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장의 황해해전 패배
乾 명보 p.622 이홍장 1823년 2월 15일 4대운
94 84 74 64 54 44 34 24 14 04 時 日 月 年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己 乙 甲 癸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子 丑 卯 亥 寅 未
1823년 2월 15일 4대운. 22세 甲辰 1844년부터 증국번의 지도 아래 베이징[北京]에서 관리생활을 시작했고 25세 丁未 1847년 진사가 되었다. 48세 庚午 1870년 수도 베이징에 있는 직례성의 총독 및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로 임명되었다. 이후 25년간 재임. 71세 甲午 황해전투 패배. 72세 乙未 시모노세키 도착 후 일본의 한 청년에 의해 피격 부상당한 채로 불평등 조약 체결. 79세 辛丑년 1901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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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은 己 재성이 용신이고 丙 식상이 희신이다.
평생 조심해야 하는 글자는 水木 인비이다.
己 재성이 잘 작용하면 권위가 높아지고 태평하나
火土를 잃으면 불리해지고 생을 마친다.
이 명조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癸 인수이다.
이 글자는 이홍장의 일을 망치고 수명을 앗아가는 한 글자이다.
가장 화려운 운은 서방 金 관성운이다.
왕목을 다스려서 25년간 총독 재임하게 했던 운이다.
丁未丙午 식재운은 길운같이 보지만
이홍장에게 丁未 丙午는 평생 한으로 남는 대운이다.
癸 인수에 의해서 연속 丙丁 식상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72세 甲午년은 甲 겁재가 작동했다.
흉대운 흉세운에 전쟁에 뛰어들은 것이다. 패배가 분명한 운이다.
이홍장도 그런 느낌을 알았는지 우유부단한 자세로 전쟁에 임했다.
이 패배는 국가적으로나 개인 적으로나 평생의 큰 실패였다.
42세 甲子년은 서방 吉 대운 凶 세운이다. 하늘이 안전을 보장할 때이므로
태평천국운동을 제압하는 군대 막료로 활동하면서 고생은 있었으나 死傷은 없었다.
대운은 팔자이고 세운은 원국과 대운의 시점을 보는 것임을 잊으면 안된다.
丙午 대운 역시 丙이 癸印에 의해 파괴되므로 흉대운이다.
79세 辛丑년, 丙 식상이 이미 손상되었으로
辛丑 편관은 너무나도 예리하고 깊은 상처를 주는 운이라
사망에 이르렀다.
원국을 잘 보면 丙午 자체가 사망 시점임을 알 수 있다.
만일 이홍장이 吉운에 조선에 왔다면
이순신처럼 청일전쟁은 승리로 이끌었을 것이고
조선은, 일본을 물리친 淸의 예속국으로 계속 남아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15년 뒤, 1910년 나라를 일본에 고스란히 내주는 庚戌 국치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홍장의 운세에 따라 조선의 운명이 바뀌었으니 참 안타까운 대한민국이다.
청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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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내용
72세 甲午 1894년 7월 조선에서 청일전쟁(1894~95) 발발. 원세개의 명으로 이홍장의 북양(北洋) 해군이 대부분의 전역(戰役)을 담당했다. 이홍장은 (李鴻章)은 직례제독 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했고 일본은 6월 하순까지 8,000여 명을 경인(京仁)간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7월 25일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했던 청국군을 쉽게 격파해 버렸다.
9월 15∼17일 평양에 집결한 청국군 1만 4000명을 격파하고, 17일 해군이 황해전투에서 청국함대를 격침시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청군 14척 대 일군 12척 전쟁)이렇게 평양과 황해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 11월 6일 진저우 성[錦州城] 점령,11월 22일 뤼순[旅順]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청나라는 할 수 없이 강화조약을 요청하기에 이르른다. 이 청일전쟁의 패배로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의 조차권과 막대한 규모의 전쟁 보상금을 일본에게 주고, 서구 열강들이 불평등조약에 의해 누렸던 모든 특권을 일본에게도 제공하며, 또 조선의 독립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홍장은 청일전쟁을 회피적인 태도로 임했다. 평양 전쟁은 남의 일이라 대충하다 후퇴하라했으므로 1만5천중에 260여명의 사상자가 나자 본토로 후퇴했고, 황해해전도 방어에 치중하라했으므로청의 함선 14척 중 3척이 가라앉자 (당시 일본 4척 침몰) 뢰안항으로 후퇴한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승기를 잡아서 청의 본토까지 점령한 것이다.
73세 乙未 1895년 4월 17일 강화회담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 1895년 4월 17일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전쟁 비용보상등을 보상했어야 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반면, 조선과 중국은 일본 및 열강의 수탈대상 및 분할 경쟁의 대상국이 된 것이다.
그때 전권대신으로 참석했던 이홍장은 한 일본인 애국청년의 피습으로 부상당했다. 이 사태로 일본인들의 동정을 자아내게 되어 가혹한 강화조건을 다소나마 완화시킬 수 있었다. 청일전쟁 패배 후 북양파는 대거 쫓겨났다. 다만 이홍장만 뒤에 다시 불러들였다.
첫댓글 기토를
수문장으로.보셨군요
이런사주가. 저한테 왔다면
저는. 아마도. 종으로
봤을거 같습니다,
네,,,,종격 정의가 참 어렵드라구요.
그래서 전 100%가 아니면 종격으로 안보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