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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6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제1독서 : 예레 14,17ㄴ-22
복 음 : 마태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애완동물의 수명도 참 많이 늘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키우던 애완동물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키우는 개만 해도 벌써 12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건강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전과 달리 몸에 좋지 않은 것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년 예방접종을 하고, 관절에 좋은 비싼 사료를 먹이고,
먹여서는 안 되는 것들은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파, 양파, 초콜릿, 포도, 빵, 과자 등).
또 보살펴야 할 존재이기에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 애완동물 키우는 분들이 모두 이렇지 않을까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자기 몸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몸에 해롭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몸 역시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 역할은 바로 ‘나’입니다.
그 누구도 내 몸을 온전하게 보호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나만이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십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 때에는
악한 자의 자녀들은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 나라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라는 마음으로 악한 자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답게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남들을 바라보면서 또 남들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삶을 통해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는 남에게도 제대로 사랑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좋은 씨라 불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자녀입니다.
가라지라고 불리는 악한 자의 자녀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들어갈 불구덩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며,
가장 좋은 선택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때로는 이 세상에 판치고 있는 폭력과 불의와 죄악을 보면서
곧잘 흥분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보고 만 계시는 하느님이 실망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또 교회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서
경악하고 환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악한 생각들을 보면서
심히 좌절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동체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럽고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3,36)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종들이
집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묻자, 주인은 말했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끝날'(마태 13,40)이 되면
밀과 가라지의 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가라지와 밀을 거두어드릴 ‘때’가 따로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거두어드리는 일을 맡은 ‘일꾼’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밀과 가라지에 대한 주권이 바로 당신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세상의 끝날'이 될 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는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의 파견 설교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고 하시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악이 세상 안에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 악에 젖어 들거나 협조하거나 방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악을 피하고 선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악을 뿌리 뽑을 수는 없다할 지라도 악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오히려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악이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싸워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오늘의 말 · 샘 기도>
“밭의 가라지”(마태 13,36)
주님!
이 세상에 폭력과 불의와 죄악이 판을 쳐도,
내 안에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나쁜 생각들이 꿈틀거려도,
비록 가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빛을 가리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게 하소서.
오늘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꺼지지 않는 빛을 밝혀 사랑의 밀밭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아메리카 원주민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하나는 옳은 일을 하고, 남을 돕는 파란 늑대란다.
다른 하나는 나쁜 일을 하고, 남을 해치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는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싸우면 어느 늑대가 이기나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우리의 마음은 일심동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2심 동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다른 내가 그것을 막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우리의 내면에는 거짓된 자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참된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나약한 마음은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사탄의 깃발 아래 있을 때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원주민 할아버지의 ‘통찰’이 맞습니다.
우리가 먹이를 주는 우리의 마음이 선과 악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에 먹이를 주면 악한 마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은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학의 특징은 발병된 부위를 수술이나 약물을 통해서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학의 장점은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기 쉽고, 조기에 치료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서양의학의 단점은 발병 부위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세포를 상하게 하기도 하고, 발병 원인을 파악하기보다는
발병 부위를 제거하기 때문에 다시 재발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동양의학은 우리 몸은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부위에 질병이 발생하면 그곳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몸 전체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질병 부위를 없애거나 잘라내기보다는 그와 같은 질병이 사라질 수 있도록
몸 전체를 다스리는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몸의 체질을 연구하고, 각 장기의 기능을 연구하는 것이 동양의학의 치료 방법입니다.
당장 눈에 드러나는 증상을 치료하기보다는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근본적인 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동양의학의 장점은 몸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상처 부위를 제거하거나, 질병 부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기능이 건강해지도록 해서 몸 자체가 이겨내도록 저항력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양의학의 단점도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고,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시켜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전에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10명의 사람 중에는 열심한 사람, 대충 일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모두가 열심할 것 같지만
열심한 사람 중에서 또 게으른 사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게으른 사람들 또한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동기를 부여 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 단체들이 있습니다.
각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지체들입니다.
어떤 단체는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어떤 단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 사람, 단체를 배제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에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하는 사람들도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과 죽음을 위해서
-‘가라지의 비유’를 바탕한 묵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날씨는 참 청명하고 좋았습니다.
수도원 주변의 경관도 아름다워 어디나 사진 찍어도 아름다운 작품이었습니다.
새삼 사진은 빛의 예술임을 실감했습니다.
햇빛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절묘하게 조화된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곳곳의 카톡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빛이 있기에 가능한 빛의 예술 사진이듯이,
하느님 은총의 빛과 우리의 죄의 그늘이 조화된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인생, 빛의 예술인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흑백 사진은 물론 빛과 그늘이 잘 조화된 천연색 사진도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듯 인생도 그렇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삼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있는 인생, 특히 노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정경에는 없으나 2세기 위경 야고보 복음에 나오는 두 인물로
이미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전승되어 기념하는 믿을만한 성인들입니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교회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전승의 요지인즉 성녀 마리아의 어머니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는 일화입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노부부를 묵상하면
참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의 모습을 연상케 됩니다.
분명 이런 삶에 죽음도 또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아름다운 노부부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오늘 기념일 가까이 있는 7월 24일 연중 제17주일을
제2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기념일로 정해 온 교회가 기념하도록 했습니다.
날로 늘어나는 노년 인생들을 위해 참 시의적절時宜適切한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날의 기도문도 아름다워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주님,
저에게 장수의 복을 베풀어 주시고,
주님께 피신하는 이들이
언제나 열매를 맺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오, 주님,
저의 체념과 절망을 용서하시고
저의 기력이 쇠하여도
저를 버리지 마소서.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미래를
주님께서 저에게 맡기신 사명을
희망으로 바라보도록 가르치시고
제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저를 주님의 온유함의 혁명을 이루는 장인으로 삼으시어
저의 손주들과
주님 안에서 쉴 곳을 찾는 모든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오, 주님,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호하시고
주님의 교회가 세상을 외로움에서 구하게 하소서.
또한 저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끄소서.
아멘.”
참 좋은 기도문입니다. 누구나 맞이할,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미래의 노년이요 죽음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이런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이나 죽음은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이 바로 유일한 답이자 처방입니다.
바로 우리 87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런 삶의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참 놀랍고도 자랑스러운 일은 지난 7월24일 주일부터 7월30일 토요일까지
일주간 카나다의 원주민들을 위해 제37차 해외 사목 방문의 여정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곳 원주민들에게 과거 교회가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이들과의 치유와 화해와 일치를 위한 주목적의 방문이기에
“참회의 순례여행(penitential pilgrimage)”이라 명명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목 방문이요, 얼마나 아름다운 가톨릭교회의 모습이요,
얼마나 아름다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노년의 모습인지요!
이런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훌륭한 노년과 죽음을 위해
오늘 가라지의 비유는 참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라 하지 않고 가라지의 비유라 명명한 것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밀이 아닌 가라지가 초점입니다.
앞서의 가라지 비유는 ‘인내’를 중점에 두고 있다면
오늘 가라지 비유에 대한 우의적 설명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현실을 반영하며
여기서는 ‘심판’에 중점을 둡니다.
우리의 현실 삶에서는 인내와 심판 둘을 다 고려해야 온당한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가라지 악의 존재는 참 불가사의不可思議요 신비롭습니다.
오늘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는 노골적으로, 참 순진하게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
수확 때는 세상 종말, 일꾼들은 천사로 비유합니다.
아주 실감 나는 비유에 대한 설명으로 어느 정도 공감이 갑니다.
분명한 것은 최후의 심판입니다. 누구나 맞이하는 노년의 삶에 죽음입니다.
죽음이 누구엔가는 절망의 심판이 될 수 있고,
누구엔가는 희망의 구원이 될 수 있을 것임인 오늘 복음의 마지막 묘사가 분명히 합니다.
심판의 지옥에 대한 묘사에 이은 희망의 구원인 천국에 대한 묘사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복음의 마지막 구절,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는 말씀이
우리 무지의 어둠을 일깨우는 하느님의 우레소리 같습니다.
참으로 오늘 복음을 경청하여 어느 쪽인지 분별하고
부단히 선의 밀쪽을 선택하여 분투의 노력을, 훈련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지상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순례 여정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입니다.
심판이냐 구원이냐? 은총과 더불어 우리의 노력에 달렸습니다.
가라지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밀과 가라지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라지는 엄연한 현실이요 이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지극한 인내와 기다림 중에 이들과 평화로운 공존의 지혜와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제거하기보다는 내 자신이 변질 되거나 변절하여 가라지가 되지 않고
한결같이 선한 밀이 되어 살 수 있도록 죽는 그 날까지
하느님의 구원에 희망을 두고 분투의 인내와 노력과 훈련을 다 하자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선의 역량을 강화하여 지혜와 사랑, 순수와 열정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제거하지 않아도 가라지 악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이 최상의 처방일 것입니다.
채소밭의 이치만 봐도 곧장 들어납니다. 특히 여름철 밭농사는 풀과의 전쟁입니다.
가꾸지 않아도 줄기차게 무성히 자라나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가라지 존재와 같은 잡초들입니다.
하여 제초제를 뿌립니다만 땅과 유익한 미생물이 죽습니다.
참 좋은 방법은 부단히 채소를 잘 돌보고 가꾸어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채소를 튼튼히 키우는 것입니다.
참 부지런해야 하는 밭농사이듯 참 부지런해야 하는 영성 생활입니다.
채소가 튼튼히 자라나면 잡초들은 저절로 서서히 약화 되어 시들어 갑니다.
이래서 영성 생활에, 특히 노년과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선의 역량 강화를 위한 영적 훈련이, 한결같은 수행자의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제 피정 중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잠시 방문한 사제에게 들은 일화입니다.
“예전 신학교 학생들은 정신적으로 정상과 좀 문제가 있는 학생의 비율이 7:3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바뀌어 3:7이라 합니다.”
바로 병든 사회 현실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심신이 온전한 사람들,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부분 약하고 병들어 있는 총체적 위기 현실입니다.
당장 공동의 집인 지구가 병들어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땅도 공기도 물도 많이 오염되어 있는데 사람이 독야청청 건강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이러다간 밀밭이 가라지밭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십시오. 광야 세상, 온통 가라지밭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인들보다는 괴물들이, 폐인들의 가라지들로 변질 되는 사람들 같기도 합니다.
이래서 비상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내적 혁명의 삶이, 삶의 방식의 전환이 시급합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탄원에 공감이 갑니다.
이런 극단적인 불행은 아녀도 우리는 우리의 탐욕과 무지로 자초한
총체적 불행을 겪고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뿐입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유일한 출구는 단 하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이요,
지혜와 사랑, 지극한 인내와 분투의 노력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한결같이 선한 밀 같은 존재로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 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내가 밀이지 가라지인지는 ‘장기적’ 관점으로 판단해야!
전삼용 요셉 신부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2021)는
프랑스에서 있었던 유명한 두 친구의 결투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실화입니다.
두 친구, 카루즈와 자크는 전쟁에서 서로를 구해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카루즈는 성주이기는 했지만, 피에르라고 하는 영주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다혈질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진 거 없었던 자크는 영주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주는 카루즈의 아버지가 죽자 그 땅을 아들이 아닌 자크에게 주어버립니다.
자크도 친구에겐 미안했지만, 영주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입니다.
카루즈는 화가 나 영주를 왕에게 고소합니다. 하지만 왕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장 카루즈는 자신처럼 가문의 회복을 노리는 집안의 딸과 혼인합니다.
카루즈는 마르게리트에게 땅을 회복시켜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를 이을 아들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카루즈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못되게 대합니다.
마르게리트는 그래도 절친이었던 자크와 카루즈를 화해시켜 주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과정에서 자크와 마르게리트가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자크는 낭만주의자로서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마르게리트는 카루즈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카루즈는 돈을 벌어 땅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에 전쟁에 자주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크와 마르게리트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카루즈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마르게리트는 남편에게 자신이 자크에게 겁탈당했다고 말합니다.
이에 화가 난 카루즈는 이 이야기를 귀족들을 통해 널리 퍼뜨립니다.
어차피 영주는 자크의 편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재판받으면 승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루즈는 왕에게 자크와 결투를 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왕은 그러라고 합니다.
결투 중에 자크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은 결코 무력으로
카루즈의 아내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카루즈는 인정하지 않고 그를 죽입니다.
몇 년 뒤 카루즈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합니다.
마르게리트는 카루즈 영토의 상속인으로서 누구의 아들인지 모를 아들과 함께
30년 넘게 행복한 생활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하기 위해
‘장기적인 관점’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단기적으로 볼 때 카루즈와 자크는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화해했다가 다시 싸웁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둘은 서로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가라지였다는 것입니다.
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단기적으로 선교도 할 수 있고 단기적으로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5년, 10년 전과 비교해 전체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면
단기적 판단으로는 그 사람인지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25살까지 저를 위해 사는 가라지였습니다.
하지만 하.사.시.를 읽고 신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이제 조금씩 더 이웃에게 피를 흘리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5년, 10년 전보다 지금이 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익어가면 밀일 확률이 매우 큽니다.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다윗은 처음에 하느님의 뜻에 잘 따르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까지 살해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나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 이후로는 조금씩 더 온유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자기를 욕하는 사울의 친척도 용서하고 사울도 용서하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압살롬이 죽었다고 할 때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이제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이 아닌 나의 피를 내어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가라지가 밀이 되는 때는 세례를 통해서입니다. 세례는 결단입니다.
자아의 뜻을 따라주며 살 것인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인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면 밀이고 여전히 자신을 위해 살면 가라지입니다.
5년, 10년 전과 비교하여 나 자신보다 이웃 영혼의 구원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면 그렇게 발전하고 있다면 구원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항상 장기적인 관점에서 1년, 5년, 10년, 20년 전과 나를 비교하고
그리스도를 닮아 이전보다 항상 더 이웃을 위해 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갑시다.
추수 때에 가라지를 추려내어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세상이라는 밀밭에는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섞여 살아가지만,
밀밭도 추수 때는 밀과 가라지가 따로 추려지듯이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준비하라고 말씀을 하신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여기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그것을 가리는 작업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야 한다.
밀과 가라지가 싹 트고 자랄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는 좋은 밀일 수도 있기에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웃을 이러한 모습으로 판단하고,
쉽게 뽑아버릴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나 역시 가라지가 된다.
쉽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심판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다.
우리가 모두 가라지가 없는 집안,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각자가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매일 우리의 마음의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고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보다도 지금, 이 순간 충실한 삶으로
언제나 좋은 밀알로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또한 내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나, 다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즉 좋은 밀알로 변화될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노력하는 삶을 원하신다. 항상 깨어있는 삶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완전한 자는 없으며 완전을 향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는 자들이다.
항상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통하여 좋은 밀알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추수의 기본 원칙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상세한 해설을 담은 대목이다.
무대는 군중을 떠나 야외에서 집안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해설은 오직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해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비유자체 만큼 쉽게 이해된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이며, 가라지는 악의 자녀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 당신이시고,
독을 품은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이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진 밀과 가라지를
주인이신 하느님은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그것은 가라지를 뽑으려다 자칫 밀을 뽑아낼 수도 있다는
주인의 염려와 배려 때문이다.(29-30절)
추수 때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고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가을에 잘 익은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뽑아 처분하는 것이 추수의 기본 원칙인즉,
세상의 종말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된다.
세상을 심판하실 人子는 천사들을 보내어 善人을 뽑아 아버지의 나라에 살게하고,
惡人은 뽑아 모조리 불구덩이에 처넣는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제자들이 바로 앞에 있었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31-33절)는 놔두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두고 가라지를 특히 강조하여
예수께 설명을 부탁한 점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왜 그랬을까?
밀과 가라지 비유 말씀이 마태오복음의 고유한 전승인 점을 감안 한다면,
저자는 마태오 복음공동체 안에 있었던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미 주지하고 있다시피 상당히 빠른 시일 안에 벌어질 세상 종말과 최후 심판의 도래,
그리고 인자의 재림에 관한 기대는
초기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갖고 있었던 생각이다.
그런 이런 일들이 지체현상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기대를 수정하게 된 것이다.
기대의 수정은 학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공동체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완성이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학습하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교회와 세상 안에 선인과 악인이
세상 끝까지 공조한다는 것을,
악인을 섣불리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악인과 선인의 구분은 공동체의 소관이 아니라
재림하실 人子의 소관이라는 점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구성원의 관점은 자연히 세상 종말에 가서
선인과 악인이 각각 받게 될 보상과 대우에 치우치게 된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가 세상 종말에 비유된 추수 때의 일들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듯하다.
따라서 교회 구성원의 관점은 자연히 세상 종말에 가서
선인과 악인이 각각 받게 될 보상과 대우에 치우치게 된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가 세상 종말에 비유된 추수 때의 일들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듯하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경에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신앙인을 돌아보면,
우리 각자는 언제든지 좋은 밀알이 될 수도 있고,
가라지도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가라지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신앙생활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온갖 악의 요소들이다.
이런 악의 요소들은 이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뿌려진 씨앗을
이렇게 가꿀 수도 있고 저렇게 가꿀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예수께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를
악마로 규정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상 안에 분명히 악의 세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미 경험한 적이 많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악의 세력에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결코 악이 선을 이길 수는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J. W. 괴테(1749-1832)가 쓴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를 감상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비유 설교 안에서 좋은 밀알은 영원히 좋은 밀알로 남고,
가라지 또한 영원히 가라지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신앙의 실제 생활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聖殿을 마련하신 성령께서
그 변화를 도와주실 것이라 믿는다.
사람의 마음 밭에 뿌려진 좋은 복음의 씨앗이
좋고 많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씨앗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인내와 끈기로 기다리신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누구에게나
철저한 추수의 기본 원칙이 적용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