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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욥기의 말씀 38,1.12-21; 40,3-5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12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
13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
14 땅은 도장 찍힌 찰흙처럼 형상을 드러내고 옷과 같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15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빛이 거부되고 들어 올린 팔은 꺾인다.
16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17 죽음의 대문이 네게 드러난 적이 있으며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18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19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20 네가 그것들을 제 영토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의 집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 그때 이미 네가 태어나 이제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알지 않느냐?”
40,3 그러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5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 안에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에 대한 불행 선언’(13-15절) 부분과 ‘파견 받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파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16절)는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도 회개하지 안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도 여전히 회개하는 일에는 더딘 저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애태우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6)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얼마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고,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동시에 파견 받은 이는 파견 받은 분에게 메여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파견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는 너희를 보낸 분께 매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매달리지 말고 보내신 분께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말씀’을 품고 있어야 하고, ‘말씀의 영’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파견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 10,20)
그렇습니다.
파견 받은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루카 10,16)
주님!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명심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하여도, 언제나 저를 보내신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말씀을 품고, 당신의 영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우상인가, 이상인가?>
"내게 프란치스코는 우상이었다.
이상이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돌아보면 우상이었다."
이것이 사부 프란치스코 축일을 맞은 저의 소감입니다.
인간적으로 얘기하면 운명적인 만남이지만,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그것이 성소였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수도원에 들어와 책도 아니고 선배들로부터 처음 얘기로 들은 프란치스코는 그야말로 저를 뿅 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니!'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저였지만, 하느님은 너무 멀고 예수님은 너무 무거운데 비해, 프란치스코는 인간미를 풀풀 풍기면서도 초월을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뒤로 밀리고 프란치스코가 저의 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저의 이상이 아니고 우상인 이유입니다.
우상이나 이상이나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존재라는 면에서는 같은데, 추구하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집착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매이게 하며, 주님을 가리키고 따르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하느님과 주님을 대신하고 가리는 것이 차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저를 집착케 하고 매이게 하고 주님을 가리는 존재가 프란치스코였기에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데 있어서 당연히 사달이 났지요.
하느님을 잃고 길을 잃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가야 할 곳이고 예수님은 그 길인데, 갈 곳도 일고 갈 길도 잃은 겁니다.
프란치스코처럼 되는 것이 돈 버는 것처럼 저의 성취, 욕심, 집착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제가 가야 할 종착역이 아닙니다.
종착역은 하느님이고 프란치스코는 그리로 가는 길의 한 역일뿐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차가 종착역을 향해 가면서 프란치스코라는 역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태우는데, 저도 이 역에서 예수 기차에 올라탈 사람 중의 하나지요.
기차에 올라타고 기차가 떠나면 역도 떠나게 마련입니다.
불교 우화가 얘기하듯 강을 건너고 나면 배를 버려야 합니다.
그냥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였으니 너무도 고맙지만, 아무리 고마워도 그 배를 계속 메고 다녀서는 안 되겠지요.
사실 프란치스코도 프란치스코라는 역을 우리에게 남겨줬지만 그도 기차를 타고 떠나버려 이제 그 역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집착하고 매였던 저와 달리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사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떠나고 난 뒤 프란치스코와 같이 쳐다보던 하늘을 보니 하늘로 오르는 계단 꼭대기에 프란치스코가 이미 올라있었습니다.
그래서 클라라도 프란치스코가 먼저 올라간 그 하늘계단을 쏜살같이 올라가 프란치스코의 젖에서 젖을 먹었더니 그 젖이 달콤할 뿐 아니라 황금빛이 났습니다.
클라라가 본 이 환시에서 계단은 천국의 계단이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계단이며 완덕의 계단입니다.
겸손이라는 맨 및 계단에서 시작하여 사랑이라는 맨 위 계단까지 오르면 사랑이신 하느님께 도달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계단입니다.
우리가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갔기 때문입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참으로 사랑한다면 뭘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해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을 같이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말을 잘 듣는 사람>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물을 찾아가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살았다면 말을 잘 들은 사람이요, 죽었다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코라진, 베싸이다, 지역은 가파르나움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대를 형성하고 있고,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들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생활하는 데 더뎠습니다.
많은 은총을 입은 만큼 새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경고합니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루카 10,15)
사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 지역으로 유다인들은 이 동네 사람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빠져버린 곳으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기네 동네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보다도 못하다고 꾸중하신 것입니다.
그런 꾸중을 듣는 것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속을 본다면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쓴 게 약이 된다는 말을 새삼 생각합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자녀들보다도 못하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1코린 4,5) 하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에제 18,30.로마 2,6)
그러므로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행하였을 때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을 봅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다.'
(창세 6,22)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여호 11,15)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욥기 1,22)
히즈키야는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 주셨다.'
(2열왕 18,6)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51)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8)
우리도 말 잘 듣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5) 하셨으니, 사랑하는 삶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샘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듯,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주님의 품에 머물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 병신 여우 짓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는 것>
삶의 궁핍함과 어려움에 지쳐 무작정 숲속을 거닐던 사나이가 다리 잃은 여우를 보았습니다.
‘저래서 어떻게 살아있을까?’ 이렇게 궁금해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사냥한 먹이를 물고 들어와서는 실컷 먹고도 여우가 먹을 고기를 남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은 여우를 먹이셨습니다.
사나이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크신 선의에 깊이 탄복하며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하느님은 저런 여우도 살리시는 분이시구나.
하물며 당신을 믿는 나야 얼마나 잘 먹이시겠나.
지금까지 먹고 살 걱정만 하며 살아온 내가 부끄럽구나.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사나이는 여러 날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며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며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문득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 거짓의 길에 들어선 자야.
참을 향해 눈을 떠라!
병신 여우 흉내랑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아라.”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시어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그분의 기적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은총만 바라고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회개란 받기만 하는 존재라는 처지에서 나도 예수님처럼 내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성공적인 학자이자 신학자였지만 자신의 감정적, 영적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불안감과 내면의 혼란을 고려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지원에 압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그에게 보여준 사랑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이에 따라 영적인 불균형이 생겼습니다.
나우웬의 심오한 마음의 변화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그림을 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형에게서 자기 모습을 봅니다.
동생처럼 회개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양심은 받은 것에 보답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사실 지금까지 받기만 하였지 보답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며)에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바뀔 때만 자신의 영혼이 진정한 치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수용에 대한 나우웬의 이해의 변화는 그가 자신의 권위 있는 학문적, 신학적 경력을 뒤로하고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인 라르쉬(L'Arche)에서 살고 일하기로 결정한 데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나우웬은 어떤 세상적인 방법으로도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평안을 찾았습니다.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받을 가치가 있거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사랑을 주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여덟 살 이후로 손과 발이 없는 것에 좌절하여 자살을 세 번씩이나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망 전도사로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강사로 살아가면서 이미 받은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부족하게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에서 갚아나는 삶을 사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은총을 받으면서도 끝내 이런 회개가 이뤄지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오늘 멸망을 예고한 도시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무소유의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대자유의 삶을 찾은 프란치스코>
가톨릭 성인(聖人)이면서도 타 종교 신자들뿐 아니라, 무신론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성인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개척한 성화의 길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는 복음서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여러 면모 가운데, 머리 두실 곳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예수님, 그래서 그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으셨던 대자유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흠모하고 추구했습니다.
인간적 나약함과 유한성을 딛고, 그 위에 펼쳐진 자기 극복과 자기 해방과 자기 이탈을 위한 프란치스코의 하루 하루 여행길은 참으로 위대하고 빛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의 성화(聖化) 여정을 바라볼 때 마다 큰 감탄과 함께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발밑을 내려다보며 큰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 자신으로부터 한번 이탈해보겠노라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보겠노라고, 갖은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보겠노라고 발버둥쳐 왔지만 아직도 제자리 걸음입니다.
초심자 시절 지니고 있었던 악습을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 일상적으로 짓던 죄를 아직도 같은 방식으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탈, 자유, 해방...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프란치스코의 삶이 대단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한올 한올 얽히고 꼬인 실타래 풀듯이 인내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의 문제나 약점들을 극복해나갔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을 머릿속이나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행해나갔습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대 성인 프란치스코에게도 젊은 시절의 흑역사(黑歷史)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지 아십니까?
사실 그의 본래 이름은 죠반니 베르나도네(Giovanni Bernadone)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자수성가한 포목상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부자 아버지 덕분에 호화판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시 남자 청년들의 로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옆 나라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청년 문화 중에 하나였습니다.
멋진 기사(騎士)가 되고, 잘생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아름다운 여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리던 여인을 찾게 되면, 미리 준비해둔 낭만 가득한 음유시를 한편 멋드러지게 읊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프란치스코 역시 프랑스 음유 시인들의 서정시를 열심히 읽고 외웠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프랑스 패션으로 온몸을 치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바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어린 프랑스인’이라는 뜻입니다.
한때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 이웃 사랑의 실천이나 청빈의 덕과는 철저하게도 담을 쌓고 살아왔던 프란치스코, 잔뜩 겉멋만 들어 유행의 최첨단을 걷고 있던 그가, 적당한 회개가 아니라 180도 완전 회개해서,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 만인들로부터 존경과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의 신앙 여정, 회개 여정, 하느님을 찾아갔던 순례 여정은, 한없이 부족한 우리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이 우리의 가난과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는 더없이 환하고 행복한 얼굴로 가난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은 반면, 그는 무소유의 삶 속에 진정한 행복, 대자유의 삶을 찾았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1)
오늘 복음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이미 지은 죄에 대한 ‘선고’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이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목자이신 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경고’이고,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타이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특정 도시들만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전체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는 “불행하게 될 것이다.”, 즉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2)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 또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몰라서 안 믿었더라도, 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안 믿었더라도, 죄는 죄이고,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안 믿은 사람들과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믿는 사람답게 살지 않은 사람들과는 좀 다른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또는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느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살았지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들을 기회가 없어서 전혀 몰랐던 경우와 듣고서도 거부한 경우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에 성탄절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고, 그날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믿지 못했다는 변명은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북한 지역 사람들이나 이슬람 지역 사람들이라면 그런 변명이 통할 수도 있겠지만...
3)
13절의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희가 얼마나 큰 은총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깨닫고,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은 “너희가 받은 은총들”입니다.
“나는 받은 은총이 없다. 그러니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큰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짚어보면서 “이것도 은총이었고, 저것도 은총이었다.” 라고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그게 무슨 은총이냐?” 라고 부정해 버리면 도와줄 방법이 없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뉘우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카파르나움’은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교만한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나는 정말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틀림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스스로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따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교만과 위선부터가 죄입니다.
16절의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떠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보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신앙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며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복음을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합니다.
4)
우리는 ‘회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를 단순하게 죄를 뉘우치는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죄를 뉘우치는 것은 회개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회개는 인생과 삶 전체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전부 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변화시킨 다음에는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보면, 그는 자기 죄를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았고, 그냥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3-5).
배반자 유다가 자살한 것은 죄책감 때문일 텐데, 용서받기를 거부한 일이기도 하고, 용서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린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멸망으로 갔습니다(마태 26,24).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을 구원할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 '회개, 가난, 겸손'>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인도하소서.”
(시편 139;1.24ㄴ)
가을 밤하늘 별들이 유난히 맑고 밝게 빛납니다.
저절로 떠오른 <땅의 행복>이란 옛 자작시에 기뻤습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흡사 10월을 대표하는 가난과 겸손의 성인처럼 느껴집니다.
성인 축일 때 마다 확인하는 생몰연대와 산 햇수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만 44세를 살았지만 영향력은 영원합니다.
기후위기를 겪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종파를 초월하여 개신교는 물론 불자들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프란치스코 성인이요, 오늘 축일을 지내는 교황님도 프란치스코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시는 가장 현대적인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성인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산과 강>이라는, 성 베네딕도회 영성을 상징하는 제 좌우명 자작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정주의 산, 흐르는 강이 기막힌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이래야 정주는 안주가 되지 않고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산'이 상징하는 바 성 베네딕도라면, '강'이 상징하는 바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두 분은 경쟁 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의 성인이요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를,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를 산다면 정말 'Ever old, Ever new'(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 최고의 영성이겠습니다.
성인의 감동적인 일화는 한둘이 아닙니다.
삶 전체가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한권의 살아 있는 복음서 같습니다.
오늘 본기도가 참 아름답게 성인의 삶을 잘 요약합니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가 성당의 정문 앞에서 바치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님, 저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경배하며 흠숭하나이다.”
예수님과 산상수훈의 '참행복'을 사랑했던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의 고백입니다.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성프란치스코는 시편 141장을 읊은 후 선종했고 마지막 유언은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지향과 동일하다 여겨지는 널리 회자되는 <평화의 기도>와 더불어,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요약하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성가 <태양의 찬가> 역시 너무나 유명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고백의 기도이자 시요 노래입니다.
이에다 몸과 맘이 하나된 춤까지 곁들이면 정말 멋지다 싶습니다.
시간되면 <평화의 기도>도 읽어보시고 <태양의 찬가> 노래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장례미사 때 입당성가는 <태양의 찬가>를, 퇴장성가는 <평화의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성인은 1226년 선종하신 2년 후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된 후, 1939년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모든 동물들과 새들, 그리고 자연환경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과 제1독서 욥기에서도 성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 요소를 발견합니다.
바로 회개와 가난, 겸손입니다.
저는 감히 오늘 강론 제목대로 '세상을 구원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회개-가난-겸손' 이라 주장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숱한 기적에도 회개하지 않은 악한 세 도시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불행 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너 벳사이다야! 너 카파르나움아!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기적의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회개요,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이자 성인들의 삶은 더욱 그러합니다.
한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갔던 성인들이요 성 프란치스코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인을 결정적 회개에로 이끈 성서는 마태복음 10장9절 말씀이었고, 성인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회개 은총의 열매가 바로 자발적 가난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고백할 정도로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정말 가난을 사랑한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가난한 부자일 것입니다.
엊그제 주교들의 시노드 피정 개막 연설시 교황님의 한 대목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로서 여기 있습니다.”
(We are here as beggars of God’s mercy)
우리가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이라면 예수님은 거지 대장쯤 되지 않겠나 불경한(?) 생각도 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의 회개가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하느님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물음에 말문이 막힌 욥은 회개와 더불어 침묵중에 진짜 가난과 겸손을 깊이 체험했음을 다음 고백이 입증합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몰라서 의심에 무수한 의문들을 남발하지 정말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침묵할 것입니다.
정말 주님 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주님 자비의 거지들로 행복할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만날 때 참된 가난과 겸손이요 이런 자기를 아는 가난과 겸손이 참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미사전례 중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위해 서 있는 빈손의 대열은 얼마나 거룩한 아름다움의 복음적 장면인지요!
가톨릭 교회의 영성체가 아니곤 도대체 어느 종교에서 이런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회개한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로서 가난과 순수, 겸손과 지혜의 절정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감동적 장면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또 하나의 거룩한 하느님의 거지가, 성 프란치스코가 되어 살게 합니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 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
(하바 3,19)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프란치스코 성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영성’>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인 아시시에 가면 성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인은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은 새와도 대화할 수 있었고, 장미와도 대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이 기도하던 성당에는 비둘기 한 쌍이 있습니다.
이 비둘기는 몇 백 년을 이어가며 성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인이 유혹을 견디기 위해서 장미밭에서 굴렀을 때, 장미는 가시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인이 기도하던 곳에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하면 좋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영성’을 나누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작은 존재로 여겼고, 가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세속적인 재화를 멸시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마음에서 진정한 부유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처럼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프란치스코는 참된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죄악 된 일을 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면, 그분은 누구를 통해서라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 겸손함 덕분에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인 나병환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안아주었는데, 그것은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자만과 자기 과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은 우리에게 겸손의 덕을 되찾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생명’ 존중입니다.
이는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을 "형님 태양," 달을 "누님 달"이라 부르며 모든 피조물들을 하느님의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자연은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반영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창조물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시적 표현에 그치지 않았고, 매우 깊은 영성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창조물을 돌보는 것이 창조주를 존경하는 방법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환경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를 돌보는 것이 단순한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나무, 강, 생명체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손길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지구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후손들이 그 열매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그리스도께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이웃을 향한 그의 급진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로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크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단순한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이들들, 병자들, 소외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그들을 조건 없이,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겸손, 단순함, 창조물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헌신의 메시지로 세상에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우리에게 거룩함으로 가는 길이 부나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신실함 안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난한 자들을 안아주고, 창조물을 돌보고, 모든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묵상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시작은 ‘나’부터 이루어집니다>
기도가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요?
미국의 심장병 전문의 벤슨 박사는 노인 73명을 선발해서 절반은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갖도록 하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살게 했습니다.
3년간의 관찰 결과, 아침저녁으로 기도한 이들은 혈압이 낮아지고 병에 대한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통해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이 장수하는 이유가 규칙적인 기도, 식사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원리를 이용해서 ‘정숙 치료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울증이나 불안이 심한 사람을 열흘간 명상하게 하여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정 후 정신적 건강을 얻었다고 느끼는 등 의학적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하는 곳에는 영적인 기운이 있어서 그 곁에만 있어도 치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곳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도가 가득해서, 그냥 그 곁에만 있어도 건강해질 수 있다면 정말로 멋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건강을 통해 이 사회에서 더 힘차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회에도 건강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교회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만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개의 도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에 위치하고 있는 당시의 상업 도시로 많은 이가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를 향해 단호하고 무거운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영적, 육적 건강으로 이끌어 주는 공동체가 아닌, 오히려 하느님께 멀어지면서 공동체의 구성원들까지 망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부터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나’가 늘어날수록 우리 공동체는 더욱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에 건강을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가정 안에, 교회 공동체 안에, 마지막으로 세상 안에서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과연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나요?
그래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가 되고 있나요?
오히려 힘을 빼는 그래서 함께 하고 싶지 않은 공동체의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모든 시작은 ‘나’부터 이루어집니다.
지금 당장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인 사랑의 삶에 적극적인 ‘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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