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내레이션(Narration)의 사전적 의미는 영화나 TV프로그램의 화면에 맞춰 해설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방송에서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다큐멘터리나 구성물 등의 해설을 담당하는 사람을 내레이터라고 합니다. 내레이션에는 화면에 대한 설명과 함께 배경음악이나 음향효과가 깔리는 것이 보통인데 프로그램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 해설의 템포나 억양, 분위기 등이 달라져야 합니다. 해설을 프로그램의 성격이나 의도하는 대로 해내지 못하면 내용이나 화면 구성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프로그램의 효과는 떨어지고 맙니다. 이런 점에서 내레이션은 다른 방송분야보다 어렵고 풍부한 방송경험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나운서가 되고 나면 누구나 카메라 앞에서 방송하는 것이 꿈이겠지만 브라운관 뒤에서 내레이터로서 자기분야를 개발하고 능력을 키워 나가는 것도 실속 있고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방송계에서 유능한 내레이터가 된다면 다큐멘터리, 문화영화 등 방송국 내외에서 활동할 기회는 다른 방송분야보다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필자가 TV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의 해설을 맡았던 70년대까지만 해도 내레이션은 아나운서들의 전유물(專有物)처럼 되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내레이션이 아나운서들의 영역에서 멀어지기 시작해 오늘날의 해설프로그램의 거의 대부분을 성우 등 타 직종의 방송인들이 담당하게 되었으니 아나운서들로서는 아쉽고 안타까워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된 원인을 찾아내 내레이션을 아나운서들의 영역으로 되찾아 오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 내레이션의 분류 내레이션은 프로그램의 종류나 내용에 따라 어조나 억양, 속도, 분위기 등 제반 요소가 달라져야 합니다. 크게 나누면 문예물(文藝物)과 비문예물(非文藝物)로 분류되는데 문예물에는 예술성이 짙은 작품이나 문화영화, 드라마의 해설, 문예작품 등이 있고, 비문예물에는 뉴스 등 시사성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등입니다. 대개 문예물의 해설에는 내레이터의 감정이나 성격을 주입시켜 효과를 높일 수 있으나 비문예물의 경우에는 내레이터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차분히 낭독해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세계문학의 거장 ‘톨스토이의 생애와 작품 세계’나 ‘고려청자의 신비’등 영상미와 함께 다른 프로그램은 문예물에 속하고, 자연 다큐멘터리나 ‘새로운 천년, 한국의 미래’와 같은 시사성 TV프로그램은 비문예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능한 내레이터라면 프로그램의 이름이나 제작 의도만 봐도 내레이션물의 형식과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야합니다. 한눈에 파악할 수 없다고 해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고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포맷(Format)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고 어떻게 낭독(朗讀)해야 할지 터득하게 될 것이니까요.
3. 내레이션의 과정과 요령 내레이션의 기본은 주어진 원고를 소리내어 읽어 글쓴이의 의도를 수용자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읽는 것’만으로 그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읽어 듣는 이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입니다. 원고를 예독(豫讀)해 가며 그 프로그램의 제작의도(製作意圖)가 무엇인지, 글쓴이가 이 글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지를 파악해야 하며, 원고 전체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제 것이 된 글의 내용을 ‘남에게 진실하고 솔직하게’말하고 들려주는 것입니다. 방송에 있어서 듣는 이(시,청취자)로 하여금 잘 알아들어 그 뜻을 이해하고 또 전달하려는 의도가 100% 공감을 얻었을 때 그 내레이션은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아나운서의 방송 요령에는 수학 공식에 맞추는 것처럼 ‘딱 이거다’하는 모범답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나운서마다 음색이나 개성, 분위기 등이 각기 다르고 원고를 다루는 기교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뉴스든 내레이션이든 ‘자연스런 흐름’에서 벗어나서는 긴 생명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80년대 중반 아나운서들의 방송이 제작진과 시청자들로부터 소외당해 인기프로의 참여율(參與率)이 낮아지는 등으로 한 때 위기감을 가진 적도 있었습니다. 80년대 중반 아나운서의 방송에는 특유의 ‘낭독조(朗讀調)’가 있었습니다. 다른 방송직종(성우나 탤런트 등)이 모사(模寫)하기 어려운 아나운서들만의 방송패턴이었습니다. 과거 우리 아나운서들의 입사 후 연수과정의 중점은 ‘아나운서다운 방송’에 포인트가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성, 정확한 발음, 품위 있는 말씨 등의 훈련은 지금처럼 필수적인 교육내용이었고 이 교육과정의 기저(基底)에는 방송의 패턴을 ‘아나운서적(的)인 틀’ 속에 넣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은 사람은 6~70년대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대한 늬우스’해설자의 억양을 들어보거나 연상하면 쉽게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우리 선배들의 방송의 정형(定型)이었고 또 가장 듣기 좋은 방송의 모델이었으니 지금의 방송 흐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갖게 됩니다. 그러던 것이 60년대 들어 민영방송들이 생겨나고 방송채널이 다양화되면서 탤런트, 코미디언 등 비전문(非專門)방송인들이 서투른 솜씨지만 방송에 등장하기 시작하자 그 동안 곱고 매끄러운 음성에, ‘틀(mold)'에 박힌 듯한 아나운서들의 억양에 식상(食傷)해 있던 청취자들에게 외부출연자(그 당시는 그렇게 불리웠음)들의 방송이 서투르지만 오히려 신선한 느낌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때부터 청취자들의 방송에 대한 구미(口味)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틀 속에 박힌듯해 부자연스러운 방송보다는 다소 거친 맛은 있어도 격(格)을 깬 형태의 방송에 더 흥미를 갖게 됐고 나중에 이런 현상은 방송의 저질화와 방송언어의 오염 논란까지 불러오는 결과를 빚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갑자기 밀어닥친 이러한 변화가 ’자연스러운 방송‘에 대한 수용자(收用者)들의 요구로 받아들여졌으니 아나운서들도 오랜 기간 자존심처럼 지켜온 ’아나운서다움‘의 고집만 지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아나운서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고 나온 이가 바로 73년도 공채 1기생인 이계진(李季振)아나운서였습니다. 꾸밈없는 목소리, 자연스런 방송흐름, 지금까지 기성(旣成) 아나운서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던 새로운 방송 스타일이었고 그것은 아나운서계(界)의 신선한 충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부터 ‘전통(傳統)’을 지켜온 아나운서들의 방송 패턴에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고 빠르게 발전하는 방송계의 흐름에 맞춰 오늘날까지 적응해 온 것입니다. 매사에 ‘버릇’을 한번 잘못 들여놓으면 바로잡기 힘들 듯이 공채 1기 이전 세대의 이미 굳어진 방송조(調)의 틀 속에 완전히 벗어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필자 역시 60년대에 입사해서 완고한(?) 선배들에게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뉴스건 내레이션이건 현재의 방송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구태(舊態)’를 벗으려 피나는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로는 때묻지 않은 후배들의 방송 흐름을 닮아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고 ‘격(格)’을 깬 그들의 대담성에 내심 경탄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필자가 뒤늦게나마 터득한 것이 아나운서의 방송에 있어 ‘자연스러운 흐름’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나운서의 기본 교육과 훈련과정의 충실한 이수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규격제품’같이 딱딱한 억양, 매끄러우나 인간미가 부족한 것 같은 음성 표현... 이것들이 아나운서들의 발전을 가로막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러움’에서 풍겨 나오는 멋과 맛, 이것이 바로 좋은 방송의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내레이션의 실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원고를 바르게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A. 묵독(?讀) 묵독은 글을 처음 대할 때나 글을 속히 보아 내려갈 때 하는 일기로 주로 글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이 과정은 온 신경이 모두 글의 내용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글의 내용이나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오자(誤字)나 탈자(脫字)를 찾아내거나 문장의 오류(誤謬)를 발견해 낼 수도 있습니다. 한번 읽어서 의미를 파악이 제대로 안되면 다시 읽어서 글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뜻을 모른 채 하는 내레이션은 맛을 모르고 먹는 음식과 마찬가지입니다. 내레이션 뿐 아니라 뉴스 등 원고를 다루는 모든 방송에서 묵독은 원고를 받고 나서 가장 먼저 거쳐야 하는 순서입니다.
B. 음독(音讀) 글뜻 그대로 소리를 내서 읽어 나가는 것으로 글자를 충실하게 음성화하는 단계입니다. 즉 묵독이 독해(讀解)라면 음독은 표현(表現)입니다. 이 단계는 발음연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므로 특수한 어구(語句)라든가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는 착실하게 발음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묵독하는 과정에서 이 원고가 어느 형식에 속하는 글인지는 파악됐을 것입니다. 그래야 어조는 어떻게 유지하고, 어디를 강조하고, 어디를 띄우고, 어디를 붙이고, 어디를 빨리하고, 어디를 천천히 해야 글쓴이의 의도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묵독할 때와는 달리 음독과정에서는 자신이 내는 음성을 귀를 통해 들을 수 있으므로 목소리의 크기나 감정의 주입 등을 어느 정도 스스로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음독은 실제 문장대로 발음이 나오나 안 나오나, 또 글을 틀리거나 더듬지 않고 잘 읽을 수 있는가 어떤가를 확인할 때, 또 작가의 호흡과 감정을 체험하고 어감에 맞게 표현하려 할 때 낭독에 앞서 꼭 거치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문장을 소리를 내 읽음으로써 눈으로만 읽을 때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으며 이때 비로소 ‘읽는 맛’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C. 낭독(朗讀) 소리를 내 익는다는 점에서 음독과 구별하기 어려우나 음독이 자기 스스로를 위해 읽는 것이라면 낭독은 남에게 들려줄 목적으로 읽는 것이라는데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낭독은 묵독과 음독의 과정에서 익힌 발음, 발성, 강약, 속도, 띄어읽기, 어조의 변화, 감정주입 등의 표현기교로써 글의 내용을 되도록 바르게 나타내는 단계입니다. 즈 글의 내용을 음성의 기교로 표출하는 것이 낭독입니다. 아나운서 대 선배인 수원대학교의 전영우(全英雨)교수는 언어표현 중 낭독법을 마장술(馬場術)에 비유했습니다. 즉 말은 각각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전문 기수(騎手)가 아니면 좀처럼 다루기 힘듭니다. 글도 동일하게 각 글의 내용과 형식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문장을 똑같이 낭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낭독도 주어진 글의 성격에 따라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레이터는 말을 다루는 기수와 같아서 기수가 어느 경우에 말을 빠르게 몰고, 어느 경우 속도를 늦추고, 또 어떤 장애물을 넘을 때는 일단 시간적 사이를 두었다가, 가볍게 뛰어넘는다든가 하는 따위의 기교는 말을 다루는 기수가 말의 호흡과 성질을 완전히 파악하고 기수와 말이 혼연일체가 되어 뛰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글을 읽는 사람은 읽혀지는 글과 완전히 조화돼야 합니다. 읽는 사람과 읽혀지는 글이 온전하게 조화된 뒤에 비로소 낭독의 기교가 운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레이션의 요령을 글로 설명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내레이션의 표현기교만 몇 가지 설명하겠습니다.
(1) 발음의 고저장단(高低長短) 아나운서는 ‘말의 예술사(藝術師)’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후배들을 지도할 때 ‘말을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의 고저장단은 바로 음악에 있어 멜로디와 리듬과 같아 높고 낮음, 길고 짧음이 잘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운 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강조한 방송의 ‘자연스런 흐름’도 음의 고저장단을 잘 지킬 때 쉽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음의 장단’은 많은 발음법칙 가운데 아나운서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시하며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드는 발음법칙입니다. 그러나 경력 10년 미만의 아나운서들의 거의 대부분은 음의 장단을 잘 지키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일부러 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필자가 현역 재직시 신입사원 교육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은 것이 음의 장단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아나운서들(아나운서 뿐 아니라 젊은 층 대부분)은 장단음(長短音)에 있어 거의가 발음장애(發音障碍)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발음현실을 무시한 한글 전용 정책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말의 장단음에 있어 상당수는 한자음(漢字音)에서 비롯된 것이 많은데 학교교육과정에 한자교육을 없애니 자연히 학생들이 장단음의 분별 능력을 키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안가 우리말의 긴소리(長音)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한 예로 ‘세상(世上)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짤막한 한 마디의 말에서 ‘세상’ ‘사는 ’ ‘사람’이 모두가 긴 발음인데 이 긴 발음을 모두 짧게 발음하면 말이 되지 않을뿐더러 말 자체가 우스꽝스러워지고 말 것입니다. 이렇듯 방송의 어느 분야든 음의 장단을 지키는 것은 필수이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2) 어조(語調) 사전적인 뜻은 ‘말의 가락’으로, 말의 운율적 요소를 일컫는 어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조라는 말은 슬픈 어조, 명랑한 어조, 무거운 어조, 높은 어조 등의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음성의 높낮이, 세기, 길이 등만 아니라 음색에서 느껴지는 느낌, 말하는 이의 심리상태와 같은 말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나타내주는 말로 사용됩니다. 내레이션에 있어 어조는 그 프로그램의 성격과 의도를 나타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원고의 내용과 형태에 따라 어조를 달리해 표현함으로써 시청취자에게 희.노.애.락의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조에 의한 음성 표현의 효과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내레이터의 고도의 표현 기법이다.
(3) 악센트 글의 어느 부분을 강조하려고 할 때 강약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즉 언어학적으로 악센트는 한 말 토막 안에서 내레이터가 특정한 음절을 다른 음절보다 더 힘주어 발음해서 두드러지게 들리도록 하는 현상입니다. 악센트는 문장 안에서 어느 특정한 말 토막을 도드라지게 들리게 해서 그 말 토막이 담고 있는 의미를 강화시켜 그 문장의 전체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문장에 악센트를 주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주위 문장과 비교해서 음성의 세기와 높이를 ‘더 높고, 더 강하게’하지만, 속도와 발음을 약간 천천히, 또는 보다 명료하게 하기도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주위 문장보다 세기와 높이를 약하고 낮게 함으로써 악센트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조 악센트를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거나 사용 위치가 적적하지 않을 경우는 문장 전체의 호흡과 억양은 물론, 발음까지도 그르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4) 속도(速度) 내레이션의 속도는 그 글의 의미, 내용 등에 의해 결정됩니다. 문예성이 있는 글이나 ‘휴먼 다큐멘터리’와 같은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은 전체적으로 비교적 느리고, 동물이나 시사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은 빠른 것이 보통입니다. 내레이션의 속도도 악센트에 있어서와 같이 글의 내용이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내레이터가 지니고 있는 개성과 음성 등도 속도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속도를 의도적으로 변화시킬 경우 일반적으로 의미가 강화되거나 약화됩니다. 문장을 강조하기 위해 전후의 환경과 속도를 다르게 변화시켜 음성 표현을 하는 경우에는 보통, 속도를 느리게 조절하는 방법을 쓰게 됩니다. 반면에 어휘나 어구, 문장의 의미를 전후 환경보다 약화시키고자 할 때는 속도를 빨리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5) 포즈(PAUSE) 원고를 읽어나가는 도중에 일정한 길이의 시간적 공백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내레이션에서 포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뜻을 정리하고 이해하고, 혹은 감정의 희비를 맛보게 하는 역할을 포즈가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포즈를 생략하거나 포즈의 위치를 잘못 둘 경우에는 그 내레이션의 전체적인 흐름을 망칠 수가 있습니다. 포즈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숨을 쉬기 위한 포즈와 숨을 쉬기 위해서보다는 문장의 의미를 좀더 명확히 해서 듣는 이가 자신의 말을 쉽고 정확하게 알아듣도록 하기 위한 포즈가 있습니다. 포즈가 가지는 역할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① 문장, 절, 문장의 성분을 구분해 줍니다. ② 문장 성분 간의 호응 관계를 밝혀줍니다. ③ 포즈의 앞뒤의 어휘, 어구, 문장 등이 담고 있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④ 음성 표현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합니다. ⑤ 억양의 경계가 됩니다. ⑥ 포즈가 스스로 의미를 지닙니다.
낭독에 있어서는 문장이 길어서 한 호흡으로 할 수 없거나, 의미ㆍ발음의 문제로 인해 중간에 포즈를 두는 것을 ‘끊어 읽기’를 한다고 합니다. 방송에서 이 끊어 읽기를 적절하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의미 전달의 효율성, 발음의 정확성, 흐름의 자연스러움, 운율 등에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문장을 어디서 끊어 읽기를 하느냐, 즉 포즈의 적당한 위치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편적인 원칙을 세워 적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호흡의 길이와 같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생리적 요인, 문장의 구조, 음성 표현의 속도, 글의 의미와 같은 수많은 요인들이 끊어 읽기의 위치와 깊은 관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끊어 일기가 전적으로 낭독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실현돼도 괜찮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모든 문장구조, 모든 사람에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원칙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이지 일정한 문장에 객관적인 끊어 읽기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한 호흡에 읽을 수 없을 정도의 긴 문장에는 항상 포즈가 있게 마련이고, 포즈가 오는 위치는 대부분 일정합니다. 단지 문장의 의미가 모호해서 이해를 달리 할 수 있거나, 문장이 여러 의미를 담고 있을 경우는 의미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사람마다 달라서 포즈의 위치가 달라질 때가 있습니다. 또 포즈의 길이도 모두 같을 수가 없습니다. 뉴스든 내레이션이든 포즈의 길이가 대나무의 마디처럼 일정하다면 지루하고 맛이 없는 방송이 될 것입니다. 내레이션, 특히 문예성이 짙은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의 경우에는 포즈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텔레비전에 많이 등장하는 유능한 내레이터들의 음성을 컴퓨터 상의 파형(波形)으로 분석해보면 어휘와 어휘 사이의 포즈의 길이가 모두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포즈를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방송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6) 변조(變調) 낭독하는 상태의 변화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포즈가 긴 것이나 따옴표(“”)속에 들어가는 대사, 인용구(引用句), 또는 화제의 전환(轉換)등에 많이 쓰입니다. 인물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의 경우 주인공의 말을 내레이터가 인용할 때라든가, 앞의 장면이나 화제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전환됐을 때는 낭독 스타일이나 분위기를 바꾸어 줌으로써 내레이션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7) 명암(明暗) 음성의 밝고 어두움에 따라 말의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주제가 밝은 내용일 때는 밝은 음성으로, 무거운 내용일 때는 어두운 음성으로 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가령 해맑은 어린이들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에서는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처럼 밝은 기분으로, 어느 애국지사의 죽음을 기리는 추모 프로그램에서는 낮으면서도 장중한 음성으로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낭독에 앞서 프로그램의 성격과 원고의 내용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레이션은 ‘이런 기법대로 이렇게 하면 된다’고 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내레이터가 지닌 음성이나 기교, 여기에 개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그 내레이션은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맺음말 어떤 장르의 방송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내레이션에 있어서는 내레이터의 능력이 곧 프로그램의 품격을 좌우합니다. 유능한 방송인이 하루 이틀에 키워질 수 없는 것처럼 ‘좋은 내레이터’도 오랜 방송 경험이 쌓인 뒤에 만들어지는 것이고 풍부한 경험은 바로 기교(技巧)와 개성(個性)으로 되어 프로그램을 통해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 글쓴이와 제작자의 의도(意圖)를 그대로 투영하고 시청취자에게는 감동을 주어 그 프로그램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내레이션, 이것이 바로 내레이터의 꿈입니다. 소정의 아나운서 교육과정을 충실히 받고 그 기초 위에서 훌륭한 내레이터가 되고자 하는 의욕과 노력을 경주(傾注)한다면 그 꿈의 실현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서두(序頭)에서도 강조했듯이 ‘듣기 좋은 방송’, ‘들어서 편안한 방송’이 바로 ‘좋은 방송’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발음이나 발설, 낭독의 흐름이 ‘자연스러움’을 유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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