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5년 여의도비행장이다. 1955년도엔 군용 비행장외엔 아무것도 없던 곳이다. 현재 KBS앞의 대로가 과거의 비행장 활주로였다.
1916년 일본이 군사목적으로 인해 여의도 일대에 간이 비행장을 건설한 것이다. 일본은 민간 항로개설을 위하는 것이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실제로는 중국대륙침략의 교두보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여의도공항은 개장당시 활주로와 격납고만 있었으며, 개항부터 여의도비행장이라 불리지않았다.
점점 항공수요가 늘어나자자 1928년 비행장을 확장하면서 여의도공항이라 불렀다.
1917년에는 세계적인 곡예비행사 아트 스미스가 여의도비행장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처음으로 항공기다운 항공기가 이착륙했던 것은 1920년의 일이었다.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가 일본과의 우호 친선을 목적으로 비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신의주 비행장에서만 한 번 착륙할 계획으로, 서울 상공에서는 선회비행만 몇 번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항공기를 하늘에서도 보기 힘든 1920년대라, 서울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결국 여의도 비행장에도 착륙, 항공기 이착륙을 선보이게 된다.
처음으로 조선 상공을 비행한 첫번째 조종사인 안창남도 이곳에서 이착륙과 선회비행을 선보였다.
"떴다 떴다 비행기안창남"이라는 노래가 널리 유행할 만큼 이 역시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다.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가 이착륙한지 불과 2년 뒤인 1922년의 일이었다.
특히 무엇보다 이 이착륙에서, 안창남이 몰고온 애기(愛機)에는 조선반도가 새겨져 있어 감동을 더했다.
광복, 6.25전쟁을 겪고 난뒤 1953년 국제공항의 지위를 부여받고, 국제공항으로 승격하였다.
잦은 홍수로 인해 침수피해가 늘어나면서 공항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1958년에는 민간공항기능을 김포국제공항으로 이전하며, 여의도공항은 공군기지로만 사용했다.
1971년에는 공군기지기능도 현재 서울공항으로 이관되면서 여의도공항을 패쇄되었다.

'불도저 시장' 김현옥의 '돌격 앞으로' 정신으로 여의도는 새롭게 등장한다. 우리나라 최대의 광장이 생긴 것이다.

여의도 개발 준공을 알리는 당시 신문기사이다. '민족의 광장''5.16광장' 등 예비이름이 등장한다.
1972년 이 광장은 '5.16 광장'으로 명명된다. 이때는 지금같은 녹지공원이 아니라 아스팔트로 덮힌 광장이었다.
김수근 등이 세운 여의도 도시계획 초안에는 여의도광장이 없었다. 대통령이 광장을 만들라고 지시하시니 광장이 만들어진다.
언제 북한하고 전쟁이 날지 모르니 비상시 활주로로 쓸 수 있는 광장을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다.

위의 사진에서처럼 여의도 광장 북단에는 몇몇 항공기들이 전시되기도 했고, 유사시를 위한 지하 벙커도 마련되어 있었다.
2005년 5월 여의도 버스 환승센터 공사를 하다가 발견한 벙커가 있다. 명확한 용도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대규모 행사 도중 유사시
고위층들이 대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1977년 10월 1일 제29주년 국군의 날 육군사관생도의 퍼레이드이다.
당시 10월1일은 법정공휴일이었다. 모든 국민들의 눈과 귀가 서울 여의도 5.16광장으로 몰렸다.
국가 원수에 대한 경례, 부대 열병, 태권도 시범, 고공낙하 시범, 공수집단 강하,공중탈출 시범,
축하 비행, 도보부대 퍼레이드, 기계화부대 퍼레이드 등이 이어졌다.
오후엔 도보부대와 기계화부대로 나뉘어 서울시내 시가행진에 들어 갔다.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열렸던 국풍’81(國風’81)이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여
반대 세력을 약화시킨 뒤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980년 언론 통폐합 이후, 1979년 동양방송에서 주최했던 ‘제1회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KBS로 옮기면서
제2회 행사를 추진하려던 참에, 청와대 정무1비서관 허문도의 지시로 소박했던 축제가 '국풍' 이라는 대규모 행사로 바뀌었다.
허문도는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채희완 등을 포섭하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결국 자신의 모교였던 서울대학교 졸업생들을
모아 행사에 참가토록 했다.
새 歷史(역사)를 創造(창조)하는 것은 靑年(청년)의 熱(열)과 意志(의지)와 힘이다'라는 캐치프라이즈를 걸고
여의도광장과 둔치 마당에서 5일간 밤낮없이 행사가 진행되었다.
행사가 열리는 여의도 일대는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었고, 행사 기간 동안 야간통행금지도 일시 해제되었다.
행사에는 전국 198개 대학의 6천여 명의 학생과 일반인 7천여 명이 참가하여 민속 문화를 중심으로 한 각종 공연·대회·축제·장터 등이 진행 또는 운영되었다. 행사에 동원된 인원은 16만명이었고, 5일간 행사를 보기 위해 여의도를 찾은 인원은 6백만명(본부측 추산1000만명)에 달했다. 민속문화보다는 야간에 있었던 가요제가 더욱 큰 인기를 끌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가운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103위 성인 시성식’이다.
"순교자의 땅, 순교의 땅…."
지난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한국에 도착한 일성(一聲)으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그해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 10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 등 한국의 천주교 순교자 103(位)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였다.
또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매년 국군의 날에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개최되기도 했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수십만~130만 규모) 김영삼 후보(추산 130만) 노태우 후보(130만 이상) 등이
여의도에서 대규모 선거유세를 벌였다.




여의도공원은 면적 약7만평으로 길이 1.3km, 너비 200m의 넓은 공원이다.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군사문화의 상징인 5.16광장을 허물고 그 위에 센트럴파크 같은 푸른 잔듸와
숲이 있는 도심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아스팔트가 깔린 삭막한 회색의 광장은 푸른 숲의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공원은 크게 연못, 개천, 정자, 오솔길 등 시골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한국전통의 숲”, 런던 하이드파크나 뉴욕 센트럴파크
분위기를 주는 잔듸에 누울 수 있는 ‘잔디마당’, 비록 규모는 작아졌지만 여의도광장이 가지고 있는 정치집회, 문화행사의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문화의 마당’, 공원전체를 순환하면서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약 3km에 이르는 ‘자전거도로.산책로’,
도심속에서 자연을 관찰할 수 있는 ‘자연생태의 숲’으로 구성되어 있다.
7,480평 규모의 문화의 마당은 각종 공연과 집회 등 시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는 문화행사가 개최되는 열린 마당이다.
광장 주변의 큰 느티나무로 그늘을 만들어 편히 쉬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길거리 농구, 인라인스케이트, 배드민턴 등
가벼운 운동도 함께 즐길 수 있다. 광장 한편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민족으로서 긍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줄
높이 50m 태극기 게양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