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하니 성인의 진리를 향한 사랑의 열정과 끈기가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성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 성경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이 뜨거웠습니다.
성인의 편지에 나오는 권고가 심금을 울립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늘 성경을 읽으십시오.
아니 당신 손에서 성경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경을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감싸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의 혀는 그리스도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들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신학교의 수호성인’,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인은 사제이면서도 생애 대부분을 수도자로 살다가 420년 오늘 9월30일, 72세에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임종을 맞이합니다.
욥의 경천애인의 사랑은 그대로 예수님께 전수되었음을 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은 오늘 기념하는 성 예로니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후 제자들에게 유언같은 교훈 둘을 선물하십니다.
동상이몽,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도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중인 철부지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가장 취약하고 약하고 무력한 이들입니다.
이들을 사랑의 환대로 맞이함이 예수님 당신을 환대하는 것이며, 궁극에는 예수님을 보내신 분, 하느님 아버지를 환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무력하고 불쌍해 보이는 이들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이며, 우리의 전적인 사고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얼마전 공동체 회의 결과에 ‘신의 한수’라 감탄했고 민심은 천심임을 확인하고 기뻤습니다.
엄격한 비밀투표를 통해 이심전심 가장 약해 보이나 실상은 똑똑한 수도형제를 총회 대표로 선출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주님의 가르침도 소중합니다.
스승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막았다는 기고만장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과 같은 내용의 어제 마르코 복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음을 배웁니다.
진리 앞에 일체의 기득권이나 엘리트주의는 모두 배격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진리의 주님을 그들만의 소유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진리 앞에 지극히 겸허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사랑과 찬미의 겸손한 이들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진리이신 주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작은 이들’을 사랑하며, 진리의 사람, 찬미의 사람, 겸손의 사람, 경천애인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
(예레 15,16)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이 세상의 여행자일 뿐>
예전에는 여행을 참 많이 했습니다.
여행을 통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나의 세상을 확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행하며 느끼는 것은 삶의 확장이 아닌 삶의 축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하지만, 사실 집에서도 전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행 중의 경험은 힘들고 불편할 뿐입니다.
힘듦과 불편함 속에서 나의 모습은 작아집니다.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삶이 축소되었을 때,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단순히 낭만, 예술, 아름다움 등을 찾고자 한다면 집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자기가 주체이니 원의만 있다면 스스로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집처럼 하겠다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어떨까요?
나의 힘듦과 불편함을 없게 하겠다고 옷만 가방 25kg을 가득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비행기도 탈 수 없습니다(비행기 수화물 25kg 이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여행자입니다.
언젠가는 여행을 마치고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작은 내가 되어, 훌쩍 떠날 수 있게 됩니다.
겸손의 삶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진정한 여행자의 모습이 됩니다.
불편함과 힘듦도 여행자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기억하면서 작은 존재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대표로 세운 일, 타볼산에 올라갈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가신 일들이 서열 문제를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의 랍비신학에서는 천상에 있는 낙원의 주민들을 일곱 등급으로 나눈 것, 꿈란 공동체에서도 확고한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볼 때, 모든 유다인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역시 세상일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세상의 서열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세우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어린이를 순진, 소박, 겸손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이처럼 순진하고 소박한 마음 또 겸손을 갖춘 사람만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의 여행자일 뿐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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