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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조금 지나 이굴루를 나섰다. 걱정이 시작되었다. 걸음마다 내 걱정의 하소연들이 뽀드득 뽀드득 울먹인다. 오늘도 살아야 할 텐데, 무슨 구실로 살려달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또 누구한테 빌어야 그 약발이 통 할 것인가? 온통 그 생각이 내 머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걱정 속에서도 아침 공기는 최고로 맑고 좋은 것 같다. 질 높은 말로 청정도, 순도 뭐 그런 것 말이다.
이글루 미팅을 한 호텔까지 산보를 하듯 걸었다. 많은 눈이 내려서 눈이 발목을 덮어 차갑고 시렸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아침 산책을 하는 기분만큼은 최고로 좋았다. 호텔에서는 모처럼 근사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여러 종류의 빵과 과일, 음료 등으로 허기진 배를 일단 가득 채웠다. 자그마치 100유로를 지불한 이글루 체험에 포함된 아침 식사 아니던가? 값비싼 이글루 체험이지만, 살아서 한 번쯤은 경험해도 좋을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청정한 체르마트에서의 아침은 그야말로 천상에서의 아침이라 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여러 논란의 여지와 판단은 다르겠지만 나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잠을 자면서부터 내내 날 괴롭히던 일, 일어나 쌓인 눈을 보면서, 내 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저리 내리는 눈길을 어떻게 살아서 체르마트를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걱정뿐이다. 마테호른과의 만남을 기대했던 아침은 아쉬움으로 접어야 했다. 사실 아쉬운 마음은 솔직히 할 수 없었다. 내 머리통에는 오로지 걱정으로 가득했으니...
스위스에서 운전할 때 눈이 제일 걱정되는 일이지만, 눈이 내려도 걱정이 제일 안 되는 곳이 스위스라고 하는 말이 실감나는 아침이다. 길 양가에는 눈이 쌓여 있지만 길가에는 말끔하게 재설작업과 함께 염화칼슘 등을 뿌려서 눈이 내려도 금방 녹아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큰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이탈리아 입성하는 날이다. 아, 산 넘어 산이라는 말처럼 나는 또 한 번의 죽음 건 운전을 해야만 했다. 도무지 이제는 눈으로 인해 사투를 벌여야 할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 일은 빗나간 내 바램이었다. 꼬불꼬불 스위스에서 이탈리아 국경을 넘는 국도를 따라 조심조심 올라가는데, 정상에서 단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눈바람으로 인해 내 숨을 멎고 시동을 끄고 멈추어야 했다. 순간 이대로 더 가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선택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핸들에 손을 꽉 쥐고 다시 기도를 했다. 이제는 내 생각을 지배하고 기억해 낼 수 있는 모든 위대하다고 자신하는 신들에게 의지하고 합창으로 빌며 또 빌었다. 아무튼 나의 기도가 통 하도록 합심해서 마음 보태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진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
이렇게 구사일생 살아서...밀라노로 향하는데, 역시 국경이라고 할 만큼의 장벽이나 신분증 제시요구등의 절차는 없었다. 그냥 무사 통과....
밀라노에서 두오모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시내가 미로처럼 역시 복잡하기는 하다. 나는 주차장을 찾기 어려워 30분 정도만 광장에 비상주차를 하고 혹시나 끌고 갈까 싶어서 얼른 보고 나왔다. 성당 전면은 겨울철 보수 공사가 있어서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송곳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난 건축물은 정말 대단했다.
밀라노 두오모는 1386년부터 1577년까지 1차 공사는 200년이 넘도록 한 이래로 내부 공사가 완전하게 끝난 것은 1951년으로 총 공사기간이 600년이 넘는다고 하니 실로 놀랍고 대단하다. 또한 밀라노 대성당은 세계 4번째로 큰 성당인데 135개의 첨탑과 3천개가 넘는 입상들로 외벽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첨탑 135개에는 성서에 나오는 성인들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망원 랜즈의 무게의 압박감에 이번 여행에서 채비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스럽던지.... 암튼 건물의 전체적인 웅장함과 그 화려함으로 하면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다. 너무나 짧은 인연을 아쉽게 고하고 생전에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다음 여행지인 피렌체로 나는 발길을 옮겼다.
피렌체에 도착을 하니 이미 밤 9시다. 친절한 이탈리아 아줌마와 아저씨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피렌체 역사 근처 숙소에 도착을 한 뒤 늦은 밥을 먹고 하루의 일정을 접었다.
피렌체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내게 고작 얼마 안 된다. 르네상스의 발상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향, 냉정과 열정사이의 두오모, 그리고 우피치 미술관 정도,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갖고 바라보면 피렌체에는 수많은 역사적인인 흔적과 문화가 그대로 아직도 남아 숨 쉬고 있는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피렌체의 도로는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도로도 아주 오래된 길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많은 길이 일방통행이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가까운 거리도 빙글 돌아야 한다. 더군다나 많은 도로에는 돌이 아직도 그대로 깔려있어 승차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차도 어느 도시 이상으로 많아 트래픽이 심하다.
늦은 밤에 보았던 피렌체와 낮에 보는 도시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 보인다.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던 피렌체는 현대와 중세시대가 공존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 중세시대 도심을 거니는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한다. 도심 건물은 모두 오래된 건물뿐이다. 적어도 100년 이내 지어진 건물이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민박집에서 아침을 먹고 민박집에서 만난 친구들과 우피치 미술관을 먼저 찾았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벌써부터 많은 인파들로 북적인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은 세계3대 미술관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해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루벤스, 라파엘로, 카라바초 등 거장들의 작품이 모여 있는 곳이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의 발상지답게 르네상스 회화가 세계 최고로 많이 소장되어 있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이 창설되고 공개된 것은 1737년이고, 로마의 바티칸미술관이 1773년,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1759년, 프랑스의 루브르미술관이 1793년이라고 하니 역시 세계 최고의 미술관 역사를 기록하는 곳이기도 하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을 들러 빼 놀 수 없는 인물,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4.15~1519.5.2)가 이곳 피렌체의 작은 마을 “린치”라는 마을에서 출생을 했다고 한다. 다빈치는 누구나가 다 아는 역사의 인물이다.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정말 많은 것 같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공증인 세르 피에로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농사꾼의 딸 카테리나이다. 바자르에 의하면 어릴 때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 에는 신동인양 재주가 뛰어났고 ,더불어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여 그의 부친의 친국인 베로키오의 공방(工房)에서 사사하면서 자연히 입문하게 된다. 그 후 20세 때 피렌체의 화가조합에 가입 하였고, 그 후에도 계속 베로키오의 공방에 남아 수련하다가 1478년에 독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일찍부터 투철한 자연관찰에 의한 엄격한 사실기법(寫實技法)을 습득하고 있었다. 이 점은 1473년경의《성고(聖告)》 (우피치미술관) 및 그의 스승과의 공동작인 《그리스도의 세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30세경에는 피렌체보다도 넓은 활동무대를 찾아 로도비코스포르차가 지배하는 밀라노로 이주했다.
이 최초의 밀라노 체재는 그의 일생 중 가장 길었던 17년간의 정착시기이며, 그 동안 축적된 다양한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시기였다. 《최후의 만찬,1493~7년 460*880cm 벽화,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 수도원 식당》 등을 그려, 객관적 사실성과 정신적 내용을 훌륭하게 접목시킴으로서 다음 세기의 고전양식을 이미 달성하였다.
1503년 3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그 유명한《모나리자》의 제작에 착수하는데, 모나리자 하면 또 많은 얘기꺼리가 있다. 또한 다빈치의 대표할 작품 중 「수태고지」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주의 잉태를 예고하는 장면으로서, 그때 책을 읽고 있던 마리아가 놀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왼손을 치켜든다. 천사의 순결의 상징으로서의 백합을 가지고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엄숙한 순간의 극적인 사건에 알맞게 가라 앉아 있다. 원래 성 발토르멜 수도원 식당에 걸렸던 것이 1867년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나에게 또 하나의 작품이 발길을 머물게 한 痼?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이후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듣게 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란 작품이다. 그림에서나 본 작품을 직접 목도하고 받은 감동으로 그 많은 그림엽서 중 하나의 고민 없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란 그림엽서 한 장을 사서 보냈는데, 소위 이렇게 야한 엽서를 아이에게 보내면 되겠는가 하는 지적이다.
<비너스의 탄생>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한 그림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우라노스는 그의 자식들을 싫어해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가이아는 자식들 가운데 가장 눈치가 빠른 크로노스에게 아버지의 살인 음모를 알려 주었다. 이윽고 크로노스는 아버지의 몸 가운데 한 부분을 잘라서 바다에 던져 버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바다에서는 하얀 거품이 피어나고 그 거품 속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생겨났다. 그 여자가 사랑의 여신 비너스이다.
<비너스의 탄생>은 바로 이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조개 위에 서 있는 여자가 비너스이다. 비너스가 바닷가로 올라오는 순간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그의 연인 클로리스와 함께 나타나 봄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님프는 알몸으로 태어난 비너스에게 망토를 걸쳐주려 하고 있다.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도 비너스의 탄생이란 그림 앞에 잠시 머물다 왔으니, 내가 좀 미인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미술관에 들러 수많은 회화와 조각물들을 그냥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잠시 잠깐 지나치는 일만으로도 하루 반나절 이상을 필요로 할 만큼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는 작품은 대단히 많다. 그런데 하나의 작품과 그 유명한 작가의 숨은 그림을 찾는 일은 몇 날 며칠의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인지, 결코 쉽지 않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적당한 포기를 단행하고 다음 장소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미「냉정과 열정사이」란 책을 영화를 보기 전 먼저 본 사람도 있고, 영화를 보고 책을 구입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도 한 일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내가 후자의 사람으로 그 약속의 장소인 피펜체 두오모에 다녀왔다. 그 영화 혹은 책에서 10년이 지난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 피렌체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성당 꼭대기에는 수많은 연인들의 따라 하기 이름들이 적혀져 있었다. 나도 유치하거나 문화인으로서 수치스럽다고 면박 받을 일인지 모르지만, 한글 많지 않은 곳 한 구석에 슬그머니 몇 자 적어 두고 왔다.
피렌체 두오모는 꽃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데,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는 1296년 공사가 시작되어 1371년에 본당이 완성되었다. 106m의 높이인 대원개(쿠폴라, Cupola)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1437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원개의 천장에는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고, 제단 왼쪽으로는 미완의 대작인 <피에타>가 있다. 흰색과 핑크, 녹색의 대리석으로 된 외관은 장엄하면서도 꽃의 산타 마리아라는 명성에 걸 맞는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이탈리아 2번째 방문지 피렌체, 그리고 두오모를 보면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 2/3가 이탈리아에 있다고 하는 말이 서서히 실감나기 시작한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베키오 다리다. 베키오 다리는 현재 아주 유명한 금은세공보석품을 파는 상점이 있는 다리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러나 14세기 베키오 다리에는 푸줏간이 있었지만 페르디난도 1세가 비위생적이라고 싫어하여 점포를 철거 시키자 하나둘씩 금은 세공 상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점포의 외형은 아주 오래된 나무들과 석물들이 틀을 짜고 있었지만, 창가에 주인을 찾는 값비싼 보석들만큼은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베키오다리 위에는 흉상이 하나 있는데, 피렌체의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 (1500 ~1571)로 금세공인, 작가, 르네상스 최고의 조각가이다. 르네상스 시대 첼리니의 ‘황금의 소금상자(살리에라 / Saliera)’는 ‘조각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데, 첼리니는 매우 뛰어난 마니에리스모 미술가이며 자신과 당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자서전으로 가장 주목받는르네상스기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첼리니의 명성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은 미술가로서의 그의 작품보다는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 1728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판된 첼리니의 자서전은 영어(1771),독일어(1796),프랑스어(1822)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당시 낭만주의 운동의 여파로 즉시 널리 보급되었다.
비록 과장이 심하고 자기자랑이 많기는 하지만, 놀랄 만큼 솔직하고 비할 데 없이 진솔한 인간 기록이며, 바로 이 때문에 첼리니라는 인물은 잘 알려져 있다.
첼리니의 그런 다재다능함과 스켄들 메이커라는 닉네임 덕분인지 흉상 주변에는 연인들이 서로 부등켜 안고 농 짙은 애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로마로 입성하는 날이다. 하마터면 나는 피렌체의 마술에 걸려 헤어나지 못할 뻔 했다. 그러나 한 곳에 머물다 말면 그만이지 할 처지는 못 된다. 여행으로부터 누려야 할 여유는 주어진 시간의 틀 안에서 최대한 보장되는 것이다. 그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그 자유를 일부 제한받아야 하는 것이 지금 내가 처한 나의 운명인 것이다.
모처럼 맑은 하늘 저 편에서는 붉게 진 석양이 아름답다. 길가에는 올리브 나무도 많이 보인다. 특히 이탈리아 고속도로 주변을 달리다 보면 도로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어 마치 한국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다. 오후 5시 30분, 로마 입성은 역시 호락호락 하지 않는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차량 행렬로 인한 심각한 정체,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끼어드는 자동차, 경적소리, 헤드라이트의 불 번쩍임...
로마를 여행하는 사람의 중심 떼르미니역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 어둠이 어둑어둑 몰려온다. 떼르미니역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어디론가 왔다가 가고 다시 돌아오곤 한다. 민박집 아저씨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 손에 지도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젊은 청년이 다가 온다. 민박집 아저씨 아들이란다. 떼르미니역사 근처의 자동차 주차 빌딩에 주차를 하고 민박집에 갔다. 당분간은 자동차를 운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복잡한 로마 시내를 차를 끌고 다닐 이유가 없다. 피렌체처럼 로마도 일방통행이 많고, 도심 건물이 모두 오래된 것들이다. 최소 건물이 40년도 아닌 400년 이상이란다. 우리나라의 건물이 40년만 넘겨도 노인 취급을 받기 일쑤인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민박집은 조선족이 운영하는 곳인데, 이곳에 정착을 한 것은 8년 전이라고 한다. 민박집은 이미 한국인 남녀 대학생들로 가득하다. 아주머니는 저녁상을 차려 주신다. 점심을 피자로 대충 때우고 온 나는 얼마나 맛있게 김치와 소고기로 배를 채웠는지, 그 자리에서 2공기를 후딱 해치웠다.
저녁을 먹으니 한 숨 쉬고 싶어졌는데, 오늘 밤 8시에 야간투어가 있다는 말에 다시 옷을 주섬주섬 차려 입고 나갔다. 약속된 테르미니(TERMINI)역 24번 플렛폼에 나가니까 10여명 정도의 한국인이 모여 있다. Tabacch 라고 쓰여진 매표소에서 1EUR 짜리 티켓을 구입하면 지하철과 버스를 모두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개찰기에 표를 넣을 때 방향이 지하철과 버스가 다를 뿐이다.
내가 받은 투어는 EU가이드 클럽의 야간투어 프로그램인데, 야간투어 일정은 바티칸 투어 및 폼페이투어 모객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이다. 바티칸의 야경, 천사의 성, 뜨레비 분수, 나보나광장, 판테온을 다니며 10시 정도까지 2시간 정도 이어진다.
야간투어를 마치고 민박집에 돌아와 샤워하며 밀린 빨래를 한다고 잠깐 방을 비운 사이에 남자 도미토리 방에는 작은 와인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밤 12시가 다 되어 가는데 젊음은 좋은 것이다. 남녀 대학생으로 보이는 10여명, 그 사이로 나는 머쓱하지만 한 자리를 차지하고 한 잔의 술로 여독을 풀어낸다. 젊은이들 사이에 뿜어내는 얘기가 재미있고, 젊은 기운도 좀 받았으면 하는 욕심도 있지만 자칫 내 욕심으로 잘 나가는 분위기를 흐릴 것이 염려가 된다. .
밤늦은 시간까지 로마 입성을 하자마자 어제도 큰 욕심을 낸 것 같다. 야간투어는 매일 밤 이루어지는 것이고 로마에는 여러 곳의 가이드 회사가 있어 얼마든지 선택적으로 받을 수 있는데, 괜히 쓸데없는 고집을 피운 것 같다.
몸이 좀 피곤하다. 모두가 떠난 민박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는 혼자 방에 들어가 부족한 잠을 더 잤다. 한 숨을 돌리고 민박집 아저씨의 도움으로 리스 차를 반납 시켰다. 혼자 파리에서 로마까지 운전거리가 자그마치 3,500키로를 달렸다. 더 이상 운전을 한다는 것이 힘에 겨웠고 로마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지도 한 장 들고 다리품을 팔면서 다녀도 좋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 유럽의 겨울, 우기가 뭔지 몸소 터득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그냥 멈추고 있을 수 없다. 시간은 내 사정에 따라 로마에 이대로 멈춰 날 기다려 주지 않는다. 멈춤 없는 로마의 시간은 어쩜 더 빠른 잰 놀림으로 시침은 달음박질을 하는 것 같다. 늦은 점심으로 한국에서 사온 라면을 끊여 먹고 민박집을 나섰다. 리스 차량을 반납 시키고 나니 무겁기만 했던 마음 한 구석은 한결 가볍다.
성마리아 성당에 가려고 지도만 한 장을 들고 털레털레 민박집을 나서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의 손에는 지도가 쥐어져 있다. 아마도 이곳 숙소, 호텔이나 민박집을 찾는 것 같았다. 그녀 뒤에는 여자 어린아이와 엄마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운전석에는 또 다른 여자가 앉아 있다. 그들도 프랑스에서 푸조 차량을 리스 해 이곳 로마까지 먼 길을 달려 온 것 같다. 그래도 며칠 앞서 왔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이곳 주변 지역을 안내하고 숙소도 안내를 해 주었다.
로마 떼르미니역 근처에는 무려 40에서 50여개의 민박집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은 8곳 정도라고 하고, 나머지는 모두 중국 조선족이 운영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이 주변 상권도 상당부분 잡고 있는데, 중국인들은 단 1유로에도 목숨을 걸 정도로 대단하다고 한다.
한국인 가이드회사도 여러 군데가 있는데, 제일 처음 로마에 생긴 회사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설립한「자전거 나라」이고, 그 다음으로는 「헬로 유럽」이라고 한다. 전통으로만 보면 자전거 나라가 최고이고, 그 다음이 헬로 유럽인 셈이다. 그 만큼 한국인 가이드투어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그 나머지는 정식 회사로 등록되지 않거나 신생 회사인 것이다. 나는 두 번의 가이드 투어를 받았는데, "헬로 유럽"이라는 곳에서 받을 것을 추천해 주고 싶다.
마리아성당은 내가 묵은 골뱅이 민박집에서도 가깝고 떼르미니역에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여행하고 싶은 의욕이 도통 생기지 않는다. 여행이 10일을 넘어서면서부터 이제 좀 싫증도 생기고 몸은 피로의 혹들이 붙어 무겁기만 하다. 멀리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나고 보고 싶다. 평상시 집을 벗어나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마음도 이제는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슬슬 드는 것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여행의 한계가 여기까지인지 싶다.
숙소에 일찍 들어왔다. 그리고 내일은 먼 길을 가야 한다. 폼페이와 쏘랜토 포시타노 아말피 절경을 보러 가야 한다. 쌓인 피로와 활기찬 폼페이 투어를 위해 일찍 잠을 청해본다.
미켈란젤로의 역작....
판테온....
스페인광장....
정말 죄송합니다. 열심히 올리려했지만, 여러 여건이 허락치 않습니다. 미완의 여행과 미완의 여행기 그동안 관심 가져 주신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밀라노에서 피랜체 그리고 로마에서는 사진으로 올려지지 않은 많은 곳도 열심히 돌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진도 올리고 많은 말도 호들갑으로 떨고 싶었습니다.
암튼, 웃는돌의 좌충우돌 미완의 유럽 여행기를 아쉽지만 이것으로 마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은 터키 답사를 떠나야 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할 틈이 없어 못했습니다. 대장님의 정성으로 만든 답사집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여행 보따리도 전혀 손 대지 못했습니다. 밤 늦게나 집에 가면 낼 아침에 얼른 챙겨 가야지요..^^
모놀님들 요즘 일기가 아주 공손치 않은데, 건강 잃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터키 답사 잘 다녀와서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