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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팔판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GENERAL
시기 |
구분 |
문헌기록 |
문화 |
유적 |
유구 |
유물 |
사회발전단계 | |
B.C 25 ~10C |
최초의 김해인 |
신석기 |
수가리 패총 |
패총 |
덧띠문 빗살무늬토기 |
무리사회 Bands | ||
B.C 10 ~1C |
구 간 사 회 |
九干/酋長 駕洛九村 集會/耕田 |
청동기 |
회현리 패총 D구 |
지석묘 옹관묘 석관묘 |
세형동검 옥 마제석검 마제석촉 붉은 간토기-홍도 |
부족연합사회 Confederacy of tribes | |
B.C1~A.D 2C 말 |
가 락 국 |
小國 首露王 |
가야 철기 Ⅰ기 |
구지로12호 양동427호 내덕리19호 |
목관묘 |
와질토기 철제관 가야식동검․방제경 방격규구사신경 |
군장사회 Chiefdom Society | |
3C ~6C 전반 |
大國 狗邪國 秦支 國出鐵 浦上八國 |
가야 철기 Ⅱ기 |
양동 162호 대성동 29호 |
목곽묘 |
도질토기 판상철부 위세품 순장 |
복합군장사회 Complex Chiefdom Society | ||
滅樂浪帶方 廣開土王碑 |
양동․ 대성동 고분군 |
수혈식 석실 |
기대 철정 갑주 마구 | |||||
532년~ |
신 라 |
金官國來降 金官郡 金官小京 |
구산동 유하리 고분 |
횡혈식 석실 |
고대국가 State |
가락국의 성립
가락국의 성립은 가락국 건국신화의 중심인 구지가(龜旨歌)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김해지역의 고고자료가 고인돌(支石墓)에서 널무덤(木棺墓)․덧널무덤(木槨墓)으로, 청동기문화에서 철기문화로 교체되는 시기와 내용을 대입하여 복원할 수 있습니다. 「가락국기」가 전하는 구간사회의 통합과 가락국의 성립은 구간집단과 수로왕의 교체, 지도자(Leader)에서 통치자(Ruler)로의 변신, 부족연합에서 군장사회로의 전환으로 해석되고, 이러한 해석은 고인돌․독무덤(甕棺墓)․돌널무덤(石棺墓)의 청동기문화에서 널무덤(木棺墓)․덧널무덤(木槨墓)의 철기문화로 바뀌었던 사실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청동기문화에서 철기문화로의 교체는 가락국 성립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단계의 가락국은 『삼국지』의 소국(小國)에 해당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성립기의 가락국은 변진 12개국 중 하나로, 전기가야의 여러 소국들과 비슷한 수준에 불과하였습니다. 『삼국지』에 국읍(國邑)에 주수(主帥)가 있으나, 읍락(邑落)이 잡거해 잘 제어하지 못하였다’ 는 것은 성립 후 얼마 동안의 내부통제력이 별로 강하지 못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의 중심고분군인 양동리고분군과 대성동고분군이 3세기 경까지 서로 대등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 이러한 상황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수로왕과 허왕후
가락국을 세운 분이 수로왕이고 수로왕과 짝이 되어 가락국을 완성시킨 분이 허왕후입니다. 가락국의 건국신화는 당시의 역사적 사실이 탄생 → 성인 → 혼인→ 장례라는 사람의 통과의례에 맞추어 탄강(수로왕의 등장) → 성인(탈해의 도전과 극복) → 혼인(허왕후집단과 결합) → 장례(죽음과 수로왕릉)로 기술되었습니다. 수로왕은 기원전 108년에 한(漢)에게 망한 고조선(衛滿朝鮮, 後朝鮮)의 유민으로 아마도 바닷길을 통해 김해에 들어온 성숙한 철기문화인이었습니다. 선진의 철기를 가지고 당시 청동기문화의 구간사회를 통합하여 기원 후 42년에 가락국을 세웠던 겁니다. 허왕후는 『삼국유사』에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49년에 왔다고 전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도에서 아유타국-야요디야가 성립하는 것은 5세기가 되어야 하고, 더구나 지금까지 김해에서 많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헤아릴 수 없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지만 인도의 물건은 단 한 점도 없습니다. 반면에 서북한 지역과 관련되는 유물은 아주 많아 수로왕의 출신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마침 「가락국기」는 허왕후가 가지고 온 물건들은 한(漢)의 사치스러운 여러 물건들(漢肆雜物)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은 알 수 없으나 허왕후의 직접적인 출발지는 서북한 지역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수로왕이 가지고 있었던 철기문화를 내세워 가락국에서 행세하려 했던 탈해(脫解)는 배척되었지만, 수로왕 보다 새로운 선진문물을 가지고 온 허왕후는 수용되었던 것이었고 결혼의 신화로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가락국의 쇠퇴
가락국은 칠포국(柒浦國, 칠원)․고사포국(古史浦國, 고성)․사물국(史勿國, 사천) 등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도전을 받게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까지 가락국이 가지고 있었던 해상교역권에 도전했던 포상팔국의 침입을 독자적으로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신라에 왕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6천 여 가락국 인민이 포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이전의 해상교역권은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313~314년에 고구려가 낙랑․대방군을 축출하면서 가락국의 선진문물 공급원이 차단됩니다. 이제 낙랑․대방군과 일본열도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은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야사의 중심이 북부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도 이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의 표현대로 가야시대의 김해는 여뀌 잎같이 좁아서 농업으로 부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이 시기가 되면 신라는 울주의 달천광산을 개발하게 되고 가락국의 철생산을 능가하게 됩니다. 가락국은 더 이상 철의 왕국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가락국의 쇠퇴를 단 한번의 광개토왕의 남정(南征)에서 구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선진문물 공급의 차단과 철생산 능력의 역전과 같은 변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중원고구려비」(448년)의 토내당주(土內幢主)와 『일본서기』웅략8년(464)의 전마(典馬)의 기술과 같이,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고구려는 신라 영토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되었고,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는 울산을 통하여 장산국(獐山國, 장산 일대)․거칠산국(居柒山國, 황령산 서북~동래)과 같은 가야계 소국을 병합하고 동래방면으로 진출합니다. 5세기 전반~중엽이 되면 동래 복천동고분군에서 신라색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이, 낙동강 이동지역은 이미 신라의 영향력 하에 편입됩니다. 가락국은 낙동강을 경계로 고구려를 업은 신라와 대치하게 되면서 동요하게 되었고, 더 이상 가야사의 중심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고령․합천․함안․창녕지역 등과 달리, 김해지역에 마운드가 높은 무덤-고총(高塚)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4세기말부터 만들어지는 고총은 김해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미 가락국 왕권이 고총고분의 축조능력을 가지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락국의 멸망
5세기 중엽까지 동래와 양산의 가야소국을 병합한 신라는 낙동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475년에 웅진(熊津, 공주)으로 남하 한 백제도 『일본서기』현종3년(487)의 기록과 같이, 섬진강 수계를 따라 동진 또는 남진하면서 서부의 가야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제는 6세기 초에 남원 등의 가야소국을 통합하고 529년에는 하동까지 남하하였고, 섬진강을 건너 아라국(安羅國, 함안)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직면한 가야제국은 독립유지를 위해 연대하기도 하고, 백제와 신라 사이의 외교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서 가락국의 움직임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6세기가 되면 가락국은 이미 신라의 영향에 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529년에 아라국에서는 신라․백제․가야․왜의 사신들이 모여 임나부흥(任那復興)회의를 개최합니다. 여기에 임나란 남가라, 즉 가락국이었습니다. 『삼국사기』는 가락국의 멸망을 532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 망하지도 않은 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모순적 기술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년 뒤 가락국의 구형왕(仇衡王, 仇亥王)이 신라에 투항하는 것은 최종 멸망의 형식을 갖춘 것에 불과하였던 겁니다. 가락국은 대가야(大加耶)나 아라국(安羅國)과는 다르게, 자진 투항하였다. 신라는 무력과 회유의 수단을 병행하여 가야제국을 통합해 갑니다. 가락국의 왕족에게 진골의 신분을 주고 우대하였던 것은 회유책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가락국의 구형왕에게 김해지역을 식읍(食邑)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아직 통합되지 않은 가야제국에 자진 투항을 권유하는 본보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던 겁니다. 구형왕의 증손인 김유신이 복속국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신라 조정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락국사의 편찬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가락국기(駕洛國記)」를 채록하여 유일하게 가락국의 역사를 전하였습니다. 그 편명도 가락국기라 하면서 고려 문종 때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 김해시장)였던 문인(文人)이 편찬하였다고 머리에 적어놓았습니다. 문종 때는 문종 30년(1076)이 분명한데, 지은이 문인에 대해서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수로왕릉에 있는 숭선전신도비(崇善殿神道碑, 1889년)에는 문종이 지김주사(知金州事) 김양일(金良鎰)에게 명하여 짓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1076년에 김해에서 가락국의 역사로 편찬된 「가락국기」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1145년)보다 70년 앞서 편찬되었습니다. 가락국의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였지만, 시조 수로왕과 왕릉에 대해 압도적으로 많은 서술을 할애했던 수로왕릉비문과 같은 성격의 내용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제2대 거등왕에서 제10대 구형왕에는 즉위년, 치세, 왕비, 왕자에 대한 기록만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지금처럼 김해의 가야사가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시대에 「가락국기」가 편찬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락국 제8대 질지왕(452년)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가야불교의 전통은 신라를 거쳐 불교국가 고려에서 꽃피워졌습니다. 김해지역에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에 관계되는 연기(緣起)를 가지지 않은 사찰은 거의 없지만 실제로 시대적으로 가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불교유물이나 유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2002년에 덕산리에서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절터가 발굴조사되었고, 고려시대의 석탑과 마애불 등은 여전히 가야불교가 김해지역에서 계승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덕산리 절터에서는 금동여래입상, 금동여래판불, 금동경패, 소조불상 등이 출토되었는데, 금동경패가 완형으로 발견된 것은 처음으로 고려불교미술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안곡리삼층석탑(安谷里三層石塔), 진영봉화산마애불(進永烽火山磨崖佛), 초선대마애석불(招仙臺磨崖石佛), 구산동마애불(龜山洞磨崖佛) 등은 김해의 고려불교를 보여주는 문화재들입니다.
수로왕과 허왕후를 사모하는 놀이
「가락국기」는 수로왕과 허왕후를 사모하는 경주(競舟, boat racing)놀이가 고려시대에 매년 7월 29일에 진행되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인민, 관리, 군졸들이 모여 승점(乘岾)에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즐기고 떠들면서, 건장한 인부들이 동서로 나뉘어, 망산도(望山島)에서 육지로 말을 빨리 달리고, 뱃머리는 둥실거리며 북쪽의 고포(古浦)로 향해 경주하며 달리니, 대개 가야시대에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이 허황후가 서남쪽 바다에서 오는 것을 보고 수로왕에게 급히 아뢰었던 것을 흉내내며 되새기는 놀이입니다. 홍콩에서 매년 세계적인 축제로 열리는 드래곤보트의 장면을 연상하면 좋을 겁니다.
장유화상 설화
▶ 경남 하동 칠불사에 전하는 장유화상 관련 전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장유화상의 행적이 설화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장유화상(長遊和尙)은 허왕후의 오빠로 보옥선인(寶玉仙人)이라고도 하며 수로왕의 7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7왕자를 성불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지리산 반야봉 칠불사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왕후는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 중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셋째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을 따라 가야산에 들어가 3년간 불법을 수도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아들들을 찾아갔으나 여전히 장유화상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그 후 다시 지리산을 찾은 왕후를 장유화상은 반가이 맞으며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만나라고 하였다. 그때 ‘어머니,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 연못(影池)을 보니 황금빛 가사를 걸친 금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 등 일곱 생불(生佛)이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후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들이 공부하던 곳에 칠불사를 세웠다.
허보옥은 동생의 신행길을 함께 왔는데, 산에 들어가 부귀를 뜬구름과 같이 보며 불도(佛道)를 설경하고 산을 떠나지 않았다고(長遊不返) 하여 장유화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현재 김해시 장유면 불모산 정상 부분에는 장유화상 사리탑으로 알려진 8각 원당형 부도가 있습니다만, 양식상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가락국기에는 장유화상의 허왕후 신행길 수행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김해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에 적혀있습니다만 역시 후대의 기록입니다. 장유화상에 대한 설화는 허왕후 도래설화의 불교적인 윤색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백승충>
김해의 역사Ⅲ - 신라시대-
신라시대란
김해의 역사에서 신라시대란 가락국이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어 종말을 고하고 고려가 건국되기 전까지입니다. 이른바 통일신라라 불리는 시대의 대부분이지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약 100여 년 전부터 김해지역은 신라의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금관이란 지명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정복자인 신라가 가락국의 철을 관장하겠다는 의지로 붙였던 이름입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680년에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지방의 군(郡)에서 작은 서울(小京)으로 승격한 셈입니다. 경덕왕 16년(757)에 금관소경은 김해소경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김해의 지명은 이 때부터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철(金)과 해상(海)왕국의 전통은 이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이 때 쇠(金)바다(海)의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겁니다.
신라왕실의 외가
문무왕이 김해지역을 작은 서울 - 소경(小京)으로 승격시켰던 데에는 아마도 같은 핏줄이라는 생각이 작용했을 겁니다. 문무왕은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명왕후(文姬)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문명왕후는 김유신과 함께 가락국 제10대 구해(형)왕의 증손으로 가락왕실의 후예였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한의 통일을 완수하였던 문무왕의 외가가 김해 가야의 가락국이었습니다. 문무왕은 외가의 본관을 금관소경으로 올리면서 그 시조 수로왕릉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의 명령을 내립니다. 가야시대에는 없었을 수로왕릉의 높다란 봉분은 이 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라시대의 개막
김해에서 신라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유적이 구산동 백운대고분입니다. 일제시대부터 알려진 구산동고분군의 하나로 1997년의 발굴조사를 통해 돌방무덤(橫穴式石室)의 구조가 확인되었고, 금동제장신구, 인화문토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가야의 돌덧널무덤(竪穴式石室)은 돌로 네 벽을 먼저 쌓아 올리고 위에서 관을 내린 뒤 돌 뚜껑을 덮고 봉토를 씌우는 구조로 1회의 매장으로 한정됩니다만, 돌방무덤은 한쪽 벽에 출입구를 만들어 추가로 매장할 수 있는 무덤형식입니다. 무덤형식이란 매우 보수적이어서 축조자의 교체 없이는 바뀌기 어렵습니다. 가야의 돌덧널무덤에서 백제․신라의 돌방무덤으로의 변화는 김해지역의 지배층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백운대고분은 구조와 출토유물로 보아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532년에 가락국이 신라에 통합된 뒤에 새로 만들어지는 무덤으로 신라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유적이 되는 것입니다.
신라사회의 가락인
신라에 병합된 후 가락국의 영역과 인민의 대부분은 신라의 지방과 인민으로 편제되었지만, 김유신(金庾信) 일족과 같이 피정복민의 후손으로서 정복국 신라의 최고권력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구해(형)왕은 신라에 투항하여 가락국왕의 자리는 잃게 되었으나, 신라로부터 금관군을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아 경제적으로 그다지 달라지지는 않았으며 이러한 대우는 그 후손들이 신라의 서울에서 출세해 가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구해(형)왕의 아들 무력(武力), 손자 서현(舒玄), 증손 유신(金庾信)의 3대에 걸친 다양한 신분상승의 노력을 통해 신라 조정의 최고위까지 오르게 됩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김유신(金庾信)
김유신은 제29대 무열왕과 함께 신라의 삼한통일을 이룩한 기둥이었습니다. 개황(開皇)15년(595)에 진천에서 태어나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17세에 혼자 석굴에 들어가 무예를 수련하였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수많은 전쟁에서 전공을 세우면서 642년에 압량주(양산)군주, 644년에 소판(3품)을 거쳐, 647년에 김춘추와 함께 선덕여왕을 도와 여왕의 통치불가를 주장하는 귀족 비담의 난을 진압하여 648년에 이찬(2품)에 오르고, 654년에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면서 명실공히 신라 최고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660년에 백제를 치고, 668년에 고구려를 통합하여 태대각간(太大角干)이란 최고위에 오른 뒤 당군(唐軍)의 축출과 삼한통일의 완성을 눈앞에 둔 673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김유신이 신라 조정의 최고의 위치까지 오르게 된 것은 통일전쟁에서 세운 혁혁한 무공이 첫번째 요인이었지만, 누이동생 문희(문명왕후)를 무열왕에게 출가시켜 신라왕실과 혼인을 맺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김유신비」에는 ‘헌원(軒轅)의 후손이며 소호(少昊)의 후예이라 하였으니, 남가야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같은 성(姓)이 된다’고 하여, 신라인들이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기 때문에 성을 김(金)으로 했다는 것에 영합하는 출신전승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신라와 동일한 출신을 주장함으로써, 신 김씨(新 金氏)의 김유신 일족은 구 김씨(舊 金氏)로 표현되는 전통적 골품제도의 벽을 넘으려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후 100여 년 이상 김유신의 후손들이 전통 경주귀족들이 시기할 정도의 영화를 누리게 되었던 것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던 겁니다.
김유신의 후예들
김유신의 아들로 삼광(三光)과 동생 원술(元述)이 있었습니다. 원술은 문무왕 12년(672)에 당과의 싸움에서 패해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훈을 더럽힌 죄로 부모에게 버림받아 태백산에 숨어삽니다. 뒤에 매초성(買肖城, 양주)에서 당군을 대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서받지 못함을 한탄하여 벼슬도 하지 않고 진주에 살았습니다. 지금의 진주김씨가 그 후손들이 됩니다. 김유신의 손자 윤중(允中)은 성덕왕 24년(725)에 대아찬(大阿飡, 5품)으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는데, 733년에 당이 신라에게 발해를 치게 하면서 원정군지휘관으로 그를 지목해 오자, 성덕왕은 그의 동생 윤문(允文)과 함께 발해를 치게 했으나, 큰 눈으로 원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김암(金巖)은 김윤중의 서손으로 당에 숙위(宿衛)로 유학하여 음양학을 배우고 스스로 둔갑법을 창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귀국 후에는 사천대박사(司天臺博士)가 되어 천문과 역수를 맡아봅니다. 양주(良州)․강주(康州)․한주(漢州)의 태수를 역임하고, 집사시랑(執事侍郞)과 패강진의 두상(頭上)을 지내며 육진병법을 가르쳤습니다. 또 술법에도 능통해 황충(蝗蟲)이 패강진 일대를 덮치자 산마루에 올라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며 하늘에 기원하니 갑자기 비바람이 일어 황충이 모두 죽었다 합니다. 혜공왕 l5년(779)에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귀국할 때 고닌천황(光仁天皇)이 그의 도술이 높음을 알고 더 머물게 하였다고 전합니다. 김암의 형제 김장청(金長淸)은 집사부(執事部)의 최하위 집사랑(執事郞)에 머물러 김유신 사후 100년 남짓에 그 가계가 매우 쇠락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김장청은 가계의 회복을 위해 김유신의 전기 『행록(行錄)』10권을 저술하였는데, 『삼국사기』김유신 전기는 이를 간단히 채록한 것이었습니다.
진경대사
가락국의 후예로서 신라불교의 진흥에 크게 기여했던 사람이 진경대사(眞鏡大師)였습니다. 진경대사는 신라 말기에 새로운 불교운동으로 전개되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창원 봉림산문(鳳林山門)를 창건한 큰스님이었습니다. 1919년 3월에 일제가 창원 봉림사 터에서 서울 경복궁 내로 이전한 진경대사비에 상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진경대사는 신라 문성왕 17년(855) 12월 10일에 탄생하였는데, 이름은 심희(審希)였고, 속세의 성(姓)은 신 김씨(新 金氏), 임나왕족(任那王族)의 후예로 흥무대왕(興武大王)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 김씨란 신라가 가락국을 통합하면서 새로 편입된 김해김씨를 경주김씨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던 명칭이며, 임나왕족의 후예란 가락국 왕족의 후예란 뜻이며, 흥무대왕은 김유신의 시호입니다. 진경대사는 9세에 원감대사(圓鑑大師)에게 사사하여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4년 간 명산을 돌면서 수도를 쌓아 존경받는 고승이 되었습니다. 888년에 진성여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고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의 초청으로 봉림사를 개창하였습니다. 918년에는 경명왕의 청으로 왕궁으로 들어가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호(號)를 받았습니다. 70세 되던 경명왕 7년(923) 4월 2일에 봉림사에서 입적하였는데 경질선사(景質禪師) 등 500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같은 해에 사리탑이 세워졌고, 이듬해에 비(碑)가 세워져 지금은 각각 보물 362호와 36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가락인의 후예로서 신라불교의 진흥을 위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큰스님이 진경대사였습니다.
신라 말의 김해
신라 말의 김해는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면서 등장하기 시작하는 지방호족의 근거지가 됩니다. 김인광(金仁匡) 김율희 등은 진례성제군사로서 현재의 김해와 창원의 경계에 있는 진례산성(進禮山城)에 근거를 두고 김해지역을 아우르는 세력이 되었으며, 헌덕왕(憲德王) 14년(822)에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반란군에 항복하여 그 수하에 들기도 하였습니다. 신라 말에서 후삼국시대까지 어느 쪽에 가담하는 지역이 되는가에 따라 건국시기의 고려사회에서의 김해지역의 위상이 결정되게도 되었습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김해소경을 김해부(金海府)로 낮추고 있음을 볼 때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기여했던 지역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김해의 역사Ⅳ - 고려시대-
고려의 지방제도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왕권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각각의 행정구역을 승격 또는 강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건국 초에는 후삼국의 통일전쟁과정에서 태조 왕건을 도왔던 지역이면 승격되었고, 후백제나 태봉(후고구려)의 편이 되었던 지역은 강등되었습니다. 후기가 되면 왜구(倭寇)의 침임을 막는데 기여한다거나, 민란(民亂)을 일으킨 책임 등을 물어 승격과 강등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김해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936년에 통일을 완수한 태조는 940년에 김해소경을 김해부(金海府)로 낮추었고, 다시 임해현(臨海縣)으로 낮추었다가, 임해군(臨海郡)으로 올렸습니다. 광종22년(971)에 김해부(金海府)로 승격되었다가 지방제도가 완비되는 성종14년(995)에 10도를 정하면서 영동도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크게 승격되었습니다. 목종3년(1000)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두어졌다가, 현종3년(1012)에 금주(金州)로 고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습니다. 충선왕1년(1309)에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충선왕 3년(1311)에 김해부로 고칩니다.
금주(金州)의 위상
고려시대 김해의 지역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고려 전국을 10도로 나눈 가운데 경주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의 주관 행정기관으로 안동대도호부가 두어졌습니다. 둘째, 금주(金州)는 김해지역 이외의 행정구역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의 함안(咸安)․의안(義安, 창원)의 2군(郡), 합포(合浦, 마산)․칠원(漆原, 칠원)․웅신(熊神, 진해)의 3현은 김해의 통제를 받는 행정구역이었습니다. 대체로 낙동강 이남으로 낙동강에서 구마고속도로에 이르는 마산․창원․진해의 지역이 김해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셋째, 문종 때에 정해진 지방관의 녹봉에 의하면, 금주(金州)의 방어사(防禦使)는 울산․예천․양산․안동 등과 함께 100섬을 받았습니다. 같은 때에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 평양)가 270섬, 남경유수(南京留守, 서울)가 200섬이었고, 현재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개성부사(開城府使)가 86섬 10말이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금주의 중요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주(金州)의 농민항쟁
고려후기에 권문세족의 착취가 심해지면서 농지를 떠나 유랑하거나 고을과 나라를 바로잡아 보려는 민중항쟁이 치열히 전개됩니다. 경상도에서는 밀양, 청도, 경주, 김해 등에서 맹렬한 농민항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신종3년(1200) 8월에 금주(金州)에서 여러 성씨의 족단(雜族人)들이 착취하는 호족(豪族)을 죽이려 봉기하였습니다. 폭동군이 무기를 들고 관아(官衙)를 포위하니 부사(副使) 이적유(李迪儒)가 지붕에서 활을 쏘아 주모자를 쓰러뜨리고 일당을 분산시켰습니다. 얼마 후 폭동군이 돌아와 외치기를 우리들은 횡포한 탐관오리를 제거하여 우리 고을을 깨끗이 하려 하는데 왜 우리들을 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적유가 성 밖에 있는 호족들과 협공해 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충렬왕19년(1293) 정월에는 농민은 아니지만 정리(丁吏) 임대(林大)와 영리(營吏) 허반(許頒)과 김언(金彦)이 폭동을 일으켜 경상도 안렴사 유호(劉顥)를 죽였습니다. 임대는 유호에게 은(白金) 2근을 빼앗겼던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허반과 김언은 영고(營庫)의 검열을 피하려 했던 것으로 이 사건으로 금주는 한때 현(縣)으로 강등되기도 하였습니다.
금주(金州)의 교통과 산업
『고려사』에 따르면 전국의 교통망은 22도(道) 525역(驛)으로 나뉘어졌는데, 금주도(金州道)에는 31역이 딸려 있었다고 하며, 덕산(德山, 대동면 덕산리), 성잉(省仍, 진례면 산본리), 적항(赤項, 장유면 관동리), 金谷(한림면 금곡리), 대역(의창군 대산면)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낙동강을 건너 양산으로 나가는 덕산, 냉정I.C 북쪽에서 창원으로 가는 성잉, 남쪽으로 웅천․진해로 나가는 적항, 북쪽 삼랑진에서 낙동강을 건너는 금곡, 밀양 수산에서 낙동강을 건너는 대산 등 현재 김해에서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길의 바탕은 이미 고려시대에 확립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수공업자들의 천민차별 마을을 향(鄕)․소(所)․부곡(部曲)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김해에는 수다부곡(水多部曲, 대동 수안리), 제을미향(齊乙彌鄕, 장유 삼문리), 성화례향(省火禮鄕, 녹산 산양리), 달음포향(達音浦鄕, 대동 월촌리), 감물야향(甘勿也鄕, 대동 대감리) 등이 있어, 대동과 생림과 같이 철생산과 같은 산업을 담당하였습니다. 감물야향의 감물(甘勿)은 단물로 담금질을, 야(也)는 야철(冶鐵)을 각각 뜻하는 것으로 대동면의 대감(大甘)이나 감내(甘內)와 같이 지금의 지명으로 남았습니다. 충렬왕2년 10월에 원나라에 일본의 밤(栗)을 바치게 하였는데, 이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조양필이 얻어 의안현(義安縣, 진영)에 심었다가 이때 열매를 맺었던 것이었습니다. 정종2년(947) 12월에 금주(金州) 관내의 주현(州縣)들에 갑자기 큰물이 나 방축이 무너지고 민가들이 파괴되었으며 농작물들에 손해를 끼쳤다는 해당 관의 보고를 보면 수해도 많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남해안의 관문
고려시대 김해의 중요성은 남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의 하나였다는 입지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해운에서 얻어지는 경제적 이익, 일본과의 외교교섭을 담당하던 창구, 왜구의 침입을 막고 몽고의 일본정벌을 돕던 국방의 요충지 등이 고려왕조가 김해를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쇠바다라는 의미의 김해(金海)나 바다에 접해있다는 임해(臨海)의 땅이름이 그렇고, 배안사(排岸使)나 방어사(防禦使)와 같은 관직이 두어진 것은 해안을 지키는 전진기지로서 국방적 역할이 중요시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어지는 것으로 남해안의 경제와 국방의 중심으로 김해지역이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일외교의 창구
고려시대 남해의 관문이었던 김해는 일본과 외교교섭의 창구역할을 하였습니다. 『고려사』문종3년(1049)에 쓰시마(對馬島) 관청이 우두머리 아키히토(明任) 등을 시켜 표류해 갔던 고려사람 김효(金孝) 등 20명을 데리고 금주(金州)에 도착하였고, 문종10년(1056) 10월에는 일본국사(日本國使) 정상위(正上位) 권례(權隷)인 후지와라아손요리타다(藤原朝臣賴忠) 등 30명이 금주(金州)에 와서 관(館)에 묵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종30년(1243) 9월의 금주(金州) 방어관(防御官)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면서 표류해 갔던 고려사람을 돌려보냈답니다. 원종12년(1271) 9월에는 몽고가 파견하는 일본국신사(日本國信使) 조양필(趙良弼)이 김해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이와 같이 김해는 고려와 일본 사신들의 직접적 왕래가 빈번한 지역이었고, 일본국의 사신들이 체재할 수 있는 왜관(倭館)도 있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명월산 아래 구랑촌에 수참(水站)을 두어 왜의 사신을 접대하였다 하는데, 수참은 현재 부산 강서구 미음동 수정마을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1920년대까지 수정마을에서 지사천으로 오르는 중간에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하며, 일본촌(日本村)이라는 지명이 1930년대까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왜구의 침략
왜구방어의 거점
고려후기부터 극성부리기 시작하는 왜구를 방어하던 유명한 거점의 하나가 김해였습니다. 읍성과 분산성이 축조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정종6년(1040)에 김해부(金海府)에 성을 쌓았고, 고종38년(1251)에는 왜구를 대비해 금주(金州)에 성을 쌓았다고 전합니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고 대비했던 사람이 김해부사 박위(朴葳)였습니다. 『고려사』열전에 따르면 밀양출신의 박위는 우왕 때 김해부사로 부임해 황산강(낙동강)과 남포(南浦, 화목동) 등에서 왜구를 쳐부수고 분산성(盆山城)을 쌓았습니다.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고령 등에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요동정벌 때는 원수가 되어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였고, 전함 100척으로 쓰시마(對馬島)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과 해안의 건물을 다 불살랐고, 고려사람 남녀 100여 명을 찾아 데려왔습니다. 최근에는 채색벽화가 그려진 그의 무덤이 밀양에서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분산성은 김해 중심의 분산(330m) 정상에 띠를 두르듯 돌로 쌓아올린 산성입니다. 『김해읍지』는 옛 산성을 돌로 다시 쌓은 것이라 전하는데, 조선 말(1871년)에 김해부사 정형석이 개축한 것이 약 900m 가량 남아 있습니다. 주로 경사가 완만한 시내 쪽에 성벽이 쌓여져 왜적의 침략을 읍성에서 견디지 못하게 될 때 올라와 장기적으로 저항하던 농성(籠城)입니다. 정몽주(鄭夢周)는 「분산성기(盆山城記)」를 지어 박위의 축성을 치하하면서 가야의 옛터에 세워진 새 성에서 술을 들고 축하하겠다 하였습니다. 금주의 군사는 경상도에서 세 번째로 많았습니다. 보승(保勝) 188명, 정용(精勇) 278명, 일품(一品) 431명 등 총 897명이 주둔하던 남해안 왜구방어의 중요한 기지였습니다.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고려와 몽고의 일본정벌군의 출발항은 마산의 합포였지만, 출발 전에 주둔하고 준비했던 곳은 김해였습니다. 원종12년(1271) 정월에 몽고가 일본국신사(日本國信使) 조양필(趙良弼)을 비롯하여 홀림적(忽林赤)․왕국창(王國昌)․홍다구(洪茶丘) 등 40여 명을 보내 왔습니다. 9월에 조양필을 사신으로 김해에서 일본에 보내고, 홀림적․왕국창․홍다구 등이 이끄는 장병은 김해(金州)에 주둔케 하면서 선박과 군함 모두 김해에서 대기토록 하였습니다. 충렬왕7년(1281) 10월에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김해(金州)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설치하고 인후(印侯)를 소용대장군 진변만호로 임명하고 호부(虎符)와 인장을 주었으며, 장순룡을 선무장군 진변관군총관(管軍摠管)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일본원정을 위한 여몽연합군의 거점이 금주에 두어졌던 겁니다.
금주(金州)의 인물
김훤(金晅)은 원종11년(1270)에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로 부임하여 1271년에 삼별초의 난에 호응해 일어났던 밀주(密州, 밀양)의 민란을 판관 엄수안과 협력하여 평정하였고 그 공이 인정되어 1271년에 금주는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습니다. 허유전은 김해 출신으로 원종 말년에 과거(文科)에 급제하여 충렬왕 때 감찰시사(監察侍史)가 되었는데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사면되었고, 국학사예(國學司藝), 전조시랑(銓曹侍郞), 도첨의참리지밀직사사(都僉議參理知密直司事)를 역임하다 충숙왕 초에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정승에 오릅니다. 충선왕이 원에서 토번(吐藩, 티벳)으로 귀양가자 민지(閔漬) 등과 함께 소환을 청했는데, 81세의 고령이고 부인이 병중이어서 만류하였으나 반년 동안 원에 머물며 귀환운동을 벌였습니다. 송천봉(宋天逢)은 김해 출신으로 과거(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충목왕 때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어 부정한 재상을 탄핵하다가 귀양을 갔고 공민왕 초에 감찰집의(監察執義)가 되어 여러 선비를 천거했으며 우왕 초에는 대사헌(大司憲)에 오릅니다. 감찰과 상소를 통해 나라 바로 잡기에 노력하다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고 81세로 돌아갔습니다. 김유(金庾)는 김해 출신으로 공민왕 때 홍건적을 평정하여 개경을 수복시켰고, 원(元)이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는 것에 반대해 덕흥군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1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최영이 임금에게 대드는 것을 성토하였고, 원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우왕의 출자를 묻는 황제에게 대답치 않은 죄로 지금의 운남성 대리(大里)까지 귀양을 갔었습니다. 원의 꼭두각시 세력가 이인임과 충돌하여 우왕12년(1386)에 투옥되었다가 순천으로 귀양가는 길에 죽었습니다.
김해의 역사Ⅴ -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것이 보통입니다. 조선전기, 임진왜란, 조선후기로 나누어 조선시대 김해의 역사를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 조선전기의 김해
행정구역의 변천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2년(1393)에 전국 각도의 수관(首官)을 정하면서 경상도에는 계림, 안동, 상주, 진주, 경산과 함께 김해를 수관으로 정하였습니다. 태종13년(1413)에 각도의 관명을 고치면서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가 되었고, 세조5년(1459)에 김해진관(金海鎭管)을 설치해, 웅천(熊川, 웅동)․완포(莞浦, 진해)의 2현이 행정적으로, 창원․칠원․함안․고성․거제․진해․웅천이 군사적으로 각각 김해의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김해부의 행정은 정3품의 부사(府使), 사법은 종5품의 판관(判官), 교육은 종6품의 교수(敎授)가 각각 맡았으며, 부사는 6방을 두어 김해출신의 향리(鄕吏)로 실무를 담당케 하였습니다.
지방자치의 원조 김해부사의 아래는 면(面)과 리(里)로 편성되어, 면에는 면임(面任)․집강(執綱)․풍헌(風憲) 등으로 불리는 면장이, 리에는 동수(洞首)․동장(洞長)․존위(尊位) 등으로 불리는 이장이 부의 향리들과 협의하면서 자치에 가까운 행정을 담당하였습니다. 또 태종 때부터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 유향소(留鄕所)는 양반으로 구성된 지방수령의 자문기구로서 성종20년(1489)에 다시 정비되면서 현령과 현감 또는 진사 등을 역임한 유력하고 덕망 있는 5명의 향정(鄕正)이 구성되었다. 지방수령에 대한 견제가 심해 태종이 일시적으로 유향소를 폐지할 정도로 지방자치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영남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운용되어, 유교의 교양과 인격을 기본으로 하는 덕치주의적 지방자치가 김해에서 전개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지방에서 어르신의 위치란 이러한 조선시대의 통치체제의 전통에 힘입은 바 큽니다.
대일교섭의 거점 세종3년(1421)에 경상좌도의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는 대마도 원정 때 얻은 왜선 34척이 황산강(黃山江, 물금)에서 썩고 있으니 부수어 새 배를 건조하는 데 쓰겠다고 상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마도 원정이란 세종1년(1419)에 이종무(李從茂) 등에 의해 단행되었던 대마도정벌을 말합니다. 대마도정벌의 전리품이 대동 앞의 낙동강에 매어져 있었다는 것은 대마도정벌에 김해지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입니다. 1407년(태종7)의 삼포개항 이전에 구랑촌(仇郞村)의 수참(水站, 녹산 미음리 수정)에 왜관(倭館)이 있었다는 것은 고려시대에 있었던 김해의 왜관과 통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으로 조선초기 대일외교의 중요한 지역이 됩니다. 반면에 해안 국방의 요충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성종16년(1485)에는 녹산의 금단곶(金丹串)에 돌로 작은 성(堡)을 쌓아 군마와 소를 기르는 목장으로 하였습니다. 고려 말~조선 초에 왜구침략의 방어책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봉수는 남해안 일대에서 서울로 전해지던 신호체제로, 김해에서는 성화야봉수(省火也烽燧, 녹산)→분산성봉수(盆山城烽燧, 시내)→자암산봉수(子岩山烽燧, 진영)로 전해졌습니다.
삼포왜란과 김해의 석전(石戰)놀이 중중5년(1510) 4월에 제포(내이포, 웅천)․부산포(동래)․염포(울산) 삼포의 일본거류민이 쓰시마도주(對馬島島主)와 통하여 난리를 일으킵니다. 제포(薺浦)를 함락시킨 왜인들이 웅천성(熊川城, 진해 웅동)을 포위하자 김해부사 성수재(成秀才)는 너더리고개(세산)을 넘어 현감 한윤과 협력하여 성을 구합니다. 이 때 선봉이 되어 왜적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던 부대가 돌팔매를 특기로 하는 석전군(石戰軍)이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김해의 풍속이 강(强)하고 간결함(簡)을 중시한다고 하면서 바로 뒤에 석전(石戰)의 풍속을 전하고 있습니다. 매년 4월 8일이 되면 아동들이 읍성 남쪽에 모여 석전을 연습하고, 단오 날이 되면 청장년들이 좌우로 나뉘어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돌을 비 오듯 서로 던져 승부를 결정하는데 죽거나 다쳐도 후회함이 없었고 수령은 차마 금할 수 없었다 합니다. 지금 마산에는 석전교(石戰橋)가 그 자취를 남기고 있지만 석전은 원래 김해인의 씩씩한 전통놀이이기도 했습니다.
남명선생의 강학과 산해정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성리학의 쌍벽이셨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무려 18년 동안 김해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성리학을 연구하셨습니다. 연산군7년(1501) 합천 삼가에서 출생하고, 20세에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1등과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30세에 처가인 김해로 이사하여 산해정을 짓고 18년 간 연구와 교육에 전념합니다. 김해에서의 18년간은 사림의 기풍을 진작하는 힘이 되었고 조선 거유(巨儒)로 추앙받게 하였기 때문에 조정은 벼슬길로 불렀으나 한번도 하지 않습니다. 산해정(山海亭)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는 뜻으로,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경륜과 도량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여 쓴 것으로, 선조21년(1588)에 서원으로 착공했으나 왜란으로 중지된 것을 광해군원년(1609)에 완성하여 신산서원(新山書院)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광복 후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당 영역이 없이 학문을 가르치는 공간만으로 이루어진 서원 형식입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입니다. 남명선생이 처음 성리학을 연구하신 곳이었고, 기묘․을사사화로 주저앉았던 선비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게 한 곳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교육적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입니다.
◎ 임진왜란과 김해
임진왜란의 발발과 피해 선조25년(1592) 4월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은 조선침략군을 편성하여 부산을 급습하여 동래와 양산을 함락시키고 18일에 제3군 쿠로다(黑田長政) 5천, 오오토모(大友義統) 6천, 모리(森吉成) 2천 등 총 13,000명의 왜군은 부산에서 다대포를 건너 김해의 죽도(竹島)에 진주하였고, 19일에 불암창(佛岩倉)까지 진출하여 김해성을 포위합니다. 왜병들이 조총을 쏟아 붓고 19일 밤에는 성내에서 내분도 일어나 20일이 되면 왜병의 총공격에 김해성은 무너지고 맙니다. 이 때부터 선조31년(1598) 11월 왜병의 철수까지 무려 6년 7개월 동안 김해는 왜군의 지배 하에 있게 됩니다. 마사(馬沙, 생림)․신답(新沓, 주촌)․죽도(竹島)․안골포(安骨浦)․웅천(熊川)의 왜성(倭城) 들은 이때 왜군의 노동력 착취를 통해 세워진 것들로 김해 사람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충무공이 불모산(佛母山)에서 왜병이 죽도․불암창․덕진교(德津橋, 주촌면 떳다리)에까지 집을 짓거나 셀 수 없이 막(幕)을 치고, 수 백 척의 왜선이 열을 지어 정박하고 있었음을 내려 다 보았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전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김해성에 밀어닥친 왜병들은 수로왕릉(首露王陵)을 도굴하려 하였습니다. 신병(神兵)이 일어나 왜병 모두를 죽였다고는 하나, 직장(直長) 허경윤(許景胤)이 향인을 데리고 봉분을 쌓았다든지, 『지봉유설』에서 왜구의 도굴 때 넓은 광(壙)속에서 장대한 골격의 주인공과 2명의 20세 가량의 여성 순장자(殉葬者)를 전하는 것을 보면, 이 난리에 수로왕릉도 큰 피해를 입었음이 짐작됩니다.
김해성 전투와 사충신(四忠臣) 1592년 4월 18일 다대포를 건너 왜병이 죽도에 진출하자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의 지원을 얻어 날랜 군사를 초선(哨船)에 실어 정탐케 하였으나 적에게 잡혀 실패합니다. 4월 19일 새벽부터 김해성이 포위되자 조총세례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인 항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인망과 재덕을 겸비한 송빈(宋賓, 1542~1592, 진영)이 이대형(李大亨, 1543~1592, 활천)과 장정 백 여 명을 이끌고 입성하였고, 무과급제자인 김득기(金得器, 1549~1592, 외동)는 동문을 지켰고, 수사(水使) 류용의 손자 류식(柳湜, 1552~1592, 예안리 마산)이 가동 수 십 명을 이끌고 입성하자 사기가 높았습니다. 김해성은 성벽이 높고 참호가 깊어 왜군이 성에 접근하기 어려웠고 동문을 지키던 사관 백응량(白應良)은 성 위 소나무에서 활을 쏘아 적의 부장까지 사살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창원 병영에 많은 군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병을 보내지 않았고, 19일 밤에 왜군이 왜병의 허수아비를 성안에 던져 넣자 성내가 소란해집니다. 더구나 초계군수 이유검이 달아나고, 김해부사 서예원이 배로 진주로 도망하자, 수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빈․이대형․김득기․류식의 네 사람은 20일에 성이 함락할 때까지 싸워 장렬하게 순국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역사상 최초의 의병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충단의 제사 김해부 사람들은 사충신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숙종34년(1708) 진례에 송담사(松潭寺)와 송담서원(松潭書院)을 세워 네 분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순조33년(1833)에 송담서원은 표충사(表忠祠)의 이름을 받았고, 고종8년(1871)에는 나라에서 사충단(四忠壇)과 비석(碑石)이 내려졌습니다. 사충단과 비석은 1977년에 지금의 동상동 송담서원에 옮겨 세워졌습니다. 비각의 지붕에 여의주를 물고 사방을 지키고 있는 네 마리의 용은 사충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들이 순국했던 음력 4월 20일을 기일로 매년 추모의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김해시내 서상동의 고인돌에는 송빈(宋賓)의 순절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고인돌의 뚜껑돌 측면에는 송공순절암(宋公殉節岩)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송공이 이 위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큰절하고 순절하였다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조대왕의 교지(敎旨)와 어서각(御書閣) 김해성 함락 후에 선산에서 김해로 내려온 권탁(權卓)은 무너진 성을 수축해 지키다가 선조대왕이 내린 국문교서를 받들어 적진에 들어가 수비병을 죽이고 일본으로 납치되려던 양민 백 여 명을 구출하였습니다. 권탁이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죽자, 경종(景宗)때 장례원판결사의 벼슬을 올리고, 고종7년(1870)에 김해부사 허전(許傳)이 기문을 짓고 현충사와 어서각을 세워 국문교서-어서(御書)를 봉안하였습니다. 어서각의 규모가 작고 건물이 낡아 1990년에 임호산 남쪽 기슭의 현 위치에 확장 이전하였다. 국문교서는 1988년에 보물951호로 지정되었고 어서각은 도문화재자료 3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김해시의 유일한 보물인 국문교서는 선조26년(1593) 9월에 작성되어 세로75cm 가로48.8cm의 크기로 「만력이십일련구월 일」의 날짜와 「諭書之寶」의 옥새가 지금도 세 곳에 선명합니다.
◎ 조선후기의 김해 정치·군사체재의 정비 선조31년(1598) 9월에 부사 정기남(鄭奇男)의 부임하고 11월에 왜군이 철수하자 비로소 전후 복구에 착수하게 됩니다. 광해군8년(1616)에 창원에 있던 청천진(晴川鎭)과 신문진(新門鎭)을 진례와 장유로 옮겼는데, 이 두 진은 소모진(召募鎭)으로서 지금의 예비군훈련소와 같은 것으로 시기에 따라 불러모아 병력을 충당하는 진(鎭)이었습니다. 효종1년(1650)에 부사 박경지(朴敬祉)가 해창(海倉)과 대변청(待變廳)을 강서구 가락동 죽림에 짓고, 현종7년(1666)에 부사 김성(金城)이 중북촌(中北村, 진영읍 설창리) 화포천(花浦川) 가에 설창(雪倉)을 세웠고, 14년(1673)에는 부사 이행익(李行益)이 각 면에 사창(社倉)을 세워 1,200석을 비축하였습니다. 해창과 설창은 조세를 받아 보관하는 시설로, 해창은 수군의 무기를 보관하기도 하였고, 대변청은 왜구의 침입 같은 변란에 대비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왕성했던 해운활동과 소금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해운의 이익이 많다고 하면서, “배로 장사하는 자의 이익은 반드시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서 얻어진다. 경상도에서 낙동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바로 김해의 칠성포(七星浦)로 북으로 상주(尙州)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고, 서쪽으로 진주(晋州)까지 갈 수 있으니, 오직 김해만이 그 출입구를 관할한다. 김해는 경상도의 입구에 위치하면서 남북의 바다와 육지의 이익을 모두 차지한다. 특히 공과 사의 모든 소금을 판매해 큰 이익을 얻고 있다”고 하였는데, 명지도(鳴旨島)의 염창(鹽倉)에는 전국의 소금이 쌓여질 정도였습니다. 영조21년(1745)에는 명지도의 염민(鹽民)이 구워내는 소금을 곡식과 교환해 주는 산산창(蒜山倉)이 대동면 예안리 마산에 세워져 소금 2석에 찧은 쌀(搗米) 1석을 바꾸어 주었는데, 염민을 상대로 하는 정부의 고리대금업 같은 성격도 강했습니다. 처음에는 1,500석의 쌀을 두고 매년 11월에 대출하고 2배로 거두는 이자를 챙겼습니다. 결국에는 20,000석까지 불어나고도 남아 나머지는 진주의 가산남창(駕山南倉)으로 옮겼습니다. 김해의 왕성한 소금의 생산과 교역에 정부의 고리대금업이 기생한 결과였습니다.
지역교육의 요람
정조, 수로왕릉의 제례를 명하다 정조16년(1792)에 가락국의 시조왕릉에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라는 국왕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제사 때 올리는 축문(祝文)은 국왕의 이름으로 작성되었고, 왕릉의 제사는 국가적 제전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거행되는 봄·가을의 큰제사에서 경상남도 도지사가 첫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이 되는 것은 조선시대국가제례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김해지도 김해 땅의 사연과 변화를 눈으로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옛 지도입니다. <지도 1>은 김해를 그린 가장 오랜 지도로 숙종36년(1710) 경의 김해부입니다. 성화야봉수→분산성봉수→자암산봉수로 이어지는 봉수체계, 창고와 교통로의 역원체계, 읍과 면의 행정구역, 구지봉·수로왕릉·허씨릉 등의 고적이 표시되고, 초선대는 초선도(招仙島)라는 섬이었습니다. <지도 2>는 대동여지도로 지금은 김해평야에 묻혀버린 덕도와 죽도가 섬으로 그려있고, 죽도에서 내륙 쪽으로 망산도(望山島)의 표시가 눈에 띱니다. <지도 3>은 고종3년(1866) 경의 김해부입니다. 완전한 김해읍성과 4대문, 읍성 바로 아래의 남포(南浦), 성밖 서쪽의 수로왕릉, 동쪽 분산성의 읍내쪽 성벽 등이 선명합니다. <지도 4>는 약 20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성리학자 기정진(奇正鎭, 1789∼1876)의 유품에서 나온 것으로, 1992년 7월 가야문화연구회가 기씨종친회장에게 구입하였답니다. 가로70Cm 세로140Cm로 읍성과 관아의 배치가 상세하고, 서쪽의 수로왕릉, 북쪽의 허왕후릉이 분명합니다. 수로왕릉 유물전시실 입구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 5>는 1910년 일한합병 당시의 김해읍입니다. 읍성과 분산성의 성벽이 분명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지도6>은 광복 후 1948년의 김해읍 입니다. 구산동의 허왕후릉과 구지봉 사이에 진영으로 가는 국도가 일제시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 보이고, 향교방면에 아주 조금 남은 읍성의 성벽이 표시되고, 호계천은 아직 복개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동학혁명과 농민봉기 고종31년(1894)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김해에서도 같은 해 3월에 부사 조준구(趙駿九)의 탐학에 항거하여 농민들이 봉기하였습니다. 관청을 부수고, 부사의 관인을 빼앗고, 부사를 김해부 경계 밖으로 추방하였습니다. 이듬해 1895년의 을미개혁 때 김해부는 김해군으로 개칭되어, 진주관찰부(晋州觀察府)에 예속되면서 진영(鎭營)과 보(堡)가 폐지되고 읍성·창고·군기·수진(水陣)·봉수(烽燧)·관액(關 ) 등 모두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과 만장대 한말에 김해출신으로 흥성대원군의 신임을 얻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김종대(金鍾大, 1873∼1949)는 광무7년(1903)에 상경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대원군을 만나 둘째 손자 민용(玟鎔)과 함께 배우며 가까이 지내 8년에 법부주사(法部主事)가 되었으나 10년에 단발을 거부하고 고향에 내려와 책과 가야금을 즐겼습니다. 명지의 염민(鹽民) 김만수(金萬壽, 1841∼?)는 바둑을 매우 잘 둬 14세 때 최연소 국수가 되었고, 18세에 상경하여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압록강 이남에서 제일이란 뜻의 녹일(綠一)이라는 칭호까지 받았습니다. 중국의 원세개와도 대국했다 하며, 30세 때에는 임금 앞에서 대국을 하여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제수 받았습니다. 점치기와 술수에 능통하였던 이유인(李裕寅, 1843∼1907)은 진령군(眞靈君)의 도움으로 고종22년(1885)에 무과에 급제하고, 양주목사가 되었고, 명성황후와 고종의 신임을 얻어 한성판윤(漢城判尹, 서울시장)과 경무사(警務使, 경창총장)을 거쳐 광무2년(1898)에 법부대신(法部大臣)까지 올랐습니다. 이러한 김해인과 대원군의 연분이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마침 김해의 중심인 분산의 정상에는 대원군이 내렸던 만장대(萬丈臺)라는 휘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현 봉수대 뒤편의 바위에 대원군의 휘호와 도장이 새겨져 있고 분산성내에는 흥선대원군의 은혜를 만세까지 잊지 못하겠다는 흥선대원군만세불망비(興宣大院君萬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대원군이 왜군의 침입을 막는 전진기지로서 분산성을 만 장의 높이나 되는 높은 대라 불러준 것이라 합니다.
<이영식> |
김해의 역사Ⅵ - 일제시대 이후-
◎ 일제의 헌병통치
일제의 경제적 수탈 조선총독부는 1912년 8월 13일 토지조사령을 공포합니다. 근대적 소유권과 토지제도의 확립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의 경제적 기반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8년 간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총독부는 많은 논밭과 임야를 차지하고, 국책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민간의 일본토지회사,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무상이나 싼값으로 불하하였습니다. 동양척식회사의 김해농장이 회현리에 설치되었고, 무라이농장(村井農場 후에 하자마농장)이 진영과 창원일대에 만들어졌습니다. 김해의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높은 세율의 소작료에 시달리는 영세소작민으로 착취당하게 됩니다. 일본인들은 김해(1912년)․대저(1916년)․하동(대동, 1920년)․낙동강(1936년)의 수리조합을 조직해 제방을 쌓고 수문을 만드는 수리공사로 농토를 경영하였습니다. 김해인 노동력은 무상에 가깝게 착취되었습니다. 1914년에 김해금융조합을 시작으로 진영과 장유에 금융조합을 설립하여 김해의 금융권을 장악하고 합법적인 고리대금업도 하였고, 1915년 6월에 일본인 우지모토(氏本太市)는 녹산광산을 파기 시작하였고, 1926년 9월에 기하라(木原竹一)는 생림의 아연광산을 채굴하였습니다. 현재 김해지역에서 바위들이 흘러내린 산비탈은 일제가 광물자원을 수탈하던 흔적이라는 증언이 많습니다.
일제의 식민교육 1911년 총독부는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공포합니다. 3.1운동 이후 1922년에 2차 조선교육령,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8년에 3차 조선교육령이 추가로 공포되었습니다. 조선교육령은 일제가 조선인의 문화적 정신적 독립성을 말살하고 영원히 식민지인으로 고착시키기 위한 일제의 교육방침과 교육법이었습니다. 교육령에 따라 진영(1919), 대저․장유(1922), 가락․명지․생림(1923), 하동(1924), 녹산(1927)에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학교의 난립을 방지하겠다는 사립학교령에 따라 1908년 녹명학교(녹산), 1911년 동명학교(명지), 1919년 중화학교(진영) 등이 세워졌고, 거류일본인을 위해 낙동․김해․진영․대사․덕두․가락․신문 등에 소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러한 교육기관들은 황국신민(皇國臣民)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 동쪽의 천황에게 허리 굽혀 가장 정중하게 경례케 하고, 황국신민선서를 암송시키며, 단발령과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한국어교육을 금지하는 식민교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의 실현도구로 김해의 교육기관들을 세웠던 겁니다.
김해지역의 소작쟁의
◎ 김해의 산업과 교통
김해평야의 개간 1930년대에 여러 갈래 낙동강을 하나로 하는 일천식공사(一川式工事)가 추진되어 하동(대동)면 월당(월촌)~명지면 진목리 간의 본류 제방이 완공되었습니다. 1934년 4월에 녹산수문이 완성되어 바닷물의 역류를 막아 김해는 영남의 곡창을 이루게 됩니다. 같은 해 7월의 대홍수로 곳곳의 낙동강제방이 붕괴되고 무려 1,230호의 농가가 전멸하자, 2천 여의 농민들은 공사가 대홍수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여 보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1936년 8월에도 대홍수가 일어났으나 이 때의 개량공사로 대저와 가락은 수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신작로의 개설과 교통 1933년 3월 17일 김해~구포를 잇는 낙동대교가 개설되어 부산과 김해가 처음으로 육로로 연결되었습니다. 1937년 김해군 내의 교통은 경남자동차주식회사의 버스에 의존하였는데, 김해에서 구포, 진영(장유경유, 이북경유), 유림정, 조만포, 월촌의 노선, 진영~일동(대산), 구포~울만의 노선이 운행하였습니다. 부산~마산 간의 국도가 개설되어 김해읍내의 구간이 신작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구지봉과 허왕후릉 사이를 관통하게 되어 김해군민은 거북이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이 잘렸다고 애통하게 여겼다 합니다. 이후 김해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은 이 때문이라 하는데, 1980년대에 구름다리로 지맥을 연결하여 큰 인물이 많이 나게 되었다 합니다. 1942년에는 대저면에 비행장이 설치되었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제국주의의 마지막 저항의 하나로 설치된 것이지만, 현 부산 김해공항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진영단감 김해가 자랑하는 전국적인 명물의 하나가 진영단감입니다. 1927년 진영역장(1923~25)이었던 하세가와(長谷川)가 한국여성과 결혼하여 진영 중부에서 첫 재배를 시작하였고, 일본인 식물학자 요시다(吉田)․사토우(佐藤)․히가미(氷上) 3인이 전국에서 진영이 단감재배의 최적지로 판단하여 신룡리에 100주 가량을 시험재배 한 것이 진영단감의 기원입니다. 1934년에는 조합이 결성되었고, 1937년에는 27,656주에서 181.4톤의 단감이 수확되었습니다. 광복 후 확대되어 2002년 현재 진영에서는 재배면적 1,936ha, 재배농가 1,683호, 연간생산량 24,293톤, 총 매출액 400억에 달하고 있습니다. 1985년부터 진영단감의 홍보와 판로개척을 위한 지역축제로 진영단감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 광복을 맞이한 김해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감격의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초대 군수 한봉섭(韓奉燮)이 부임하였고, 9월에 일제의 소학교는 한국의 국민학교로 다시 열렸습니다. 그러나 새 나라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주장들도 있었습니다. 1948년 5․10선거의 후유증으로 1949년 11월 대동면 평촌에서 76호가 모두 타는 대화재가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1950년 6․25전쟁 때 김해는 전화(戰火)를 입지 않았으나, 피난민 수용과 국민방위군의 설치 등으로 복잡하였고, 학교는 노천에서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인한 민간인학살 등 불행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1952년 4월 지방자치의 실시로 도․읍․면 의회가 구성되었고, 7월에는 김해교육구청이 신설되었습니다. 1972년 대저와 진영, 1977년 장유, 1979년 녹산, 1981년 가락의 도시기반 조성사업이 전개되었고, 1973년 11월 4일에 남해고속국도가 개통되었으며, 1976년 9월에는 김해공항이 개설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