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의 침대'와 1949년의 조지오웰의 '1984년'.
그리고 오늘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는 부활하는가.
소설을 이야기 전에 잠시...
그리스 신화에 영웅 테세우스는 아버지인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를
찾아가는 길에서 많은 악당들과 괴물들을 만나 이들을 퇴치하고.
그 중 하나가 프로쿠테스인데. 이 이름은 '잡아 늘이는 자'의 뜻.
그는 쇠로 만든 침대를 하나 갖고 있다가 그의 집에 들어 오는 여행자들을
그 위에 결박하고 키가 침대보다 길이가 적으면 잡아 늘이고, 반대로 길면
다리를 짤라 내어 침대에 맞도록 하다가 영웅 테세우스에게도 이런 짓을
하려다가 죽임을 당하지요.
사람들은 이렇듯 나름데로 어떤 한 가지 기준르 가지고 모든 것을 그것에다
맞추려 는 사람을 프로크루테스라 하고, 그러한 획일적인 작업에 사용되는
도구를 일컬어'프로크루스의 침대'라고 하지요.
테세우스의 영웅적인 퇴치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부활하는
근대적 '프로크루스의 침대'.
자기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무죄가 나오든 말든 감옥에 잡아 넣고.
이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지요.
동물농장과 1984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소설가이다.
오웰은 필명이며, 본명은 에릭 블레어이다.
인도 벵골에서 영국인 하급 관리의 자녀로 태어났다.
오웰은 영국에 돌아와 명문 이튼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922년 인도 제국 경찰로 미얀마에 갔다.
그러나 식민지 경찰관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회의를 느낀 그는
어린시절 꿈이었던 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 유럽으로 되돌아왔다.
그후, 제국 지배에 대한 혐오감, 소외 계층과 함께 생활한 경험을
토대로 인간 내면의 강렬한 감정, 지독한 증오심 등을 표현한
작품으로 정치적 색채를 띤 작가가 되었다.
전체주의를 혐오한 오웰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러 갔다가
공화국 의용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이 당시를 그린 것이 그의 첫 작품이 카탈루냐 찬가다.
또 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으며,
문학 비평가이지만 지식인들을 싫어했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가 아무리 바람직하다고 해도 억압과 폭력에 의한
전체주의 사회로 변질될 경우 그것은 우리가 진정 원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것. 인간의 자유, 존엄성, 사랑등을 상실한 전체주의는
결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는 결론.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도 잔혹함과 거짓,
위선적인 말 등을 몹시 증오했다. 결핵으로 여러 번 입원하면서도
작업을 계속했으나, 1950년 1월 21일 런던의 병원에서 죽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의 장편소설 (1984년)이 런던에서 출간됐다.
극단적 전체주의 사회의 독재자 '빅 브라더'가 온갖 정보기술을 동원해
국민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린
1949년에 쓴 미래소설.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제도에서 소재를 인용한 이 작품은 때마침 냉전의
분위기를 타고서 출판 후 1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서만 약 40만 부가
팔렸으며, 세계 각국에서 잇따라 번역 출간되었다고 하지요.
소설은 디스토피아의 전형을 보여주며, 정보기술이 권력자의 지배도구로
이용될 때의 참혹한 상황을 경고한다. 각 부문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제목을 둘러싸고도 화제를 모았다.
원래 제목은 ‘유럽의 마지막 인간’이었으나 출판사가 마케팅 차원에서
제목 변경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현대 사회의 발전과정과 그 속성을 꿰뚫고
있었으며, 한 순간도 시대에 뒤처짐 없이, 아니 오히려 한 발짝 앞서
시대와 함께 숨 쉬는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왜일까?
1984년은 암울한 세상.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 모습을 차용한
가상의 3개국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가 그 무대다.
세계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로 나뉘어 지속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가운데 영국 런던은 유라시아 제1공대에 속하고.
정부는 네개의 부처가 있는데, 전쟁을 담당하는 평화성平和省,
억압적인 법과 질서응 담당하는 애정성愛情省, 피폐한 경제를
담당하는 풍부성豊富省, 뉴스와 오락 그리고 예술을 담당하는 진리성眞理省.
그래서, 물자도 풍부하지 못하고 모든 국가전력을 전쟁수행을 위해 동원해야 한다.
사람들은 당의 명령의 복종해야 하고, 조금도 당에 반항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현상을 지금에서 살펴보더라도 전체주의 국가와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세계에 남아있는 전체주의 국가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세계2차 대전
당시만 해도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롯해서 많은 국가들이 전체주의 국가체제를 유지했다.
특히 냉전시대에는 소련, 그리고 공산주의체제 국가들이 이러한 전체주의로서
이들 나라는 서로 전쟁 중이면서도 가장 평화스러운 시대라고 선전하고 다니며,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 카메라를 모든 공공장소, 사무실, 구내식당, 심지어는
집안까지 설치하여 행동과 대화등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들의 사상까지도 감시하고자 한다.
오웰의 <1984년>이 다시 주목 받게 된 이유도 이런것 때문이 아닐까.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신은 권력'이라는 술로건 아래...
1984년을 통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행어가 된 "빅브라더Big Brother'는
사회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기관.
이 용어는 원래는 유인원이나 폭력배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속어.
아무도 모르게 모두를 지켜보는 불쾌한 '감시자', 누구나 불안하게 하는
비열한 '고발자', 언제든 고문실이나 감옥으로 보내는 비밀스러운
'정부의 관리'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사회 전반을 통제·감시하는 지배권력이나 사회체계를 말하는 ‘빅 브러더’.
바로 <1984년>에서 비롯된 용어다.
한국에서 지금 ‘빅 브러더’란 말이 공공연히 거론되는 것을 보면
<1984년>은 정말 ‘지나간 한 해’가 아니라 ‘늘 현재’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일방적·독선적인 국정기조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광범위하게 민주주의의 후퇴가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단체, 각계 원로인사,
대학 교수, 대학생 등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중앙대 교수들은 시국선언문에서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던 현 정권이 국민을 전방위적으로 감시하고 억압하는
21세기형 ‘빅 브러더’로 변신한 지는 이미 오래”라며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어느 새 경찰국가로 전락해버렸다”고 비판했다.
국무총리실의 서민의 사찰, 더나아가서 여당의 국회의원까지 사찰하는.
우리의 주인공 윈스턴은 이중사고를 하면서 행동으로는 당에 충성하지만
그의 사고는 빅브라더를 타도하고 싶어한다. 진리부 기록국에 근무하는
윈스턴의 주된 업무는 역사조작과 기록 조작으로 당에 불리한 역사나
기록들을 삭제하는 작업들을 날마다 하게 된다.
빅브라더와 당은 인간의 사랑까지도 감시하고 결혼은 철저하게 당에 합당한
두 당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빅브라더의 감시를
벗어나 사랑의 행각을 벌이면서 <당은 당원들의 쾌락을 없애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그런 규칙을 어기면서 살아남으려고 한다.
결국 당의 하수인인 오브라이언의 계략에 의해 둘의 행각이 탄로나고 둘은
감방에서 고문당한다. 고문당하는 동안 윈스턴은 줄리아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당은 철저하게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방의 상징인 101호실에 집어 넣고
결국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
*101호실은 우리나라의 남영동 대공분실격이겠지요
물고문으로 연세대생이 죽게되는-고문 기술자 이근안경감이 떠오르네요.
101호실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마지막에 '쥐고문'을 당하면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쥐고문은"몇 주일 동안 굶주린 쥐들에게 뜯어 먹혀 죽게 되는 고문"이지요.
결국 윈스턴은 "줄리아에게 하세요!. 내게는 하지 마세요!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해도 상관 없어요. 그녀의 얼굴을 찢어도,그 살갗을 벗겨 뼈가
드러나게 해도 괜찮아요. 난 안 된다구요!" 결국 이렇게 애인을 배반하게 되구요.
자신이 간직했던 인간성 마져 버리게 되지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지요.-
그러한 부정으로 간신히 목숨을 무지하고 살아난 윈스턴은 그의 사고마저도
<빅브라더를 사랑한다>라고 최면을 걸면서 1984년 속에 살아가는 운명에 처한다.
1984년의 비유는 현재를 살아가는 디지털시대를 풍자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20세기 말부터 불기 시작한 정보 통신의 발달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통제사회에서는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폐쇄회로 TV, 전자결재 등에 의해서
비단 군대나 병원 공장 학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내의 중앙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는 PC업무시간, 작업과정등 타의에 의한 또는 자발적아니 감시를 받고.
언제 어디서나 현대인의 삶의 모습은 어항속의 금붕어,
백화점 쇼윈도에 세워 놓은 벌거 벗은 마네킹 처럼 훤히 노출 되어 있는 느낌이다.
휴대전화와 전자 우편의 일상적 사용,
신용카드와 교통카드 같은 전자인식 체계, 곳곳에 설치 되어 있는 감시 카메라.
지문이나 홍채와 같은 생체 정보의 수집, 위치추적 기술의 발전등 빅브라더는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1984년>은 독재권력에 의해 인간성이 얼마만큼 파괴되고,
권력자의 정보 왜곡과 통제가 얼마나 정교한지 등을 잘 보여준다.
또 정보기술 발달에 대한 맹신을 경고하면서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다.
이에 따라 <1984년>은 달력상 한 해가 아니라 ‘늘 현재’라는 분석이 많다.
우리들은 그런 장비들의 편리성에 대한 대가로 자신만은 감시 당하고 않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사생활 챔해를 암묵적으로 동의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조지오웰은 사생활침해의 부당성을 사회주의에만 두지 않고 현재의 사회적
시스템의 의식하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의 침대'와 1949년의 조지오웰의 '1984년'. 그리고
현대와는 어떤 삼각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것일까.
이 글을 쓰고 있어도 혹여 누군가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안네요.
꼭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