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의 이야기로 들어가면서
참고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4번을 잘 이해하려면 3번을 보아야 하고 3번이 이해않되면 2번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1번도 보시겠지요.
5번째로 마감하렴니다.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가 아니라, 미 상원 부의장이신 신호범 박사님의
간증이랍니다. 남대문 거지생활에서 의연히 일어나
우리 청년들앞에 우리 5,60대 앞에 우뚝서서 외침니다.
그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현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흥청거리는 우리들을 향하여 주는
강력한 멧시지를 들으십시요.
사랑이란 공상에 빠져 허우적 거리지 말고.........
전화위복!
‘축하합니다. 앞으로 외교관이 되어 미국을 빛나게 하기 위한 준비를 해두시기 바람니다.‘
두 번째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제야 말로 ‘나도 할수 있다’라는 자부심도 생겼다.
기쁨도 잠시, 미국시민권 취득후 9년이 지나야 하는데.... 자격 미달이라 한다.(합격취소)
청천벽락이 따로 있겠나! 외무장관에게 간절한 편지를 보냈다. 허탈감에서 온 외침이었다.
당장 임용은 어렵지만 법정기한이 될 때까지 공부 더하도록 추천하고 있었다.
석사과정의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전화위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학원 졸업과 함께 강의를 맡게 되어 하와이로 이사했다. 선생이 되려했던 별과의 꿈,
그 꿈이 이루어 진 것이다. 동양사, 국제정치, 세계문화사의 과목을 강의했다.
열심과 진심으로 노력하는자에게 주님은 함께 하신다. 제자들과 친해지고 수강생들이 늘고,
어느 크리스마스 파티, 한인들만 모이는 자리였다. 한국말을 못하는 나에게는 곤욕이었다.
한 청년이 내게 다가 왔다. ‘한국에서 어느 대학 나왔습니까?’ ‘한국에서는 학교에 못
다녔습니다.‘ ’이런 개자식! 한국에서 학교도 못 다닌 놈이 여긴 왜 왔어?‘
분하고 억울해서 파티장을 뛰쳐 나왔다. 30킬로나 되는 거리를 뛰며, 걸으며...
포효! 짐승이 따로 없다. 소리치고 울고 원통하고.....‘모국어를 배우리라!’
나는 그동안 무얼했던가! 양부모의 신세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위해 가사를 도왔고,
학비를 해결해야했으며, 생활비 충당을 위해 밤 늦게가지 일해야 했다.
손은 거칠고 터지고 여기저기 못이 박혔다. 그러나 내민족과 소통할 수 있는 말을
못하고 산다니! 누가 나를 미국인, 유럽인이라 하겠는가? 그 날의 뼈저린 경험은 커다란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1967년, 박사과정의 등록을 마치고 동양사에 명성이 있는 ‘서두수 교수님’을 방문했다.
‘신군, 한글과 한국말을 배우게, 언어소통이 않되면 같은 민족이라도 피가 통하지 않는 것일세’ 자네가 배우고 싶다면 내가 가르쳐 주지.‘
한국을 알게되고 일본을 알면서 제국주의로 인한 민족적 비애도 느끼게 되었다.
워싱턴 DC 국립도서관 지하창고에 쌓아 놓고 있다는 ‘일본이 강탈해간 역사적 기록들을
살피게 되었다.‘
애국심이 거져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국의 역사에 대한 아픔이 신박사의 연구에 열을
올리게 하였다. 아울러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생기게 되었다.
정치의 입문에 서다.
다음에, 우전.
첫댓글 앗싸,,코스모스,,1등이다,,좋은글에 머물다가 갑니다..우전 님 이쁜 하루 되세요,,
항상 좋은글 감사 합니다. 유월도 수고 많으셨구요. 더 좋은 7월 되시길 소원 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