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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역사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불꽃남자
제4절 왜란과 호란
1. 16세기의 사회변화와 왜란
(1) 16세기의 사회변화
조선왕조에 있어서 16세기의 사회변화는 지배층의 분열이나 외적의 침입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사상 등 각 분야에 걸쳐서 실로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정치적으로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사림파가 형성되고, 이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사화와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사림의 정치 이상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이 요구되었던 고려말․조선초기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큰 호소력을 갖지 못했으나, 이미 그러한 과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부분적으로 그 역기능까지 드러내고 있던 15세기 말기에 와서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사림의 등장은 국가 발전을 중시하는 창업의 시대에서 지방 자치의 안정을 추구하는 수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었다.
사림이 중앙정계를 장악한 이후에 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림은 본래 향촌의 사적 경제기반과 서원을 중심으로 한 학연관계, 그리고 동족이나 인척과의 결속을 통한 문벌 등 사회적 연관 속에서 그 조직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폐쇄적 붕당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사림정치는 언론권을 대단히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격렬한 이론투쟁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더욱이 사림세력은 성리학적 명분론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분별이 매우 철저하였다. 이러한 사림의 체질은 자연히 붕당 사이의 대립과 경쟁을 한층 격화시켰다. 붕당은 선조 때에 동․서인의 분당을 시발로 하여 17세기에는 남인․북인․노론․서론으로 갈리었으며, 이후 여러 당파로 갈리어 17세기에는 붕당 분열의 극성기를 이루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의 편중을 완화하고 관료와 농민의 자립기반을 안정시키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던 과전법이 무너지면서 토지겸병현상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여말에 성립된 과전법 대신 15세기 중엽 세조 때에는 직전법이 실시되었다가 성종 때에는 관수관급제가 시행되었으나, 이 마저도 16세기 중엽 명종 때에 들어와 폐지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현직 관료들은 녹봉에 의지하는 생활에 곤란을 느끼고 토지겸병을 통하여 사유지를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중앙의 고급관료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향촌의 토호들까지 이에 가담하여 전국적인 현상으로 번져 나갔다. 이들은 개간․매득․약탈 등의 방법으로 토지를 집적하였으며, 이에 따라 무전농민이 갈수록 늘어났고, 병작제가 보편화하였다. 이와 같은 토지겸병 현상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층 더 심화되었다.
이렇게 토지겸병이 성행하면서 병작관계는 더욱 확산되고, 농민의 계층분화가 촉진되었으며, 국가의 전세수입은 갈수록 축소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토지를 잃은 농민들 중 일부는 도시로 나가 상업에 종사하여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이 당시에 들어와서는 상업에도 조선초기와 같은 국가의 통제가 무너지면서 자유 상인인 사상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서울에는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어 시전상인 외에 많은 사상이 생겨났다. 이렇게 상업이 발달하여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자, 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곡물시장이 발달하였다. 상인들 가운데는 곡물매매만을 전업으로 하여 큰 부자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부상대고(富商大賈)라고 불리던 큰 상인들은 곡물뿐 아니라 공물의 방납을 통해서도 막대한 이득을 얻었으며, 권력층과 결탁하여 중국이나 일본과의 사무역에도 종사하였다.
상업은 지방에서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향시(鄕市) 즉 지방의 장시(場市)가 각지에서 새로 생겨났다. 15세기 말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지방 장시는 1520년경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른다. 지방의 장시는 농업 기술의 발달로 구매력이 증대된 기반 위에서 성립한 것이었다. 농업기술의 보급이 선진적으로 이루어졌던 전라도 지방에서 장시가 먼저 대두하였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장시를 통한 전국적 유통망은 이전의 어느 시기에도 없던 것으로, 집약적 농업의 실현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성과에 토대를 두는 하나의 사회경제적 발전이었다.
사회적으로는 부가 편중되면서 사회적 불만이 커져 가는 가운데 농민층의 저항이 일어났다. 농민 저항은 16세기에 들어와 심화되고 있는 토지 집중과 수취체제의 모순, 그리고 상업의 발달로 인한 계층분화와 농촌사회의 동요를 배경으로 일어났다. 경제적 변동에서 권신과 척신들의 탐욕으로 피해를 당한 것은 거의가 농민들이었다. 농민의 불만이 커감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도적떼가 일어나고, 그 중에는 중앙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정변까지 계획하는 야심가가 나타났다. 명종 때 황해도․평안도․함경도․강원도․경기도를 무대로 일어난 임꺽정 일당의 도적활동은 그러한 농민 저항의 한 예이다.
사상적으로는 16세기에 들어와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이기철학 중심으로 바뀌어 갔다. 새 왕조의 제도개혁과 관련하여 치인(治人)에 초점을 맞추어 수용되었던 성리학은 15세기말에서 16세기초에 걸쳐 훈척들의 비리를 경험하면서 도덕적 자기 완성을 목표로 하는 수기(修己)의 방향으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바뀌어 갔다. 삼강오륜의 수신 교과서인 소학이 초기 사림에 의해 크게 주목되고, 기묘사림이 이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것은 그러한 추세를 말해준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학자들이 큰 관심을 가진 문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였다. 도덕 정치의 출발이 수기에 있는 만큼 수기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理)와 기(氣)를 바탕으로 인간본성과 직접 관련이 되는 사단(四端)이나 칠정(七情)과 같은 심학(心學)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깊어졌다. 이는 동양철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다.
(2) 임진왜란
붕당의 대립으로 양반사회가 분열되기 시작한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여진족의 통합 기운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였다. 토요토미는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전 조선의 대일관계는 15세기에는 조선이 일본에 대해 강온 양면정책을 써서 무력으로 응징하기도 하고, 일본의 무역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기도 하여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일본의 무역 요구가 더욱 늘어나고, 삼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도 갈수록 많아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조선정부는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국기무를 장악하게 하는 등 대책을 세웠으나, 초당적으로 다루어야 할 국방문제가 당론의 차이로 효율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통일국가를 이루면서 국력이 충실해졌다. 15세기 후반기에서부터 시작된 100여 년간의 혼란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종식되고 전국 통일이 실현되었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정복하려는 야욕을 품게 되었다. 여기에는 전국시대에 양성된 지방세력가인 다이묘(大名)의 힘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적인 통일과 안정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깃들여 있었다.
토요토미는 침략에 앞서 승려를 정탐꾼으로 보내어 조선의 산천과 정치정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병력과 선박을 징발하고, 서양의 총포술을 도입하여 개량한 조총으로 군사들을 무장시키는 등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그는 쓰시마도주(대마도주)를 통해서 조선에 대하여 을묘왜변 이후 단절되어 있던 국교의 재개를 요청하는 한편,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명을 정벌하러 가는데 필요한 길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이 이에 응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일본의 국내 실상과 토요토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해 선조 23년(1590)에 황윤길(黃允吉)을 정사로,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하여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3월에 돌아온 통신사가 받아 가지고 온 토요토미의 답서에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표현이 있어 침략 의도가 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사와 부사의 보고가 일치하지 않아 정부의 대책이 실효성 있게 추진되지 못하였다. 정사인 황윤길은 반드시 침공이 있을 것이니 경계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반대로 이를 공박하고 대일 안심론을 폈던 것이다. 이에 조정의 의견이 나뉘어, 서인은 황윤길, 동인은 김성일의 의견에 찬동하여 당파 사이의 대립만 더욱 조장시켰을 뿐이었다. 이에 따라 우세하던 동인 세력과 오랫동안 문약하여 무사안일에 젖어 있던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보고를 따라 별다른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조선의 관료들 사이에는 붕당 사이의 대립이 아주 심하였다. 그리하여 이이가 10만양병설을 주장하자 동인 인사들이 이를 평지풍파라고 배격하는 등 초당적으로 다루어야 할 국방문제까지 당론의 차이로 힘있게 추진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비변사의 보고와 빈번한 일본 사신의 왕래로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뒤늦게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그 대책이라는 것도 실효성 있는 것이 아니어서 김쇄(金晒), 이광(李洸), 윤선각(尹先覺) 등으로 하여금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를 수축하게 하였으며, 신립(申砬), 이일(李鎰)로 하여금 변비(邊備)를 순시케 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대책도 요충지인 영남지방에 한정된 것이었다. 한편으로 유성룡의 추천으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왜군은 20만의 대군으로 선조 25년(1592) 4월에 조선을 침략하였다. 부산첨사 정발(鄭撥)과 정읍출신인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장성출신인 양산군수 조영규는 부산과 동래에 상륙하는 왜군을 맞아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순국하였다. 동래에 상륙한 왜군의 주력부대는 동래로부터 동로․서로․중로로 삼분하여 서울을 향하여 북진하고, 한 지대(支隊)는 연안 지대를 따라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왜군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양산, 밀양을 거쳐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자,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순찰사 이일을 상주로, 도순변사 신립을 조령으로 보내어 왜군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이일은 상주에서 패하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사투를 벌였으나, 패전하여 전사하였다. 아무런 준비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잘 훈련된 데다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더욱이 15세기 후반부터 야기된 부역제의 모순으로 방군수포(放軍收布)가 성행하게되어 이미 군사동원 체제가 유명무실해졌던 것이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서울 근교에까지 이르자 선조는 하는 수 없이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서울은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20일 만인 5월 3일에 왜군에게 함락되었다.
선조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는 한편, 이덕형을 명나라에 보내어 원병을 요청하였다. 서울을 함락한 왜군은 다시 북진을 계속하여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방위군을 격파하고 개성을 점령한 다음, 이어서 6월 13일에는 평양마저 함락하였다. 한편 함경도까지 북상한 가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았다.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여 근왕병으로 지원하는 자도 없었으며, 정부의 무능에 격분한 백성들이 피난가는 선조의 어가를 막으면서 원성을 터뜨리기까지 하였다. 서울에서는 일부 노비들이 혼란한 틈을 타서 노비의 문적을 맡고 있는 장례원과 형조를 불질렀고, 이 때문에 궁궐이 소실되었다.
육지에서의 참패에 반하여 해전에서는 도처에서 왜군을 섬멸하고 있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전라도의 수군은 태종 때에 왜구에 대비하여 만들었던 거북선을 개량하고, 거기에 왜군의 것보다 우수한 화포를 설치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왜군이 침입하자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와 함께 옥포․당포․당항포․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한산도에서는 적선 60여 척을 쳐부수는 전과를 올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이순신 함대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북진하는 육군과 합세하려던 일본의 작전이 무너졌으며,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해전에서의 잇단 승전과 때를 같이하여 육지에서도 각 지방에서 유생과 농민, 승려들이 들고일어나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에 저항하였다. 이들은 정부의 모병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왜적에게 침탈을 당하자 자기 가족과 재산 그리고 자기 고장을 지키지 위해서 거병하였던 것이다.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관료와 사림 그리고 승려들이었다. 의병들은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향토조건에 맞는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어서 매복․기습․위장 등의 유격전술을 많이 써서 적은 병력으로 적에게 큰 어려움을 주었다. 의병은 각처에서 일어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그 중에서도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에서 왜병을 공격하다가 전사한 조헌,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과 창녕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왜적을 격퇴한 곽재우,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에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전사한 고경명,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로 왜군을 격퇴하고 강화로 진을 옮겼다가 제2차 진주전에서 전사한 김천일,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길주 등지를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왜적까지도 축출한 영광인 정문부 등은 유명한 의병장이었다.
또 묘향산의 노승 휴정(서산대사)은 격문을 팔도의 승려에게 보내어 그의 제자 유정(사명당)과 함께 1,700여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 공을 세웠다. 그는 이로 인하여 도총섭(都摠攝)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제자 처영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율을 도와 활약하였다. 이밖에도 평안도의 조호익․양덕록, 경기도의 심대․홍계남․경상도의 김면․정인홍․권응수, 황해도의 이정암 등 많은 의병장이 활약하였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승리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으로 모든 전선에서 반격을 강화하여 전세가 반전되어 가고 있을 때 이여송이 이끄는 5만 명의 명나라 지원군이 도착하여 조선군과 합세하였다.
명은 처음 조승훈을 보내어 평양을 치게 하였으나 실패하자, 심유경을 보내어 휴전을 교섭하는 한편, 다시 이여송에게 4만 3천명을 주어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명군은 조선군과 연합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계속 왜군을 추격하여 남진하다가 고양의 벽제관에서 패하자 다시 평양으로 후퇴하여 왜군과 화의를 맺으려 하였다.
이 때 권율은 명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다 명군이 평양으로 퇴각하자 행주산성에서 고립상태에 빠져 왜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전라도의 관군 만여명과 대흥사의 승려 처영의 도움 그리고 변이중의 화차로 적은 병력이지만 배수진을 치고 피나는 사투를 벌여 대규모 병력으로 공격해온 왜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는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승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행주산성 싸움에서 패배한 왜군은 드디어 서울을 포기하고 경상도의 웅천(창원)․울산 등 해안 일대로 퇴각하여 명나라와의 화의에 응했다. 왜군은 조명연합군의 반격에 예기가 꺾인 데다가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활동으로 본국과의 보급 연락마저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각지에서 의병들의 유격전에 시달리고 거기에 더하여 악역까지 유행하여 전의를 잃고 있었다.
한편, 왜군은 화의교섭이 진행되는 중에 진주성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나주 출신인 의병장 김천일, 능주 출신인 경상우병사 최경회, 남원 출신인 충청병사 황진, 광주 출신인 고종후와 호남의병들이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 진주성 싸움은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한 전투로 3대첩의 하나였다.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왜군 사이에 진행되던 화의는 피차 승리로 자처하는 가운데 3년간 끌다가 토요토미가 제시한 무리한 조건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왜군이 제시한 화의조건은 ①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②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조선왕자 및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명나라의 화의 대표인 심유경은 이 조건을 명나라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므로 아예 그 요구를 숨기고 거짓으로 ‘도요토미가 왜왕의 책봉을 희망한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심유경의 보고에 따라 선조 29년(1596)에 도요토미를 일본국왕에 봉한다는 책서(冊書)와 금인(金印)을 내렸다. 그러나 명의 국서를 받아본 도요토미는 심유경에게 속은 것을 알고 대노하여 재침을 명령하여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이 정유재란(1597~1598)이다.
선조 30년(1597) 1월에 왜군은 14만 대군으로 침공하여 먼저 동래․울산 등의 성을 점령하고, 이어서 김해․사천․진주 등 경남 일대를 함락하였다. 이 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으로 투옥되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적의 유인에 빠져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였고, 원균도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수군은 그 주력을 상실하고 제해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해전에서 승리한 왜군은 여세를 몰아 육군을 호남․호서지방으로, 수군을 전라도 해안을 따라 북상시킬 기세였다. 왜군은 동년 9월에 남원과 전주를 차례로 함락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공주를 거쳐 직산까지 점령하였다.
급보에 접한 명나라는 다시 원병을 보내어 조선과 명나라의 원군이 연합하여 북상하는 왜군을 직산 북방 소사에서 저지하였다. 그 사이 조선도 군비를 새로이 갖추고 대비하고 있어서 이전보다 쉽게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을 우리가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였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방법을 바꾸었다.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편제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명나라 장군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참고하여 군인을 살수․사수․포수의 삼수병으로 나누어 훈련시켰다.
한편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남은 병선 12척과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전비를 갖추고 서해로 향하는 왜 수군의 주력부대 130여 척을 명량 해상에서 대파하고 제해권을 다시 잡았다. 이어서 이듬해 7월에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隣)과 연합하여 순천에서 적을 봉쇄하여 공격하고, 이어서 고금도에서 왜의 수군을 대파하여 기세를 올렸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하여 왜군이 전의를 잃고 있을 때 토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이를 기화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노량 앞 바다에서 도망가는 왜군의 퇴로를 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적선 300척과 싸워 200여 척의 적선을 격침시켰으나, 불행하게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하여 임진왜란은 7년만에 끝나게 되었다.
7년 동안 계속된 임진왜란은 16세기 말엽 동아세아 전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 전란으로 조선이 입은 피해는 대단한 것이었다. 인구의 감소와 대대적인 유망, 그리고 농지의 참담한 황폐는 조선사회를 그 밑바닥으로부터 붕괴시켰다. 특히 농지의 황폐는 농민의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이에 따라 국가의 재정 역시 악화되었고 조세의 파악 근거인 호적과 양안(量案)마저 소실되어 버렸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신분제의 해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전쟁 초에 노비들에 의해서 노비문적을 관장하는 장례원(掌隸院)이 소각됨으로써 많은 노비들이 손쉽게 도망하였으며, 군량미의 확보책으로 실시된 납속책으로 노비가 양인이 되고 양인이 양반이 됨으로써 조선 전기의 엄격한 신분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은 조선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전란 중에 크게 성장한 여진족이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일본에서는 전쟁에 참여했던 서부 지방의 영주들이 몰락하고 동부의 영주들이 흥기하여 토구카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통일국가가 성립하였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