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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2일 연중 제16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제1독서 : 아가 3,1-4ㄴ
복 음 : 요한 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갑질하는 사람,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아랫사람을 함부로 하는 사람,
익명성이 보장되기에 인터넷 안에서 악성 댓글 달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을 우리는 절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이런 사람들과 반대의 모습, 즉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 남을 배려하며 밝게 웃는 사람 등의 모습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서 갑질하고, 함부로 대하고, 악성 댓글을 남기고,
그 밖의 부정적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으로부터 칭찬과 지지를 받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행동해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라고 하던데, 이렇게 욕 많이 먹으며 오래 산다고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특히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절대로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부정적 평가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불쌍한 사람임을 기억하며 측은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사람을 알려졌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 있었고, 부활하신 무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하던 제자들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자마자 뿔뿔이 흩어졌고, 죽음 뒤에는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그 호언장담은 공허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과 수난과 죽음에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함께 있었던 마리아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고,
당신의 부활을 처음으로 전할 수 있는 영광까지 주신 것이었습니다.
유한한 시간인 이 세상 안에서의 행복을 좇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시간인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행복을 좇겠습니까?
후자를 원한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뵌 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이 바뀐 것에 해당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새로운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요,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곧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15)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사실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곧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 ‘말씀은 더 이상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문화와 일본문화를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문화의 특징은 선을 넘는 문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정(情)’이라고 합니다.
선을 넘는 우리의 문화는 국악과 현대음악의 조화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선을 넘는 우리의 문화는 역동성과 다양성을 만들어냈습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정치인들에게만 맡기지 않았습니다.
정당에 참여하기도 하고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의 사명이며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려고 합니다.
명절이면 먹을 것을 나누곤 합니다.
최근의 한류 열풍은 선을 넘는 우리문화의 특징이 드러난 것이기도 합니다.
선을 넘는 우리의 문화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정이 지나치면 ‘간섭’이 되기도 합니다. ‘오지랖’이 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의 이런 간섭과 오지랖이 많은 사람을 ‘꼰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선을 넘는 문화는 외적인 다양성과 역동성은 크지만,
내적인 역량을 쌓는 데는 소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 문화의 특징은 선을 긋는 문화라고 합니다.
한국의 씨름은 씨름판 위에서 삼세판을 하지만
일본의 스모는 스모판에서 몰아내는 단판 승부입니다.
선을 긋는 일본 문화는 좀처럼 타인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정치에도 좀처럼 관여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선을 긋는 문화는 상당히 정적입니다.
사회가 정의로울 때는 평화를 유지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에 전념하기 때문에 기초과학이나 물리학에 큰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을 긋는 문화는 사회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선을 긋는 문화는 현대인들에게 고독과 소외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합니다.
선을 긋는 문화는 상대방의 호의에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이 원한다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을 자주 넘으려는 한국의 문화는
선을 긋는 일본의 문화의 신중함과 진중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선을 엄격히 긋는 일본의 문화는
선을 넘는 한국 문화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어떤 것인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넘는 경우가 많으셨습니다. 연민과 사랑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뜻을 따를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을 넘는 경우가 많으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셔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유다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워 도망간 제자들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선택을 존중하셨습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축일입니다.
오늘의 감사송은 막달레나 성녀의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막달레나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일 수도 있고,
오랜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일 수도 있고,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일 수도 있고,
부정한 행위를 한 후에 잡혀 온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전해주는 막달레나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죄 중에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막달레나는 지금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역시 나약하고, 부족하고, 쉽게 넘어지고, 원망과 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무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받은 것 많았던 제자들이 두려움에 숨어 지낼 때,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능력과 재능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열정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결심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찾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을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면 만난다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63,2)
이렇게 하느님을 찾고 목말라할 때 비로소 성인이요 참사람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참으로 이야기 거리가 무궁무진한 성녀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모든 성인들이 그렇지만 성녀는 정말 ‘사랑의 성녀’였습니다.
정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경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영적 우정, 영적 사랑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들의 사도’라 부르며 성녀께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사랑하면 만난다-예수님!-”,
어제오늘의 말씀을 얼핏 읽으며 묵상하던 중 떠오른 제목입니다.
너무 평범하며 자명한 진리의 발견에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면 찾게 되고 급기야 만납니다.
사랑하면 만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오늘도 역시 여러 단상들을 나눕니다.
사랑하는 자매들과 주고받은 메시지입니다. 지금도 향기의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참 좋은 사랑의 만남이었는지는 길이 남아있는 향기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오늘이 초복이네요. 습기 있고 더운 여름을 보내시려면 보양식을 드셔야 하는데. 늘 건강하셔요!”
“자매님, 문자 메시지도 참 좋은 영적 보양식이랍니다!”
“아멘! 언제나 감동을 주시는 울 신부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하면 압니다. 알기에 이런 영적 보양식 같은 덕담의 문자 메시지의 교환입니다.
또한 어느 자매와의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입니다.
-“무슨 꽃이 이렇게 신비롭습니까?”
“별수국입니다.”
“자매님을 닮았네요!”-
짧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이지만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사랑하면 만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요즘 “헤어질 결심” 영화에 대한 일화들이 넘쳐흘러
박찬욱 감독이 어떤 분인가 “나무위키”를 출력하여
공부하듯 줄 치며 읽어보니 장장 19쪽 분량이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것은 인물들에 대한 소개이며
특히 자서전이나 평전은 좋다 생각되면 눈에 띄는 대로 구입해서 읽곤 합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박찬욱 감독, 정말 천재이자 거장이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겼는지 불가사의였습니다.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린 남자, 모호필름의 대표랍니다.
모호란 단어도 재미있습니다. 한마디로 1만 영화를 본 영화광이랍니다.
정말 대작의 영화 한 편에 참여하는 그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정통하지 않으면
영화가 불가능한데, 한편도 아니고 그 많은 영화 과정의 그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공동체 삶의 대가요 달인이요 참 좋은 사람임이 100% 확실합니다.
절대 참 좋은 사람이 아니곤 이런 관계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직업에서의 대가일 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대가라 할 수 있는 박 감독입니다.
제가 놀라는 점은 바로 이점입니다.
정말 신화적 인물이었습니다.
“너나 잘해!” 바로 '친절한 금자씨' 영화에 나오는 대사도 박감독의 창안이라는 것입니다.
딸이 초등학교 숙제로 가훈을 알아 오라고 했는데
즉석에서 “아니면 말고.” 써줬다는 일화도 참 기발했습니다.
무수한 일화들이 참 재미있었고 묵상감이었습니다.
새삼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이것은 손흥민 축구선수의 아버지 손정웅씨의 자서전을 읽으며 확인한 진리입니다.
전자가 영화광이라면 후자는 축구광입니다.
어느 독서광에 대한 묘사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는 평소 인문학에 남다른 호기심과 탐구를 좋아해서
책을 안은 채 잠이 드는 포서면抱書眠 환자로 살아오고 있다.’
어느 경지에 이르게 하는 이런 ‘미칠 광(狂)’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이런 미칠 광(狂)은 그대로 ‘빛날 광(光)’이 됩니다.
그렇게 좋게 미치니 달인이요 대가요 성인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이는 제가 자주 되뇌이는 말입니다.
제대로 하느님 사랑에 미친 이들이 성인들입니다.
이들 중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이 제 소망입니다.
만남 중의 만남이 파스카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사랑했기에,
사랑의 대가, 사도들의 사도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생전에도 늘 그림자처럼 예수님을 추종했던 성녀였기에
중요한 결정적 순간마다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제1독서 아가서의 신부는 그대로 예수님을 그리며 찾는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가리라. 나는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또 하나의 아가서가 재현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의 하와와 오늘 복음의 부활 동산의 마리아 막달레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알고 묻는데 정확했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은 새로운 부활동산의 정원지기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때 만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님과의 극적 만남은 늘 읽어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에 감격하신 예수님은 드디어 자기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흡사 양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듯합니다.
참으로 두 분의 사랑은 ‘스승과 제자’, ‘목자와 양’의
순수한 영적사랑의 우정관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지는 장면이 이를 입증합니다.
남녀의 애정愛情이나 연정戀情을 하느님 안에서
영적 사랑의 우정友情관계로 승화시킬 때 참 아름답고 영원합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내 형제들’이란 말마디에서 예수님의 형제애兄弟愛가 빛납니다.
참으로 당신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최초로 나타나셨고
이 기쁜 소식을 당신 제자들이자 형제들에게 전한 성녀이기에 사도들의 사도라 칭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6년
마침내 오늘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격상시키셨습니다.
약 1500년 전 교황 대 그레고리오의 멋진 강론 중 일부를 나눕니다.
“자, 보십시오. 인류의 죄는 생겨나온 바로 그곳에서 제거됩니다.
낙원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죽음을 마시게 하였고,
무덤에서 여자는 남자들에게 생명을 선포하며,
죽음을 가져다주는 뱀의 말을 전하였던 여자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류에게 언어만이 아니라 사물로도 말씀하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여자의 손에서 죽음의 잔을 받아들였으나, 너희는 여자에게서 생명의 잔을 받아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만난 성녀처럼,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참으로 사랑하는 부활동산의 정원지기인 주님을 만나,
주님 사랑의 성체를 모심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혜롭고 복된 미사 시간입니다. 아멘.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함께 있으면서 악의 폐해가 있지만
결국에 악은 가려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자연 식물로서의 가라지는 결코 밀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악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인간은 언제나 회개하면 선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두라고 하신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이다.
영혼 깊이 좋은 것이 뿌려진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 좋은 씨를 뿌린 이는 ‘말씀’이신 하느님이시다.
말씀이신 하느님은 이 세상에 계속 말씀의 씨를 뿌리신다.
이 말씀의 씨앗은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좋은 씨앗이며
우리 인간은 저마다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는 삶은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즉 주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나태한 때에,
악마는 좋은 씨들 사이에 악한 생각들이라는 가라지를 덧뿌린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1)고 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악한 자가 깨어 있지 못하는 그때에 가라지를 뿌렸고,
악에서 돋아난 그것들은 악한 자의 자녀이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살고 있다.
밀과 가라지는 주님의 밭이라고 하는 교회에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다.
사람과 진짜 밀과 가라지는 다르다.
밭에 있던 밀은 가라지가 될 수 없고, 가라지는 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밀이었던 것이 가라지가 될 수도 있고,
가라지였던 것이 밀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내일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종들처럼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절) 하면서
가라지를 뽑거나 잘라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한다.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29절)
다른 사람을 쉽게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늘 악으로 타락하였다 해도, 내일 진리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30절)고 말씀하신다.
또 가라지는 싹이 튼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대가 자라나지 않았을 때는 밀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것은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세상 종말”(마태 13,39) 때에, 즉 심판 때에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나라 전체에서 가라지들을 모두 거두어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때서야 그들은 자기들이 자는 동안에 받아들인 것이
악마의 씨앗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울부짖으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2).
그리고 의인들은 그저 빛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라고 하신다.
항상 깨어 있는 삶으로 좋은 씨를 받고, 가꾸고 키워서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자.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세상에서 소중하고 고귀한 것을 내 놓으라면 남녀간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이나 드라마, 음악, 미술에 이르기까지
주 주제 중에 하나가 남녀간의 사랑인 것입니다.
가에따노 도니제띠(Caetano Eonizetti, 1797-1848)가 쓴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제 2막에서
주인공, 네모리노가 부르는 아리아, ‘남 모르게 흐르는 눈물: Una furtiva lacrima.’의 주제도
결국 한 시골의 순수한 남녀의 사랑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한때 교회 안밖으로 시끄럽게 만들었던 댄 브라운이 쓴 ‘다빈치 코드’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남녀 간의 사랑으로 만들어 갑니다.
성경의 내용을 보더라도 마리아가 스승께 대한 감정을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특징이 허구의 세계를 그려 나가며 세상 흥미를 돋군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소설이 사실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그 파장은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이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선,
천사의 존재와 같이 하느님 사랑과 평화를 누리는 인간의 지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으로 펼쳐나가는 아가서의 표현을 보아도
이 성경이 정경논란의 토막 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 있게 해줍니다.
한 여인은 자신의 연인을 찾아 나섭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아가 3,1)
그리고 이 여인은 성읍의 거리와 광장을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가서의 저자는 끝맺음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3-4절)
유대인들의 이 사랑하는 연인을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과의 사랑 관계로 보려 했고,
그리스도교 해석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보려 했지만,
그 공통적인 표현은 자연스러운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인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신원에 대해서 교회의 역사에 보면 논란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한 죄 많은 여인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아서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발을
마리아는 자신의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나서
향유를 부어 바르는 것입니다.(루카 7,36-38)
요한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리사이의 집이 아닌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에서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위한 잔치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는 것입니다.(요한 12,1-3)
마태오와 마르코는 라자로의 집이 아닌
베타니아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 26,6; 마르 14,3).
마태오, 마르코, 루카와 요한이 전하는 이야기를 놓고
서로 다른 표현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해석하는 데에서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각각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든지,
아니면 마리아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게 표현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베타니아 마리아와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가 ‘동일인물’인가
아니면 ‘동명이인’가도 확실하게 규정하기는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루카는 마리아 막다레나가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루카 8,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마리아에 대해서
마태오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혼자로(마태 28,1),
그러나 마르코는 마리아 막달라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함께(마르 16,1)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요안나, 야고보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루카 24,10)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보다 후대 쓰여 진 요한복음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일을 전하고 있는 다른 복음들과는 달리
더 상세하면서도 마리아와 예수님과 오고 갔던 긴 대화도 적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금요일 오후,
안식일이 시작하는 시간 쫒기며 사람들이 서둘러 무덤에 모신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아직 날이 어두울 때에
스승님의 시신에 향료라도 발라 드리려고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여인의 연약한 힘으로는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울 것을 걱정하던 마리아에게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 집니다.
무덤은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신도 없어진 것입니다.
기가 막힌 마리아는 그만 울고 맙니다.
그때에 마리아의 뒤에 서 계시던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글 찾느냐?’하고 물으시지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그곳 정원지기로 알았기에 그분에게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20,15)라는 말을 건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리아’라고 정답게 부르시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스승님이라는 뜻인 ‘라뿌니’라고 반갑고 놀라운 소리를 치고 맙니다.
그녀는 스승님의 지시대로 기쁨에 젖어 제자들에게 서둘러 달려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면서,
스승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난 일과 하신 말씀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이 전하는 부활 후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스승에 대한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묻어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서 전하는 최대의 존경의 표시인
그분 앞에 엎드려 발을 만지는 표현은 없지만, 주님께서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라는
주님의 표현을 미루어 보아 그녀도 예수님의 발을 만졌던 것입니다.
엎드려 발을 만지는 것은 그 당시 최대의 존경과 애정의 인사법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라뿌니’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거나
구미에 당기는 이성 간의 감정이 아닌 스승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존중하고 마리아를 신앙인의 모델로 삼았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시달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죄인이라 하더라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분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용기 있게 또한 행복하게 해줍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