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다가오자 하늘이 시샘이라도 하려는 듯 사나운 바람이 몰아치더니 사방에 함박눈이 흩뿌려지며 천지가 눈 세상으로 변했다. 눈은 펑펑 쏟아지고 마당에도 길가에도 풍년을 암시하는 눈이 가득가득 쌓였다. 짚더미 위에도 눈다발은 내려앉고 붉은 털 새가 먹이를 찾으려는 듯 앙증맞은 모습으로 포롱포롱 날다 짚 속으로 파고들며 추위를 피한다.
다음 날은 설날이라 때때옷을 입고 아버지를 따라 쫄레쫄레 아랫말로 향하는데 까치가 반가운 듯 깍깍 거리며 짖어댄다. 형네 집에 들어서자 반가운 어른들과 사촌형, 사촌누나들이 확 눈에 들어오고 어린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인사도 못하고 아버지 뒤만 촐랑거린다. 잠시 후 차례를 마치고 떡국을 먹은 뒤 사랑채에 있는 현님이 언니 방으로 갔다. 현님이 언니는 이십 세가 넘어선지 얼굴이 볼그레 윤기가 돌고 머리는 반짝반짝 빛이나 한창 미모가 피어올랐다. 게다가 인자하고 상냥한 언니라 옆에만 있어도 웃음꽃이 피어나고 옛날이야기를 하다 제사 지내고 남겨둔 과자나 사탕을 종종 주어 언제나 언니가 마냥 좋았다.
그 날도 저녁이 되어 누나의 ‘별이 빛나는 밤’에 나오는 이야기를 신나게 듣고 있으려니 밖에서 낮게 들리는 휘파람 소리가 연이어 들창을 흔들고 얼마 후에는 톡톡 창문을 치더니 대답이 없자 빼꼼이 창이 열렸다. 어린 나는 궁금하여 열린 창문으로 신비스럽게 밖을 보자 어둠이 살포시 내려앉고 어제 내린 함박눈이 녹지안고 구석에 가득 쌓였다. 눈을 밟고 서있는 털보사내가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고 있다. 현님이 언니는 볼이 발그레 상기된 채 수줍어하며 창밖을 내다보자 사내가 성큼 다가선다. 둘은 자연스럽게 얼굴을 마주보고 몇 시간을 다정하게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가끔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채 날이 저물도록 사랑을 속삭이면 난 갑자기 심심하여 아랫목에 누워 잠이 들곤 하였다.
한 번은 솔공지 개울가를 건너고 있는데 털보사내를 만났다. 사내는 아는 체 하며 곱게 접은 종이쪽지를 현님이 언니에게 주라고 한다. 그리고 껌 한 개를 건넨다. 나는 신이 나서 껌을 씹으며 개울을 폴짝폴짝 뛰어 건너 달려가다 사내가 보이지 않는 모퉁이에서 쪽지를 펴 보았다. 낮 2시에 뒷동산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어린 나는 호기심에 미리 동산에 있는 참나무에 몸을 숨기고 현님이 언니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털보사내가 먼저 나타나고 조금 뒤 현님이 언니가 빨간 털모자를 쓰고 들국화처럼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둘은 오랜 연인처럼 다정히 손잡고 숲을 거닐며 속삭이다 가끔 현님이 언니가 유행가를 부르면 털보사내도 따라서 합창을 하였다. 숲을 지나다 둘은 가볍게 포옹을 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넘어서 미래를 그리려는 듯 행복이 넘쳐흘렀다. 그럴 때 내가 참나무 뒤에서 숨긴 몸을 휙 드러내면 현님이 언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따스한 손으로 내 작은 손을 감싸며 주변을 훈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 우리는 동산 비탈길로 가서 짚을 깔고 신나게 눈썰매를 탔다. 현님이 언니 허리춤을 잡고 비탈진 눈길을 쏜살같이 달리다 눈 위에 넘어지면 털보사내가 눈을 털어주며 신발도 가져다주었다. 겨울 짧은 해를 뒤로 하고 동산을 내려와 논둑길을 걸으면서 털보사내와 현님이 언니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갔다.
다음 해 봄이 되어 해 그림자가 길어지고 아지랑이가 작은 고개를 넘던 날 현님이 언니는 전통 혼례식을 올렸다. 현님이 언니가 가마를 타고 큰 고개를 넘던 날 나는 산마루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 연지 곤지 찍고 족두리를 쓴 언니가 나타나자 이제는 자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얼마 후 현님이 언니 혼례식은 치러지고 절을 하던 언니의 고운 얼굴에는 웃음 뒤에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털보사내는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절을 하고 나중에는 폐백을 어르신들에게 드리며 혼례를 마쳤다. 현님이 언니는 털보사내를 따라 아지랑이가 아직도 피어나는 큰 고개를 넘고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실개천을 울면서 건너 도회지로 시집을 갔다. 시골에 남은 어린 나는 한 동안 현님이 언니를 그리워하다 동산과 언니의 텅 빈 방을 털보사내처럼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았으나 차디찬 공기만 맴돌고 언니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무정한 세월이 한참을 무심히 흐른 뒤 이제는 나도 어른이 되었고 현님이 언니도 시골에서는 볼 수가 없어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친지 잔치집에서 정말 우연히 현님이 언니를 뵙게 되었다. 잔치집에서 본 언니도 이제는 많이 늙었고 세월의 무상함에 옛정도 식어 겨울의 차디 찬 공기만 내 마음을 아프게 짓눌러 잔치집에서 나와 혼자 어린 시절을 조용히 그려보며 현님이 언니의 처녀시절 고운 자태를 떠올려 보았다.
첫댓글 현님이 언니는 털보사내를 따라 아지랑이가 아직도 피어나는 큰 고개를 넘고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실개천을 울면서 건너 도회지로 시집을 갔다. 시골에 남은 어린 나는 한 동안 현님이 언니를 그리워하다 동산과 언니의 텅 빈 방을 털보사내처럼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았으나 차디찬 공기만 맴돌고 언니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