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 실내로 설정된 사각의 플랫폼 장면에 따라 의봉의 방, 살림방, 교실, 디스코텍, 술집 등이 된다. 플랫폼 오른쪽은 실외로 설정된 공간 나무하나 서 있을 때는 의봉의 집 마당, 가수가 노래 부르는 디스코텍의 무대가 될 때는 높은 플랫폼이 가설된다.
((막이 오르면 깜깜한 어둠 속에 엎드려 있는 의봉의 전신 위에 핀 라이트 켜진다.창고 같은 방의 바닥에 기어 나온 집 개미를 관찰하는데 몰두해 있다.))
[소리] (매우 코믹하게) 태초에 개미가 있었다. 처음, 이 세상은 개미 한 마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잠시 후) 어느 날 개미 한 마리가 땅 굴 밖으로 기어 나왔습니다. 주둥이에 모래알 하나를 물고 있었습니다. 땅굴밖에 나오자마자 아무 데나 모래알을 내려놓고 재빨리 나온 곳으로 기어들어 갑니다. 다른 한 마리가 뒤쫓아 나오더니 먼저 나왔던 개미의 동작을 되풀이하고 사라집니다. 또 한 마리가 나옵니다. 자꾸 자꾸 꼬리를 물고 기어 나옵니다. 첫 번째 나왔던 개미의 동작을 쉬지 않고 반복합니다. (의봉이 위치를 바꾸어 객석으로 머리를 두고 마치 엎드려 절하는 자세로 바꾸어 개미를 관찰) 나오고 들어가고, 들어가고 나오고, 나오고, 나오고, 나오고 다시 돌아 들어가는 두 줄기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일사불란 결코 흐트러지는 법 없습니다. (다시 위치를 처음의 우편에서 좌편으로 바꾼다.) 저 개미 구멍 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이 땅굴 속엔 얼마나 넓은 공간이 있는 것일까? (살그머니 팔을 들어올린 뒤 잠시 후 모래성을 지워 버리듯 개미집을 쓸어버린다.) 기계적
[페이지] 002
으로 반복되던 진행에 큰 혼란이 생겼습니다. (개미굴을 중심으로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열심히 위치를 바꾸며 관찰에 열을 올린다.) 길을 잃은 놈들이 허다합니다. 제 집을 못 찾고 황급히 치달립니다. 이런 바보 멍텅구리 (방바닥을 주먹으로 치고 벌떡 일어나 앉는다. 멀리서 와르르 와르르 건물들이 붕괴하는 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옆에 있던 불도저가 다가오는 소리 쫓기듯 보이지 않는 사면 벽을 따라 뒷걸을 치기 시작한다. 곧이어 쿵쾅쿵쾅 따따따따 굴삭기 소리- 인형을 꼭 안은 채 방안을 딩굴딩굴 구른다. 일순 모든 소리가 물러간다. 동작도 멈춘다. 방바닥에 귀를 대고 들으려 한다. 다음, 무릎을 꿇고 정면을 향해 앉는다. 조명 밝아지면-) 이 방 바로 밑에 땅굴이 있습니다.
-암 전-
[장] 1장
실내에 아비와 어미가 밥상을 대고 앉아 있다.
[어미] (아비의 눈치를 본 뒤) 오늘이 소집 날짜네요. (아비, 묵묵히 밥술만 떠 넣고---) 여보, 의봉이를 데리고 가야겠어요.
[아비] (역정내며) 또 입학시키려고?
[어비] 전입해 온 지 일 년이 됐는데 저대로 내버려두 실 꺼예요?
[아비] 그럼 내버려두지 않고--- 벌써 몇 번째야. 데리고 가면 줄서기 바쁘게 도망쳐오는 놈.
[어미] 어디 그 아이 탓 만이유? 있을 만 하면 다시 이삿짐싸구 정 붙일 만 하면 당신이 못 다니게 막구.
((어느새 의봉이, 실회 나무 아래 그림자처럼 붙어 서 있다.))
[아비] 뭐 정 붙이고 살았었다구? 우리가? 저 병신이 생기고부터 우리가 무슨 끈끈이 같은 정을 가져 본 적이 있어?
[어미] 자꾸 병신 병신하지 마세요. 우리가 낳은 자식이에요.
[아비] (화를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서다가 인형을 집어든다.) 이게 병신이 아니고 뭐야 당신이 낳고서도 몰라?
[어미] 죄 지은 년이니 내가 지금까지 말못하고 살아왔지요. 하지만 당신이 원해서 낳은 자식이란 말이에요. 아들 하나만 하나만 일곱 번 째 딸 뒤에 아들이 라고 낳아 주니까
[아비] (인형을 집어 던진다) 우리 금천 이씨 가문에 난쟁이 병신은 없었어. 고향 사람 보기 민망해서 떠돌아 다니다가 달동네보다 못한 별 동네로 왔더니 이제 또 무슨 일 저지르려구?
[어미] (인형을 다독거리며) 여보 세상이 다 아는 걸 언제 까지 숨기며 살겠어요. 방 구
[페이지] 003
석에 가두어 눈다고 있는 자식 없는 척 할 수 있어요?
[아비] 세상에 내 놓고 손가락질 받게 하자는 거요? 병신 새끼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병신 취급을 받아도 돼?
[어미] (아비의 발을 끌어 앉는다) 당신 자식이란 말예요. 아무리 병신이래도 내가 낳은 자식이란 말예요. (의봉이 나무를 더 힘껏 껴안는다)
[장] 2장
1장과 같음.
((상자마다 가득한 보세 일거리를 꺼내 놓고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일에 열중해 있는 어미, 밖에서 아이들 노래 부르며 노는 소리 " 꼬마야 " " 꼬마야 " 할 때 유난히 목소리가 높고 신이 난다. 말순이 뛰어들어오자마자 책가방을 내 던진 후 두 발 내뻗고 주저앉는다.))
[어미] (애써 무관심한 척) 그럴수록 네 동생을 가러 줘야지 누나 좋다는 게 뭐야. 남들이 놀린다고 동생 떨어뜨려 놓고 너만 도망쳐 오면 어떻게 해.
[말순] (꼬마 인형을 힘껏 팽개치며) 엄만 의봉이 불쌍하다고 편들지만 걔가 얼마나 나쁜 짓만 골라하는 지 알아. 병신 고운데 없다는 말이 맞다니까.
[어미] (단호하게) 너 그 말 다시 한번 했다간 가만 안 놔둘 꺼야.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병신, 병신 하면 너 벌받아.
[말순] 엄만 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아들 하지만 아들이면 다야? 딸들은 있으나 마나 눈에 보이지도 않지?
[어미]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며) 이 못된 년 네가 제 동생을 한 번이라두 손잡고 다녀 봤어. 창피하다고? 뭐 창피해?
[말순] (피해 가며) 다시 골방 속에 가두란 말야. 그러면 모두가 다 좋아한단 말야. 이번이 몇 번째야 일 학년에 입학해서 한번도 마친 적 있어요? 다니지도 못할 걸 왜 자꾸 학교에 집어 넣구 그래요. 일 학년만 세 번 다닌 애는 그 애 밖에 없어. 사람들이 다 병신 때문에 그렇다구 다들 그래.
[페이지] 004
[어미] (따라 나가려다 인형 앞에 고꾸라지듯 엎어진다) 이누무 새깨야 이 가여운 내 새끼야.
[말순] (나가려다 말고) 흥! 엄만 저렇다니까. 딸들이 도망쳐 나가두 아들 하나만 있으면 최고지. 작은 언니처럼 나도 나가 버릴 꺼야.
((뛰쳐나가는 말순이와 엇갈려서 동이 사람인 갑순모 씩씩거리며 등장))
[갑순모] (말순의 등 뒤에 대고) 네 동생 학교에서 돌아 왔냐?
[말순] (소리만) 왜 내게 물어요? 내가 그 애 보호자인가요?
[갑순모] 쯧쯧 못된 것. 누가 제 동생 병신 아니랄까 봐서---
[어미] (놀라움을 애써 감추며) 갑순 어머니가 웬일이세요. 우리 애들이 뭐 말썽이라두?
[갑순모] 말썽이다 뿐예요? 그렇지 않아두 시끄러운 동넨데 웬 못된 애들이 이렇게 많은지.
[어미] 무슨 일인데요.
[갑순모] 맨날 가게에서 술병이 없어지지 않나. 내다 건 빨래가 사라지질 않나.
[어미] 그런데요?
[갑순모] 아직도 모르겠수? 댁의 아들이 하고 다니는 짓인데두.
[어미] (놀라며) 아니 누가 그런데요. 의봉이 짓이라고?
[갑순모] 동리 큰 애들이 당신 그, 그 꼬마를 시켜서 못하는 짓이 없다는 거. 그거 모르구 있었수?
((의봉이 조용히 나무 밑에 그림자처럼 붙어 서서 엿듣는다.))
[어미] 해도 너무 하시네요. 동네 애들이 내 아들을 시켜서 그런 나쁜 짓을 하도록 시켰다면 시킨 애들이 나쁘지. 어떻게---
[갑순모] 그러니까 내 말은 전처럼 당신 아이를 나가 돌아다니지 않도록 가둬 두자는 거야. 알아듣겠어요. 이건 내 의견만이 아니고 돈동리 사람들이 다--- (말 끝나기 전 복덕방 할아버지 허우적거리며 들어온다)
[할아버지] 꼽추가 산다는 집이 여기야. 이 녀석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혼 구멍을 내 줄테다. 어떤 병신 새끼가 감히 내 성한 손주 새끼에게 손찌검을 해--- 이 놈 이리 나오너라. 그 손버릇 고쳐 주마.
[갑순모] 복덕방 할아버지. 이 집 아이가 댁의 손자를 때렸어요? 분명히 보셨겠지요. 틀림없이 그 애 짓이지요.
[할아버지] 본 것이나 다름없다니까. 우리 아인 이 댁 아들처럼 꼽추가 이니외다. 비록 벙어리긴 해도 사지가 멀쩡한 아이올시다. 아 그래, 말을 못하는 아이라고 꼽추까지 찾아 와서 못 살게 굴어. 이 놈. 이 고약한 놈 이리 나오너라. 내가 그 손모가지를 가만 두지 않겠다.
[여선생] (반갑게 손 잡으며) 어머나 집에 계셨군요. 기억 하구 말구요. 의봉이 어머님이 부탁하신 말씀두 잊지 않고 있답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미] (가로막듯이)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혹시 학교에서 말썽이라두?
[여선생] (의아해 하며) 말썽이라니요.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의봉이 사는 집을 한 번 보고 싶어서 시간을 냈을 뿐이예요. 그런데 이 분들은 모두 동네 분이신가 보죠.
[갑돌모] (단호히) 잘 오셨습니다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의봉이가 이 동네에서 몹쓸 짓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 때문에 이렇게 몰려 왔습니다만--- 담임 선생님이시라니까 서슴없이 하는 말씀인데 환경을 잘 아셔야 아이들을 잘 지도 하신다는 건 참 훌륭한 말씀입니다요. 이 의봉이네도 말할 것 같으면 (의봉이 나무 밑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다)
[할아버지] (나서며) 흠. 의봉이네로 말할 것 같으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수다. 아 작년에 이 집을 얻어 준 사람이 내가 아닌가베?
[어미] (여선생을 잡아끌며)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가세요. 여기가 의봉이 방이에요.
((암 전))
[장] 3장
의봉이의 방
((여 선생 떨어진 인형을 두 손으로 천천히 들어올린다. 실내 어두워지며 여선생과 인형에 떨어지는 핀 라이트 동시에 나무 앞에 서서 방을 들여다보고 있는 의봉이에게도 핀 라이트가 들어온다. 두 사람 마주 선 상태에서 대화가 전개됨.))
[여선생] (인형에게 말하듯) 오늘 학교에서 왜 그런 짓을 했어. 선생님은 인형이 아니란다. 선생님도 다른 사람처럼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단다. 바로 너하고 똑같은 사람이야. (인형을 등 뒤로 숨기고 점점 의봉이를 향해) 나에 대해서 뭘 알고 싶었어?
[의봉] (피하듯 등을 돌린다) 난 개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요. 개미가 되고 싶기 때문에 개미를 잘 알아요.
[여선생] 내가 묻는 말을 피하는 구나. 개미에 대해서 물은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 뭘 알고 싶으냐고 물었잖니?
[의봉]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개미는 아주 조그맣기 때문에 손에 넣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손안에 넣고 싶거든.
[페이지] 006
[페이지] 007
[장] 4장
제4장 의봉이의 집 살림방
((젯 상이 차려 있는 옆에서 아비 혼자 술을 따루어 마시고, 어미는 마당에서 큰 딸과 함께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어미] 전화 심부름 보낸 지가 언제인데, 이 애가 아직두 오지 않누?
[큰딸] 지 동네는 언제 공중전화라도 편하게 쓸 때가 온대우. 시내 전화 한번 걸려면 저 아래 동네까지 걸어내려 가야 하니.
[어미] 오죽하면 달동네도 못되고 별 동네겠니?
[큰딸] 여기도 시골이라구 믿을 사람 있을까? 밤에 저 시내 불빛을 바라보면 산동네가 아니라 천사동네라고 하겠지만.
[어미] 그런데 야 큰 애야! 큰일이다. 언제 철거당해서 쫓겨날 지 모르니 걱정이 되어 잠이 안온다. 의봉이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 만이라도 견딜 수 있으면 더 바랄 것 없겠으면서두.
[큰딸] 의봉이 졸업할 때가 오겠우? 학교 들락달락하면서 몇 년이 지났는데 지금 겨우 일 학년, 대학교 들어 가기 위해 삼수 한다는 말 들었어도, 국민학교 삼수한다는 말 들어봤수?
[어미] (음식을 들고 제사상으로 간다. 큰 딸도 따라 간다) 그렇게 남의 말하듯 하면 못 쓰는거여. 하나뿐인 남동생인데.
[아비] 이 녀석은 제사 준비 하잖고 어디루 나가서 아직 안들어 오는 거요?
[어미] 말순이랑 같이 전화하러 갔을 걸요. 벌써 두 시간짼데 시내에 있는 애들한테 오늘이 제삿날이라는 걸 알려 주라고 했는데. 걔들이 전화를 아직도 안 받고 있는 모양이지요.
[아비] (술을 따라 마시며) 딸들 소용없어. 딸들 소용없다는 건 이런 날 당하면 아는 거야. 조상을 모르는 자식을 어디 자식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
[큰딸] 아버지는 또 그 말씀, 딸자식도 자손이니까 제사 모시려 이 험한 데까지 찾아오지 않수?
[아비] (마지못해) 박서방은 잘 지내냐?
[큰딸] 잘 있지라 그럼. 아버지, 그만 시골로 내려갑시더. 고향 버리고 왜 여기까지 와서 제사 하노.
[아비] 몰라서 묻냐? 대를 이을 자식이 병신인데 무슨 면목으로 내 뼈 묻히겠다고 고향으로 찾아간다냐.
[어미] 의봉이 아빠. 차례 지낼 준비 다 됐어요.
[큰딸] 자정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아비] 요새는 조상님들 혼백도 낮 밤을 못 가리시겠더라. 안그렇겠냐? 며칠이 멀다하고 다리 끊어져 빠져 죽고 가스 폭발로 떼죽음 당하고 건물이 무너져 깔려 죽는 세상이니 혼백인들 정신없으시겠지.
[페이지] 008
((말순이 급하게 뛰어들어 오다가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고 의아해서 멈춰선다))
[어미] 언니들한테 전화는 다 걸었니?
[말순] 둘째 언니는 가게 비어서 못 오고 넷째 언니는 애가 아파서 못 오고 다섯째 언니는 공장에서 일이 바빠서 못 오고 여섯째는 지금 학원 끝나고 오겠다고 말했데요.
[큰딸] 의봉이는 어데 두고 혼자만 왔어?
[말순] 그 자식하고는 이제 말도 하지 않기로 했는걸.
[어미] (쥐어박으며) 네 동생은 네가 책임지기로 했지? 나갈 때 들어갈 때 손잡고 다니라고.
[말순] (발끈하며) 내가 그 새끼 보호자인가.
[큰딸] 그럼 보호자이지 않구.
[말순] 동생이 아니라 웬쑤야 웬쑤
[어미] (쫓아가며) 너 그런 말 다시 하면 내가 가만 안 있겠다고 했지?
[큰딸] 제 남동생이 원수라니 그럼 온 가족이 다 네 원수냐?
[말순] 언니는 보지 못했으니까 몰라. 학교 다니기 전에는 종일 방바닥에만 엎어져 있던 애가 다시 학교에 넣어 주니까 하는 짓마다 못된 짓 뿐이야. 귀신이 씌었나봐.
[어미] 이게 얼마나 맞아야 입을 다물 지(때린다) 이 싸가지 없는 년아! (쫓고 쫓기며 한바퀴 돈 후)
[말순] 엄마가 이런다고 내가 입다물 줄 알아요. 난쟁이 꼽추 병신 누나라는 소리 듣기 싫어서라두 멀리 가버릴꺼야. 셋째 언니처럼 다시 안돌아 올거라구.
[아비] (인형을 집어 던지며) 그만 두지 못해! 다 쓸데없다. 자식들 소용없어. 내 혼자 제사 모시겠다. 앞으로 제사지낼 때 아무도 얼씬거리지 마라.
[아비] 여보 위패함을 모셔 오도록 해.
((어미. 낡은 위패함을 내온다. 아비, 위패함에서 세 개의 짚 인형을 꺼내어 젯 상에 올려놓는다. 제문을 꺼내어 읽기 시작할 때 말순이가 의봉이 손을 이끌고 들어온다. 어미가 억지로 의봉이를 젯 상 앞으로 데려가서 꿇어 엎드리게 한다.))
[아비] 유세차 갑신삭 십이일 갑자 효손 상섭
감소고우현 조고 학생 부군
현조비유인 금천 이씨 세서천역
현조고 휘일무림 추워감시 불승영모 근이청작
서수 공신 전헌 상 향
((제문을 읽는 동안
[페이지] 009
넷째, 다섯째, 여섯째 딸 사이를 두고 하나씩 들어와 방 앞에 늘어선다.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셋째딸 들어와서 이들과 떨어져 제사를 지켜본다.))
[아비] 의봉아 이제 네 차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지 않았겠지? (의봉이 젯상 앞에 무릎 꿇고 앉는다)
[아비] 어디 대답해 보아라. 네 큰 조부님이 어떤 분이시냐?
[의봉] 큰 조부님이자 차자 국자께옵서는 학문과 덕이 銜으셨을 뿐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셔서 소싯적부터 인근 사방에 칭송이 자자 하셨으며---
[아비] (호령하며) 네 이놈. 그런 고명하신 증조부님의 후덕을 입고 태어난 녀석이 조상님께 부끄러움을 드리면 짐승이나 다름이 없으렸다.
((어미, 인형을 의봉이 등에 업히고 묶는다. 의봉의 제상 앞에 놓인 긴 가죽 채찍을 아비에게 공손이 바친 다음 죄인처럼 부복한다. 아비, 채찍을 의봉이 등에 내리친다. 채찍이 등에 업힌 인형에 떨어질 때마다 하나, 둘, 셋, 넷, 복명하 듯 큰소리로 센다. 여섯째 딸이 참을 수 없어 아비와 의봉이 사이에 뛰어든다. 모두들 경악))
[어미] 여섯째야 너 이게 무슨 버릇없는 짓이냐
[여섯째] 아버지 예전엔 제가 아무 것도 몰라서 아버지 하시는 일을 다 옳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저도 다 컸어요. 이건 야만인들이나 할 짓이에요.
[어미] 얘야, 네가 자랐으면 얼마나 자라고,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다고 나서는 거냐
[여섯째] 엄마도 아빠나 똑 같아. 평생 얘 낳은 죄 밖에 없으면서 폭군 같은 아버지 밑에 종이나 다름없이 사셨어요. 이게 다 뭐예요. 조상님께 지은 죄가 있으면 아빠나 엄마가 받아야지 왜 우리까지 당해야 해요?
[아비] (채찍을 높이 들고 내리칠 듯 부들부들 떤다) 너, 너 말 다했느냐? 아비 앞에 감히.
[여섯째] 차라리 제가 맞겠어요. 저를 치세요. 저는 벌써 하나님께 생명까지 바치기로 원한 몸이니까. 무서울 것 하나도 없어요.
[아비] 고얀 놈 내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 다시 부르지 말라고 했으렸다. (힘껏 채찍을 내리치자 의봉이 옆에 쓰러진다) 공부시키겠다고 고둥학교까지 보냈더니 신학대학을 들어가 목사가 되겠다고? 조상을 모르는 것들은 인간지말이다.
[여섯째] (고개를 들고) 조상님이 아니라 조상신이에요. 조상신은 우상이란 말이에요. (재상 위의 인형을 가리킨다) 여태까지 저 우상 앞에 종살이 해 온 거라구요.
((아비, 분을 이기지 못해 다시 채찍을 든다. 셋째 딸이 급히 앞으로 나온다.))
[셋째딸] 어머니, 저예요. 집 나갔던 불효자식이 돌아왔어요.
[어미] 셋째야, 내가 살아 있었구나. 이것아 네가 돌아왔구나 (서로 얼싸 안는다)
[페이지] 010
[아비] 너 무슨 낮짝으로 집에 돌아왔느냐. 제집 싫다고 뛰쳐나가서 6년 동안 편지 한 장 없던 년이 제삿날 나타났다고 해서 용서해 줄줄 알았느냐.
[셋째] (꿇어 앉은 채 일어나지 못하며) 나 하나쯤 죽고 없다고 생각해 주기를 바랐어요. 아버님, 어머님
[어미] (일으켜 앉히며) 잘 돌아왔다. 내 자식아. 딸 일곱 낳아서 다 키웠는데 너 하나 집밖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이 어미 속이 얼마나 아픈 줄 너도 자식 낳아 보아야지 알게다. 여보, 셋째를 용서하시구려.
((딸들 모두 셋째를 둘러싸고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른다.))
[큰딸] 셋째야, 어디 좀 보자. 죽지 않으면 만나려니 했지만 이렇게 살아서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다.
[넷째] 같은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 어쩌면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수- 도대체 뭘 하느라고 바빠서 지금 나타난거야.
[여섯째] 언닌 성공한거야? 그치!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지?
[셋째] 성공? 그래. 성공했으니까 돌아왔지. 우리 의봉이를 공부시켜서 큰사람 만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모든 걸 참았지. 의봉아 어디 좀 보자.
[의봉] (감격하며) 누나! (품에 안긴다)
[셋째] (인형을 풀어 품에 안으며) 인제 너하고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꺼다. 넌 우리 집에 기둥이야. 우리 집의 호프란 말이다. 딸들이 아무리 잘 되도 아들인 네가 성공해야 부모님이 기뻐하실테지. 안 그래요. 엄마?
[말순] 셋째 언니, 어떻게 성공했어? 성공한 이야기 좀 해줘.
[셋째] (밖을 향하여 손짓하자 두 명의 청년이 선물상자, 옷상자들을 잔뜩 들고 들어온다) 아버지 어머니께 드릴 선물이에요. 그리고 나머진 가족들 선물. 어서 열어 보세요.
((어미와 아비 빼놓고 모두 선물 상자 열어보기에 바쁘다. 터져 나오는 탄성과 감탄! 두 청년이 가족 한사람 한사람에게 광고지를 돌린다.))
[청년] (동시에) 서울에 오시면 꼭 들려주십시오. 정성을 다해서 모실 것을 약속 드립니다. 대왕 호텔 나이트클럽 밤의 여왕 이금희 쇼는 서울 환락가의 최대 규모이며 미국 라스베가스 쇼 무대에 전속 계약 예정인 최고의 연예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셋째의 밤무대 출연 선정으로 전라의 모습이 찍힌 광고사진을 펼친다. 모두 경악하는 가운데 아비의 모습만 조명 속에 남는다. 아비 조상신인 세 개의 인형 하나 하나를 제사 끝난 뒤 소지하듯이 불에 붙인다. 짚으로 만든 인형은 봉화가 오르듯이 순식간에 화염을 일으키고 사라진다. "끝장이다. 모든 게 끝났다" 아비의 절규와 함께 조명속에 옷 하나 하나를 벗고 있는 셋째))
[페이지] 011
[소리] 엄마 아빠 나 때문에 끝난 것 아니잖아요? 자식이 많으면 바람잘 날이 없다 하던데 자식 하나 하나에 생명을 나누어주시고 그 생명의 하나 하나를 지키시려고 무던히도 애쓰시던 어미. 그 생명의 불도 돈이 없으면 꺼져요. 아비는 그걸 몰랐지만 이 세상은 돈이 지배하는 걸 전 알았어요. 돈 없으면 죽어요. 저에게 이 아름다운 몸을 자본으로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려요. 이 몸을 보기 위해서 돈 뿌리며 몰려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아세요?
[장] 5장
제5장 대왕 호텔 디스코텍
((높은 플랫폼 위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셋째. Ring my bell, Ring my bell. 휘파람소리. 무대 앞에서 손님을 호객하고 있는 의봉, 불빛이 번쩍거리는 옷과 모자가 요란하다.))
[의봉] 자 오늘 밤 나이트쇼에 특별 초대 손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금희의 노래와 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들어와 보시라. 자 하늘에는 빛나는 별까지도 탐내는 별 중의 별. 땅위에는 천사로 변장한 이금희 쇼!
[깡패1,2] (몇 번 의봉이 앞을 왔다 갔다 하다가 버티고 선다) 너, 나좀 봐.
[의봉] 왜요 뭐 물어 보실 것 있어요?
[깡패1] 어쭈 너한테 물어 볼 것이 있느냐구? 물으면 똑똑히 대답할 수 있다 그거지?
[의봉] 글세 물어 보시래니까요.
[깡패1]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아는 땅 꼬마가 꽤 똑똑한 체 하는데
[깡패2] 너 언제부터 여기서 일하게 됐어?
[의봉] 사흘 전부터요. 왜요?
[깡패2] (쥐어박으며) 왜요? 몰라서 물어? 이 동네에서 일하려면 먼저 신고부터 해야지.
[깡패1] 형님들이 널 좀 만나자고 하신다.
[의봉] 왜요?
[깡패1] 왜요? 이런 어린놈 봤나. 저 하늘에 별들 보이냐.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너 떼놓고 모두 별들이야. 형님들을 잘 모셔라. 이거야. 알아들어?
[청년] (반대쪽에서 나타내며) 별 좋아하는 구나. 어디 보자. 별들이 어디 숨어 있어서 이렇게 어두운가 했더니 여기들 모두 모여 있어 환하군 그래.
[깡패1,2] (물러서며) 너 이런 식으로 우리 일에 초치려 들면 큰 형님이 가만 안 놔둘 거다. 어디 두고 보자. (사라진다)
[의봉] 자 오늘밤 이금희 쇼에 초청 받은 손님 여러분 행운의 천사표를 골라잡으십시오. 복권도 타고 쇼도 보고 자 행운의 천사표!
[청년] (의봉을 툭 치며) 천사표 하나 뽑아 보자!
[의봉] 형님에겐 거쳐 한 장 선사하죠. (사진이 든 입장권을 준다)
[청년] 이 여자가 천사표냐?
[페이지] 012
[의봉] 천사처럼 보이지 않으세요. 우리 누님이죠.
[청년] 넌 아무나 형님이고 아무나 누님이냐 여기서 일한 지 며칠 안됐다면서 아주 프로가 됐구나.
[의봉] 저 깡패들하고 이야기하는 것 다 들으셨군요? 전 아무에게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리고 이 천사처럼 생긴 여자는 틀림없이 내 누님이시구요. 아셨어요?
[청년] 야 너 참 보기보다 똑똑하구나.
[의봉] 형님도 보기보다 똑똑하시다면 벌써 깡패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 눈치채셨지요. 어서 피하세요. (더 큰소리로) Ring my bell, Ring my bell 쇼는 즐겁다. 자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이금희 쇼를 찾는 분에게 천사표를 드립니다.
(무대에서 춤추는 셋째 암전)
[장] 6장
제6장 제 5 장과 같은 무대. 낮
((의봉이 흥얼거리며 부츠며 하이힐 등을 내놓고 닦고 있다. 자동차 경적 소리. 뒤이어 청년 등장. 휘파람으로 의봉을 부른다.))
[의봉] (청년을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형님 오래간만입니다.
[청년] 부지런하구나. 쉬는 날 놀러 가지도 않고.
[의봉] 모두 누님거죠. 구두만도 오십 켤레가 넘어요.
[청년] 그 많은 것 모두 네가 때 빼고 광 내냐?
[의봉]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에요. 누님은 나보고 공부하라고 하지만
[청년] 야, 타
[의봉] 멋진 차네요.
[청년] 내차는 아니지만 다름없지. 타보고 싶니?
[의봉] 형님 차예요?
[청년] 이 좋은 날 남자가 여자 신발이나 닦고 있다니 불쌍하구나.
[의봉] 어딜 가시려구요?
[청년] 나도 오늘은 쉰다. 모처럼 야외로 씽씽 달려가 보는 거지. 탈꺼야 말꺼야?
[의봉] (잠시 주저하다 일거리를 밀어 놓고 청년 옆에 앉는다) 야 죽여주네요. 이거 정말 형님 차에요?
[청년] 부자집 아들 껀데 부서진 차를 두 달 걸려 정비해 주었더니 하루 동안 마음대로 쓰라고 빌려주었어.
[의봉] 형님 기술이 좋으시군요. 나도 정비 기술을 배우려고 준비중이거든요.
[청년]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 보지. 벌처럼 날라서 나비처럼 사뿐히 모셔 드릴테니---
[의봉] 정말! 운전도 그렇게 캡으로 잘해요!
[페이지] 013
[청년] 이 녀석. 사람 의심난 하고 살아왔나? (시동을 건다) 자 간다.
((신나는 음악소리. 운전하는 청년))
[청년] 자 봐라. 서울을 순식간에 빠져 나왔지. 여기부처가 통일로라는거다.
[의봉] 통일로!
[청년] 여기서부터 개성은 30분. 평양 한 시간, 신의주 다섯 시간, 압록강 넘어 중국 하얼빈까지 스무 시간! 길이 있는 곳은 어디로든 달린다. 달려라!
[의봉] 아니, 정말 휴전선을 넘는 거예요!
[청년] 간다면 가는 거야. 누가 말려.
((별안간 급정거하는 소리. 총격을 받으며 멈춘다.))
[의봉] 그것 보라니까. 막혀도 첩첩이 막혔네요. 저 중무장한 군인들하며. 탱크!
[청년] 여기가 임진각이라는 곳이지. 저기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의봉. 차에서 내려 신기하게 둘러본다.))
[의봉] 그런데 왜 이 길을 택했어요. 뻥 뚫린 경부선으로 달리지 않구.
[청년] 저 넘어가 우리 아버지 고향이란다. 아버진 고향까지 가는 길이 뚫리는 날을 달려 가는 것이 평생 소원이셨지.
[의봉] 옳아. 실향민이군요.
[청년] 제법이다. 그런 말을 다 알고 있구.
[의봉] 개비 덕분이죠.
[청년] 갑자기 무슨 이야기냐. 개미라니?
[의봉]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개미와 놀았거든요. 개미집에서 나온 개미새끼를 멀리 옮겨 놓으면, 집을 찾느라고 헤매는 거야. 실향민 아니겠어요.
[청년] 틀려. 이 녀석이! 사람은 개미가 아니야. 사람은 고향을 꼭 찾게 되어 있지. 죽은 다음에라도 가는 거야. 제 고향으로---
[의봉] 죽은 다음에야 고향을 가게 될 지. 못 갈지 누가 알아요?
[청년] 내가 알지, 내가, 내가 왜 널 여기까지 데려 왔는지 아니?
[의봉] 형님이 날 좋아하기 때문에---
[청년] 그래!
[의봉] 형님이 날 좋아하는 것은 누님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청년] 네 누나가 좋아서 널 공짜로 차 태워 준다고 생각했구나.
[의봉] 내 말이 틀려요.
[청년] 아주 틀린 답은 아니다. 자 타라. 다시 달리자.
[의봉] (타면서) 이번엔 어디죠?
[청년] 고향으로.
[페이지] 014
[의봉] (놀라며) 정말 북쪽으로 가는 거예요?
[청년] 네 고향으로---
[의봉] 내 고향!
[청년] 그래. (시동과 함께) 자 간다--- 꼭 붙잡아라.
[의봉] 히야. 빠르네. 정말 우리 고향으로 가요.
[청년] 그래 이 녀석아. 내가 널 왜 차에 태워 주었겠니? 널 처음 본 순간 생각했지. 사람들을 제 집 아닌 딴 집으로 끌어들이는 네 놈이 악마처럼 보였거든. 그래서 널 본래 있던 곳으로 데려다 주려고 했던 거지. 내가 널 고향으로 보내 주마.
[의봉] 싫어. 싫단 말야. 난 안가요. 여기서 내려 줘. 개미 구멍 같은 내 집으로는 다시는 안 돌아 갈거란 말야.
((암 전))
[장] 7장
제7장 어둠침침한 디스코텍
((셋째가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밖에서 의봉이 여전히 손님을 호객하고 있다. 이쪽 저쪽에서 깡패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깡패1] 여전하구나. 땅꼬마야. 대왕 디스코에 손님이 몰리는 게 너 때문이냐? 네 누나 때문이냐?
[두목] 이 녀석이야? 듣던 대로 쓸만하군. 저 여자가 네 누나 틀림없겠지?
[깡패1] 이 녀석을 데리고 무대 위에 올라가 보는 게 어떨까요? 오늘의 특별쇼 [이금희와 난쟁이]
[의봉] 안돼요. 누나가 홀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왕초] 옳아. 천사께서 제 동생이 악마라는 걸 알리기가 싫은 거겠지.
[깡패1] 그럼 직접 이리로 나와 보라고 하는 게 어떻겠어요.
[모두] (웃으며)그게 좋겠어. 그게 좋아.
[두목] (깡패1에게) 너 가서 그렇게 전해. 동생을 다시 보고 싶으면 은행에 가서 거금을 찾아다가 직접 나를 만나러 오라고 말이야.
((셋째의 슬픈 노래가 계속 되다가 암전))
[장] 8장
제8장 으슥한 지하 술집, 의봉이를 둘러 싼 깡패들
[두목] 겁낼 것 없어 꼬마야. 우리끼리 큰 돈 버는 사업을 꾸며 보자는 거야. 우리 시키는 대로 하면 돈방석에 앉게 해줄꺼다.
[페이지] 015
[의봉] (절망적으로)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누나는 내버려둬요. 누나는 돈이 없어도 몇 년동안 고생하면서 번 돈 불쌍한 부모님 위해 다 받쳤단 말이예요. 시키는 대로 뭐든 할테니 누님을 건드리지 말라구요.
[두목] 들어보니 눈물나는 사연이네. 너희 집은 모두 천사들만 모여 사는 모양이구나. 이것들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깡패1] 새벽 한 시가 넘어야 영업이 끝나는데 곧바로 온다고 했어요.
[두목] 알아듣도록 전했겠지? 혼자 오라고.
[깡패2] 틀림없이 이리로 오게 되어 있어요. 염려 마시고 사업 계획이나 추진하시죠.
[두목] 그래! 너희들 생각은 어때? 귀하신 몸을 빌려준다면 이 꼬마와 함께 전국을 돌며 쇼를 벌일 수 있지 않을까?
[모두] 그게 좋겠어! 그게 좋아.
[깡패2] [미녀와 야수] 어때요?
[깡패1] [천사와 악마] 가 어때요.
[모두] 그게 좋겠어! 그게 좋아.
[깡패3] (뛰어 들어 오며) 왔어요. 천사가 왔어요.
[두목] 혼자겠지?
[셋째] 혼자 오라고 해서 혼자 왔어요. 내 동생은 어디 있어요. (모두 길을 비켜준다. 달려가 반갑게 얼싸 않는다)
[셋째] 의봉아!
[의봉] 누님! 죄송해요. 놀라게 해 드려서.
[두목] 남매 상봉은 간단히 끝내고 사업부터 이야기합시다. 약속한 것은 어떻게 됐어? 돈은 가져 왔겠지?
[셋째] 돈 몇 푼 받자고 불쌍한 애를 데리고 와서 인질극을 벌여? 돈이 없기도 하지만 너희들에게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두목] 천사의 입에서 이런 거칠은 말이 나올 줄음 예상 밖인데--- 돈이 없으시다? 부모님 공양하랴. 병신 동생 거두랴. 그러니 우리가 분명히 천사를 모셔오긴 했는데, 가난한 천사로군!
[셋째] 우리를 집으로 보내 주는 게 어때요. 지금 돈이 없지만 만들어 보도록 할께요.
[두목] 역시 천사야. 돈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지. 자! 우리 사업 계획을 들어 보시겠소. 우리와 손잡고 일하면 지금보다 배로 수입을 보장해 드리지 어때?
[셋째] 지금은 그런 사업 계획 듣고 싶지 않아요. 우선 아이를 보내 달라고. 당신들은 내가 필요한 것이지. 이 애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요? 다시는 이 의봉이를 건들이지 말라고요.
[페이지] 016
[두목] 이 꼬마가 그렇게 귀하신 몸인 줄 몰랐는 걸. 함부로 다루어서 미안하군 (칼을 꺼낸다) 어디 이 꼬마 녀석의 흐르는 피가 천사의 혈통인지 악마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칼을 의봉의 목에 갖다 댄다. 의봉과 셋째 경악한다)
[셋째] 아서요 무슨 조건이든지 들어 줄테니 살려만 주세요. 내 동생 공부시키려 데리고 온 거지 당신들 밑에서 나쁜 일 배우게 할 생각 조금도 없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저 애를 건드리지 말라구요.
((청년이 지하실 입구에 등장))
[청년] 저 애를 건드리기 전에 너희들 몸값을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어?
[두목] 웬 놈이 여기 끼여들어? 뭐야 어서 온 놈이야.
[깡패1] 우리보다 먼저 꼬마 녀석을 빼돌리려 한 놈입니다.
[두목] 으음. 대왕 호텔에서 보낸 놈은 아니로구나. 그럼 누구냐. 널 보낸 놈이?
[청년] 너희들 같은 시시한 조직 폭력배가 아냐.
[두목] 그래 그럼 그 잘난 놈 솜씨 좀 보여자구 자 덤벼.
[청년] 덤벼라. 이 비겁한 똥파리들.
((몇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그 중 하나를 잽싸게 바닥에 메어치자 주춤하는 사이에 셋째와 의봉이 층계 쪽으로 피한다. 화난 두목이 쇠사슬을 꺼내 휘두르며 달려든다.))
[의봉] 형님 조심해요.
[두목] 얼마 받고 저 꼬마 녀석을 빼내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혼나서 해 먹을려고 하면 안되지. 자 이번엔 네 차례다.
((일제히 달려드는 칼과 몽둥이 앞에 쓰러지는 청년))
((암 전))
[장] 9장
제9장 교실, 책상 위에 화사한 꽃, 여선생이 들어와 책가방을 놓는다.
[여선생] 웬 꽃? 내 책상에 꽃이 다 놓이다니. 그리고 이건 편지, 의봉이가 학교로 돌아왔나?
((교실 밖에 나무 아래 의봉이 찾아와 선다.))
[의봉] (여선생이 편지를 읽는 동안 독백이 계속된다.) 선생님. 처음 저희 집으로 찾아와 주셨을 때 제게 말씀해 주셨지요. 지금에야 그 말씀 깨닫고 선생님 앞에 고개 숙입니다. 개미가 아무리 작아도 개미에게도 사랑이 있고 사는 방법이 있고 언어가 있다고-. 제 눈에는 개미는 개미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머리 떼고 다리 떼면 죽어 버리는 곤충에 불과했습니다. 나도 역시 그런 개미와 다름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지요. 아무도 나를 개미 이상으로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개미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개미가 되어 사람의 말로가 아니라 개미의 말로 전해야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저는 그게 불가능하게만 생각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게 알아듣기 쉬운 개미의 말로 개미
[페이지] 017
에게 말을 해준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셋째 누님 형님 모두가 개미의 말로 개미에게 사랑을 고백한 천사들이죠. 선생님. 지금부터 나도 천사의 말로 내사랑을 고백하기를 배우려 합니다. 선생님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