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부루나 존자’ 무진장 대종사가 9월 9일 새벽 4시 30분 열반에 들었다. 세수 82세, 법랍 56세. 조계종 원로의원인 무진장 스님은 고령과 지병으로 최근 일산 동국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무진장 스님의 법구는 잠시 후인 오전 9시 경 입관식을 마친 후 영결식 및 다비식 장소가 확정 되는대로 이운될 예정이며, 장례는 원로회의장으로 오는 9월 13일 5일장으로 엄수된다. 총무원과 원로회의가 장례에 따른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며, 장지는 평생 주석해온 조계사와 본사인 범어사 중에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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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 대종사. 9월 9일 새벽 4시 30분 입적에 들었다.
반세기 이상을 서울 조계사에서 주석하며 포교의 제1선에 섰던 무진장 대종사는 70~80년 이후 수많은 재가자들을 교화했다. 당시 불교와 인연을 맺은 불자들은 대부분 무진장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문에 들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스님의 상좌인 진관 스님(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은 범어사에서 치러질 경우 영결식 및 다비식은 영결식 및 다비식은 쌍계사 방장취임, 마곡사 주지 취임 등 종단의 중요한 일정과 겹치는 것을 감안해 오후 4시 경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후 상보)
다음은 무진장 대종사에 대해 기자(이학종)가 <한국의 대종사들>에 기고한 글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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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전수수 반세기 중생 곁 떠나지 않는 참 부처
-조계종 원로의원·초대 포교원장 무진장 대종사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가장 평범한, 보통’ 사람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보통 사람에 미치지 못하거나, 지나친 사람들이에요. ‘가장 평범하고 보통사람인’ 부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 앞에서 우엇을 빌고 있습니까? 아파트 당첨을, 남편 승진을, 또는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붙기를 바라고 있지 않나요? 왜 절에 다닙니까? 우리의 정신세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다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무진장 대종사께서 하신 법문의 일부다. 간결하고 정법에 입각한 설법이기에 늘 후련하다. 법문 내용만 들어도 무진장스님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무진장 대종사는 서울 조계사에서 반세기를 넘게 주석하고 계신다. 저잣거리에서 늘 오가며 마주칠 수 있는, 조계사를 비롯해 전국의 주요 사찰법문에서 자주 친견할 수 있는 그런 분이시다.
스님에게는 상좌도 많지 않고, 절도 없다. 대종사쯤 되면 으레 갖추고 있을 법한 고급 승용차난 눈이 번쩍 뜨이는 고가품도 일절 없다. 종정으로부터 대종사 품계를 받던 날, 고급 승용차가 아닌 아는 재가불자의 봉고차를 타고 해인사까지 간 분이 무진장스님이시다. 이 광경을 본 한 종단의 중진 스님께서 중얼거리듯 하신 말씀이 “오늘 대종사는 무진장스님 한 분뿐이시네” 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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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불교대학 졸업생들에게 불자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며 연비의식을 집행하고 계시는 무진장 대종사.
오래전 어는 신문에 무진장스님 이야기가 전면을 차지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스님은 일곱 가지가 없는 스님이라고 표현됐다. 그 일곱 가지는 모자, 목도리, 내복, 절(집, 토굴), 돈, 장갑, 솜옷이다. 스님은 승복도 딱 두벌이다. 두 벌인 까닭은 빨아 입을 때에 입을 옷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니, 사실 한 벌인 셈이다.
지금의 사오십 대 청장년층 중에 무진장 스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불자가 드물 정도로 스님은 서울 한복판에서, 또한 전국을 돌며 사자후로 부처님의 진리를 전하는 삶을 살아오셨다. 법당에서, 대학의 강당에서, 또는 길거리에서, 중생이 살고 있는 삶터에서 진리를 전하며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고 계신 무진장 대종사가 그 누구보다도 진정 우러러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무진장 스님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포교사로 지칭하는데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흥미로운 사실은 가장 가까이 사시면서도 모든 언론에서 무진장 대종사를 인터뷰한 기사가 없다는 점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철저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스님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그래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8월 초 어느 여름날, 스님께서 학장으로 있는 동산불교대학 사무실에서 스님을 만났다. 그날따라 몹시 피곤하시다. 평소의 우렁찬 목청은 사라지고, 말씀도 거의 않으시고, 하더라도 조곤조곤 들릴 듯 말 듯하다. 이런저런 말씀 을 건네 봐도, 그저 미소만 지으실 뿐이다. 그날 스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건강도 썩 좋은 편이 아니고, 당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더욱 손사래를 치시니, 결국 필자가 평소 무진장스님에게서 들었던 여러 이야기들, 또 무진장스님을 가까이 보시는 분들이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주 오랜 기간을 두고 들어온 이야기들이므로, 한두 시간 만나 글을 작성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무진장 큰스님은 제주도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제주 오현고를 졸업했다. 열일곱 살 때 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는데 탄탄한 한문 실력을 갖춘 것을 눈여겨본 대장으로부터 ‘너는 나를 따라다니라’는 명령을 받고 대장을 수행했다. 스물한 살에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집안 친척 가운데 태고종 소속 스님이 있었는데, 상심해 있던 스님에게 출가를 권했다. 종가집의 장손(외아들)이었던 스님은 훗날 “아마 아버지가 살아계섰다면 출가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곤 했다. 한의사 집안이었던 까닭에 스님의 속가는 비교적 잘 나가는 집안이었다. 집안에 교수와 의사 등이 츨비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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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포교원장들과 함께 한 무진장 대종사.
출가 결심을 한 후 어느 스승을 찾아가야 할 것인지를 여기저기 수소문 해보니, 많은 분들이 범어사의 동산(東山)스님을 찾아가라고 권했다. 장발에 훤칠하게 생겼고, 한학을 잘 하는 청년 무진장을 본 동산스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시켰다. 이렇게 스님의 행자 생활이 시작됐다. 당시 스님은 담배를 즐겨 피웠는데, 숨어서 몰래 담배를 피다가 어느 날 동산스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동산스님으로부터 “속세의 습도 끊지 못 하고 왔냐?”는 호된 야단을 맞고 즉시 담배를 끊었다. 이후 스님은 주로 공양간에서 일을 했다.
출가해 범어사에서 십 년 가까이 행자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스님은 평상시처럼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런데 그날은 계를 주는 날이었다. 계를 받으로 빨리 내려오라는 행자의 말을 듣고는 스님은 한걸음에 큰 절로 달려 내려왔다.
“그 높은 산에서 어떻게 내려왔는지, 굴러서 왔는지…” 스님은 그때의 그 마음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환희심에 차 있었다고 술회했다. 지금도 스님은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에 물기가 스민다. 목이 메고, 목소리도 흔들이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스님이 된다는 것은 그 당시엔 벅차고 소중한 기쁨이었던 것이다. 어찌나 기뻤던지 스님은 당시 부전 스님으로부터 오조가사와 장삼을 받고는 입었다, 벗었다를 밤새 거듭했다.
서른여 명이 같이 계를 받기 위해 늘어서 있는데, 동산스님이 각자 계를 내리는 은사 스님께 절을 하라고 일렀다. 무진장스님은 지체 없이 동산스님께 큰절을 올렸다. 나중에 스님 방을 찾아가 다시 삼배를 올리니 은사스님께서 ‘공부 잘 하라’고 하시며, 법명은 내일 내리겠다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아침에 새벽같이 마당을 쓰는데 동산스님께서 나와서는 “네 법명은 혜명(慧命)이니라. 부처님의 지혜를 이어받는 자라는 뜻이다”라고 하셨다. 그날 어찌나 신바람이 나는지, 스님은 마당도 혼자 다 쓸고 달밤에 나무도 하면서 더욱 정진을 하였다.
1960년대 어느 날, 밭일을 하고 있는데, 은사 스님이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흙발을 잘 씻지도 못하고 스님 방으로 달려가니, 은사 스님께서 써놓으신 야부송(冶父頌)의 구절 ‘마가대법왕 무단역무장 본래비조백 수처현청황’을 판각하라고 하신다. 판각이라는 것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지만, 은사 스님의 지엄하신 명령인지라 도구도 없이 연필 깎는 주머니칼 하나로 판각을 시작했다. 손바닥은 온통 찢어지고 갈라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판각을 마치자마자 몸살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때 스님이 판각한 주련 글씨는 지금도 범어사 대웅전 주련으로 남아 있다.
혜명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동산스님은 끙끙 앓고 있는 제자 혜명을 친히 찾으셔서 문병까지 했다. 그러고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사탕 세 알을 쥐어주며 따뜻하게 말했다.
“자, 이거 사탕이다. 이거 먹으면 한결 나을 것이다. 어서 먹고 일어나거라. 그런데 혜명이 네 재주가 참으로 무진장(無盡藏)이로구나. 허허허.”
그래서 스님은 혜명이라는 이름을 ‘무진장’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즈음 스님은 어린 동자승들과 함께 살았다. 옷을 개울에 가서 빨아서 방에 줄을 매고 쭉 널어서 말려 아침이면 손질해서 입혔던 일, 산에 나무하러 갈 때 줄줄이 따라오고, 스님이 나무 지고 내려올 때에 뒤에서 끈을 매어 잡아주던 일 등을 어린 동자승들과 함께 무던히도 잘 지냈던 추억이 새롭다.
학창 시절에는 역시 대강백으로 이름이 높은 우룡스님과 고산스님도 같이 힘들게 공부를 했다. 일본 교토대학 유학도 했는데, 당시 홍윤식 박사, 인환스님과 함께 공부했다. 태국에 유학을 하기도 했다. 스님은 지금도 가끔씩 가난하게 공부했던 학창 시절을 추억한다. 그럴 때마다 신세진분들의 이야기를 빼놓기 않는다. 대원정사 노(老) 거사(장경호)에게 학비를 얻었고, 민기식 씨에게 도움을 받았던 이야기 등이다. 당시 너무 힘들게 공부를 했기에 베풀지 못하고 살았다며, 이제는 회향 차원에서라도 인색하지 말고 베풀고 살려고 한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스님의 철저한 절약 습관과 무소유 정신은 아마도 가난했던 학창 시절에 몸에 밴 듯하다. 스님은 어느때, 외국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나갈 때 이백 불을 가지고 나가 한 달을 머물다가 들어오는데, 백 불을 남겨서 가져온 적도 있었을 정도다.
대학원 시절에는 임석진 교수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임석진스님은 대처 측의 대표 스님이었는데, 무진장스님에게 큰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다. 임석진스님은 무진장스님을 만나면 늘 “장가가지 마라, 주지하지 마라, 행정직을 하지 마라”라고 당부했다. 자연히 이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무진장스님은 임석진스님의 당부를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도무지 상좌를 둘 것 같지 않은 무진장스님이 상좌를 두게 된 동기는 마곡사 조실을 지낸 혜원스님께서 당신의 상좌들을 부탁하시고 열반에 드셨기 때문이다. 이때 진관스님(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을 승단에 입적시키고 학비를 주어 동국대 공부를 마치게 했다. 또 한 상좌로는 제주의 오산스님이 있는데, 그는 율사가 되었다. 이 스님이 가끔 서울에 오면 은사 무진장스님을 찾아뵙는데, 스님은 흐뭇한 마음에 제일 많이 여비를 넉넉하게 주신다고 한다. 아무래도 계율 잘 지키는 상좌가 가장 흡족한 모양이다.
스님에겐 역대 고승들과의 인연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해인사 지월스님과는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스님이 배탈이 나서 설사를 며칠째 하며 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변소로 급하게 달려가는데 그만 변소 앞에서 지월스님을 만났다. 지월스님은 《초발심자경문》 외엔 일체 경전을 보지 않은 분으로 수행의 모범을 보인 큰스님으로 유명한 분이다. 지월스님은 안절부절하는 무진장 수좌를 변소 앞에 세워놓은 채로 십 분간 즉석법문을 했다. 그 통에 그만 설사가 그쳤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을 준 것이었다.
설법 제일로만 알려진 무진장스님이 젊은 시절 피나는 만행을 한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스님은 맨발로 6년 동안 전국 사찰을 참배하는 만행을 했다. 말이 그렇지 여름 겨울 가리지 않고 6년을 맨발로 걷는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행이다. 스님은 그 당시 송광사에 들렀을 때, 당시 방장스님이 손수 부르튼 발을 닦아주며 격려해주셨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대종사가 포교사로서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스님은 설법의 능력을 얻기 위해 피나는 정진을 거듭했다. 스님은 주로 파고다공원(지금의 원각사터)에서 거지들을 상대로 매일 법문을 했다. 당시 공원에서 구걸을 하던 거지들 가운데는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상당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도 있었는데, 스님의 당당하고 수준높은 법문에 이들이 매료되어 스님을 자신들의 보스로 모시기도 했다. 졸지에 무진장스님이 거지 대장이 된 것이다. 무진장스님이 이곳에서 매일 대중 법문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도선사 청담스님이 매일 이백 원을 스님에게 후원했다. 이 돈이면 이십여 명의 밥값이 되었는데, 수준 높은 법문에 점심까지 사주는 스님의 인기는 거지들 사이에서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훗날 스님은 파고다공원에서의 대중 법문이 큰 힘이 되었다고 회고하곤 했다. 이때 얻은 힘으로 스님이 조계종 중앙종무기관에 포교원을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포교원장을 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님의 조계사 생활은 어언 오십 년, 반세기가 흘렀다. 스님의 장삼은 낡고 색이 바래 마치 실크처럼 보드랍다.
무진장스님에게는 또 한 사람 평생을 같이 해온 잊을 수 없는 재가 제자가 있는데, 그는 동산불교대학이라는 현대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김재일 법사와 무진장스님과의 인연은 1970년대 초 원주군법당 수계 법회 때 시작되어 제대 후 1975년 조계사에서 청년회활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경전공부 모임인 동산반야회를 창립하면서 스님을 법주로 추대, 어언 사십 년을 함께 해왔다. 김재일 법사는 지난해 유명을 달리했지만, 무진장스님은 지금도 동산불교대학 학장으로 십만 동산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무진장 대종사. 스님은 2007년 원로회의 의원이 된 후 지난해 종단으로부터 대종사의 품계를 받았다. 평생 감투나 명예를 멀리해온 스님이었지만, 종단에서 내리는 것이기에 특히 대중 포교에 헌신한 스님을 최초로 인정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대중 포교에 평생을 헌신해온 스님의 삶을 종단에서 인정한 것이니 스님의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스님은 저자에 사셨으나, 산중에서 산 어떤 스님들보다도 더 철저한 수행자의 삶을 견지했다. 딱 두 벌인 승복에는 겨울용이 없다. 스님은 시도에게서 선물 받는 것도 극도로 싫어하신다. 모자를 쓰는 것도 무소유 정신에 어긋난다고 강조할 정도로 본분사에 철저하다.
자가용은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고, 조계사 주변의 찻집 같은 곳은 일체 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신 틈만 나면 근처 책방에 가서 새로나온 불서를 눈여겨보고 신간 구입하는 일을 즐겨하신다. 법회 등에서 거마비를 받으면 몽땅 책 구입비로 사용한다. 그래서 스님의 방은 거처인지 책방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물과 공기의 고마움을 잘 모르고 산다. 늘 엎에 있기에 그 진정한 가치를 간과하는 것이다. 스승도 마찬가지다. 깊은 산중의 고래등 같은 당우에서 수십, 수백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있어야만 선지식인 줄 안다. 그러나 진정한 선지식은 대중과 함께 살며 숨 쉬고 생활하면서 부처님의 진리를 깨우치고 전하는 분이다. 십우도의 마지막이 입전수수(入廛垂手)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스님은 일찍이 입전수수의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사바세계 최일선에서 반세기를 넘게 살면서 정법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마침내 누구도 닿지 못할 큰 족적을 남기셨으니, 스님의 일생이야말로 ‘처염상정’이고, 스님이야말로 우리 불교사의 자랑스런 대종사, 그 자체이시다.
*무진장 대종사는?
1932년 태어난 스님은 1956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수지했다. 법명은 혜명, 1957년 구족계를 수지하고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을 이수했으며, 동국대 불교대학을 졸업했다. 1968년에는 태국 방콕에 위치한 왓 벤차마보핏 사원에서 남방불교를 연구했으며, 일본 교토불교대학 대학원 등을 거쳤다.
1970년 조계종 포교원 창립해 제2대, 4대 포교원장을 역임했으며, 동국대 강사를 지냈다. 무진장 대종사는 1992년 동산불교대학 학장으로 취힘해 현재까지 재가불자 포교의 최일선에 활동하고 있으며, 동국역경원 후언회장을 맡고 있다. 2007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1987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제가 다니는 용주사에서 수계하는날 무진장 스님을 가까이에서 뵈었습니다,모든 보살님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앗지요,주지스님과 무진장스님께서 수계을 주신다는것에 감사하면서~~~!
근데 무진장스님왈~~!, 난 수계을 줄 만한 사람이 못되~~! 옆에 계신 스님들이 우리 보살들에게 수계도 주고 큰스님이지 ,난 아니야~~! 난 오라고 해서 구경하러 왓어~~! 하시며 끝까지 큰스님 아니라고 하시더라구요,그래도 아쉬움에 법문 한 말씀 부탁합니다,하고 조르니,,복지으고 살으라 하셧으며 ,주지스님 말 잘 듣고 공부하라 하시던 모습이 생각나네요,참 고운맘 가지셧다 생각햇는데,().
뵐때마다 항상 같은 옷이어서,스님은 항상 저 옷이네~~!생각햇엇습니다,근데,글을 보니 이해가 갑니다...()()().
무진장 큰스님에게 법문 듣던 조계사 청년회 시절이 그립네요. 나무아미타불. _()_
호통은 누가 치시나 이제.... 모든게 그립네요 나무아미타불 ()()()
()()()....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