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첩채산 서 본 시내 전경 |
장가계에서 저녁5시 유주로 가는 특급열차에 올랐다. 장가계 역 광장을
지나는데 중국인 짐꾼들이 천원하며 집요하게 달려든다.
돈보다도 짐이 없어질 것 같아 우리 일행들은 거의 다 직접
여행가방을 끌고 대합실까지 왔다. 중국서 처음 타는 열차여행
한국 관광객도 제법 눈에 띄었다.
5시 정확하게 열차는 유주을 향해 출발했는데 우리 일행들은
기차표를 일렬로 구할 수 없어서 뒤섞여 탑승했다.
4인, 6인, 8인실이 있어 4인실을 구하느라 한 열차 칸에 모두
탑승하지 못하고 칸을 나누어 탔는데 우리 칸은 가이드, 정년을
맞은 교장 부부와 나.
저녁이라 주변 경관은 보이지 않았고 침대에는 에어컨이 잘 안돼서 덥고,
다른 사람과 동행해 마음대로 옷을 입을 수도 없고 불편하더라고.
복도로 나서니 중국인 남자들은 반바지에 상의는 홀랑 벗어 버리고는
자기 집 안방처럼 거리낌 없이 다니는데 그 모습들이 우리나라 깍두기와 똑같다.
단지 문신만 없을 뿐이지 행동거지는 똑같은 인상이다.
침대칸 밖에는 나가기도 싫었고 여행사에서 미리 싸준 2기치 도식 락을
먹는데 고역이더라고 억지로 소주 마시고 자는데 덜컹거리고
쉬다 가다를 반복하다 유주에 도착했다.
유주라는 도시는 광서자치구 제일도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 중경에 이어 생긴 도시라는데 새벽에 열차에서 내려
버스로 계림까지 이동하기 위해 잠시 머문 곳이다.
유주의 열차 역을 나와서 어제 먹은 도시락이 소화도 잘 안되고
급히 화장실을 찾았는데
어라, 이게 말로만 듣던 문짝 없는 화장실.
옛날 울릉도 화장실 이야기로만 들었고 내가 군대 생활을 한
GOP 야전 화장실은 문짝이라도 있는데
단동에서 백두산 갈 때나, 성도에서 캉딩갈 때 가끔 시골 화장실을 들리면
우리나라 과거 재래식 화장실을 많이 보았지만
대도시 중앙역에서 이러한 화장실을 보는 것은 좀 신기한 느낌이다.
지금은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중국 관리들이 우리나라 공중화장실이
세계 최고라고 소문 듣고 와서 고속도로 화장실 견학을
많이 보고 갔다고 했는데 하기야 우리나라도 서울 88올림픽 이전까지도
화장실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던가...
화장실 구조는 이렇다.
한쪽은 소변보는 벽이 20m 정도 있으면 복도를 두고 맞은편에는
30센치 정도 있는 받침대에 올라가면 앉아서 u 자형 블록에 물이 흐르는데
그 위에 일렬로 20명 정도가 앉아서 볼일을 보는 것이었다.
70년대 우리 군부대에서는 문 높이만 좀 낮았고 나머지는 막혔는데
여기서는 오른편만 벽이고 옆, 앞, 뒤가 모두 개방되어
그런데서 처음 볼일 보는 사람은 황당할 거여 “특히 여자분들”
나는 직감적으로 입구에서 제일 깊은 곳에 가서 바지를 내리고 앉았다.
그나마 다른 사람에게 프라이버시가 조금 보장되는 곳이라 생각했고
옛날 화장실을 생각하며 볼일 보는데
머리를 깎은 젊은 파란 눈에 갈색머리 서양인이
내가 있는 곳까지 왔다가 자리가 없어서 앞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옛날 초등학교 건물 화장실은 일본식민지 시대 건축한 화장실이라
청소도 학생들이 물을 양동이로 퍼부어 항상 물이 많이 차 있었는데
대변을 볼 때 떨어지는 속도에 맞추어 일어나야지
눈치 없이 첨벙할 때까지 그냥 앉아있다간 엉덩이에
똥물이 튀겨서 곤욕을 치렀던 경험이 있었고
그 결과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는 오물 표면 근처에 떨어지기 전에
쪼그려 앉았던 다리를 펴서 서서 있어야 첨벙하며 오물이 튀어 올라도
옷이나 몸에 오물이 묻지 않았던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바닥에 물을 24시간 흘려보내 둥둥 떠내려가는 모습이
초등학교 시절 화장실이 생각나더라고
볼일을 마치고 곁눈질하며 다른 사람들의 대변보는 모습을 보고 내오는데
아까 내 옆까지 왔다가 돌아간 코쟁이 서양 젊은이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앉아서 볼일 보는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한참 웃으며 버스에 올랐다.
유주에서 고속버스로 3시간 정도 달렸다.
아침 해가 밝아오면서 주변 경관이 보이는데 책에서만 보았던
산수가 눈에 띄기 시작하더라고
베트남 하롱베이나 닌빈 같은 모습이 서서히 보이면서
시내 모습이 가까이 다가오더라고
|
리강 나루터 |
계림은 카르스트 지형이다.
석회암이 오랫동안 풍화작용을 일으켜서 빗물에 깎기고
구멍이 뚫리고 하여 생긴 지형인데
우리나라도 강원도 일부 석회석이 나는 시멘트 공장과 환선굴이나
성류굴이 카르스트 지형인데 이곳 규모는 대단하더라고
옛날 동양화나 책자에서 보면
桂林山水 甲天下(계림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다)라고
송나라 왕정공의 시 문구에서 나오는 구절인데 여태껏
동양에서는 그리 알고 있었다는데
20년쯤에 홍콩에 살았던 돈 많은 화교가 소수민족이(토후족, 묘족)
살던 장가계를 발견하고 관광지로 개발한 이후에는
세계 천하제일 산수가 장가계로 바뀐 느낌이다.
그 곳은 특히 한국인이 좋아하는 산으로 하나투어에서 엄청 실어 날랐지.
한국인은 거의 다 가보지 않았던가.
계림 시내에 들어서니 공해에 오염이 심각한 느낌이 들었다.
옛날 소림사 영화 촬영장소 배경은 아닌 것 같고
인구 증가가 관광객 증가에 버금가는 것 같은데 시내에 호텔이 들어서니
주변 산세가 모양이 망가져 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관광객에 바가지가 심하고 강 오염도 많이 된 것 같다.
기후는 위도가 한국보다 훨씬 아래지방으로 연평균 기온이 18℃ 정도로
온화한 아열대 기온이다
이 지방에는 계수나무가 많아서 지명이 계림이라 하던가.
첩채산 입구 |
처음 투어를 시작한 곳은 첩재 산이다.
구아닌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인데 4개 봉우리와 능선이
비단을 첩첩이 쌓아 놓은 모습이라 첩재 산이라 부름
관광객이 많아 사진 찍을 때는 포즈를 빨리빨리 하라우...
배에서 본 이강 모습 |
멀리 보이는 이강 과 시내 |
두 번째 간 곳은 복파산
시가지와 리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을 자랑한다.
복파산은 복파장군의 무덤이 있는 산으로 복파장군이
칼을 시험하기 위해 바위를 잘랐다는 전설의 돌기둥이 있는데
그런 전설은 우리나 일본 어느 나라도 다 있는 이야기인 것 같고
세 번째는 관암동굴을 갔다.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레일에 무동력 의자가 있는데 안전장치도 없고
사고 나기 딱 좋은 것 같은데
이곳에는 이런 허술한 시설로 허가가 나는지 신기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신나게 썰매 타는 기분으로 지하 동굴로
질주하며 들어가는데 동굴 속에서 배도 타고 가고
광장에 내려서 지하폭포도 보고
지하에 거대한 강이 흐르는데 종유석과 기둥에는
조명 빛이 현란하게 비추는데
이것만을 보는 일부 관광객 중에는 우리나라 동굴은
조족지혈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달리 생각한다.
우리나라 동굴은 베트남이나 중국처럼 현란한 조명을 놓아서 사실 모습을
왜곡하여 보여주지는 않는다.
조명에 의한 현란한 색깔은 실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비춰지기 때문에 자연을
보존하고 생태를 보호하려면 현란한 조명을 설치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닌가...
리강 산수 투어 |
사진 발 안받네 |
다음날에는 리강을 투어 했다.
계림의 관광 백미 리강은 400km 정도로 긴 강인데 170km 정도 5시간의
정통코스가 있다.(계림에서 양숴까지)
지금은 양숴로 바로 가는 관광객이 많다고 들었다.
옛날에는 뗏목배가 다닌 사진이 있는데 동력선을 탔다.
배 안에서는 리강에서 가마우지로 잡은 물고기 튀김을 팔고 있어
일행에 소주와 함께 사서 먹는데 다들 별로라 잘 먹지 않아 민망하더라고
옛날 방식으로 잡은 물고기 망태기와 대나무, 가마우지 등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사진작가들이 최근에 찾아가는 곳이 있다.
중성. 이곳은 둥족과 야오족, 묘족 등 소수 민족이 사는 땅인데
경사도 50°정도의 가파른 해발 300~1,100m 사이에 계단식 논이다.
원나라 때부터 산을 개간하기 시작해서 청나라 때 완성 했다는데
그 이름은 용척제전 인간과 자연의 투쟁으로 이룬 것으로
우리나라 강원도 계단식 논하고는 규모가 대단해....
최근에 이르러 개방되어 관광 상품으로 개발된 곳으로 작품사진 속에서는
많이 보았을 것 같다.(가을 추수 중에 노란 벼 모습이 무척 아름다운 사진임)
다음날에는 동물농장과 쇼를 겸해하는 용호상박으로 향했다.
호랑이, 악어, 곰 기타 동물을 대량으로 키우는 거대한 동물원이다.
곰 원숭이 낚타,호라이 행진 |
낚타등에 원숭이 |
곰과 호랑이 원숭이, 낙타 등이 나와서 악기도 불고 서커스도 하고
재주를 부리는데 서커스 장에 온 느낌이다.
마지막 코스가 호랑이가 소를 잡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는 게 좀 꺼림칙했지만
동물왕국이나 내쇼날지오그래픽 다큐를 좋아했고 많이 봐서
실제 모습은 어떨까 하고 전망대에 올라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호랑이가 소목을 물고 버티고 있음 |
호랑이본 소는 무서워 안절 부절 |
200평정도 철책 안에 검은 중소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그 안에는 나무는 별로 없고 풀만 무성했다.
옆 철책에는 방목하는 호랑이가 여러 마리 있었는데
사육사가 철책 문을 열자 제일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소가 있는 우리로 뛰어 들어가더라고
20m 정도 거리에서 소와 호랑이가 마주쳤다.
소가 호랑이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던지
우리 안 소는 우리한테 구원을 청하는 눈빛과 음매하고 소리를 지르며
사람을 쳐다보고 호랑이를 보고를 반복하더라고
그 모습을 보면서 가엽기도 하고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
얼마 전 경북 봉화에서 워낭소리라는 다큐 소 이야기를 영화로해
우리나라에서 크게 히트했지만 내가 어릴 적 농촌에서는
소와 함께 살지 않았던가.
소+ 마차 하루품삭은 성인의 1.5배 정도 품삯이었으며
동내에서는 소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야 살만한 집으로 여기며
소를 친자식 이상으로 생각하며 농사일을 하지 않았던가.
이른 봄에 논밭에 거름을 내며 쟁기로 논 갈고 모심을 때
서래 질하고 물건 나르고 7월 나무하러 살 때는 먼 산길을
사람과 함께 가면서 무거운 나뭇짐을 날랐고
가을에는 벼와 벼 수매시 가마를 마차에 실어 나르고
봄부터 늦가을까지 거의 매일 인간을 위해 노동을 하였다.
지금도 일부 아프리카나 몽골, 중앙아시아의 국가에서는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지만 그 당시 우리 농촌에서는 볏짚으로
두엄을 하여 비료대신 사용하였고 음식물 쓰레기가 하나도 안 나오게
쌀뜨물과 설거지물 모두를 쇠죽 끓이는데 요긴하게 사용했는데
사랑방에는 쇠죽 끓이는데 필요한 열로 군불 때며 방고래에
구들 장판을 만들어 난방열을 공급하였으니
열 손실 없이 긴요하게 쓰였고 소가 새끼를 가졌을 때는
특별 식으로 쌀겨나 콩깍지, 공비지, 수수 대, 볏짚과
아카시아 잎이나 칡넝쿨도 좋아하고 풀잎 중에서는 베랭풀을
소가 제일 잘 먹는데 인간과 함께 오랫동안 같이 살아가면서
볏짚이나 나무로 여러 가지 소가 필요한 장신구들을 만들어 사용했지
이런 것은 지금은 민속 박물관이나 가야 볼 것 같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1년에 한 번씩 한 15년 정도는
새끼를 낳아서 농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인데
3달 정도 키워서 송아지가 되기 전에 코뚜레를 하지 않고
우시장에 가서 팔고 돌아오곤 했다
내가 8살 정도 될 때부터 할아버지 따라서 안성 장날에 간 기억이 새로운데
왕복 16km 정도를 이웃집 애들과 할아버지, 아버지를 따라서
우시장에 간다.(풀빵도 못사먹고 온 적이 허다함)
이때쯤이면 송아지는 자기 목에 새끼줄이 매어져 있어
그날 자신이 팔려 가는지를 모른다.
어미 소가 신작로 길을 걸어가면 송아지는 이리저리 어미 곁 주위를
걸어 다니다 1km 정도 걸어가면 송아지가 평소 자기가 놀았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무서워서 어미 곁에 바싹 붙어서 걸어가는데
문제는 우시장에 도착해서지
그곳은 많은 소들이 모여 울어대는데 소들이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며 낮설어 하는데 사고 팔고자하는 사람과 흥정이 이뤄져
송아지는 다른 주인 손에 끌려가는데
어미 소는 이 사실을 모르는지 아는지 별 반응을 보이질 않는다...
매매 후 소는 배가 고파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을 거의 뛰어가는
속도를 내며 달려가는데
집에 돌아오면 큰 가마솥에다 영양이 풍부하게 잘 끌어진 소죽을
여물통에 듬뿍 넣어서 먹여주는데
한 시간 정도 잘 먹고 나서는..
어미소는 이때서야 자기 새끼가 안성 장에서 같이
집으로 함께 오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는데
이것이 영리한 동물인지 인간을 너무 믿은 미련한 동물인지 잘 모르지만
이때부터는 저녁마다. 집안 식구들이 밤잠을 설칠 정도로
음매음매하며 서럽게 우는데 어린 마음에도 정말 불쌍하더라고
소목청이 쉬어서 소리를 못 지를 정도가 되려면 1주일 정도가 흐르다.
이때는 소가 자기 새끼 찾는 것을 포기하는 것 같다.
그 후 3개월 안에 씨받지 수소와 교미를 시키는데
사람 임신기간과 비슷해서 거의 1년에 한 번씩 이러한 일을 되풀이 한다.
그 다음해도 소들은 인간들한테 똑같이 자기새끼를 잃어버린다.
그 당시 그것이 소들의 인생이고 사람과 같이 동고동락을 했는데
소도 어린이나 약한 여자를 보면 깔보는 습관도 있다.
우습게 보이면 뿔로 사람을 향해 머리를 흔드는데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1때까지 여름방학 일과는
오후에는 서운산에 동네 애들과 소풀 먹이는 일을 했다.
산에 오른 후 방목하는 것이나 마찬 가짐.
목욕을 하다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소는 한여름 낮에는 풀을 잘 먹지 않고 휴식을 취하다
해가 떨어질 저녁부터 풀을 잘 뜯어 먹는데
배가 고파 내가 집에 빨리 가자하면 머리를 나를 향해 바라보고
풀을 더 뜯고 집에 가자는 눈치로 계속해서 먹는데
해가지고 어둡고 이때는 나도 화가 나서 참는데 한계에 이르러
소와 고삐를 잡고 실랑이를 벌인다.
소가 워낙 겁이 많은 짐승이라 어두운 밤이 오면 무서워 집으로 달려가고
한 번은 화가 나서 소죽 먹는 소머리에 몽둥이를 내려쳤는데
운 없게도 소 눈을 때린 것이다.
소 눈에서 며칠간 눈물이 흐르며 괴로워하는걸 보고
어찌 미안하고 안됐는지 소에게 말은 못하고 미안하다는 표현만 했는데
계림에 와서 호랑이가 소를 잡는 모습에서 소가 네다리를
간신이 버팅 기며 관광객을 쳐다보며 울부짖는 모습이
왜 우리 주인과 저 사람들은 호랑이가 내목을 물고 죽이려 하는데
말려주지는 않고 아무 소리 없이 쳐다만 보냐고 원망의 눈빛을 보이는데
옛날 소와 함께한 시절이 생각 나서 마음이 영 찜찜하더라고...
리강 물고기 잡는 가마우지 |
산수 좋고 |
시내는 공사중 매연도 심하고 |
나무 화석
시내전경
공원
|
첫댓글 햐~~아.... 계림동네 구경보다 그 글이 더 재밌소.. ^^ 소 머리를 내리친 미안함의 표현은 어떤거였소..? 사방이 훵하니 뚫린 변소에서....그것도 여럿이 한꺼번에...ㅎㅎㅎ. 표정 없는 얼굴에서 이런 글이 나오다니....다음에 만나면 그 얼굴속에서 저런 글을 찾아 보겠소..ㅎㅎ
인물 사진은 못찍겠구만...세월은 못속이지
도연아~ 여행사진 구경 잘한다 요즘. 중국은 땅덩어리 크니 별 구경거리가 다 있는것 같어 ㅎㅎ..
맞다. 안방마님 말에 한표 더... 아주 재밌게 잘 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