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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잊혀져 버린 도심 속의 하천들
오산천은 신갈저수지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른 식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걸까. 인간은 모두 태어나서 살고 죽는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장 간단하게 말해서 남자와 여자부터가 다르다- 때문에 존 그레이는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는 수사를 사용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모두 같지 않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걸까. 그건 모두 저마다의 꼭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살면서도 열두 번 마음이 바뀐다고 한다. 아침의 나와 저녁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인 것이다. 하물며 지구에서 살아가는 50억이 넘는 사람들이 같을 수 있을까. 독자들은 왜 필자가 오산천 이야기를 하다가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다름 아니라 그건 지금부터 이야기하게 될 오산 속에 있는 오산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오산천은 신갈저수지에서 시작된다(이건 앞 문단을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만 중복된 문장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많은 하천들이 있다. 고매천, 치동천, 신리천, 장지천 등등. 그리고 지금부터 이야기하게 될 하천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아스라이 잊혀져버린 하천들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오산천은 분명 신갈저수지에서 시작되지만 오산천이 진위천이 되고, 진위천이 황구지리가 되는 순간순간에 저마다의 사건이 있다. 오늘도 그 사건들은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필자는 지금 글을 쓰고 있고, 독자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가서천에서 가장천까지
당신은 가서천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서천? 그게 어디에서 흐르는 천이지?”라고, 당신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서천은 가장천(佳長川)의 발원이 되는 중심 하천이다. 그리고 가장천은 서동저수지로부터 시작되는 하천이다. 그럼 이제부터 가서천으로 떠나보도록 하자.
가서천으로 가기 위해서는 청학동에 위치한 오산성당으로 가는 길을 택해야 한다. 그 길의 끝에는 정남면 소재지가 위치해 있다. 버스를 탄다면 시내에 있는 국민은행 앞에서 정남면으로 가는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자전거를 타고 가도 기껏해야 30분 정도니까 바람을 시원하게 맞으며 패달을 굴려도 좋겠다.
필자가 가처천을 찾았을 때는 코스모스가 한껏 피었다가 이미 지고 있는 중이었다. 농부들은 추곡수매를 앞두고 황금 들녘에서 바쁘게 가을 추수를 하고 있었고, 지나가는 길목마다 지푸라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장동(佳長洞)1)에 다다랐을 때, 높은 하늘은 이미 파랗다 못해 시퍼렇게 숨김없이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서동 저수지로 유입되는 지점으로부터 약 1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철환경이 보인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가서천의 발원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폐가처럼 을씨년한 한일3농원에서 앞에서 가서천이 두 갈래로 갈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가서천의 발원지는 두 곳임이 분명했다. 우선 첫 번째 갈래를 찾아보도록 하자.
첫 번째 갈래의 발원지는 독장골길 위에 있는 쌍수봉2)의 동쪽 산록이다. 이곳의 아래에는 현재 벚꽃마을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천의 모습을 이곳에서 찾아볼 수는 없었다. 가장동 주민에 의하면 과거 유관진 시장 때 복개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원한 첫 번째 줄기는 독장골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가장저수답(佳長貯水沓)3)으로 유입된다. 저수답의 특성상 지금은 가을인지라 이곳에는 벼이삭을 흠뻑 머금은 벼가 있었다. 이곳에서 가서천 첫 번째 줄기는 복개된 지점이 끝나고 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낸다. 배무니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가서천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도저히 오산에서 흐르는 하천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수심이 들여다보이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산성화된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환삼덩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곳에서 가서천은 계속 흘러 신용정공을 지나 한일 3농원에서 두 번째 줄기와 합쳐진다.
그럼 이제 두 번째 줄기의 발원지를 찾아보기로 하자. 첫 번째 줄기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줄기 역시 발원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복개되어 있었다. 함박산과 배마니산이 두 번째 줄기의 발원지이다. 이곳 부근에 배무니 고개4)가 있다. 높은 고개인지라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가서천은 물론 서동저수지와 멀리 신동아 아파트5)까지 보인다. 이곳에서 시작된 두 번째 줄기는 배무니길을 따라 내려가다 예전에 세조 임금님이 마셨다던 찬우물(어정) 터6)를 지나 한일3농원에서 첫 번째 줄기와 합쳐진다.
첫 번째 줄기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상류가 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유관으로 수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류가 두 갈래인 가서천은 한일3농원에서 합쳐지고 가장로 부근으로 향한다. 그리고 가장로를 지나기 약 5미터 전에서 또 다른 하천을 맞아들인다. 성철환경 입구부근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 합쳐진 가서천은 가장로를 지나 서동저수지로 향한다. 드디어 가서천이 가장천으로 거듭나는 순간인 것이다.
가서천 중류 지점 맑은 하천, 가서천은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단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서천은 이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운명을 맞을지도 모른다. 가장동 지방산업단지 조성이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이다. 가장 지방산업단지(450미터), 청학-가장간 도로확포장공사(100미터), 서부우회도로공사(100미터)에 편입될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오산시에서는 해당분야 전문가와 가장동 주민의 의견을 듣는다고 시 홈페이지에 공지해 놓긴 했지만 얼마나 의견 수렴이 될지 의문이다. 가장동 마을 주민들은 이미 토지보상 문제도 거의 매듭지은 것 같고, 기관을 상대로 하천을 지키고자 할 의지가 엿보이지 않았다. 가서천과 함께 가장동 자연부락의 존폐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또한 이대로라면 시에서 계획하고 있는 서동저수지 공원화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서동 저수지를 공원화 하려면 일차적으로 풍부한 수량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가서천이 복개되고 가장 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면 서동저수지로 유입되는 수량은 분명 크게 줄어들 게 뻔하니 말이다. 가까운 미래도 내다보지 못하는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서동저수지 강태공서동낚시터 안내판 가서천이 서동저수지로 유입되는 부근, 가장동 윗말에서 내려온 물과 합수되어 서동 저수지7)를 이룬다. 대부분의 저수지가 그렇듯 이곳 또한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수의 역할과 함께 낚시터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낚시터 안내 표시판을 보니 관리자의 이름이나 허가 기간이 적혀 있지 않아 방치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곳이 바로 황새보이다. 한세택씨에 따르면 예전에 이곳에서 황새가 많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황새를 볼 수 있다. 가깝게 잠수교가 있다. 이렇게 가서천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서동저수지로 이어지고, 서동저수지에서 다시 오산천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오산천은 단지 신갈저수지에서 시작해서 진위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사건이 개입되고 그 속에 이야기가 담기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함께.
1) 마을이 길고 주위가 아름다워 긴 마을의 뜻인 가장(佳長)이 되었다고 한다.
2) 123m로 오산시 가장동과 화성군 정남면 고지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3) 가장골못이라고도 한다. 1960년에 설치되었으며 평균 수심은 2m이다.
4) 배문이라고도 하며 함박산의 서쪽 골짜기에서 서랑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의정평(艤艇坪)이라 하여 아주 먼 옛날에는 배가 닿은 고개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나 언제였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만약 이곳까지 예전에 물이 올라왔다면, 현재 서동에 있는 신동아 아파트는 과거에 반 이상이 물에 잠겨 있는 부분일 것이다.
5) 예전에 개미굴(골짜기)가 있던 곳으로 가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천수답으로 개미나 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6) 가장동 함박산 밑 배마니 골짜기에 잇는 샘물로 조선시대 세조대왕께서 피부병이 있어 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시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 이 샘물로 목을 축이게 되었는데 물이 차고 맛이 좋아 크게 기뻐하며, ‘찬우물’이라 명명하시고 샘물 관리를 위하여 샘물 근처의 농토에서는 세금을 받지 말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 후부터 근처에 객사(客舍)가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 시대에도 이곳의 농토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임금이 드신 샘이라 하여 어정(御井)이라고 부르며 약수터로 유명했다 한다. 하지만 현재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귀래정(식당) 밑에 있는 소나무 부근이 찬우물 터라는 마을 사람의 증언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7) 공식명칭은 서리지이다. 1969년 축조되었으며 청학저수지라는 이칭도 갖고 있다. 만수면적은 3.6㏊, 몽리면적은 27㏊, 계획저수량은 2만9천5백 톤이다. 8) 서촌이라 하여 오산의 가장 서쪽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1동과 2동으로 되어 있으며, 예전에는 초평면의 면사문소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으며 여들이라고 불렸다.
첫댓글 역시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글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차차 해야겠지요. 쓰고 나서도 숙제가 많군요.
장래의 오산문화원장 감이네요. 일본에는 지역 연구가가 곳곳에 많답니다. 거창하게 나라사랑보다는 지역사란부터. 열심히 하는 모습이 우선입니다.
대단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귀화식물인 미국자리공과 돼지감자(뚱단지)가 있는데, 그 흔하디 흔한 한삼(환삼)덩굴은 왜 없을까요? 깨끗한 저수지에서 빈낚시의 이태공이 되어 볼꺼나..^^?
그러게요, 요즘 여기저기 가보면 환삼덩쿨 천지인데 가서천에서는 환삼덩쿨 발견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환삼덩굴로 호프 맥주를 만들어 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