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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15. 대전주교좌성당. 오전 11시. 성모안식. 김요한주교별세 27주년 기념 감사성찬례. 유낙준주교.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신 김요한주교님!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15:19).”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둔다는 것은 이 세상 모두 어떤 사람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 바우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은 죽음이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물리친 삶이라고 주장했습니다(1고린 15장 참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과 사가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선의 잣대가 그리스도를 믿고, 믿지 않고라는 것입니다. 한국관구설립시 모토가 “그리스도가 우리민족의 생명이다”였습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으면 생명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에만 생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까지 연결되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만 생명이라면 불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Eternal Life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공회 대전교구 초대주교인 존 찰스 시드니 데일리교구장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삶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만의 생명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생명까지 이어질 생명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례하신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희망으로 하여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아멘.
John Charles Sydney Daly(1903.1.13. 런던 생, 케임브리지대졸, 더람교구서 사제서품(25세), 1935.5.1. 런던 제성인교회서 주교성품(34세), 감비아, 가나에서 20년간, 한국서 12년간 주교직 수행(1955.12.25. 한국주교승좌식. 1968.1.15. 대전주교좌성당서 마지막 설교. 1993.8. 15.소천(92세)). 3번째 교구 한국교구 5대주교(1955.12.24.-1965.5.27.).(10년간(54세-64세),
4번째 교구: 대전교구의 초대 교구장주교로 임명(1965.5.27.- 1968.2.26.(2년 9개월, 64세-67세). 54세에서 67세까지 한국서 주교직 수행(12년 2개월간). 34세에서 67세(1935.5.1. -1968.2.26. 주교직수행(32년 11개월간 주교직 수행). 성공회 선교의 토착화, 자정, 자립, 자전- 3자운동 전개(중국의 자치, 자양, 자전과 유사).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교구장주교
초대, 존 데일리 John Daly 김요한주교, 1965년 5월 27일~1968년 2월 26일 (2년 9개월)
2대, 리처드 러트 Richard Rutt 노대영주교, 1968년 2월 27일~1974년 5월 31일 (6년 3개월)
3대, 배두환 마가 주교, 1974년 6월 1일 ~ 1987년 10월 13일 (13년 4개월)
4대, 윤환 바우로 주교, 1987년 10월 14일 ~ 2003년 1월 24일 (15년 4개월)
5대, 신현삼 안드레 주교, 2003년 1월 25일 ~ 2007년 11월 9일 (4년 10개월)
6대, 권희연 미카엘 주교, 2007년 11월 10일 ~ 2014년 12월 5일 (7년 1개월)
7대, 유낙준 모세 주교, 2014년 12월 6일 – 2020년 8월 현재 (5년 9개월 진행)
* 오동균키프리안사제- 학생운동가, 농민운동가출신사제로 신학박사로 공부하는 대전교구 사제원 원장, 초대 대전교구교육원장, 생태운동을 중심으로 마을사목으로 새로운 신학을 현장에서 펼치시는 파이어니아선교활동을 하심.
* 김호욱디도사제- 말래시아 교회와 20여년간 친교와 아프리카 김요한 주교님의 선교지였던 가나(씨릴주교)와의 친교로 우물파기 지원과 학교세우기 지원과 성도간 교류와 농촌지도자 양성교류로 파트너선교로 국제교류의 경험이 깊고 전통적 성공회 선교를 하심.
* 남재우미카엘사제- 윤환바우로주교님의 영향을 많이 받아 걷는 모습부터 비슷한 사제. 성공회 전례의 아름다운 사목을 펼치심. 기도하고 싶은 성당을 만드심.
* 조정근 프란시스사제- 켈틱기도와 새벽기도와 전통적인 심방으로 기도하는 성공회 사제의 표상이 되심. 자신과 맞는 성당에서 최고의 달란트를 움직이시는 사제.
* 전재명 프란시스사제- 전형적인 충청도 사제로 역동성을 최고로 펼칠 아파트중심의 사목준비를 강하게 하시는 신선한 영혼을 소유한 사제.
* 소진원요셉사제- 그리스도의 영성을 사회영성화로 표현하는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바친 사제.
* 전경석프란시스사제- 복음만을 외치며 현실 사목현장에서 복음을 세우고자 하는 우직한 사제.
* 박문수미카엘사제-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삶에서 하느님의 부르신 뜻만을 세우시는 사제로 부부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품는 사목을 보여주는 성공회의 고결함을 간직한 사제.
* 이윤기미카엘사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젠틀한 사제.
* 노기보니콜라사제- 순수한 영혼으로 살고자 심하게 고민하는 현실에서 사는 총사제
* 김경현스테파노사제- 자신 내면의 그리스도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는 총사제
* 이정운페트라사제- 삼위일체 하느님의 협력적인 관계를 이끌어내는 총사제
* 이현동야고보사제- 예수님만을 영적 안내자로 모시고 사는 사목신학적인 사제
* 한상윤프란시스사제- 그리스도를 향한 순례자 사제로 사는 사제
* 한용걸프란시스사제- 다른 사람을 한없이 껴안고 사는 프란시스 사제
* 박재원아타나시우스사제- 복음을 기쁨으로 사는 교무국장사제
* 김경준안드래사제- 하느님의 부르심에 한걸음씩 힘차게 걷는 사제
* 조종필프란시스사제- 아침이슬처럼 빛나는 성도들을 양육하는 사제
* 국충국아모스사제- 욥 같은 사제
* 임내규요나사제- 완전하신 하느님을 향하는 사제
* 이쁜이에스터사제- 기도하는 수도하는 사제
* 이기찬이삭사제- 신앙의 명가를 이루는 사제
* 김희영드보라사제- 빛과 소금인 성교회의 사제
* 장동윤미카엘사제- 어디서나 언제나 영혼이 순수한 사제
* 주명철어거스틴사제- 하느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따르는 사제
* 구본균사무엘사제- 고난 속에서 영광을 보는 복음전파의 사제
* 오재광디모테오사제- 훈련하는 사도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사제
* 김규돈아오스딩사제- 수도사제
* 김진호 크리소스톰 요한사제- 말씀 선포로 주님을 찬양하는 사제
* 정기용사무엘사제- 주님과의 우정이 깊은 복음전파의 사제
* 김승태요한사제- 무릎이 닳도록 기도하는 복음전파의 사제
* 김준영사베리오사제- 하느님께 길을 묻는 복음전파의 사제
* 김윤경힐렐사제- 주님이 쓰시는 복음전파의 사제
* 김민규베네딕트사제- 성무일도로 교회를 세우는 복음전파의 사제
* 이현우요한사제- 주님의 온유와 주님의 평화의 사제
* 채창완야고보사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제
* 심규홍안토니오사제- 마을사목으로 주님께 감사를 올리는 사제
* 김대식토마스아퀴나스부제- 하느님을 경험하는 부제
* 김완술명예부제- 그리스도의 향을 내는 우직한 부제
* 이현우바우로사제- 성공회 춤추는 선비사제
* 전재식사무엘사제- 주님만 선포하는 사목의 달인 성공회 사제
* 유낙준모세주교- 열성으로 이성을 세우려는 나눔의집 사제
3줄 정도로 우리교구의 동료사제를 설명한다면 어떤 글들로 표현이 될까요? 외부 사람들에게, 또는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 교구사제를 설명한다면 더 붙일 말들은 무엇일까? 그러한 말들을 3줄 정도로 세시간 정도로 시간을 내서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3줄로 써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 사제이지만 복음전파를 위하여 때로는 동료사제를 표현할 선전문구를 어떻게 적으면 좋을까요?
그리고 어떤 말들을 붙여야 하는데 그 말을 뺀 이유는 무엇인지를 고민도 해 보시구요.
# 인내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사제라고 한다면 수치를 가진 사제일 것입니다.
# 지난 주에 아픈 이야기를 한 성도를 주일에 만나서 아픈데 대한 기도를 한 얘기보다는 다른 얘기만 한, 기도도 하지 않은 사제이면 낯이 두꺼운 사제였을 것입니다.
# 하느님 보다는 자신을 드러내려고 무진장 애쓴 교만한 사제를 자신에게서 봅니다.
# 못한 부정적인 것에는 집단 이름으로 하고, 개인의 잘한 점은 자신의 이름만 내세우는 수치한 사제가 이미 되어버렸습니다.
# 교구공동체의 관계적 사고보다는 자신의 게토를 만드는 사제에게서 숨이 막힙니다.
# 처음에는 거창하지만 이후에는 속이 빈 모습의 불쌍한 사제가 됩니다.
#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하여서 실제의 일을 제대로 풀지 못하는 어려운 사제가 되었습니다.
# 솔직한 평가받기가 두려워 항상 도망만 다닌 완결하지 못하는 사제가 이미 되었습니다.
# 고참은 되었는데 고참답게 훈련이 덜 되고 조직적이지 못하고 관용적이지도 못한 울퉁불퉁한 사제입니다.
# 먼저 자기를 주장하는 사제이지만 바로 후에 회개하는 사제입니다. 듣는 것이 먼저이지 못한 사제입니다.
다음은 김요한 주교님의 편지에서 나온 글입니다.
1.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사랑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려운 처지에서 살고자 애쓰시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을 전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삶의 기본입니다. 나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제입니까? 오늘은 어려운 처지의 누구를 위하여 기도합니까?
2. “우리 대부분이 할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그분께로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초대교구장이신 김요한주교님께서 성공회 교구사제가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 이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올리는 것이 사제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태백광산으로 가신 이유입니다. 대백선교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3. “교회가 절제, 극기, 정결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요소를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삶에 인간적으로 가장 영웅적이고 희생적인 삶으로 대응하는 것은 절제와 극기와 정결입니다.” 많은 풍요를 누리는 현대인에게 절제와 극기와 정결은 이상한 단어일 것입니다만 그리스도인에게는 귀한 단어라는 것입니다. 특히 사제는 세상과 구별짓는데 이세 단어가 가장 중심이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4.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신다는 기쁨을 느낀 1958년 람베스회의였습니다.” 영국에서 30년전이면 1928년정도에 가게서 콘돔을 파는 것을 교회가 열렬히 반대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교회가 받았들였고, 이제는 가족계획을 동의하는 람베스회의였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방향을 선도하는 2022년 람베스회의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문제로 갈등을 갖지만 역시 새로운 세상을 여는 람베스회의가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5. “4.19혁명은 학생들이 부패와의 싸움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4.19 당시 영국에 계셨던 김요한주교님이 TV를 보시다가 이 장면을 보시고 귀국하셔서 미국장군이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라고 했을 때 김요한주교님은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와이서 독립운동을 하고 하와이서 죽은 이승만대통령을 죽기 직전에 아버지연배와 같은 대통령을 하와이 요양원에 가서 뵈었는데 울기만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신 김요한주교님의 모습이 성공회 주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김요한주교님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되어 사신 주교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되어 산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다른 성경번역).” 하느님의 목표가 세상구원이라면 우리 사제의 목표도 세상구원입니다. 하느님과 나의 목표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제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코스를 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정해 주신 코스를 따라 길을 걷는 사제입니다. 우리에게 코스를 정해주신 하느님이 우리의 방향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정해주신 코스와 방향과 일치되면 됩니다. “네 즐거움을 야훼에게서 찾아라.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리라(시편37:4).” 우리 인생에서 똑같은 실수를 하는데 그 실수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과 일치된 길을 걸으면 됩니다. 소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겨 큰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의 큰일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첫째, 우리 앞에 다가선 가장 큰 일은 예배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높이는 행위가 예배입니다(시편34:3,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라(영어직역)).” 예배를 통해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잃은 사람들을 찾는 인생이면 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루가19:10).” “나는 길잃은 사람을 찾아 돌보러 왔다(마태15:24).” 하느님이 나를 보내신 곳이 어디입니까? “나를 이곳에 보내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창세45:8).” 어려운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그곳이 하느님이 보내주신 곳입니다.
유대전통에서 제단에 두 개의 촛불을 켭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기억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이 보내주신 곳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율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신명5:15 참조).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여 하느님의 위대함을 잊지마라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이 예배이고 고통에 처한 사람을 돌보는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기원전 3천년경부터 촛불을 켰습니다. 그러니 약 5천년동안 인간은 촛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화촉을 밝힌다는 말이 좋습니다. 생일촛불을 밝히는 일도 좋아합니다. 복음을 선포할 때 항상 촛불을 켜놓습니다. 어느 주교님은 복음강의를 할 때마다 촛불을 켜놓고 하십니다. 아마 사제의 강의시에도 촛불을 켜놓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강의를 한다면요.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선포하신다면 당연히 촛불을 켜야 합니다. 그렇게 촛불은 특별한 가치를 담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니 카이로스의 시간이 됩니다. 일상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변화되는 시간이 됩니다. 그 자리에 사제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일상을 특별한 시간으로 만드는 자리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그들을 들어올려 하느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촛불이 켜지는 순간 분주함이 멈춥니다. 평온한 공간의 시간이 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8:12).”
대전교구의 초석을 놓으신 김요한주교님의 언행을 연구하여 우리의 사목에 적용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사목공부가 될 것입니다. 좋은 선생님을 둔 것만으로도 복있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겨야 다른 사람도 귀하게 여깁니다. 귀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귀함을 모른다면 말이 안 됩니다. 김요한주교님 27주년을 맞아 하느님의 참 좋은 도구로 그분을 쓰신 것에 감사를 올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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