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양주시를 상세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지금의 남양주시는 본래 1980년 양주(楊州)에서 분리되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지금의 진접·진건 지역은 고구려시대에 '골의노(骨衣奴)'라고 불렸 으며,이 지명은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황양(荒壤)으로 바뀐다. 이것이 고려시대에는 풍양(豊壤)으로 다 시 바뀐다. 이렇게 현재의 남양주시 진접·진건지역은 양주와는 별도의 지명을 갖고 있었다.
양주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인 936년으로, '후백제왕 견훤에게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처음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양주라는 명칭은 지방행정구역 명칭으로 꾸준 히 이어온다. 그러나 당시의 양주라는 명칭은 지금의 남양주시 영역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양주라는 명 칭과 영역이 명실공히 일치하는 시기는 1410년(태종 10) 양주목으로 승격하고부터이다. 그러나 이 때에 도 지금의 진접·진건지역은 풍양현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지니면서 양주목의 속현으로 존재하고 있었 다. 그러면서 이후 풍양이란 명칭은 영·정조대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풍양현지역이 1530년 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접동, 진벌, 건천, 진관 등의 면지명으로 표기되는 것으로 보아 풍 양현 자체는 이즈음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가 되면 지금의 남양주시지역도 양주의 한 부분으로 확 고하게 자리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980년 4월 1일 법률 제3169호에 의하여 구리읍 (7개 리), 미금읍(10개 리), 별내면(6개 리), 진접면(8개 리), 진건면(9개 리), 수동면(7개 리), 화도면(10 개 리), 와부면(11개 리)의 2읍, 6면, 68개 리를 갈라 남양주군이 새로 설치되면서 남양주시의 역사가 새 롭게 시작되었다.
1980년 12월 1일 대통령령 제10050호에 의하여 와부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3 읍 5면이 되었고, 1986년 1월 1일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1986년에는 조안면과 퇴계원면 이 새로 생기고 1989년 1월 1일 미금읍이 시로 승격하여 분리되었다. 같은 해 진접면이 읍으로 승격하 고 1991년에는 화도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995년 1월 1일 미금시와 남양주군을 통합하여 남양 주시가 신설되기에 이르렀다.
[ 와부읍 ]
◎ 덕소리(德沼里)
덕소리에 전체를 일컫는 이름으로 '덕소·떡수'가 있다. 오늘날에 와서 '덕소'라고 불 리며 공식적인 리 이름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보통 '떡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말 한강에 큰 못이 있어 서 '덕소'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덕소리에는 '득수리고개' 혹은 '득실 이고개'라고 하는 고개가 있다. 율석리와 석실 사이에 있는데, 옛날에 양반이 많이 살던 곳이었고 한양 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이 곳으로 수레를 끌고 지나갈 때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 양반들이 수레를 들 고 지나가게 했다고 해서 '득수리고개'로 불린다고 전한다. ' 득실이고개'라고도 부른다.
한편 덕소 리에 있는 마을 가운데 '신촌'이 있는데, 이곳은 을축년 대홍수로 원덕마을이 침수되자, 마을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신촌'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 도곡리(陶谷里) [도골, 도곡]
도곡리는 글자 그대로 기와 혹은 그릇을 굽던 골짜기라는 뜻에서 유래하였 다. 특히 '기와골'은 도곡리에 있는 골짜기인데, 이 곳에서 기와를 만들었기 때문에 '기와골'이라고 부른 다고 한다. 한편 도곡리에는 '우묵배미·쑥배미'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마을이 있는데, 지래기 북쪽에 있 다. 지형이 우묵하게 들어갔다고 하여 '우묵배미', 지형이 쑥 들어갔다고 해서 '쑥배미'라고 한 다.
◎ 팔당리(八堂里) [바다나루, 바다이, 바대이, 바당이, 팔당]
본래 한강가의 넓 은 나루이므로 '바다나루', '바다이', '바대이', '바당이' 또는 '팔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팔당 바 댕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강의 양쪽 산세가 험준하고 수려하여 팔선녀가 내려와 놀던 자리가 여덟 곳이 나 있고 이후 그 자리에 여덟 개의 당을 지어 놓았다고 해서 '팔당'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도 팔선녀를 낳았기 때문에, 또는 강이 내와 비슷하게 있었는데 양쪽으로 난 나무가 팔자(八字)처럼 쓰 러져서 '팔당'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용이 되어 올라가려는 것을 여자가 봐서 부정을 타, 강으로 떨어져 이무기가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바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일제시대 전에는 '바댕이'라 고 불렀고, 그 후 '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월문리(月文里)
조선시대 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 대부분은 양주군 와공면으로 1914년 월곡리의 '월(月)'자와 문곡리의 '문(文)'자 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월문리의 이름이 된 '문곡리'라는 마을은 예전에 이 마을에 글선생이 있었기 때 문에, 또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마을에서 유래하였다. 처음에 '글계울' '글개울' 등으로 불렸 다고 하고, '문곡'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조선 말기에 '문곡'이라는 호를 가진 선비가 살았었기 때문이 라 한다.
월문리의 또다른 이름인 '월곡'은 '다리골 중광'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이 곳은 동쪽으로는 갑산과 운길산이 솟아 있고, 서북쪽으로 천마군봉이 벌려 서 있으며, 중 앙으로는 내가 흐러 한강으로 유입되는, 아늑한 마을이다. 이러한 마을에 이씨가 많이 들어와 살게 되 니, 이씨가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해서 '많을 다(多)' 자를 써서 '다리골', '달골', '월곡'이라 부르게 되었 다고 한다.
◎ 율석리(栗石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와공면으 로 1914년 율북리의 '율(栗)'자와 석실리의 '석(石)'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율북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마을 주변에 밤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밤뒷고개', '밤나무고 개', '율정(밤나무정)'이라는 밤나무 관계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율석리에는 '피사 골'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골짜기가 있다. 지금의 목식골 북쪽에 있는데, 옛날에 이 곳으로 많은 사람들 이 피난을 왔었고, 그 피난민들과 군인들이 이 곳에서 많이 죽었기 때문에 피난와서 죽었다는 의미 의 '피사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남양주시 - 진접읍(榛接邑)
◎ 장현리(長峴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접동면 지역으로 1914 년 장승리의 '장(長)자와 봉현리의 '현(峴)wkfmf 따서 장현리라 하고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봉현 (蜂峴)'이라는 이름은 '벌우개' '비리개' '버리개' '보루개'라고도 하는데, 조선 초기에 마을 동쪽에 조그 마한고개에 벌집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벌 때문에 그 곳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 고 개를 '벌우개', '비리개', '버리개', '보루개' 등으로 불렀으며, 고개 밑에 있는 마을 이름도 '벌이 많은고 개 마을'이라는 의미의 '봉형(蜂峴)'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세조와 관련된 지명유래도 전하는 데, 세조는 자신의 묘 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직접 땅을 돌아보던 중 불길한 땅에 묘 자리를 쓰고 있는 상 주를 만났다.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어 300냥을 주면서 "다른 곳으로 이장하라."하고 묘 자리를 잡아준 사람을 물으니 바로 자신이 찾던 이생원이라는 자관이었다. 세조가 기이하게 생각하여, 이생원을 찾아 그 집에 이르러 그 묘 자리의 길흉을 물으니 " 그 근방이 길지(吉地)가 있지만 현 장지(葬地)는 당장 300 냥의 큰 돈이 생기므로 가난한 상주에게 금시발복(今時發福)할 자리를 정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이에 감탄한 세조는 "당신같이 잘 아는 사람이 왜 산골에서 이 고생을 하느냐."고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그 의 집을 보며 물으니, "국왕이 친림(親臨)하실 곳이므로 이 곳에 산다."며 짚자리를 문 밖에 깔고 백배 사죄하였다. 이생원의 능력에 감탄한 세조는 그와 동행하여 현재의 광릉을 능자리로 정하였 다.
그 뒤 광릉에 능을 만드는데, 그 곳에서 큰 벌이 나올 것이라 하여 주관하는 지관이 지금 의 장현리 벌우개로 대피하여 큰 독을 뒤집어 쓴 지관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부터 이 동네는 '벌 우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승리'라는 지명은 장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하였는 데,
'장승(長承)·장승배기 매봉제'라고도 한다.
예전에 마을 입구에 장승이 서 있어서 '장승' 또는 '장승배기'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매봉제'라 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리고 장승·들판·논에 물을 대기 위한 보(저수지)라는 뜻의 '장승배기보', 장승 에 있는 들판이라는 뜻의 '장승벌'이라는이름이 아직까지 전하고 있다.
◎ 내각리(內閣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접동면 지역으로 1914년 내동리의 '내(內)'자와 비 각리의 '각(閣)'자를 따서 내각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한편 내각리에는 풍양궁이 있었다 고 하여 '궐리(闕里)·대궐터·구궐지(舊闕址)' 등의 이름이 있다.
정종은 1400년(정종2) 11월에 왕위를 아우 정안군(후에 태종이 됨)에게 양위하고,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풍양궁터로 옮겨가 게 된다. 병이 심해져서 심신을 휴양하기 위해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내용의 교서(敎書)를 내고, 정종이 선택한 곳이 바로 이 곳 대궐 터(풍양궁터)이다. 물론 여러 복잡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겠지만, 쉬기 위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휴식을 취하겠다는 것은 정종의 솔직한 본심이었을 것이다.
이후 정종의 아버지인 태조도 이 곳에 머무르게 된다. 1402년(태종 2년) 태조는 자신이 사랑하는 왕자 방석과 방번이 참변을 당하자 태종 을 미워하며 함흥으로 가버린다. 그 곳에 머문지 4년 만에 박순(朴淳)의 충언에 감동되어 서울로 돌아오 는 길에 이 곳에 머무르며 움직이지 않자 내각들이 와서 모시고 갔다고 한다.
이렇게 대궐터는 태 조, 정종, 태종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역사적인 마을이다. 그렇지만 대궐터는 이름 그대로 대 궐이 있었던 곳은 아니다. 앞서 살폈듯이, 태상왕(太上王)과 상왕(上王)이 왕위를 물러나 머물던 곳이 라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이 마을은 '비각촌' 혹은 '비각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성계가 정 종에게 왕위를 전하고
상왕으로 있을 때 이 곳에 행궁을 정했던 곳이라서 비각(碑閣)을 세 운 후로, '비각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비각촌'혹은 '비각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의 '새말'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임진왜란 때 풍양궁은 물론이고 이 곳이 모두 불타버리자, 새로이 집들이 들어서고 마을을 형성하게 된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 다.
내동(內洞)은 이성계가 비각마을에 행궁(行宮)을 정하고 있을 때, 왕비 강씨가 임시로 거 처하고 있었던 곳이라 하여 안마을이라는 뜻의 '내동'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비각(碑閣) 리'는 대궐터에 있는 비각에서 유래하였다. 비각에는 1755(영조 31), 1905년(광무 9)에 세워진 2기의 비 석이 있는데, 이는 이곳이 풍양궁지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내곡리(內谷里) [ 안골, 내곡]
이 지역 명칭은 통일신라시대에는 황양현,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는 풍양현의 중심 지역이었다. 이후 양주목 별비면 지역으로 1914년 내곡리·영지동·동촌리·서촌리 그리고 전도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곡리라 해서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본래 풍양현(豊壤縣)이 있던 곳으로서 그 안쪽이 되므로 안골 또는 내곡이라 하였다.
동촌과 영서 사이에 '원내곡(元內谷)·안골·역말·역 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내곡의 원래 마을 또는 원래의 개척지라 하여 이렇게 불린다. 원내곡은 '안 골'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내곡리의 안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전해진다. 이 안골이라는 이름 을 한자어화한 것이 내곡(內谷)이며, 이것이 리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이 마을은 '역말', '역촌(驛村)'이 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을 이름의 유래에 따라 '골 안·고을안·내곡교' 등의 지명이 아직 전한다.
◎ 연평리(蓮坪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의 대부분은 양주군 접동면지역으로 1914년 비각리·내동리·봉현리의 각 일부와 건천면의 양지 리 일부를 병합하여 연평리라 해서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연평리에 있는 큰 들을 풍양(豊壤)들 또는 요연평이라 한다.
궁동 서쪽에 넓게 펼쳐져 있는 들판을 '요연평(蓼蓮坪)·연평뜰·풍양뜰·풍양 들'이라고 한다. 왕숙천을 끼고 드넓게 펼쳐져 있는 들판으로, 현재의 평야로 개간되기 전에는 토질이 습하고 군데군데 연못이 있다고 하여 '요연평'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연평뜰', '풍양뜰', '풍양들' 등의 여러 이름으로도 불린다.
요연평 북쪽에는 '목화배기 목화배미'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논이 있 다. 예전에 이 곳에서 목화를 재배했던 연유로 '목화배기' 또는 '목화배미'라고 불린다. 이 곳과 관련된 이야기도 하나 전해지는데, 옛날 어떤 농부가 이 곳에 600여 평의 논을 가지고 있었는데, 흉년이 들었 을 때 너무나 배가 고파 논 600여 평을 팥죽 세 그릇과 바꿔버렸다고 한다.
◎ 부평리 (富坪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진벌면과 접동면 지역으로 1914년 부동리의 '부 (富)'자와 후평리의 '평(坪)'자를 따서 부평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부동은 '분토골'이라고도 하 며 '후평'은 뒷벌을 한자화한 것이다.
부평리에는 '능내(陵內)'·능내동·능안'이라는 마을 이름 이 있는데, 조선 제7대 세조의 능인 광릉에 위치한 마을이라서 '능내' 혹은 '능내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고 한다. 능안쪽에 있다고 해서 '능안'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살내벌'이라는 이름은 광릉 앞 에 있는 벌판을 말한다. 옛날 차수복이라는 사람이 임금의 능에 참배를 하러 가는데, 부채로 얼굴을 가 리지 않고 그냥 갔다. 이에 임금에 대한 불경의 죄를 지었다고 해서 차수복을 동구 밖에서 참수하려 하 였다. 그런데 차수복은 동구 밖까지 춤을 추면서 끌려갔다. 이 때 마침 임금이 능에 참배를 하고 내려오 다가 이를 보게 되었다. 임금은 곧 참수를 당해 죽을 사람이 희안하게 춤을 춘다고 해서 차수복을 살려 주라고 명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임금은 부채도 하사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수복이 춤을 추었던 장소 를 임금이 '살려줘라'고 한 연유에서 '살내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 팔야리(八夜里) [여덟밤이, 팔야]
조선시대에 태조가 함흥에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데, 이 곳에 이르러 여덟 밤이 되었으므로 태조가 '아, 여덟 밤이로구나.' 하여 '여덟밤이' 또는 '팔야'라 하였다고 한다.
남양주시 서쪽을 관통하여 흐르는 '왕숙천'도 같은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왕숙(王宿)'이 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태종이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는 함흥 으로 가버렸고, 이에 태종은 사자를 보내 부친이 돌아오도록 백방 노력했으나, 태조는 일체 거절을 하 고, 사자들마저 모두 죽어버렸다. 태종은 궁리를 거듭한 끝에 태조의 사부라 할 수 있는 무학대사를 보 내어 겨우 태조를 환궁시킬 수 있었다. 이 때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도중,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면 팔야리에서 여덟 밤을 자고 갔으므로, 이 마을 이름이 '여덟배미' 또는 팔야리(八夜里)'라 부르게 되었 고, 이 마을 앞을 흐르는 내를 '왕이 자고 갔다'는 의미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다 른 하나는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한 동구릉과 세조의 광릉 등 여러 임금들의 능이 있는 하천이라는 뜻에 서 연유했다는 주장이다. 세조가 광릉에 안장(安葬)된 후, '왕이 길이 잠든다[永宿]'는 뜻에서 '왕숙 천'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왕산내' 혹은 '왕산천(王山川)'라고도 부르는 데, 이 역시 '왕의 산[陵]'과 관련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1861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여지도』에 도 '왕산천(王山川)'이라 표기되어 있다.
또한 팔야리에는 '아작고개·아재고개'가 있는데, 그 이름은 옛날에 흉년이 들었던 시기에 어떤 농부가 너무 배가 고파 이 고개에서 자기 자식을 잡아 먹고 말았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 전해진다. 혹은 '아지작고개'라고도 불리는데, 호랑이가 이 고개에서 사람 을 '아작'하고 잡아먹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전한다.
◎ 진벌리(榛伐里) [갬벌, 진벌]
개암나무가 많은 벌판이므로 '갬벌' 또는 '진벌'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진벌리에는 '진벌·가얌 벌·가얌벌리·갬벌'라는 이름이 많이 보이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얌나무(개암나무)가 많아서 '가얌 벌', '갬벌' 등으로 불리다가 '진벌'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름 유래에 따른다면, 이 마을은 '가얌나 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와는 달리, 이 곳은 가얌나무가 많았는데 가얌나 무를 베어버리고 형성된 마을이어서, '가얌벌리'로 불리다가, 이의 한자어인 '진벌(榛伐)'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이름 유래에 따른다면, 이 마을은 '가얌나무를 베어버리고 이룩한 마 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 금곡리(金谷理) [쇠파니, 쇠푸니, 금곡]
조선시대부 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진벌면지역으로 1914년 금곡리 '금'자와 주곡리의 '곡'자를 따서 금곡 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금곡리에는 '쇠푸니·쇠파니·금곡·원금곡'라는 지명이 있는데, 예로 부터 이 지역에 쇠가 많이 나서 '쇠푸니', '쇠파니'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금곡(金谷)'이 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쇠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금곡마을이 점차 커지고 리 이름으로도 쓰이게 됨에 따라, 구별을 위하여 원래의 금곡마을이라는 의미의 '원금곡'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금곡리라는 이름을 구성하는 '주곡(주리골·주유골)'이라는 지명은 삼면이 두루 산으로 둘 러쌓인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두릅이 많기 때문에 주곡이라 부 른다고도 한다. 이 마을은 '주리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 이곳이 주리를 틀었던 곳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밖에도 '주유골'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유씨(柳氏)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한편 용신신화와 관련된 '벼락소'라는 이름도 있는데, 하늘로 올라가던 용이 벼락을 맞고 이 곳에 떨어졌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혹은 벼락이 쳐서 바위가 쪼개져서 이소(연못)의 깊은 물 속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벼락소라 불린다는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과는 달리 나름의 체계를 갖 춘 장자못 전설 유형의 이야기도 전하는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신감역이라는 부 자가 살았는데, 굉장히 인색했었다고 한다. 하루는 동냥하러 온 중에게 쇠똥을 퍼서 주었는데, 이를 본 그 집 며느리가 안타까운 마음에 바가지를 씻고 쌀을 한 바가지 퍼주었다. 이에 중이 "돌아보지 말고 나 를 따라 오라"하여 뒷산으로 따라 올라가는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고 폭우가 쏟아졌다. 며느리가 겁 이 나서 뒤를 돌아보니, 자기집은 벼락에 맞아 불이 붙었다가, 쏟아져 내린 폭우에 깊은 못이 되어버렸 다. 신감역의 가족들은 이 때 내려친 벼락에 맞아 모두 죽었고, 그 며느리 역시 뒤를 돌아 본 까닭으로 산중턱에서 그만 바위(혹은 돌부처)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신감역의 집터는 쏟아져 내린 폭우에 못이 되었는데 이것이 벼락소라고 한다.
진접읍 금곡리, 진벌리와 수동면 수산리 경계에는 높이 720m의 '철마산'이 있는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나 『대동지지(大東地志)』등에서는 '검단산 (黔丹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현재 마을 사람들은 '검단산'이라고 부르지 않고, '철마산'이라고만 부르 며, 철마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름 유래를 말한다. 북쪽 봉우리인 '검단산'은 '검은 산' 또는 '수풀이 우 거진 산'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남쪽 봉우리인 '철마산'은 쇠푸니의 이름 유래와 관련이 되어서 '쇠 를 캐는 광산'과 관계가 있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철마산'은 남북 봉우리가 달리 불리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10년대에 지형도를 만들 때, '철마산'만을 기록해 놓음으로써, '검단산'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두 봉우리를 모두 '철마산'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 남양주시- 화도읍(和道邑) ]
◎ 마석우리(磨石隅里) [ 맷돌모루, 맷돌머루, 마석우]
'맷돌머루·마 석우'라는 마을은 심석종합고등학교 남쪽지역으로,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서 맷돌이 많이 생산되었고, 마을의 길이 돌아서 생겼다고 해서 '맷돌머루'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자로 '마석우(磨石隅)'이라 고도 불린다.
그리고 마석우리에 있는 마을로 '아래닭계·계전'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풍수지리적으 로 이 지역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아래닭계' 또는 '계전'이 라고 불린다고 한다.
◎ 묵현리(墨峴里) [먹고개, 먹갓, 묵동]
천마산과 마치고개 밑 이 되므로 '먹고개', '먹갓' 또는 '묵동'이라 하였다.
이곳 묵현리에는 옛 원터가 있었던 곳이라 서 '원지(院址)' 또는 '원터'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 곳은 강원도 춘천 방면으로부터 한양으로 가는 무인지경(無人之境)의 대로변이었 다고 한다. 이 곳에 원(院)을 두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나 약 100여 년 전에 폐지가 되 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지명만으로 전하여 온다.
◎ 가곡리(嘉谷里) [가오실, 가곡]
지형이 가오리처럼 생겼으므로 '가오실' 또는 '가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가오실 서쪽에 있는 우물이름으로 소경우물·쇄경우물이 있다. 이 우물에는, 옛날 장님이 이 곳 의 물을 먹고 눈을 떴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따라서 '소경우물'은 '소경이 마시고 눈을 뜬 우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우물은 '쇄경우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소경우물'이 변해서 된 것으로 보인다.
◎ 구암리(九岩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양주군 상도면 의 지역이었다. 1914년 구곡리의 '구(九)'자와 응암리의 '암(岩)'자를 따서 구암리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 되었다.
'응암(鷹岩)'이라는 이름은 한자에서 알수 있는 것 처럼 '매'와 관련된 지명이다. 마을 모 퉁이에 매처럼 생긴 매바위가 있다고 해서, '매바위'라 불리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응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바위·감투바위'라는 바위 이름도 있는데, 한 바위 위에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또 다른 바위가 올려져 있다. 아마 바위가 두 개가 있어서 '두바위'라고 불리게 된 듯 하며, 한 바위 위 에 또 다른 바위가 올려져 있는 모습이 마치 감투를 쓴 것처럼 보여서 '감투바위'라고도 불리게 된 듯하다.
◎ 금남리(琴南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양주군 하도면의 지 역이었다. 1914년 금대마을의 '금(琴)'자와 남중리의 '남(南)'자를 따서 금남리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되 었다.
'금대마을'은 약 400년 전 전씨 일족이 만든 마을이다. 이 전씨 일족 중에는 음율을 좋아 하던 이가 있었는데, 매일 거문고를 타고 놀았다고 해서 '검터'라고 불리다가, 한자화 되어 '금대(琴臺)'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 창현리(倉峴里)
창현리에는 재미있는 마 을 이름이 몇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무시울·무시동'이다. 조선시대 고관이 이 지역으로 낙향하여 정자 를 세웠는데, 그 정자 이름을 '무수정(無愁亭)'이라 칭한 데서 '무수'로 불리다가 점차로 '무시울' 또 는 '무시동'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현·노루너머·노루머리'라는 이름도 있는데, 옛날 이 지역에 노루가 많아서 사냥꾼들이 많이 잡았다고 해서 '노루머리', '노루너머' 또는 한자로 '장 현(獐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답내리(沓內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양 주군 상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답동(沓洞)의 '답(沓)'자와 내동(內洞)'의 '내(內)'자를 따서 답내리 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1991년 12월 1일 화도면이 화도읍으로 승격하자 이에 편제되었다.
'내동'은 답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안으로 쭉 들어가서 형성된 마을이어서 '내동'이라 불리 고, '답동·논골'은 논이 마을 앞으로 펼쳐져 있어서 논 마을이라는 의미의 '답동(沓洞)'이라 불린다. 순 우리말 이름인 '논골'이라 불리기도 한다.
◎ 월산리(月山里) [달미, 당미, 땅미, 월산]
월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서 '달미', '당미', '땅미' 또는 '월산'이라 하였다.
'월산'이라는 이름은 '달봉', '월봉(月峰)', '월길산', '달기리산' 등으로도 불린다. 이렇게 다양한 산 이름들은 모두 달 이 뜨는 산이라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월산리에는 어떤 풍수가가 남평문씨의 묘터를 잡으 면서, 이 지역의 모양이 등잔처럼 생겨서 또는 등잔을 걸어 놓은 모양이어서 '등경골'이라 불렀다고 전 하는 곳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래와는 달리 가뭄이 들어 물이 귀한 때에도 물이 등잔혈의 기름과 같 이 잘 나오는 마을이라고 해서 '등경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녹촌리(鹿村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양주군 하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녹동(鹿洞)의 '녹(鹿)'자와 궁촌(宮村)의 '촌(村)'자를 따서 녹촌리라 해서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녹촌'이라는 이름은 옛날부 터 마을 앞산인 잣봉산에 수목이 울창하여 사슴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사슴 녹(鹿)' 자를 써서 '녹촌(鹿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 차산리(車山里) [수리너미, 수리너머, 수레너머, 차산]
차산리에 있는 고개로 '차유령·수레너머'라는 이름이 있다. 1570년(선조 3) 4월 10일 전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숙민공(肅敏公) 유강이 사망하자 묘소를 이 고개 근처에다 정하고 장사를 지 냈다. 이후 1639년 증손 유성증(兪省曾)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유강의 산소에 석물 및 신도비 를 세우는데, 와부읍 덕소로부터 우마차로 운반하여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이후부터 '차유령(車兪嶺)' 또는 '수레넘어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이름이 곧 행정구역 '차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맹골 남서쪽 고래산에 있는 바위는 모양이 베틀처럼 생겨서 '벼틀바우' 또는 '베 틀바우'라 불린다. 이와는 달리 노인들이 이 바위 근처에서 베틀을 짰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는 이야기도 전한다.
[남양주시 - 별내면(別內面) ]
◎ 청학리(靑鶴里) [동학굴, 동학동, 청학동]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별비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4월 1일 읍면 통폐합에 따라 별비면 동학(同鶴)동 전 부와 응달리, 흑석리, 덕동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청학리라 하였다.
청학리라는 리(里) 이름 은 원래 청학동(靑鶴洞)이라는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청학동'이라는 이름은 '학(鶴)'과 관 련되어 있다. 푸른 학이 이 마을 동쪽편 은행나무에 자주 날아온 데서 연유한 것이다.
또한 청학리 의 다른 이름인 '동학굴(東鶴窟)', '동학꼴', '동학동(東鶴洞)' 등도 '학(鶴)'과 관련되어 있다. 학이 이 마을 동쪽편 은행나무에 자주 날아온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는 '청학리'의 유래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마을 앞산의 모양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앞산에 봉 우리가 잘룩한 모양으로 세 개가 있는데, 먼데서 보면 마치 학이 동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동쪽으로 날아 가는 것 같은 형상이어서, '동학굴', '동학꼴', '동학동'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 용암리(龍岩里)
용암리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산의 이름은 용암산(龍岩山)으로,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룬 다.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산'이라 부른다. 따라서 '용암산'이라는 이름은 '용바위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가 된다. 용암리라는 리 이름은 이 지역이 용암산 밑에 해당하는 곳이므로 붙게 된 것이 다.
용암리에 있는 마을로 '거묵골·거묵굴(巨墨窟)'이라는 이름은 마을 근처에 숲이
우 거져서 마을이 거므스름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 전해진다.
이와는 달리 옛날에 큰 먹이 나와서 이렇게 불린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도감포수(都監砲手)' 혹은 '도감(都監)'이라는 벼슬을 했 던 사람이 이 마을에
낙향(落鄕)하여 살았다고 하는 '도감말', '도감마을' 이라는 이름도 있다.
◎ 광전리(廣田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별비면에 속해 있었는 데, 1914년 광암(廣岩)리의 '광(廣)'자와 마전(麻田)리의 '전(田)'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광 암'이라는 이름은 '넉바위·넓은바위'라고도 불리는데, 마을 뒷산에 넓적하고 큰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서, '넉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광암(廣巖)'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넓을 광(廣)'자 에 '바위 암(巖)'자를 합성한 것으로, '넉바위'의 한자식 이름이다. 광전리라는 리 이름에서 '광'은 바 로 '광암'에서 따온 것이라 전해진다.
그리고 '삼밭골·삼밭꼴'이라는 지명은 한자로 '마전(麻田)'이라 한다. 현재 광전리의 '전'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옛날부터 이곳에는 삼밭이 많아서, '삼밭 마을'이라는 의미의 '삼밭골' 혹은 '삼밭꼴'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태봉마을 동쪽 에 있는 산을 '태봉'이라고 부른다. 마을사람들은 남쪽에 있는 봉우리인 '옛성산'까지 포함하여 함께 '퇴 뫼산'이라고도 부른다. '태봉'이라는 이름은 왕자의 '태(胎)'를 묻었기 때문에, '태가 묻힌 산'이라는 의 미에서 이름하였다고 한다. 혹은 어떤 힘쎈 장사가 흙을 날라다 쌓은 산, 곧 '퇴미[堆山 혹은 堆峯]'이 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원학적으로 접근하면 '퇴미'는 '갈라져 나온 산'이 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즉 '퇴뫼산'이라는 이름은 '퇴뫼'라는 말에 '산'이 덧붙은 것이다.
그리 고 이 '퇴뫼'의 '퇴'는 '결채, 행랑(廊)'을 뜻하는 우리말로서, '몸채 곁에 있는 딴 집채' 또는 '대문 양쪽 에 벌여 있는 방'을 뜻하는 말이다. 결국 '퇴뫼'란 '높은 산에서 줄기가 뻗어나와 독립적인 봉우리를 이 룬 산'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뜻은 산이 자리하고 있는 형세와도 걸맞다. '용암산', '소리봉', '천견산 (天見山)'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서 옆으로 뻗어나간 줄기의 산이 바로 '퇴뫼산'이기 때문이다. 따라 서 '퇴뫼산'이라는 이름은 '갈라져 나온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덕송리(德松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별비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덕 동(德洞)리의 '덕(德)'자와 식송(植松)리의 '송(松)'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덕동'은 덕흥대 원군의 묘소가 있는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다. 덕흥대원군의 묘소는 줄여서 '덕릉'이라고도 하는데, 이 '덕릉'이 있는 마을 혹은 동내라 하여 '덕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식송리'는 유꿀 서쪽에 있 는 마을이다. 심은 소나무가 있어서 '싱근솔'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싱근솔(심은 솔)의 한자식 이 름인 '식송(植松)'이라 불리기도 한다.
◎ 화접리(花蝶里) [곶나리, 화접]
화접리에 있는 마을로서 하천인 주을내 가에 형성되어 '주을내·주을동'이란 지명이 있다.
'주을내' 또는 '주을동'이라 불린다. 이 마을은 북쪽의 '안 주을'마을과 남쪽의 '바깥 주을' 마을로 다시 나뉜다. 마을 이름 과 관련해서, 줄과 연관된 유래 추정과 어원학적인 추정이 있다.
줄과 관련된 유래 추정은 태 조와 남재(南在)의 장례(葬禮)와 관련된 것이다. 태조의 능지(陵地)를 화접리에다 선정하고는 그 장소 가 적합한 곳인가를 중국에 문의한 결과, 적당한 땅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에 현재의 동구릉(東九陵)에 재선정하였다. 이 때 마침 개국공신이며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재가 죽게 되어 동시에 하관(下官)키로 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통신망이 발달하지 못하여 줄을 이용하여 신호를 하게 되었는데, 이 줄이 이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 '줄이 지나간 마을'이라 하여 '줄 흘내', '주을내', '주을동'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어원학적으로 접근한 견해는, '주을내' 혹은 '주을동'에서 '주을(住乙)'은 '注(주)'에서 뜻을 파고, '乙(을)'에서 음을 딴 표기로 보아서, 브을'- '불'-'벌'-'블(벌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을동'이란, '벌판에서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 가 된다.
[남양주시 - 퇴계원면(退溪院面) ]
'퇴계원(退溪院)'이라는 이름은 원래 마을이름이었는데, 면의 이름으로 확장되 었다.
'퇴계원'이라는 이름 이외에도 '도제원(道濟院)', '토원(兎院), '퇴조원(退朝院)' 등으로도 불 린다. 이렇게 불리게 된 유래는 제보자에 따라 약간씩 달라, 서로 다른 세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유래는, 본래 양주군 별비면 지역으로 도제원이 있었기 때문에 '도제원' 또는 '토원'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퇴조원' 또는 '퇴계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와는 달리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환궁하던 중, 이 곳 냇가에 이르러 삼각산의 세 봉우리를 보자 분이 복바쳐서 다시 풍양궁으로 물러가 있었으므로 '퇴조원'이라 하다가 '퇴계원'으로 변하였다고 한 다.
마지막으로, 예종(睿宗)이 선왕인 세조(世祖)의 능인 광릉(光陵)에 참배차 행차하는 데 교통이 불편하여 길을 새로 만드는데, 냇가를 길로 닦기 위하여 밖으로 물리쳤기 때문에 퇴계원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말티고개·마치고개·뒷고개·공동묘지고개·인산터고 개'라는 고개이름도 보인다. 옛 문헌에 보면, '마치현(磨峙峴)', '마치(馬峙)', '마치(摩峙)' 등으로 기록 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마치'와 '말티'라는 이름을 함께 쓰고 있는데, 이 이름에 서 '말'과 '마'는 모두 '산' 혹은 '산정(山頂)'이라는 의미의 '마리', '마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말티고개' 혹은 '마치고개'는 '산에 있는 고개' 혹은 '산정에 있는 고개'란 의미가 된다.
이 고개는 '뒷고개'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퇴계원 뒤에서 화접정거장으로 넘어가는 고개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이 밖에도 '인산터 고개', '공동묘지고개'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이 고개 를 넘어서 인산터와 공동묘지로 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남양주시 - 진건면(眞乾面) ]
◎ 사능리(思陵里)
단종비 정순왕후의 능이름을 따서 사능리라 한다.
특히 사릉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 '비선골' 또는'비선굴'이라고 불리는데, 이 골짜기에 비 (碑)가서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따른다면 '비가 서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가 된다.
◎ 배양 리(培養里) [배암굴, 뱀굴, 배양동]
'배양'이라는 이름은 '배암'에서 유래하였는데, 원래 마을 근처 골짜기마다 뱀이 많아서, 마을 이름을 '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즉 '뱀' - '배암' - '배 양'으로 변했다고 한다.
◎ 진관리(眞官里)
진관리에는 '수살마기'라고 불리는 논 밭지역이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따르 면 수살(水殺)이 있어 마을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어서 이 지역에 느티나무를 심고 바위를 세워 놓고 살막이해야 한다. 즉 수살을 막는다는 의미의 '수살마기'라 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유래를 가진 마을로 '목골·목동'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힘이 센 역사(力士)가 있었는데, 얼마나 힘이 세었던지 산에 가서 나무 한 짐만 해 와도 말 4~5마리가 짊어지고 갈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이 마을을 '나무를 많이 해오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목골', '나무마을' 또는 이의 한자식 이름인 '목동'이라 부 르게 되었다고 한다.
◎ 신원리(新月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의 대부분은 양주군 건천면 지역으로 1914년 신촌리의 신(新)'자와 월음리의 '월(月)'자를 따서 신월리라 하여 진건 면에 편제되었다.
신촌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이고 '월음'은 '대래미', '달음리' 등으로 불리 며 신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었다.
'월음동'은 마을이 자리잡은 형태가 달에 있는 계수나무 의 그늘진 곳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조선 말 양주의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유씨(兪氏)가 살았는데, 호가 월음(月陰)이라 하여 동네 이름을 '월음동'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어째든 이 '월음 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달음동'이라 변하여 불리어지다가, '다래미' 또는 '대래미'로 변해서 불리어지 게 되었다고 한다.
◎ 용정리(龍井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건 천면 지역으로 1914년 오룡리의 '용(龍)'자와 독정리의 '정(井)'자를 따서 용정리라 하여 진건면에 편입 되었다.
한편 용정리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감바위·감바우·반바위·반바우'가 있다. 이 바위에 는 고려 태조 때의 이야기가 전한다. 인근에 대적굴이라는 도둑의 소굴이 있었는데, 이 곳의 도둑들이 어느 날 이 바위 앞을 지나는 예쁜 신부를 잡아다가 도적 두목의 부인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신부가 꾀를 내어 말하기를 남편과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이 일을 알게 되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먼저 내 가 가서 그들을 죽인 후 다시 오겠으니 잠시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이에 도둑들이 허락을 하니, 그 신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부를 본 남편과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부정 한 행실을 하고 왔다고 하여 쫓아냈다. 쫓겨난 신부는 이 바위 아래에서 기도를 드리고 비녀를 뽑아 바 위를 내려치자 바위가 갈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이 바위를 '감바위' 혹은 '반바위'라고 부르게 되었 다고 한다.
'독정(獨井)'이라는 이름은 '독재이', '독쟁이', '독정이' 등으로도 불리며, 북쪽 의 '아랫독정'과 남동쪽의 '윗독정'으로 나누어진다. '독정'이란 이름은 풍양(豊壤)조씨(趙氏)의 시조인 조맹(趙孟)이 홀로 먹던 우물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즉, '홀로(獨) 먹던 우물(井)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오룡골·오룡굴·오룡동'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용 다섯 마리가 이 곳으로 내려왔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는 달리 다섯 개의 능선으로 뻗어내린 마을 뒷산 줄 기가,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용이 뻗은 것과 같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한다.
◎ 송능리(松陵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건천면 지역으로 1914년 송정리의 '송 (松)'자와 성릉리의 '능(陵)'자를 따서 '송릉'이라 하고 진건면에 편입되었다.
'성릉(成陵)'은 원래 송능리에 있는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恭嬪) 김씨(金氏)의 묘이다.
'성릉'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성묘(成墓)'라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광해군의 묘가 이 곳에 생기자 '능이 생긴 마을'이라 하여 '성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웃송릉'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송릉(松陵)'은 왕릉이나 묘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가 많고 능이 있는 마 을이라는 의미에서 '송능리'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양주시 - 수동면(水洞面) ]
◎ 운수리(雲水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상도면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운하(雲霞)리의 '운(雲)'자와 석수대(石水臺)리 의 '수(水)'자를 따서 운수리라 하였다.
'석수대리'는 돌 틈에서 물이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것 으로, 수동유원지의 첫째 가는 경승지라고 한다. 이 지역 암석에는 약 300년 전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 는 "석천아묵거편애청산청불로(石泉俄默居偏愛靑山靑不老)"라는 글귀가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옛 선현 들도 이 곳의 산수를 즐겼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송천리(松川里)
조선시대부터 한 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상도면의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송라동의 '송(松)'자와 장천(長川)리 의 '천(川)'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는 '며느리바위'라는 독특한 이름의 바위가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장자터에 소문난 큰 부자집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은 인심이 야박하기 로 소문이 나있었다. 동냥 오는 거지들은 물론 시주를 부탁하는 스님마저 문전에서 쫓아내었다. 그러던 어느 흉년이 든 해에 이 집에서는 며느리마저 쫓아내었다. 그녀가 먹는 쌀마저도 아까워 쫓아낸 것이 다. 쫓겨난 며느리는 할 수 없이 산을 넘어가던 길에 스님을 만났고, 산을 넘어가는 도중 절대 뒤를 돌아 보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 하지만 며느리는 길을 가는 도중 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고, 그녀의 눈에 는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마을과 자신의 집이 보였다. 그 순간 벼락이 내리쳤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바위가 되어 버렸는데, 이 바위가 바로 '며느리바위'라고 한다. 이와 같은 '며느리바위' 이야기 는 금곡리 '벼락소'의 유래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특징이 있다.
◎ 수산리(水山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진벌면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수막(水幕)동의 '수 (水)'자와 내마산(內馬山)리의 '산(山)'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물막골·수막'은 물줄기의 원 천이라고 해서 '물막골' 또는 이의 한자식 표현인 '수막'이라고 불린다. 중간말과 아랫말로 이루어져 있 다.
'안마산·내마산'은 옛날에 안씨 성을 가진 사람들과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곳에 살 았기 때문에 '안마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철마산 줄기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기 때문 에 '안마산' 또는 '내마산' 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내방리(內坊里) [안방골, 내 방동]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가평군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내방동과 비금리를 합해 내방리라 하여 외서면에 소속되었다. 산골짜기 안이 되므로 안방골 또는 내방동이라 하였다고 한 다. 1980년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
◎ 외방리(外坊里) [바깥방골, 외방동]
앞에서 말한 내방리와 연관된 이름이다. 방골 바깥쪽이 되므로 바깥방골 또는 외방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외방리에 있는 '남이바위'는 세조 때 남이 장군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바위의 형태가 의자 와 같이 생겼다고 한다. 이 유래를 바탕으로 한다면, '남이바위'는 '남이 장군이 앉았던 바위'라는 의미 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입석리(立石里) [선돌, 입석]
'선돌' 마을은 마을 앞 산에 약1평 정도되는 큰 돌이 서 있다고 하여 '선돌'이라 불린다고 한다. '입석(立石)'이라는 리 이름도 즉 서 있는 돌의 의미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 지둔리(芝屯里 : 지둔지, 지둔)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곳은 양주군 상도면 지둔리였는데 1914년 4월 1일 화도면에 편입되 었다. 지둔리에 있는 마을 가운데 '광대울'은 약 200년 전 이 마을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집에서 경연이 벌어졌는데, 이 때 한 광대가 줄을 타다가 떨어져 울고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 다.
지세와 관련되어 명명된 마을이름도 있는데, '삼각골'은 마을 지형이 삼각형의 골짜기 형 태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는 달리, 천마산의 수려함으로 드러나는 산가(山佳), 풍부한 계 곡물로 나타나는 수가(水佳), 그리고 인심 좋은 마을 사람들로 표현되는 인가(人佳) 등 삼가(三佳)로 이 루어진 마을이라 해서 '삼가골'이라 불리던 것이 '삼각골'로 변하게 된 것이라 한다.
[남양주시 - 조안면(鳥安面) ]
◎ 능내리(陵內里) [능안, 능내]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 (韓確)의 묘가 있으므로 능안 또는 능내라 하였다고 한다.
능내리에 있는 '마현'은 광주분원으 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 말을 타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던 고개가 있어서 '마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림학사 민씨도 이 곳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 조안리(鳥安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광주군 지역인데 1914 년 조동리의 '조(鳥)'자와 사안리의 '안(安)'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조동(새울·새월)은 옛날 이 곳에 새가 머물다 날아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는 달리 박씨 선조가 한양 가는 길에 이 지역에서 쉬게 되었는데, 새 소리가 듣기 좋고 물이 좋아 가려 했던 길을 멈추고 여기서 살 기로 하고, 마을 이름 을 '조동'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새울' 또는 '새월'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새와 관련된 지 명으로 조동 서쪽 와부읍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새재', '새고개[鳥嶺]'가 있다.
◎ 진중리(鎭中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광주군으로 1914년 진촌리의
'진(鎭)'자와 중리의 '중(中)'자를 따서 진중리라 하고 양주군 와부면에 편입시켰다.
한편 이 곳에는 '고려장터'라는 이름이 전하는데, '고려장(高麗葬)'이란 고구려(高句麗) 때의 장사(葬事) 지내는 법으로서, 늙고 병들은 사람을 묘실(墓室)에 옮겨 두었다가 죽으면 거기에 안치 하고 금은 보화를 넣은 다음 돌로 쌓아 봉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장사 풍습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병 든 노인을 깊은 산골에 버리는 풍습으로 전해졌다.
진중리 북동쪽에 있는 '고려장터'는 바로 이러 한 고려장을 실행하던 구체적인 장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리'라는 마을은 '중말'이라고 도 하는데, 원래 말의 죽을 먹였던 곳으로 처음에는 '죽말'이라고 부르다가 '중말'로 변하고, 다시 '중 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馬]과 관련된 곳으로 '마진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 변응성장군의 전적지이다. '마진산성'이라는 이름은 말로 진을 쳤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이 곳에 청동으로 만든 말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 송촌리(松村里)
'송송골·송신'은 송촌리에 있는 마을이다. 두촌 서쪽 송촌 2리에 있다. 중국에서 장수 이여송을 조선에 보낼 때, 송자가 붙은 마을은 가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것을 전해들은 한음 대감이 직접 이 마을에 송자를 붙여 지은 이름 이 바로 '송송골'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와는 달리 두촌마을에 세대수가 늘어나자 마을을 하나 더 만들었는데, 소나무밭 속산에 만들어진 마을이라 해서 '송송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 다. '송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현재 송촌리는 이 '송송골' 즉 '송송동'의 '송(松)'자와 평촌리 의 '촌(村)'자를 합하여 붙여진 것이다.
[남양주시 - 오남면(梧南面) ]
◎ 양지리(陽地里)
양지리는 중심마을이 '양지말', '양지편', '양지'라 고 하는데 양지바른 곳이므로 붙은 이름이다.
이곳 양지리에는 '삭다니·삭다리'라는 특이한 이름 이 있는데, 옛날에는 '골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골말'에서 '삭다니' 혹은 '삭다리'로 바뀐 이유는, 이 마을에서 화재가 나서 마을 대부분이 타버려서 '모두 다 타버린 마을'이라는 의미의 '싹탄리'로 불리다 가 '삭다리' 혹은 '삭다니'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팔현리(八賢里) [발안, 배라니, 배래 니, 팔현]
이곳은 벌판 안쪽이 되므로 '벌안', '배라니', '배래니'라고 불렸다.
그런데 조선조 유명한 유학자인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과 망세정(忘世亭) 심선(沈璿) 등 여덟명의 선비가 이 곳에서 항시 만나 강론을 하였다 하여, '여덟 현인(賢人)이 은거 했던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여덟 선녀가 이 마을에 내려와 목욕하고 올라갔 기 때문에 '팔현'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래서 이들 팔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운 사당으로 '팔현재'가 있다.
그리고 원팔현 북쪽 팔현유원지에 '형제바위'가 있다. 옛날 남 양홍씨(南陽洪氏) 가문에서 사효성문(四孝姓門)을 받은 홍서구(洪瑞龜)를 비롯하여 그의 아우 주구(疇龜), 우구(禹龜), 응구(應龜) 등 4형제가 이 곳에서 사이좋게 놀던 자리라 해서 형제바위라는 이름이 붙 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이 바위에 돌을 던지고 기원을 하면, 아들 형제를 낳는다고 하여 '형제바 위'라 불린다는 유래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 오남리(梧南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 지 이 지역은 양주군 건천면 지역으로 1914년 오산리의 '오(梧)'자와 어남리의 '남(南)'자를 따서 오남리 라 하여 진접면에 편입되었다.
'오산'이라는 이름은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 다. 그러나 낫을 가는 데 사용되는 숫돌이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 해서 '숫돌모루', 또는 '숫돌머리'라고 도 한다.
이와는 달리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돌아 내려온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 한다.
'어남(於南)·오남(梧南)·어냄이'는 세조가 광릉 묘지터를 찾으러 광릉 방면으로 가는 길에 건너다 본 곳이라 하여 '어람리(御覽里)'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의냄리', '어냄이', '어남 (於南)'이라고 불러오다가 '오남'으로 되었다고 한다.
고종황제 때의 내시가 이 곳에 와서 많 은 농토를 소유하고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남양주시 - 호평동(好坪洞)]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상도면에 속 해 있었는데, 1914년 호만(好滿)리의 '호(好)'자와 평동(坪洞)리의 '평(坪)'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 다.
호평동에는 '가마솥둥지'라는 바위가 있는데, 좌우로 갈라진 바위 사이가 큰 가마솥을 얹을 만하다 해서, '가마솥둥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이 지역은 가뭄이 들 때면 기우제 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다. 온 동네 부녀자들이 키를 들고 이 곳으로 와서 키로 물을 퍼서 바위에 끼얹으 며 비가 오기를 빌었다고 한다. 가뭄이 심한 해에는 몇 번식 키질을 하기도 했으며, 키질을 마치고 내려 오면 젖은 키가 채 마르기도 전에 비가 오곤 했다고 한다.
◎ 구룡터·구명터·구멍터·구녕터
호평동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 경춘간 고속화도로가 마을 가운데를 지나게 되어 마을이 양분 되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이 지역의 우물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고 해서 '구룡터'라고 부 른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구씨와 명씨가 살던 곳이라 해서 '구명터'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구멍 터'라 불리는 것은 '구명터'가 변해서 된 것이라 한다.
처음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의 이름에 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이름이 약간씩 달리 전하기 때문 에 마을 이름도 약간씩 다르다. 즉, 전구용이라는 사람이 처음 살았기 때문에 '구룡터', 전구멍이라는 사 람이 살았기 때문에 '구멍터', 전구영이라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구녕터' 등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호만'이라는 이름은 원래 '홈안'이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무내미골 논에다 물을 대기 위해 느 티울쪽으로 나무 홈을 파서 만든 홈통을 이어 댄 농수로가 있었는데, 이 홈통으로 된 농수로 안에 있는 집들을 '홈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에 부르기 쉽게 '호만'이라고 하기 시작했으며, 한자어로는 '호만 (好滿)'이라 표기했다.
[남양주시 - 평내동(坪內洞)]
평내리 151번지에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사당(祠堂) 이 있어 궁촌
이라하는데, '궁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궁말'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혹은 이성계의 아들인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의 사망 후 이 곳에
궁을 세운 이후부 터, '궁말' 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또 다른 이름
으로는 '궁평(宮坪)'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궁평의 '평'자를 따고 그 안쪽에 있다는 뜻으로 '내(內)'자를 붙인 것
으로 추정된다.
[남양주시 - 양정동(養正洞)]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금촌면과 와 공면 일부 지역에 속해 있었다.
1989년 1월 1일 일패동, 이패동, 삼패동을 아우르는 행정동으로 만 들어졌다. 자연마을인 양정에서 따온 명칭이다.
'양정(養正)'은 봉두메삼거리 서북쪽에 있으 며, 건너마을, 봉사골, 홍계, 뒷골, 안마을, 바깥골, 가마골 등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옛날 양정양씨가 처 음 와서 살던 곳이어서 이렇게 불린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조선 중엽 전주최씨의 양정재(養正齋)라는 묘막이 있어 그 후부터 '양정'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 왕자궁(王子宮)
이패동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해질모루 서쪽에 있다. 조선 중엽 장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恩信君)과 은신군의 생모인 임숙빈(林肅嬪)의 묘를 쓴 뒤부터 '왕자궁'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윗궁'과 '아 랫궁'으로 나누어지며, 예전에는 집도 크게 있었다고 한다. 다른 제보자는 그 무덤의 주인이 고종황제 8 촌의 묘였으며, 지금은 이장했다고 한다.
또 어린 왕자를 데려다 키운 곳이 이 마을이었다는 데서 이런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 삼패동
'삼패동(三牌洞)'이란 이름 은 청풍김씨 신도비에서 연유된다. 삼패동 평구마을에는 김식(金湜), 김육(金堉), 김좌명(金佐明)의 신 도비가 있다. 이처럼 청풍김씨의 신도비가 3기가 있기 때문에 삼패(三牌)동이라고 한다. 이 중 김식의 비석에 쓴 돌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비신과 이수가 통골로 되어 있다. 일패, 이패동 역시 각각 비석이 한 기, 두 기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 평구마을
평구마을의 '평구(平丘)'는 평 평한 언덕이 박덩쿨처럼 흩어져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평구역'이 있었기 때문이라 고 해서 생겼다고도 한다.
◎ 역말·역촌
삼패동에 있는 마을 중에 '역말·역촌'이라는 곳이 있다. 조선시대에 한양을 기점으로 8도로 가는 도로에 설치하여 여행객의 편리를 제공하거나 혹 은 역마가 휴식을 하고 공문서를 전달, 교환하던 곳을 驛院역원)이라 했었다. 이 마을이 바로 한양 40 리 지점으로, '평구역(平邱驛)'이라는 역원이 설치되었었다. 이러한 연유로 '역말' 혹은 '역촌(驛村)'이 라 불린다.
[남양주시 - 금곡동(金谷洞)]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의 대부분은 양주군 금촌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4월 1일에 금촌면 일패리와 건천면 송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금곡리'라 하고 미금면에 편제되었 다. '쇠골'이라고도 한다. 1989년 1월 1일 법률 4050호에 의해 미금시로 분리·승격되면서, 금곡리가 금곡 동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시청 소재지가 있으며, 남양주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금곡동은 예전 에 철을 파낸 곳이라 하여 '쇠푼' 즉 '금곡'이라 불렸다.
금곡동에 있는 자연마을 가운데 '무대 (舞垈)'가 있다.
옛날에 벼슬이 높은 선비가 지나가다가 아래로 보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서 커 다란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쉬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흥이 올라 춤을 추고 갔다고 해서 '무대'라 불 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춤을 춘 장소인 느티나무가 있으며, 남양주시 보호수 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금곡동을 이루는 4개의 큰 마을 중 '어룡(魚龍)' 또는 '어룡골'이라는 곳이 있다. '어룡'이라는 이름은, 현재 철도가 놓여진 지역이 예전에는 저수지였는데, 이 곳에서 물고기 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남양주시 - 도농동(陶農洞)]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 제2조에 의해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폐지되었고 같은 날 법률 제4774호로 남양주시로 승격되었을 때 도농리에서 도농동으로 바 뀌었다.
'도농(陶農)·도롱'은 본래 양주군 미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교리, 가재동의 각 일부와 구지면의 인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농리라 해서 미금면(읍)에 편입되었다 가, 1980년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
질그릇을 구웠던 마을이어서 '도농' 또는 '도롱'이라 불리 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조선 중엽 남양홍씨가 거주하였는데, 도적이 너무 많아 철(鐵) 로 울타리를 만들어 세웠던 연유로 '쇠미'라고 하다가 '도농'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전한 다.
[남양주시 - 지금동(芝錦洞)]
◎ 가운동(加雲洞)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의 대부 분은 양주군 미음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가재(加在)동의 '가(加)'자와 조운(朝雲)리의 '운(雲)'자 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가재(加在)'는 가운동에 있는 마을이다. '가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 해서는, 마을 주변 산의 형상이 가재와 같다고 해서 '가재마을' 또는 '가재울'이라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 다. 이와는 달리, 마을 북쪽에 있는 '안산'에 가재가 많기 때문이라는 산물과 관련된 유래가 있다. 또 다 른 유래는 임금이 지나가다 휴식을 취하면서 '이 곳은 가히 쉴 만한 곳'이라 했다 해서 '가재'라고 부르 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조운(朝雲)'이라는 곳은 옛날에는 '원터'라고 하다가, 다시 '조 원'이라는 원집이 있어 '조원'이라 부르다가, '조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수석동(水石洞)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의 대부분은 양주군 미음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수변(水邊)리의 '수(水)'자와 석실(石室)리의 석(石)'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수변이란 글자 그대로 한강을 끼 고 있는 지역이어서 붙은 이름이고, 석실은 이 곳에 석실서원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1995년 남양주시 로 승격되었을 때 수석리에서 수석동으로 바뀌었다.
'석실(石室)'은 '서원' 혹은 '세원'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여러 지명들 은 모두 석실서원이 이 마을에 있었던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조선시대에 안동 사람 김창협이 석 실서원을 설치하여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라는 연유로 이런 이름들이 붙여진 것이다.
'미음(渼陰)'은 수석동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 중엽 안동김씨의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원래 김조기 자손의 호를 따서 '미음'이라 칭하다가 구한말 때 '수변리(水邊里)로 바뀌었다.
◎ 지금동(芝錦洞)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의 대부분은 양주군 미음면에 속해 있었는 데, 1914년 지사리(芝沙里)의 '지(芝)'자와 금교리(錦橋里)의 '금(錦)'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 다.
금교(錦橋)리'는 조선초 중엽 '금어'라고 불리는 조그만 개울에 있던 다리를 '금교'라고 하 였는데, 이 다리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남양주시에 있는 산 이름
1)축령산
일명 비룡산이라고도 한다.(879m /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외방리)
고려말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사냥 왔다가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고 돌아온 몰이꾼들의 말이 이산은 신령하니 산제를 올려야 한다고 하여 이튿날 산정상에서 제를 지낸 후 사냥을 한 사실에서기원한다.
축령산은 소나무와 잣나무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남이장군의 전설이 깃든 남이바위, 수리바위 등의 기암이 있다. 정상은 암봉이며 능선길은 저남이 좋으며 아기자기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축령산 기슭에는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있다. 축령산이 자연휴양림으로 이름나 있는 것은 국내 최대로 알려진 잣나무 숲 덕분이다. 해방전에 산자락을 빙 둘러 심어놓은 손가락 굵기의 잣나무 묘목들이 60여년이 지난 지금은 한아름으로 자라 송진향 그윽한 휴양림이 된 것이다.
2)서리산
(832m /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외방리, 가평상면)
산 북서쪽이 급경사로 이루어져 항상 응들이 져 서리가 내려도 쉽게 녹지않게 되었습니다.
늘 서리가 있는 것 같아 보여 서리산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수동면 외방리와 가평군 상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청취대 북쪽에 있다. 옛기록을 사펴보면 서리산의 다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소의산’으로, [동국여지지]에는 ‘상의산’으로, [조선지지자료]에는 '상산‘으로 나와있다. ’소의‘나 ’상‘은 ’서리‘의 가차로, 한자의 음만 그대로 빌려와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상‘은 ’서리‘에 해당하는 한자로, 그뜻을 살려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3)수리봉
(563m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별내면)
산의 형세가 독수리같다고 하여 수리봉이라고 하며 소리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남양주시 진접읍과 별내면 경계에 잇는 수리봉은 국립 수목원 뒤편 서쪽에 있는 암릉이 빼어난 명산이다. 서울시보다 최저기온이 -4° 쯤 낮고 10월 초순에 첫서리가 내리고 오월 중순에 늦서리가 내린다. 특히 온대 활엽수림은 현재까지 인공을 가하지 않은 원시림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국내외 임어기술자들과 학술조사단의 왕래가 빈번하다. 또한 천연림과 인공림의 조성관리가 가장 잘되어 시범림을 이루고 있으며 ha당 평균축적이 106m*3 에 이른다. 수리봉 동쪽사면 전체를 점하고 있는 수목원 관내에는 세계적인 희귀종 크낙새, 하늘다람쥐, 장수하늘소, 원앙새등 20여종의 천연기념물이 서식하고, 천연림을 비롯한 2,900여종의 식물과 3,000여종의 동물이 뛰어놀고 있어 생태계의 원형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며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동식물의 낙원이며 천연의 자연사박물관이라 불리우고 있다.
4)철마산
(786m / 경기 남양주 진접읍, 수동면)
예전 어느지사가 철이 나올것이라 예언하였던 곳이며 산정바위가 말머리 모양으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철마산은 남양주시 진접읍과 수동면 경계에 있는 광주산맥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조용한 명산이다. 산의 동편 수동면은 물 좋은 비금계곡으로 유명하고, 서쪽의 팔야리는 조선태조가 함흥에서 서울로 돌아오면서 여덟밤을 묵어간 역사적 고장이다. 등산로는 비교적 수월하여 등산객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5)주금산
(813m / 남양주시 수동면, 포천군, 가평군)
일명 비단산으로 불리고 있는 주금산의 정상은 공터이며 정상부근의 기암과 수려한 비금계곡이 어우러져 마치 비단결같은 산세를 자랑하고 있다.
주금산은 운악산과 천마산의 중간지점에 가장 높이 솟아있는 산이다. 남쪽의 아름다운 비금계곡은 도심근교의 대표적 피서지중 하나! 남쪽 약 1.3Km에는 독을 엎어놓은 것 같은 독바위라는 암봉이 있으며 능선에는 바위지대와 억새밭이 심심치않게 있고 수림도 울창하다. 산의 서북쪽 산자락에는 베어스타운 스키장이 있다.
6)천마산
(812m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오남읍, 호평동)
높고 웅장하여 하늘에 닿을 듯 하다하여 “천마산”이라 부른다.
해발 812m 스키장으로 널리 알려진 천마산은 서울에서 버스로 한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명산중의 하나이다.
의적으로 이름을 날린 임꺽정이 이 산을 근거지로 ‘마치’고개에서 활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들린 만큼 산세가 험해서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산은 아니다. 그러나 공기가 어찌나 맑은지 산자락 아래에는 심신수련장을 비롯하여 사학재단의 생활관이나 각종 종교단체의 훈련원등이 세워져있다.
또한 직장인들의 야유회나 대학생들의 MT장소로도 많이 활용된다. 정상에 조금 못미쳐 있는 봉우리가 해발 795m의 멸도봉이고 이 멸도봉에서 정상까지는 암릉으로 되어있다.
바위위로 얼음이라도 끼는 날에는 아이젠이 있어도 미끄러지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7)백봉
(590m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화도읍)
산봉우리 형체가 잣송이 같다고 하여 잣봉이라 하며 백봉은 한자표기이다.
광주산맥이 천마산을 일구고 이어서 마치고개로 이어져 남쪽 뻗어내린 능선에 솟아 있는
백봉(589m)은 높이는 낮으나 산세가 아름답고 동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어 전망이 뛰어나고 교통편이 좋은 산이다.
정상남쪽 산자락에는 신라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무술도량으로 창건하였다는 묘적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사찰은 조선 세종대왕때 학열대사가 불사를 새로 지었으며 그 후 남북 군영을 세워 무과시험을 보다가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켰던 곳으로 소실되었다가 재증축하였다고 한다.
8)예봉산
(683m / 경기 남양주 와부읍)
예빈산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의 정부관서중 손님을 맡아보던 관아의 예빈시에 나무벌채권이 있었기 때문에 예빈산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예봉산은 적갑산과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산이며 능선길로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산행기점은 팔당리와 조안리 및 분쪽 조곡에서 오르는 길이 있는데, 팔당에서의 주된 등산 기점은 팔당 2리 버스 정류소(한일관)에서 철로쪽 골목길을 거쳐 굴다리 밑을 지나 팔당2리 회관 앞길을 따라 올라간다. 정상에서는 한강과 강 건너 검단산 및 동쪽의 운길산등이 보인다.
9)적갑산
(561m / 경기 남양주 와부읍)
절터가 있어서 예로부터 적골(절골의 변음)이라 했던 곳이며 절골산-적골산 이었는데 일제시대에 이런 유래를 모르고 적갑산으로 기록한 것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높이 561m이다. 높이 683m의 예봉산과 마주보며 1.5Km의 능선길로 이어져 있다.
주변에 이렇다 할 명소는 없지만 산세가 아기자기해 인근 예봉산이나 운길산(610m)과 연계한 등반코스에 빠지지 않는 산이다. 그래서 산행을 예봉산 정상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운길산이나 예봉산에 가려 단독산행지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팔당호와 인근경치가 좋은 곳이다.
10)운길산
(610m /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태조께서 이산에 구름이 많이 운길산이라 한다.
<수종사중수기>에는 운길로 나오고, 그보다 오래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곡산이라고 적혀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 북서쪽 지점에 솟아있다. 1890년 (고종 27)에 지은 <수종사중수기>에는 운길로 나오고, 그 보다 오래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곡산이라고 적혀있다.
산수가 수려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가족산행이나 가벼운 주말산행지로 널리 알려졌다.
서쪽의 적갑산(561m)과 예봉산(683m)을 함께 종주할 때 기준점이 되는 산이기도 하다.
산행은 송촌리나 진중리에서 시작한다. 송촌리에서 송성골마을로 들어가 수종사에 들른 뒤 산신각 옆으로 500봉을 거쳐 정상에 오르거나, 요사채 앞에서 200m를 내려가 오른쪽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 서면 예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적갑산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11)불암산
(509m /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1,100년전 치중대사가 개산하여 불암산이라 칭한 명칭이 오늘까지 내려왔다.
팔암산·천보산이라고도 한다.
불암산은 남양주시와 서울시의 경계를 이루며 덕능고개를 사이에 두고 수락산과 이웃하고 있다.
서울시 경계에 위치한 5개 산 가운데 가장 낮은 산이다.
그러나 정상부분이 온통 바위산을 이루고 있어 규모를 뛰어넘는 기품을 자랑한다.
불암산 주봉은 해발 509m이고 그 형상이 마치 송낙(소나무 겨우살이로 만든 여승이 쓰는 모자)을 쓴 부처의 모습과 같다 하여 불암산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천보산, 필암산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불암산은 사암으로 된 산이라 수목이 울창하지는 않으나 능선은 기암으로 이어지고 봄의 철쭉은 화원을 연상케 한다.
불암산의 대표적인 사찰인 불암사는 신라 경문왕때 지증국사가 개창한 사찰로 봉선사의 말사이다.
12)수락산
(509m /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산이 전부 석각으로 되어있어 물이 스며들지 않고 전부 흐른다 하여 “수락”이라 부른답니다.
수락산은 서울의 북쪽 끝에 의정부시와 남양주시를 경계로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불암산이 바로 연결되어 있어 종주가 가능하다. 산 전체가 화강암과 모래로 이루어져 있고 기암괴석과 샘, 폭포가 많은 반면 나무는 매우 적다. 산의 분위기가 다소 삭막하기는 하나 바위의 경치가 뛰어나고 곳곳에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수락 8경이라 불리는 금류폭, 은류폭, 옥류폭포와 신라때의 흥국사, 조선때의 내원암이 있다.
그리고 동서 산록의 계곡에는 수락산 유원지가 있다. 산세가 웅장할 뿐만 아니라 산 전체가 석벽과 암반으로 되어있어 도처에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13)문안산
(536m /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산의 정상에 서면 서울의 동대문까지 보인다고 하는 이야기 때문에 문안산이라 불리웁니다.
높이는 536m로 한북정맥에 속하는 운악산, 천마산의 산맥이 연결되어 있고 가장 큰 볼거리는 문바위이다. 산의 북쪽에는 공원묘지와 공장들이 들어서 있고 인적이 드물다.
화도읍과 강변에 숙박업소가 있으며 주변에 금남 유원지와 천마산스키장 등 관광명소가 많다.
북한강에 가까이 자리잡고 있으며 산세가 험하지 않아 가족산행지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