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꽃 피운 영웅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부닥치는 큰 어려움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생각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기아, 질병, 추위, 전쟁, 문맹(文盲) 등이 가장 큰 어려움이다.
‘춥고 배고프다’ 는 옛말이 있다. 먹을 것 없고 추위에 시달리는 어려운 처지의 처량한 삶을 한탄하는 말이다. ‘등 따습고 배부르다’ 는 옛말은 현실의 삶이 크게 어렵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류에게 추위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숙명적 과제였다.
수천 년 우리 역사에서도 백성들은 추위에 떨며 살아왔다. 물론 지배층 에서는 비단이나 호피(虎皮) 등으로 추위에 크게 노출되지 않고도 살아왔다.
대다수 백성들은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다. 겨울에도 삼베옷에 닭털이나 억새꽃을 넣어 보온하는 정도였으니 그 어려움은 형언하기 어렵다.
나에게는 어릴 적 농촌에 살며 목화농사 짓던 시절의 추억이 있다.
밭에 목화씨를 뿌리면 싹이 돋고 자라 여름철이 되면 목화 꽃이 피었다
목화 꽃이 피기 전 다래를 따 먹은 기억이 있다. 궁핍하게 살던 시절이라 달짝지근한 그 맛이 너무도 좋았었다.
다래가 모두 익으면 껍질이 버러지며 하얀색 꽃이 탐스럽게 피어난다.
목화 꽃이 햇볕에 마르면 솜의 원료가 된다. 밭에서 목화를 거두어 손질을 하며 말린다. 길쌈을 하는 날은 동네 아낙네들이 물레를 가지고 작업을 하러 모인다. 물레로 솜에서 실을 뽑아 깨끗하게 손질하여 무면 천을 짠다.
할머니께서 베틀위에 앉아 실이 담긴 북을 좌우로 움직이며 무명천을 짜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목화의 보급은 우리나라 의생활(衣生活)의 혁명과 함께 수공업의 발달과
결혼풍습의 변화를 가져왔다.
10개의 목화씨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넘어온 역사는 고려 말에서 시작된다.
문익점이 중국의 강남으로 유배를 갔다가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에 담아 왔다는 것은, 오늘날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야담으로 취급될 뿐이다.
고려사나 조서왕조실록 등 그의 행적을 기록한 정사에서는 훔쳐왔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문익점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고, 귀국할 때 목화씨 10개를 소중히 담아 왔다는 것이다.
문익점은 귀국 뒤 공민왕과 부원파 세력의 투쟁에 휘말려 파직을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낙향 후 장인과 함께 처음으로 목화재배를 실험했다.
첫해 재배에서는 10개 씨앗 중 단 한 개만 살아남았다.
한 개 살아남은 씨앗이 100여개 씨앗이 되었고, 수년간의 재배 끝에 목화의 국내 재배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후 경상도와 전라도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목화재배는 성공했어도 목면으로 옷을 만들고 이불을 지으려면, 목면의 씨를 빼고, 솜을 타고, 천을 짜는 기술이 필요했다.
문익점은 씨아와 물레의 제조 기술을 전수받아 개발까지 하였다.
개발한 물레로 목면을 짜니 백성들은 겨울나기가 용이해졌다.
목면의 보급은 의생활의 혁명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목면으로 무명을 만드는 직조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평민들의 결혼 풍습까지 바꾸어 놓았다
문익점은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는 고위 관료였다.
그러나 백성들의 어려움을 그냥 볼 수 없어 목화씨를 가져와 재배에 성공한 것이다. 중국을 다녀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직 문익점만이 목화씨 가져올 생각을 하였다.
어려운 생활에 시달리는 백성들에 대한 남다른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공무원의 신분으로 백성들 어려움을 헤아려 이와 같이 큰 업적을 남긴 공은 청사에 영원히 남은 것이다.
문익점은 우리 겨레를 어려움에서 구해낸 영웅이다.
첫댓글 백성들의 어려움을 그냥 볼 수 없어 목화씨를 가져와 재배에 성공한 것이다. 중국을 다녀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직 문익점만이 목화씨 가져올 생각을 하였다.
어려운 생활에 시달리는 백성들에 대한 남다른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공무원의 신분으로 백성들 어려움을 헤아려 이와 같이 큰 업적을 남긴 공은 청사에 영원히 남은 것이다.
문익점은 우리 겨레를 어려움에서 구해낸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