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란해. 한 편의 영화가 사람을 이렇게 축 쳐지게 만들지는 몰랐어.
물 한 컵을 따라 마셨지만 사실은 소주를 한 잔 들이키고 싶은데
밤비는 내리지 않고 대작해 줄 사람도 없고 그냥 말아야지 뭐.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습잖아. 그 옛날 봉봉 브라더스나 부르벨스 4중창도 아니고
와이키키라니. 제목에서 부여한 의미조차 새삼스러워.
그러더니 웬걸. 지나간 시절, 서글픈 지산동 지하 연습실의 담배 연기가 새삼
그리워질 줄이야. 기타를 만져본지가 10 여 년이 지났지만 왜 문득
가파른 기억의 비탈길을 숨가쁘게 넘어 그 지산동의 연습실이 떠오르는지,
주인공으로 나오는 기타리스트가 성우라는 사람이었나.
송골매 시절의 배철수나 시나위의 신대철 정도를
떠올리면 될까. 마른 몸매에 달라붙은 청바지를 입고 갈기 머리를 늘어뜨리며
밴드를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매력이었던 시절이 아니었나.
다들 그랬지.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일정한 팩트도 담보되었겠지.
성우라는 사람. 그런 위인이야 그 시절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있었어.
영화에서처럼 엉망으로 취한 롬살롱 취객들 앞에서 옷을 하나씩 벗더니
마침내 알몸으로 기타를 쳐야 하는 설정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슬픈 인물형이야. 그렇고 말고.
악다구니를 쓰듯 목 터지게 부르던 그 노래는 아파트가 아니었던가.
그의 알몸이 슬픈 것이 아니었어. 술 처먹은 손님들이야 장난이었을지 모르지만
테이블에 널부러진 술잔과 땅콩 부스러기는 한 사람의 꿈을,
아니면 지나간 청춘들을 마음껏 비웃었을 테지.
그 장면에선 왜 눈물이 나려 했는지. 눈물이 이렇게 하찮은 것인가.
이런 주책.
친구가 생각났어. 아직도 드럼 스틱을 놓지 못하고 밤무대를 전전하는
그 녀석이 말이야. 레드 제플린의 스테어웨이 투 헤븐을 연주해 내려고
무척이나 용을 쓰던 시절이었지. 그렇지. 기억이 나.
곡의 후반부에 나오는 존 보냄의 드럼 연주를 그 친구는 드럼이 '터지는' 소리라고 하며
똑같이 따라서 했어. 양림동의 한옥집에다 마란츠 컴퍼넌트를 조립해놓고
에릭 클립톤이나 에이프릴 와인, 하다 못해 딥퍼플이라도
종일토록 들으면서도 꼬들배기 김치처럼 질리지도 않았을 그런 날도 아니었잖아.
미국이나 일본에 가서 음악 하겠다던 꿈도 다 접어두고
향토사단 군악대를 제대하고 나온 그, 그런데 80년대가 저물어가던 어느 날이었던가 싶어.
지산동의 지하 연습실의 자욱한 담배 연기 속도 아닌데
라면을 끓여 먹다 남은 양은 냄비에 아직도 허우적대는 꿈이 남아있을 리도 없는데 .
녀석이 힘겹게 말하더군. 희미하게 웃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 드럼을 괜히 배웠나 봐. 건반이나 할 걸 그랬어.
신디사이저에다 키보드만 두드리면 리듬박스가 팍팍 터져 나오는 세상이 되었는데
이깟 막대기가 뭐야. -
기가 막힐 일이라는 표정이었어. 후회가 묻어 있었을까.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그 말꼬리가 살아남아 한 잔 가득 따라 붓는
소주잔에 넘실거렸어. 재빠르게 엉겨붙는 청승은 허겁지겁 떼어 냈겠지.
맑은 술잔이 그리도 슬퍼 보였을 테니 내가 그 날 밤 취하지 않고 배겼겠니..
그런데 이런 비슷한 대사가 와이키키 부라더스에도 나오더란 말야.
참 절묘하게 만든 영화로구나 생각했어. 임순례 감독의 과거에는 이런 친구가
한 명쯤 살아있지 않을까. 임순례 감독은 단순한 대중 영화를 만드는
많고 많은 감독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천재적 장인 감각을 예술가라고 생각한 것도
바로 이 때였지.
그랬잖아. 기억이 나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할 무렵 나도 한 때 밴드를 해보겠다고
돌아다녔던 시절 말이야. 기타는 12살 때부터 치기 시작했으니 그 이력이야 뭐
누구에게 떨어질 일은 아니었지만 그 놈의 기타가 막걸리 기타인 탓에 전자 음이
지직거리는 일렉 기타를 쳐보고 싶었지. 그런데 대한민국 청년들이 다 그렇듯이
군대라고 하는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모든 게 정반대로 바뀌고 말았어.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부터는 팝을 듣지 않았고 기타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커피나 껌도 씹지 않았던 그 80년대 후반을 뒤로하고 음악은 접어 버렸어.
기왕 접을 것, 확실하게 접어 버렸지. 미련도 없었어. 아니, 남겨둬서도 안 되지.
대신 씁쓰레한 부끄러움은 남았을지 모르겠어. 남도 극장 옆 골목에서 마신 소주에
서툴게 취해 친구와 음악적으로 완전히 결별하던 그 날이 1차전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와이키키 브라더스. 참 좋은 영화였어. 옛날 생각나기에 딱 좋은 영화였어.
가투 상황이 끝나고 최루 연기를 뒤집어 쓴 채로 다들 대폿집으로 몰려가
목울대를 세우고 진짜 노동자를 부를 때는 기타를 치던 지나간 시절이
부끄럽기까지 했으니. 엘피 디스크가 자취를 감추고 황홀한 시디 음악이 나오면서
언플러그 음악들이 추억의 장면으로 사라져간 것처럼
세상은 변했고 사람도 변했으며 나도 확실히 변했어.
그랬는데 이 한 편의 영화가 지나간 필름들을 죄다 되돌려놓고 마는 거야.
콜박스 옆의 막걸리 홀도 당시에는 비주류였어. 한물 간 3류급 딴따라 인생들이
마지막 몸부림을 치던 곳이었으므로. 영화 속 밴드들처럼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나가고 마는 서글픔이 엄연히 도사리고 있던 곳이었어.
와이키키의 화려한 조명이 그들의 꿈속에는 언제나 반짝거렸겠지만
사라져 간 벗들, 떠나간 첫사랑, 거기에다 송두리채 저당 잡히고만 미숙하기만 했던
청춘의 날들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시 다가왔어.
그래서 나는 끝내 얼굴을 감싸쥐고 말았나.
다 보여. 제프 백이 우상이었던 것처럼 그것 또한 흉내내어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연주하던 어설픈 기타리스트가 보여.
그 뒤로 화려한 와이키키 조명이 눈부셔. 그런데 제발 수안보라는 지명만 뺐다면,
눈치도 없이 그걸 빼꼼히 들이밀고 있는 그 활자만이라도 치워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아, 꿈결 같은 와이키키. 그걸 노래하는 밴드들.
영화는 끝이 났는데 자꾸만 소주를 마시고 싶은 건 왜인가.
비라도 내렸다면 무조건 소주 한 병은 따는 건데.
글로 만나는 와이키키 브러더스는 가난했던 청년기를 회상케 하는 마력을 갖고 있군요. 음악과 영화에도 조예가 깊으셨나봐요. 좋은 산문 한 꼭지 만나고나면 한동안 현실에 대한 갈증이나 조급함이 사라집니다. 선생님 산문을 이 곳에서 자주 뵙기를 소망해도 되나요? 글빚 많이 지는 기분입니다.
첫댓글 와이키키를 대하고 그날을 회상하며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기보다....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잘 형상화시키면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을 것 같네.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줄 소주 같은 멋진 소설 한 편을 기대하네.<강>
그래볼까요. 형님... 늘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꾸벅..
글로 만나는 와이키키 브러더스는 가난했던 청년기를 회상케 하는 마력을 갖고 있군요. 음악과 영화에도 조예가 깊으셨나봐요. 좋은 산문 한 꼭지 만나고나면 한동안 현실에 대한 갈증이나 조급함이 사라집니다. 선생님 산문을 이 곳에서 자주 뵙기를 소망해도 되나요? 글빚 많이 지는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