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령칙하다'라는 형용사가 있다.
김원우 소설에서 처음 보았고 나중에 김연수 소설에서도 보았는데
기억이나 형상 따위가 긴가민가하여 또렷하지 아니하다
라는 뜻으로
……아스트랄한 맛이 있는 단어다.
아, ‘긴가민가’의 본딧말은 ‘기연가미연가’로 ‘아령칙’과 비슷한 말.
그러니까, 나는
'나의 아령칙한 옛날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11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긴 하지만―
뮤지션들에게 잔인한 달이다.
유재하의 자동차는 한남대교 북단 근처 강변도로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았고
김현식의 간은 알코올 때문에 녹아내렸고
(자, 이제 태평양을 건너 미쿡으로 가볼까)
조지 해리슨의 폐는 암세포 군단에 점령당했다.
그렇게 가는 거지.
12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저 멀리(유라시아를 가로질러 우랄산맥 너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달에 차이코프스키가 죽었다.
게이였다는 사실이 아웃팅되면서 본인뿐만 아니라 친구들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 관리였으니 그의 친구들은 당대의 유력 인사들이었을 거다―
까지 곤란해졌던 모양이다.
친구들은 그에게 자살을 종용했고, 그는 그들의 말을 따랐다.
콜레라균 가득가득 삼다수를 들이켰던 거다.
병사로 위장된 자살이자, 자살을 가장한 타살인, 참으로 기이한 죽음이다.
차이코프스키도 일반적인 남자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밀류코바란 여자사람과 결혼했지만
관계는 3개월 만에 끝나버리고 만다.
그러고 나서 만든 작품이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되시겠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7CB51E4BCF256EB5)
차이코프스키 횽아의 간지 작렬 30대 모습
빙고가 처음 구입해서 들었던 바이올린 협주곡은
데카에서 나온 ‘정경화, 샤를 뒤투아(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610E1A4BCF236F52)
카세트테이프였는데 워크맨으로 닳도록 들었다
그 후
안네―소피 무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야사 하이페츠, 프리츠 라이너(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유진 오르만디(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
나단 밀스타인, 샤를 뮌슈(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
막심 벤게로프, 클라우디오 아바도(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피에르 아모얄, 샤를 뒤투아(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등
들어왔다.
처음에는 막연한 느낌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몇 년을 지나면서 하나의 이미지를 (역시나 막연하지만) 만들었다.
감동의 한 형태일까.
시간은 흘렀고
어느 순간
무의식의 심연에 먼지 층처럼 얇게 쌓여 있는 심상이라고 직감했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잊고 있던 과거의 한 지점을
건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바이올린 협주곡이
바람을 몰아 먼지를 일으켜주길 고대했다.
다시 시간이 흘렀지만 이미지의 구체화는 진전이 없었다.
나의 마들렌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음반을 바꿔가며 꾸준히 들었다.
안개 때문이었다.
안개가 레테처럼 그것과 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그것은 불쾌하고 무서운 것일까.
그래서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안개를 뿜어내놓은 것일까.
팔을 휘휘 저어 안개를 걷어내면 무언가가 어렴풋했지만
이내 공간은 메워져버린다.
하지만 안개를 원망하지 않았다. 나의 안개는
앙겔로폴로스의 정서와 닮아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그것만으로도 바이올린 협주곡은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한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7EFA1E4BCF244C7D)
테오 앙겔로폴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
그날
간택한 것은 야사 하이페츠였다.
여느 때처럼 나는 안개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카덴차가 지나가고 오케스트라가 주제부를 포르티시모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안개 속으로 한 발 내딛었다.
그리고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빙고는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137E1E4BCF24F245)
정모에 다녀오고 난 후
글을 한 번 올려야겠다는
괜한 의무감 같은 게 있었는데요...
그래서인지 글이 길어지네요.
시간 되면 이어서 쓰죠 뭐.
굿나잇!
첫댓글 이런 건 다음 메인에 떠야하는 거 아닌감? ㅋㅋㅋ
글고, 빙고님 핸드폰 꺼놓지 마요~~ 일욜날 저녁때 오랜만에 와바로 부를려고 했더니...ㅋ
에고... 요즘 발등의 불 때문에 정신이 없네요. 일 좀 마무리되면 한 잔 해요, 와바에서...^^
어릴적부터 마주쳤던...아찔했던 문구가 있어요. "다음호에 연재" , 기대합니다~~^^
귀찮아져서 슬쩍 넘어가려고 했;;; 독자 누나가 즐겁다면야... 발등의 불 지나가면 쓸게요.^^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데, 그림이 일순 일렁이더니 움직이기 시작해요. 저만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테오 영감님 영화를 보면 저 양반은 카메라로 시를 쓰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래서 그런가...^^
오랜만에 "안개속 풍경" 포스터를 보니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포스터도 덩달아 생각나네요. 지금보면 이해할 것도 같은데...^^ 남자사람, 여자사람 유행어 됐네요 ㅋㅋㅋ
몇 년 전에 제 7의 봉인이 극장에 걸려서 먼 길을 갔더랬는데, 1시간 40분 동안 참 달게도 자다 왔네요.ㅎㅎ
저도 정모 다녀오면 어쩐지 빚진 기분이 되어, 뭐라도 좀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들들 여기 올리신 글 읽다 보면 그런 다짐따위 소심하게 쪼그라들곤 해요 ㅎ
그러게요, 하늘신발님도, 저도 그렇지만, 윤대녕 카페 회원들은... 좀... 다들... 소심해요.^^
특히, 남자 회원들이요- ㅋ
모두 작가님을 닮아서 그렇;;;
아령칙한 얘기가 재밌네요. 1987년의 유재하도, 비틀즈도, 차이콥스키도...정말 11월은 잔인한 달이군. 안개 속에서 듣는 야사 하이페츠 연주의 바이올린협주곡이 과연 어떨까? 11월의 안개 속에서 젠 하이저를 귀에 낀 채 들어봐야 겠다. 빨리 다음 호 연재하세욧!
네,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짙은 안개 속, 그곳에 주크박스가 있다면... 드뷔시를 선곡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