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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욥기의 말씀 3,1-3.11-17.20-23
1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2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나 지금 있지 않을 터인데.
17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20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숨겨진 보물보다 더 찾아 헤매건만 오지 않는구나.
22 그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23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을 굳히셨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는 말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더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고자 하시기에,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 했던 그리짐산을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갈릴래야에서의 활동이 배척을 받았듯이, ‘예루살렘 상경기’도 배척받음으로 시작되며, 결국 예루살렘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이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섣부른 찬미가>
오늘 욥은 자기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기 인생을 저주합니다.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욥 3,1-3)
그런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어제 자신의 재산과 종들과 가족을 다 잃고 난 뒤에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그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욥의 고통이 한층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한 층이 더 커진 것이 아니라 두 층, 세 층이 더 커진 때문입니다.
어제 얘기에서도 욥의 고통은 가중되었었지요.
먼저 소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양과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낙타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자식들이 다 죽었지요.
이때까지는 하느님이 주셨던 것 하느님이 가져가시니 하느님은 찬미 받으시라고 하느님 찬미를 합니다.
이것만도 사실 하느님께 대한 대단한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그런데 소유물에게는 손을 대도 욥에게만은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사탄이 욥의 목숨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지독한 피부병을 앓는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래서 욥은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고, 고통을 실제로 겪게 되면 욥처럼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너의 죽음보다 내 몸의 가려움이 더 큰 고통이고, 너의 다리 절단보다 내 손의 가시가 더 아픕니다.
그러므로 찬미하던 욥의 입에서 어떻게 저주가 나오는지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하고, 같은 맥락에서 저는 저를 반성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숙제처럼 안고 있습니다.
왜냐면 저는 한 번도 저의 출생과 인생을 저주한 적이 없습니다.
사춘기 때 빼고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한 번도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렇게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없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니 이런 제가 고통이니 사랑이니 감사니 찬미니 얘기하는 것이 어쭙잖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일생을 장애를 안고 사는 분들이나 지병을 앓는 분들 앞에서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인생이 뭔지 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수도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제이기 때문에 인생을 운운하고 저보다 더 크고 더 긴 고통을 겪는 분들에게 위로니 격려니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저주를 볼 때 어제 욥의 찬미는 섣부른 찬미였다고 할 수 있는데, 욥처럼 큰 고통을 겪는 분들을 볼 때 저의 사랑 찬가나 하느님 찬미는 욥의 찬미보다 훨씬 더 섣부른 찬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섣부른 찬미가에서 성숙한 찬미가가 될 수 있도록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도 못하는 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새벽, 비록 이 섣부른 찬미가인 제가 저 스스로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는 못하지만, 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 더 큰 고통을 제게 주실 때 잘 견딜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품을 키워야 합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기에 앞서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셨고,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요한 4,9).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에서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신명 11,29).
그리짐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니 야단맞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루카 6,32-33)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 3,17).
예수님께서는 길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루카 19,10).
그리고 사도들도 역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꾸짖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
맞서지 않고 그저 당신의 일을 찾아가실 뿐입니다.
순리를 따라가십니다.
우리도 주변 여건,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기쁘게 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활동을 하다 보면 가끔은 이런저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향한 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이 먼저 커지게 되고,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다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에 화만 쌓이게 되고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먼저 품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단을 내리는 데에 있습니다.
… 사랑은 넘어질 수도 있고 불충분한 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에서 유익함을 얻어낼 수 있고 주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들을 신속하게 없애 버립니다,
…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
… 사랑이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중심은 사랑이었습니다.
성녀는 “나의 소명은 사랑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랑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의 사랑을 비추는 연장이기를 희망합시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선교의 수호자로 모시는 것은 바로 교회의 소명이 사랑이고 그 사랑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사랑이신 주님을 전하려면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사랑의 사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분노는 지옥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은 자신들 편인 줄 알았으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짖는 개와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왜 개와 싸우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한가해서 그렇습니다.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개가 짖건 말건 급해서 병원으로 갑니다.
두 번째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 목적지로 가봐야 고통만이 있으니 여기서라도 자기를 무시하는 개를 두들겨 패는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단편 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처음엔 이 영화가 응당한 복수를 하는 사이다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지나친 복수에 아내도 떠나고 딸들도 아버지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버지가 범죄자의 모습처럼 처참하게 변해있습니다.
복수하면서 자신도 고통을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는 감사한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의사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길을 가다 돌부리에 발이 긁혀 피가 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피가 나는 그 애인을 더 사랑하여 잘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부리가 감사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무서운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면 그 결말이 행복하지 않아 돌부리를 발로 차며 화풀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복수심이 생긴다면 내가 가는 방향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미 천국과 지옥을 정해놓고 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용서되지 않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유일한 행복은 그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행복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안톤 룰리 신부는 자국의 공산주의 정권 동안 극심한 박해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1910년에 태어난 그는 종교 기관을 맹렬히 표적으로 삼은 알바니아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부가 등장하기 직전인 1942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7년 정부에 반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7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극심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환경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1989년 석방된 이후 고문자 중 한 명을 용서하고 포옹하기까지 했습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사랑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특히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 교황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가 평생을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가 천국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투옥 중 심한 고문을 당했던 특별한 크리스마스 이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묶인 그는 겨드랑이 아래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고 간신히 발가락으로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추위가 그의 몸에 스며들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이 고통과 무력함으로 울부짖던 순간에 룰리 신부는 그가 묘사한 특별한 영적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느꼈습니다.
지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은 그를 기쁨과 위로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행복이 없이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부활 앞에선 십자가는 감사의 도구가 될 뿐이지만, 지옥 앞에서는 모든 게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이 이정표를 잘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칩시다!>
한류 열풍의 기세가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음악이나 영화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지속적으로 끌고 있다는 것, 정말이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지한 성찰도 필요합니다.
전 세계 수많은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K-드라마나 영화, 가요인데, 그저 흥행만을 추구하며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으로 흘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화나 드라마가 너무 지나치게 폭력적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풀라는 의미인지, 여차하면 주먹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니, 아이들이 보고 따라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냉철한 지성을 소유한 인격자인 인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뜨거운 피가 돌고 있는 생명체이기에, 내면 깊숙한 곳에 강한 공격성이 분명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절실히 느끼는 유혹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이성과 논리와 대화로 풀어나가기보다는 그냥 확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입니다.
책상이고 컴퓨터고 다 엎어버리고 뛰쳐나가고 유혹, 평소 꽉 참고 눌러왔던 하고 싶은 말들 속 시원히 해주고 싶은 유혹, 우월한 힘을 총동원해서 눈엣가시 같은 누군가를, 천하 밉상인 이웃 나라를 확 쓸어버리고 싶은 유혹...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면서 특별 제자교육을 받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핵심 제자들, No2, No3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사도들도 그런 유혹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는 개와 고양이 이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안 섞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이민족들과 혼혈하게 된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유다인들, 나름 전통 신앙과 관습을 고수한다고 잔뜩 폼을 잡지만, 실상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유다인들, 뒤로 호박씨를 까는 유다인들을 또한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자기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노골적인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해 노발대발한 요한과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저것들 그냥 확 한번 엎어버릴까요, 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요한 9,54)
사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받아, 사마리아 고을 하나 순식간에 날려버릴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그게 낫겠네. 감히 우리를 배척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속 시원히 한번 봐버리게!”
그러나 생애 내내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한결같이 고수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두 제자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인은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저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1)
오늘 복음 이야기의 상황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상황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한 상황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고, 그 길로 가면 도보로 사흘이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부름꾼들을 당신에 앞서 보내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고, 일행이 많았기 때문에ㅜ음식과 숙소를 미리 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가 심부름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성전이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그것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면서 예루살렘으로만 가는 것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는 축제 기간 중에는 그 적대감과 반감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 당시에 전반적인 실제 상황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도 야훼 하느님을 믿고 있었고, 모세오경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와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고, 배척하고 학대하고 박해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박해에 맞서 싸울 힘이 없어서 소극적으로 적대감과 반감을 드러내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있는 입장에 있는 사마리아인이 박해를 하는 위치에 있는 유대인을 도와주는 이야기는 ‘이웃 사랑’과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잘 보여줍니다.
2)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을 모욕하면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신체적인 폭행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심부름꾼들이 먼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면서, 오만한 태도로 음식과 숙소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모욕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부름꾼들이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였다면, 그들은 모욕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크게 화를 냈을 것입니다.
둘 다 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마르 3,17).
겉으로만 보면 두 사도는 자기들이 당한 일은 곧 예수님이 거부당하고 모욕당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모욕당한 것에 대해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몹시 화가 난 두 사도는 엘리야 예언자가 했던 일을 사마리아인들에게 똑같이 하고 싶어 했습니다(2열왕 1장).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립시다.”,
또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려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일은 다음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루카 6,27-28)
우리도 살다보면 두 사도와 같은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악인들의 횡포를 참기가 힘들 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부당하게 보일 때...
그럴 때에 하느님께 ‘정의의 심판’을 간청하기도 하는데, 그 간청이 선을 넘어서 악인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빌거나 악인들이 큰 불행을 당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저주’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다른 사람을 저주할 권리와 권한이 없습니다.
가끔 예외적으로 하느님께서 직접 천벌을 내리시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청할 수는 없습니다.
저주 자체가 죄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죄인들이 멸망당하기를 바라지 말고,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
(야고 3,9-11)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화(聖化)의 여정 - 시종여일(始終如一)한 삶>
“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 주시리라.”
(시편 37,5)
가을의 절정이자 묵주기도 성월에 전교의 달 10월 첫날 오늘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어제는 성 예로니모 기념일이었고 글피인 10.4일은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꽃같은 성인들입니다.
꽃의 색깔, 크기, 모양, 향기가 다 다르듯 성인도 다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닌 꽃같은 분들입니다.
성 예로니모가 사막의 선인장꽃이라면, 성녀 소화데레사는 백합꽃 같고 성 프란치스코는 가을의 코스모스 같습니다.
다 다르지만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에서는 일치합니다.
지금까지 여전히 저를 행복하게 하는 좌우명 같은 <꽃>이라는 시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성인 축일은 기념하고 기억하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꽃같은 성인이 되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누구나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는, 날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성소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작은 길(Little Way)', '작은 꽃(Little Flower)'이라 불리는 성녀 소화데레사는 비록 꽃다운 나이 스물 넷에 선종했지만, 여전히 끊임없이 감동을 선사하는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성녀입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성녀를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불렀고, 비오 11세는 사후 2년만에 시성하였으며, 성녀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고, 비오 12세 교황은 성 조안 오브 아크와 함께 프랑스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녀를 보편교회의 박사로 선언합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아빌라의 데레사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성녀의 삶은 복음의 메시지에 매우 가까웠고, 고통 중에도 용기, 힘, 자기 희생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성녀의 내적 금욕주의는 단순한 외적 행위보다는 사심없고 무조건적인 순종에 기초했습니다.
작은 길로 알려진 성녀는 거룩함을 얻기위해서는 영웅적인 행동이나 위대한 행위가 필요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처럼 고백합니다.
“사랑은 행위들로 입증된다.
나는 어떻게 나의 사랑을 보여줄까?
위대한 행위들은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
내가 내 사랑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꽃을 뿌리는 것이고, 이 꽃들은 모든 작은 희생, 작은 시선과 말, 그리고 사랑을 위한 가장 작은 행동들이다.”
평범의 깊이를 살았던, 참으로 비범한 일상의 성녀, 소화데레사입니다.
임종 직전의 극심한 병고중에 감동적인 고백들을 소개합니다.
“나는 더 이상 고통을 겪을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
모든 고통이 나에게는 달콤하기(sweet) 때문이다.”
“나는 매우 작은 영혼이어서 주님께 작은 것만을 바칠 수 있다.”
“나는 천국에서 보낼 시간을 이땅에 좋은 일을 하는 데 쓰겠다.”
“내가 죽은 뒤에는 장미꽃이 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오늘 소화데레사 축일, 아침에는 꽃비같은 가을비가 내리네요.
사랑으로 ‘교회의 심장’이 된 소화데레사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예수님의 교회를 사랑했고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어제 참 많이 나눴던 10월 한달 행복하게 할 선물처럼 찾아 온 다음 시에 감사합니다.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떠오르는 고백시입니다.
“산 앞에
서면
당신 앞에
서듯
행복하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앞에서의 삶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은 없을 것이며 바로 성녀 소화데레사는 물론 모든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도상의 십자가의 길이 참 감동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서두의 묘사가 단호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예수님의 결의에 찬 씩씩한 모습이 참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성화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이자 하늘 향한 여정임을,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의 여정임을, 궁극의 영적승리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디가나 반대자들은 있기 마련이요,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통과하는 것이 거부되자 불같이 화내는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불필요한 마찰을 피한 후 지혜롭게 다른 마을을 통과해 예루살렘 여정에 오릅니다.
추호의 주저함이 없는 단호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처신입니다.
예수님도 아름답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소화데레사도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극도의 시련중에도 치열한 사랑으로 사명을 다했던 거룩한 분들입니다.
이 두 분과 더불어 언급하고 싶은 인물이 제1독서의 욥입니다.
욥의 치열함이 참으로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욥은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지만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는 않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는 사방을 에워싸 버리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사방이 막힌 절망적 암흑같은 극한 상황중에서 ‘어찌하여’로 계속되는 처절한 물음이 일종의 치열한 기도처럼 생각됩니다.
끝까지 하느님 끈을 놓지 않고 온갖 부정적 말마디로 기도하는 치열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참사람 욥입니다.
그동안 믿고 희망했고 사랑했던 하느님이 없었다면 아예 이런 넋두리 기도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살아 남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내 목숨처럼 사랑했던 독자(獨子)를 잃은 어머니가 원망할, 울부짖을 하느님이라도 계셨기에 죽음 같은 고통을 살아낼 수 있었다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욥의 수난과 시련의 삶에서 예수님을, 또 소화데레사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사’답게 결코 좌절하여 쓰러져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다하면서 치열한 아름다움을 살았던 세분들이요 우리 삶의 좌표가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시종여일,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좋은 도움을 줍니다.
“너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길이 살리라.”
(시편 37,2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우리의 본성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나요?>
강의할 때 종종 감동적인 영상을 보여줍니다.
지난번에는 네 살짜리 꼬마 아이가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를 그리워하는 영상을 틀었습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아빠에 대한 그리움에 도화지에 아빠를 그린 뒤에 “아빠, 보고 싶어.”라면서 그림을 자기 가슴에 안습니다.
이 영상에 신자들이 여기저기 훌쩍거리면서 곧 성당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떻게~~~”하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하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인간 내면에 깊이 심어주신 본성입니다.
하지만 이 본성을 벗어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무례하고 불친절한 사람,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 사람을 단순히 경쟁 상대로만 보려는 사람….
우리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본성인 사랑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사랑을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다시 찾으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도보로 사흘이 걸리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국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이지만, 민족적으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 취급하며 그들의 음식을 부정하다 하여 먹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던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한 4,,40-41).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개심보다는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는 유다인들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홀대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마음으로 유다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대우하는 유다인이나, 또 스승을 홀대한다고 벌하겠다고 하는 모습이나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본성인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본성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나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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