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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이에 이재선과 주동자들은 이번엔 300명으로 강화도를 점령한 뒤 그 병력으로 수도를 공격하자는 더더욱 무리수가 심한 계획을 세웠고 결국 이마저도 병력을 포섭할 자금 부족으로 실패, 결국 쿠데타에 회의적인 내부 고발자 발생으로 이재선 추대 음모 세력들은 모조리 뿌리 뽑히게 된다.
당연한 소리지만, 고종이 의도적으로 구식 군인들을 홀대했다는 주장처럼 대원군이 구식 군대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면 굳이 이런 황당무계한 음모를 획책했다가 남은 자기 세력마저 숙청당하는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경군 내 자기편을 통해 군사를 일으키면 그만이니까. 결론적으로,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으로 군 지휘 체계가 아예 붕괴되기 전까지는 스스로 군대를 동원할 역량이 전혀 없었고, 고종이 임오군란에 했던 대처는 결과적으로 권력욕은 엄청나지만 세력이 없어서 실패하던 대원군에게 알아서 칼자루를 바친 짓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대원군이 실제로 구식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장악할 만한 현실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고종이 그런 의심을 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고종의 구식 군대 홀대는 과연 올바른 조치였을까? 당연히 아니다. 진짜로 구식 군대가 위협 세력이라고 느꼈다면 일단 수뇌부를 기습적으로 제거하거나 무장 해제를 시도하는 방식을 먼저 택해야 했다. 총은 총대로 그대로 들려놓고 이렇게 군인들을 가지고 놀았다면 이건 불온 세력을 견제하는 게 아니라, 멀쩡한 군인들마저 불온 세력으로 만드는 짓밖에는 되지 않는다. 만약 고종의 의도가 진짜 이것이었다면 오히려 더더욱 멍청이라는 증명밖에는 되지 않는다. 물론 아무리 암군으로 비판받는 고종이라도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는 시위대
폭행 사건을 일으킨 김춘영, 유복만과 군인들은 잡혀가서 뭇매질을 당하고 갇히게 됐는데, 그들이 사형을 당한다거나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이 고종에게 군란(軍亂) 진압을 요청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게다가 투옥된 군인들이 모두 죽을 것이란 소문에 구식 군인들은 분노가 제대로 폭발했다.
이에 구식 계통 군인들은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의 주도로 동조하던 한양 주변의 백성들까지 가세하여 마침내 민겸호의 자택을 습격하여 약탈하고선 운현궁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흥선대원군은 사태를 휘어잡기 위해 일단 그들을 달래주고는 성난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며, 그다음 자신의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인으로 위장시키고 비밀리에 김장손, 유춘만과 함께 구식 군인들의 지휘를 맡도록 하였다.
음력 6월 9일, 허욱, 김장손, 유춘만의 지휘하에 구식(옛 훈련도감) 군인 300명이 동별영의 무기고를 부수고 병장기들을 탈취하여 무장했으며 부대를 3군으로 나누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김장손이 이끄는 제1대가 포도청과 관가(의금부)를 습격하여 감옥을 부수고 잡혀간 김춘영, 유복만, 그외 군인들과 위정척사파 및 흥선대원군 지지파 인물들을 비롯한 모든 죄수들을 전원 석방시켰고 유춘만이 이끄는 제2대는 중전 민씨의 오빠인 민겸호, 민태호 등 민씨 일가 친척과 개화파 인물들의 자택을 습격하고 파괴하였다. 모두 다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편, 같은시각 경기도로 남하하던 허욱의 제3대는 경기 감영을 장악하여 감영의 무기고를 부순 후, 그들과 합세한 10,000명의 일반 백성들까지 무장시키고 개화파 인물에 이어 원흉과 혐오의 대상이었던 주(駐)조선 일본 공사관과 하도감까지 습격하여 별기군 교관이었던 호리모토 소위를 비롯한 별기군 조교들을 습격해서 살해했으며, 별기군 부대까지 급습하여 별기군 일부를 살해하는 등으로 사태가 끝나는 듯싶었다.
그러나 구식 군대는 이에 그치지 않았고, 그다음 날인 6월 10일, 대원군의 지원하에 폭동을 일으킨 백성들과 합세한 뒤 민씨 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궁궐로 거침없이 진격했다. 이들은 우선 대원군의 형이었지만 고종과 중전(명성황후)을 지지하였던 전 영의정 흥인군(이최응)과 이조참의 겸 호군인 민창식의 집을 습격해서, 현장에서 이들을 살해했다. 이때 백성들이 임오군란에 합류했던 것은 민씨 세력과 명성황후가 관료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조장하고 그들과 똑같은 만행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 또한 구식 군인들처럼 민씨 일파에 대한 증오감과 원한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단숨에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이닥쳤는데, 궁성과 궁궐에서는 이를 막아서거나 저지하려는 병사들은 그 누구도 없었다.
궁성으로 들어선 군인들과 백성들은 더 이상의 거칠 것 따위는 없었으며, 궁궐 안까지 들어와 그 원흉이었던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붙잡아서 살해했으며, 사실상 모든 일의 근원이라고 할 만한 작자인 중전 민씨를 찾아내서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군졸들은 먼저 교동(校洞) 이최응의 집을 부수고 벌벌 떨고 있는 그를 죽였다. 군병들은 그가 다시 살아날까 염려하여 장창(長槍)으로 항문을 찔러 창날이 머리와 뺨에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나서 "장안의 민가 놈은 다 죽이겠다"고 호언하면서, 민겸호(閔謙鎬)·민태호(閔台鎬)·민규호(閔奎鎬)·민두호(閔斗鎬)·민영익(閔泳翊)·민치서(閔致序)·민치상(閔致庠)·민영목(閔泳穆)·민창식(閔昌植)은 종루(鐘樓)에 끌려나와 난자질당하여 죽었다. 또 김보현의 큰 집, 작은 집과 신관호(申觀浩)·한성근(韓聖根)·윤흥렬(尹興烈)·홍완(洪玩)·이태응(李泰膺)·내영집사 등속과 중인통왜자(中人通倭者:일어 통역관)의 집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홍완은 포박되어 죽이려 들자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그 밖에도 민가(閔家)와 친근한 사람이나 궁궐에 출입하는 점쟁이․ 무당들 집까지도 모두 파괴하여 이날 피살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저상일월(渚上日月), 1882년(壬午年, 고종 19년) 6월 10일
이때 중전 민씨(명성황후)는 궁녀 옷을 입고서 궁녀로 변장하여 궁궐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구식 군인과 마주치게 되어서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무예 별감으로 있던 홍계훈이 자신의 누이 동생인 홍 상궁이라고 속이면서 그의 도움으로 궁궐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충주 장호원(長湖院)에 있는 충주 목사 민응식의 자택으로 피신하였다.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결국 흥선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구식 군대의 호위하에 부대부인 민씨, 장남 이재면과 함께 입궐하게 되었으며, 고종을 알현하여 사태에 대해 논의한다. 고종은 대원군의 요구대로 이재면을 무위대장으로 임명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음으로써 다시 흥선대원군의 섭정 통치가 시작되었다. 군인들과 백성들은 대원군이 입궐했을 때 만세를 불렀고 대원군은 그들을 달래어 해산하여 귀가시킨다.
대원군은 섭정 통치를 하면서 중전 민씨 지지자들을 모두 파면하면서 그들을 귀양 보내거나 처벌했고, 군인들의 밀린 급료 역시 전부 지급했으며 구식 군대에 대한 우대를 강화하기로 하였다. 게다가 이전에 자신을 지지했던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여 조정 관료로 격상시키는 등 고종이 시행했던 부분을 전면 개정하게 되었다. 영의정 홍순목은 원래부터 대원군의 핵심 인사였으므로 자리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부 구식 군인들이 중전의 시신을 공개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자 대원군은 중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중전에 대한 국상(國喪)을 선포하였다.
사건의 전개 및 수습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행보에 대해 의혹이 있다. 우선 구식 군대 장병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 자체는 봉급 문제와 민겸호 등의 잘못된 일 처리에서 나온 것이므로 대원군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대원군이 사건의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가 다소 의심스럽다. 대원군의 정계 복귀는 봉기를 일으킨 군민들이 대원군을 찾아가서 일을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대원군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이때 군민들이 '그래도 왕실의 큰어른이니 일을 해결해 주시겠지'라는 생각에 먼저 자발적으로 대원군을 찾아간 것인지, 아니면 마침 기회를 잡으려던 대원군이 먼저 사람을 보내서 자신에게 오게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여기까지만 했어도 민란이 원인이 된 국내 정변 수준에서 사건이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종 혹은 중전 민씨가(누가 청병했는지는 후술)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한다.
청나라는 자국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이 청군의 군영을 방문한 틈을 타서 그를 톈진(天津)으로 납치 감금한다. 대원군은 청군이 이렇게까지 비겁하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청군은 대원군을 잡은 그날에 톈진으로 보내버렸다(...)
이에 따라 섭정 통치는 끝나게 되었고 중전 민씨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3일 뒤인 음력 7월 16일, 청군은 또한 구식 군인들이 많이 주둔한 왕십리와 이태원동을 습격하여 170명을 체포하였다. 그 뒤 반란을 주도한 11명이 처형당한다.
한편 군란으로 자국 공사관과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된 일본은 조선에 즉각적인 배상 책임과 보상을 요청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모든 피해를 보상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 있는 자국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켜 경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임오군란은 구식 군대의 반란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 끝은 결국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일 수호 조규 속약, 제물포 조약 등 청과 일본의 이중 외압의 심화를 불러왔으므로 본격적인 조선의 식민지화의 시작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2년 후인 1884년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대(對)백성 사과문과 함께 개화 의지를 천명하였고, 이 사건을 끝으로 기존의 개화 반대 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더 이상 주도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유림들은 이후 대세를 바꿀 수 없다고 느꼈는지,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고종도 유림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문묘 종사를 받아들여 김집, 조헌 등이 문묘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일단은, 군란의 과정에서 중전 민씨가 은신처를 제공한 윤태준을 통해 고종에게 밀서를 넣어 청에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해서 대원군이 청으로 끌려갔고, 이 때문에 조선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종전까지의 교과서 내용이자 학계의 정설이었다.
2006년 7월 1일, '임오유월일기'가 발견되면서 당시 중전의 행동반경이 알려졌다. 이 일기는 음력 6월 10일 궁에서 탈출한 이후 6월 13일부터 환궁하기 직전인 8월 1일까지의 날씨와 동정, 주변 인물들의 행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전은 2달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한성, 경기도, 충청도를 거치며 이동하였다. 심지어 이 와중에 인후염과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한다. 자세한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다.
창덕궁 → 한성부 관훈동 → 경기도 광주부 적취리 → 광주부 조현리(새오개) → 경기도 이천군 읍내 → 경기도 여주목 단현리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장호원) → 충청도 충주목 노은면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 → 경기도 지평현 상동면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 → 경기도 안성군 읍내 → 경기도 양지현 읍내 → 경기도 용인현 읍내 → 경기도 용인현 포곡면 신원리 → 창덕궁 환궁
경기 감영에 자신의 생존을 알린 것이 음력 7월 4일, 서울의 상황을 알아보게 사람을 보낸 것이 7월 15일인데 대원군이 청군에 억류된 것이 7월 13일, 끌려간 것이 7월 15일이다. 홍계훈은 충주까지 동행하여 양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여비 500궤미를 내놓은 조충희는 전라남도 영광군수에 임명되었다. 서울과 충주를 계속 왕래하며 정보를 수집하던 북청 물장수(보부상) 이용익이 바로 이때의 공로로 천거된 인물이다.
흔히 청군은 중전 민씨, 혹은 민씨 일파가 요청하여 파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장 박시백은 자신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어떠한 통보도 없이 영선사 김윤식만이 중차대한 파병을 홀로 요청할 수 있는가?"라며 민씨와의 소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말라리아로 고생하던 민씨가 김윤식과 소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기록에도 없다. 그래서 소거법으로 따지고 보면 고종밖에 남지 않는데, 따라서 고종이야말로 청에 밀서를 보낼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 보기도 하나, 이 역시 물증은 없다. 그러나 파병은 예로부터 군 통수권자의 고유 권한이며, 군 통수권자에게 그만한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건 국가원수 정도뿐이니,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인 만큼 적어도 고종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김윤식과 어윤중은 사건이 일어날 당시엔 벌써 고종에 의해 영선사로 발탁되어, 청에 체류 중이었다.
반대로 청이 조선 국내의 누군가로부터 원병 요청을 받고 파병한 것이 아니라 미리 조선에서의 '급변 사태'를 첩보를 통해 파악한 상태였고 그런 상태에서 조선으로의 파병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애초에 일본과 마찬가지로 청도 조선에 대한 첩보 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조선에서의 '급변 사태'를 감지, 상해에 3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여차하면 인천으로 투입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김윤식이나 어윤중은 청이 조선에서의 급변 사태를 파악한 상태에서 원병 파병을 타진하는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뭐하는 사람이냐, 그 사람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등의 문제에 대한 청으로부터의 자문 요구에 응했던 정도였다는 것.
임오군란 이후로 벌어지는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일전쟁, 을사조약,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스펙타클한 사건들이 워낙에 많이 일어난지라 임오군란이 그렇게 임팩트가 크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상 조선 왕조는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멸망의 길을 걷는 회생 불가의 상태임이 입증되었다.
유능한 군 지휘부나 왕족에 의해 일어난 정변도 아니고, 정부가 봉급도 제대로 안 줘서 중앙의 하급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들고일어난 '민란'에 정권이 뒤바뀔 정도로 중앙 정부가 막장이 되었음이 만천하에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후에는 이런 일이 안나도록 군인에게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그 예로 탐오행위를 한 대대장 이용구와 중대장 이만직을 바로 징계하였다.
시민 혁명 등 현대의 비슷한 사례를 떠올릴 수 있는데, 민주주의 기반의 현대 국가와는 달리 이 당시 조선은 명실상부한 '전제 왕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국가의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는 것을 전제로 하는 민주 국가와 달리 왕조의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조 국가에서 민란으로 정권이 위협받는 것은 국가 멸망의 징조로 여겨졌고, 실제로 말기에 들어 민란으로 붕괴한 역사 속의 왕조 국가는 매우 많다. 만약 외세의 개입과 세계 열강이라는 요소가 없었다면 조선 왕조는 임오군란과 뒤이은 민란과 혁명으로 스스로 무너졌을 확률이 높았다. 그만큼 중대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군인에 의한 우발적인 반란 자체가 이 당시에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었으나, 대개는 포템킨 반란처럼 변방에 배치된 병사나 수병같이 처우가 안 좋을 수밖에 없는 병사들한테서 일어나지, 수도를 지키는 중앙군은 왕권의 목숨줄과 같기 때문에 이런 반란이나 혁명을 진압하는 세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앙군에 의해 궁궐이 습격당하고 집권 세력이 바뀐다는 것은, 변방 같은 곳의 국방과 치안은 안 봐도 뻔하다는 말이고,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할 군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중앙군이 일으켰다는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임오군란은 엄연한 내란이었다. 내란이 벌어지는 국가가 기틀이 튼튼한 나라일리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열강들에게는 임오군란이 일종의 '조선을 노려도 좋다'는 뜻의 청신호로 여겨졌다. 우선 각국 지도층들에게 있어 어떠한 나라의 내부 상황이나 속사정을 면밀히 파악하고 식민지화할 수 있을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자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대중에게 공개된 것으로 당대에는 많은 내용들이 기밀로 처리되며, 스파이나 간첩을 통해 알아내는 정보에도 한계가 있다. 조선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의외로 열강의 식민 침투를 막아낼 저력은 있을지도 모르고 그 와중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 엉뚱한 제3국이 가장 큰 이득을 챙길 수도 있다. 즉, 세계 열강 입장에서도 식민지화는 그냥 대충 깃발만 꼽으면 되는 행위는 아니었고 신중한 포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임오군란 같은 사건은 기밀로 감출 수 없는 것이고 외국 열강들에게 있어 조선이 그만큼 허약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장치였다. 실제로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는 허약한 실정을 파악한 세계 열강들의 이권 침탈을 위한 개항 요구가 빗발쳤고 조로수호통상조약 같이 서양 열강은 물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물포 조약 등 청나라와 일본도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포석을 본격적으로 두기 시작한다. 이후 조선을 노리고 수많은 열강들이 외교전과 두 차례의 전쟁까지 불사한 끝에 최종적으론 일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니, 임오군란이 '조선 식민지화'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된 것이다.
역사에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종종 있는데 프랑스 혁명 직후 '민중에 의해 국왕이 참수되었다'는 소식에 허약해진 프랑스로부터 이권을 나눠 먹으려고 벌어진 전쟁이 프랑스 혁명 전쟁이고 중국도 아편전쟁이 참패로 끝나자 간을 보던 많은 서양 열강들이 본격적인 이권 침투에 나섰다. 그러나 유럽의 제일가는 강대국이었던 프랑스는 오히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타나 그 불리한 상황을 딛고 승리해 열강들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 오히려 유럽 대륙을 제패하였고, 중국은 이권은 상당수 빼앗겼지만 열강 하나가 단독으로 먹기에는 너무 거대했으며, 갈라먹으려고 해도 사람 수가 너무 많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조선은 너무나 쉬운 상대였다.
임오군란 이후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며 청과 일본 상인이 조선 영토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인해 빈약한 기반을 가졌던 조선 상인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1891년 기준 청 거류민은 2천 명, 일 거류민은 8,600여 명에 육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