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기의 평생운동일지에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 먼저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면서
아래쪽 부터 읽어 주시면
김승기의 67년 이후 60 평생 운동일지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소위 출세한 사람이라면 회갑을 맞아 자서전의 출간 등 여러 형태로 보낼 수가 있겠으나
본인은 운동을 좋아하는 필부이며 빈한한 귀농자이다 보니
역우회의 한 귀퉁이를 빌어 평생의 운동일지를 정리해 봄으로써
"평생운동, 평생공부"의 좌우명을 지켜온 자축의 자리를 마련해 보고자 함이다.
순전히 나 자신을 돌아보고자함이라
보는 이들에게는 초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은 없다.
한번 보고 웃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2012년 3월이후 임업회사에 취업하여 삼척에 와있다.
회사에서 제공한 원룸에서 보내고 있지만 불편함이 없다.
제일 반가운 소식은 아들 진후를 비롯해 가족들이 보고 싶다는 소식이다.
"아버지 며칠날 소주 한잔하시죠" 하면 만사 제껴두고 상경한다.
2009년 이후 산일을 줄곧했다.
산일은 때에 따라 고달프다.
땡삐에 쏘이기도 하고 온산을 헤매다 보면 발톱이
멍이들어 모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왜 사서고생인가 한다.
남루한 작업복 차림에 마주쳤던 사람이
골프연습장에서 마주치면 유심히 바라본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퇴근후 작업복 차림으로 대형마트에 들리면
직원 녀석들 다른 사람에게는 90도 인사지만 나에게는 아래 위를 훑어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ㅋㅋ
뭐 세상 그렇지 아직 어리니까 모르지...
나이 60에 근로의 짜릿한 맛을 알고 즐기는 것은 평소의
운동을 통한 건강관리였다는 생각이다.
내가 지닌 능력 눈높이 아래에서 일을 잡으면 언제 어디서든 환영이다.
모셔가기 바쁘다. 물론 겸손이 으뜸-.
그러나 능력위의 눈높이로 일자리를 구하면 눈총에 구박에 고달프다.
감원 0순위는 물론이다.
그러나 절박한 것도 아니고 즐기는 근로라면 나는 전자를 택한다.
땡삐 독한 놈!
2010년 4월 산림기사로 취업을 하고
새벽시간 자원봉사로 봉화군민 청소년수련관
헬스회원을 모집해 지도했다.
봉화에 내려와 있던중 농사일로 어렵게 지내는 것을 본
안동의 역도부 동기
김동진의 권유로 2010년 산림기사 자격을 취득하여
전환기가 마련된다.
그후 영양에서 1년을 보내고 지금 삼척에서 보내고 있다.
2007년 힘의미전 찬조출연
사이드체스트 모습-.
역우회원들과 골프모임도 이따금 참석-.
그런데 요즘은 아예 전화도 없다.
나한텐 요새 돈냄새가 나지 않는 모양-. ㅎㅎ
경북 봉화에 있는 나의 취미방-.
SCUBA, 키타, 서예, 골프, 낚시 등 다양한 연장이 보인다.
사회성이 부족해 혼자만의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름의 선택이 아닌듯 싶다.
청계천이 복원됐을 때 기념 마라톤대회가 있었다.
보는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해적모자를 쓰고 달리니 뉴시스기자가
"청계천에 나타난 해적"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이모자를 지금도 보관하고 기회가 생기면 늘 사용한다.
어린이들과 웃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2005년의 몸매-.
2004년 이후 매년 4월 18일에 역도부 후배들과 함께
4.18마라톤에 참석키 위해 상경하곤 했다.
2004년 기본포즈 몸매-.
2003년 경북 봉화로 귀농을 했다.
이때도 틈틈이 봉화군 수련관에서 웨이트를 즐겼다.
수련관에 트레이너가 없음을 알고 의미 있는 자원 봉사를 위해
국민생활체육지도자 자격을 취득한다.
서울 모 스포츠센타에서 잠시 트레이너로 근무하기도 했다.
아들 진후가 98년 고대를 입학하고 자진해서 역도부에 가입했다.
2003년 군제대후 복학해서 역도부 주장을 지냈다.
그해 힘의미전 초청장 내용-.
2002년 일본 니찌난오로찌 100KM 마라톤대회에 출전하여
13시간 50분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당시 윤동주 시집을 목에 걸고 달리며
한장 한장 일본 산하에 뿌리려 했으나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땀에 젖었던 시집을 보관하고 있다.
당시 90KG의 체중으로 완주해 화제가 되기도.
그후 땅끝에서 통일전망대까지 7박8일간의 울트라에 도전했으나
3일만에 전주 못미쳐에서 발부상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언젠가 꼭 다시 도전해 보려하고 있다.
2002년 런너스클럽 회장을 맡으면서 동아일보에서 인터뷰요청이 왔다.
그 때의 기록이다. 스포츠면 전면이 할애돼 한 때 우쭐한 기분이었다. ㅋㅋ
2001년 마라톤 산문집 "도랑치고 가재잡고"를
출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란다.
런너스클럽 후배들이 서울대학교 동문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성대하게 해주었다.
당일 300여권을 사인하기가 정말 바빴다.
평소 그럴듯하게 사인하나 마련해뒀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1997년 IMF사태를 계기로 마라톤에 입문했다.
매일 10KM이상을 달렸다.
사진은 당시 마라톤 전문잡지에 매월 칼럼을 썼는데
그중 한부분이다.
아마츄어 마라토너는 사연을 담은 신간서적이고
두고두고 읽혀지는 한 권의 장서라는 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소신이다.
1988년 무모하고도 어설픈 도전을 해본다.
미스터코리아 헤비급 일반부에 출전,
천만다행 예선을 통과한 것으로 크게 만족해야 했다.
1979년 사회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면서
새벽시간을 활용해 종로 YMCA와 잠실 YMCA에서
수영, 유도, 웨이트 등을 즐겼다.
또한 직장을 따라 동호회모임을 달리하면서
볼링클럽(에버리지 180), 테니스클럽(연습6개월만에 사내대회 석권),
낚시클럽(우리나라 제일의 낚시클럽 총무역임), 골프클럽(베스트스코어 82타),
당구클럽(400점) 등에 가입해 생활체육을 즐겼다.
1974년부터 77년까지는 군시절-.
복싱(헤비급4전4ko승), 럭비(격구), 수영(인명구조), scuba 등과 함께 태권도를 경험했다.
태권도 3단 국군의 날 시범단원 고달픈 이마격파가
전문이었다. 제대후에도 태권도는 동네 도장에서 3~4년 지속됐다.
1973년 현재 고대박물관 뒷쪽에 역도부실이 있을 때 학교 사진사분을
초청하여 사진을 부탁해서 한컷-. 78kg인 이때를 목표로 늘 운동을 하나
여지껏 이루지 못하고 있다.
1971년 여름 대천해수욕장 합숙훈련장에서
찍은 사진-.
1971년 카메라가 귀하던시절 힘의미전 출전때
섭재삿갓 홍관희(70) 형이 찍어주신 유일한 사진이다.
2위 입상했다.
1969년 휘문고 2년시절 미스터코리아 참가를 위한 포즈-.
역도부 지도교사이신 유인전 선생님이 휘중당을 배경으로
찍어주셨다.
1967년 청운중학교 3학년시절 친구들과 아차산에 놀러가 한컷-.
형님들이 운동을 좋아하셔서 몰래 따라하던시절이다.
운동을 하면 혼났던 시절이지만 김승기의 운동의 시작이다.
농구부였지만 당시 야구도 잘했다. 반대표로 소프트볼 시합에 나갔지만
내가 알까는 바람에 져서 담임 선생님한테 혼났던 시절이기도-.
하교시간 현 경기상고 운동장에서 당시 야구연습을 하던
한일은행 김응룡 선수에 매료돼 1루에서 김선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다
귀가 시간이 늦어 어머님께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첫댓글 승기형. 도랑치고 가재잡고 책을 구하고 싶은데 무슨방법이 있을까요?
먼저 아우 사업은? 나 놀기 바빠 요새 아우 일지를 못들어거봤어 자주 보러갈게 ㅎㅎ
원래 내가 사업할 때 명함처럼 돌리려 했으나 출판기념회때 300여권 나가고 교보에 몇권 보내고 등등 하다보니
제대로 관리를 못해 나도 한권밖에 없어서 구하는대로 아니면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PDF로 만들어 뛰울께!
아우님 늘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하게!
감사합니다. 요즘은 나이 생각해서 달리기는 많이 줄이고 Weight Training과 수영을 함께 하고 있어요.
현명한 생각! 황영조 감독이 그러더군 "형님 그나이에 태릉선수촌 들어갈일 있어요? 전 평생에 풀코스 한번 뛰고 평생 먹을 것 벌었어요!" 물론 황감독의 농담이지만 귀담아 뒀어. 건강하자고 하는 일이지. 웨이트와 수영, 유연성을 보강하는 아주 훌륭한 조합이야. 김수한 히~~~~~~~~~~~ㅁ!
승기 아우님은 나중에 따로 자서전 쓸 필요가 없을거 같네, 일목요연하게 자신의 일대기를 사진과 함께 보관하고 있으니...위의 사진중 내가 찍어준 사진도 있다하니 흐뭇하군, 사진 찍어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잘 찍어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네. 동분서주하며 역동적으로 사는 승기아우가 부럽다네~~건투를 빌며...
공식적인 단체 사진이나 입상사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요. 하지만 아마 형님의 지인이 찍어주신 것을 형님이 전달해 주셨어요. 형님도 출전하셔서 형님 사진도 함께 나누어 본 기억이니까 말입니다. 한번 더 고마워요! (꿉벅)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저도 더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할것 같읍니다.
늘 건강하시고 부근에 갈일있으면 꼭 연락드릴께요
저는 대구에서 여전히 일 잘하고
잘지내고 있읍니다.
이 사장 감동적이긴 ㅇㅎ 대구 한 번 찾아갈게.
언제 든지 오케이입니다.
오시기전에 미리 연락주시면 대구 번개모임 한번 할께요
전화 드릴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