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아세안경쟁부문'의 신설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결정이라 판단됩니다. 방콕영화제가 다른 영화제와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일수도 있고, 동남아시아영화의 주도적 역할을 꾀하겠다는 전략으로도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싱가폴영화제와의 경쟁에서 이길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올해로 17회를 맞는 싱가폴영화제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지만, 적어도 동남아시아영화의 창구로서는 가장 좋은 영화제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아세안경쟁부문’에 초청된 작품들의 면면을 보아도 태국영화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동남아시아 작품이 별로 없었습니다. 방콕영화제가 이런 전략을 내놓은 것은 현재의 영화제 스탭들의 마인드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방콕영화제의 집행위원과 6명의 프로그래머(나머지 1명은 태국인) 모두가 미국인이며, 전 팜 스프링스영화제 스탭들이랍니다. 그들이 그러한 새로운 전략을 내놓은 것은 필연적이었으리라 생각되지만, 문제는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시스템을 아직 구축하지 못했다는데에 있는 ? 그렇다면, “도대체 그 많은 예산을 어디에다 다 쓰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시죠? 이것이 방콕영화제가 지향하는 세번째 특징과 관계가 있습니다. 방콕영화제는 게스트 중심의 영화제입니다(이런 방향이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겠지요). 이번에 방콕영화제에 참가한 해외 게스트들의 면면을 볼까요?
올리버 스톤, 발 킬머, 크리스토퍼 도일, 성룡, 손예진, 양자경 등입니다. 화려하죠? 그리고, 해외 언론의 초청에 있어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산이 저희 영화제의 두배 가까이 드는 것이지요. 영화제 초청작이 상영되는 극장에 가도 일반 관객보다는 게스트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해외 게스트들이 가장 생소해 하는 부분은 시상식입니다. 시상식에는 공주가 참가하는데요, 모든 수상자는 공주앞에서 무릎을 꿇거나(여성의 경우), 90도 가까이 몸을 숙여 인사를 한 다음 트로피를 받습니다. 크리스토퍼 도일이나 올리버 스톤 같은 거물급 인사들은?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들도 똑같이 그랬으니까요. 한편으로는 태국왕실의 권위나 태국인의 자긍심의 발로라는 ?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까 방콕영화제의 부정적인 부분만 언급하였네요. 꼭 그런 것은 아니고요. 나름대로의 장점도 많은 영화제입니다. 우선 방콕이라는 도시 자체가 매우 매력적이고요, 게스트들에게 매우 친절한 영화제입니다. 저는 끝끝내 게스트 패키지(카탈로그와 티셔츠 등이 포함된 가방)를 못받긴 했지만, 영화제 사람들은 대개 매우 친절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 태국영화 신작을 보고 태국영화인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나온 작품중에 제 마음에 쏙 드는 작품도 몇편 있었고(당연히 올 부산영화제에 초청될 예정입니다), 논지 니미부트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을 비롯한 많은 지인들을 만나 근황과 앞으로 나올 작품들에 관한 소식을 챙길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 참가의 또 다른 목적은 지난해 연말 암으로 작고한 여성 프로듀서 듀앙카몰 림차로엔의 집을 방문하여 참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논지나 펜엑 라타나루앙 등 태국의 뉴웨이브 감독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듀앙카몰은 매년 부산영화제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하는 단골이었습니다. 그녀가 암선고를 받은 것은 지난 해 초. 그녀는 투병중에도 펜엑의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과 논지의 신작 [베이통]을 완성시켰고, 또 한편의 완성을 목전에 둔 채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가장 애착을 보였던 미완의 그 작품은 바로 이정국감독의 [편지]를 태국판으로 리메이크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쓰리]를 통해 한국과의 합작을 경험하기도 하였던 그녀는 한국영화와 부산영화제를 특히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지난해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0월에 열린 부산영화제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그런 몸으로 부산에 오면 어떡하느냐”는 질타를 하면서도, 꼭 건강을 회복하기 바란다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두달 뒤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죠. 당시, 저는 일본 출장중이서 장례식에 참가하지도 못했었답니다. 그 가슴아픈 이야기로 마무리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도 수시로 건강을 체크하셔서 활기찬 한해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부산영화제에서 여러분들과 만나뵙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사진참조: 태국영화제 공식홈페이지, 굿데이신문
1997년에 개관한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은 건물 전체가 은빛 스테인리스로 건축한 초현대식 건물이다. 공업도시였던 빌바오는 이 건물하나로 스페인의 대표적인 예술의 도시, 관광의 명소로 탈바꿈했다.
2002년 가을, 이곳을 찾았을 때 1층 넓은 홀은 거대한 설치미술작품이, 3층의 3분의 2는 독일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빔 벤더스의 사진전이, 나머지 3분의 1의 전시공간은 인상파화가 중심의 소장미술품 전시가 열리고 있었고 2층 전시실은 수리 중이었다.
밖과 안의 식당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전시장안에는 소장품전시실에만 관람객이 있을 뿐 비교적 한산했다. 다른 미술관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도 현대미술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내부의 철근 구조물과 특히 비구상조각을 보는 듯한 건물의 외형에 매료되었다.
작년 여름 미국 LA에 들렸을 때 마무리공사가 한창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작년 말 이곳을 찾았다.
설계비만 5천만 달러, 건축비 2억7천4백만 달러를 투입해서 작년 10월 23일 개관한 이 음악당은 핀 떨어지는 소리가 전 좌석에 들릴 정도로 ‘음향시설이 너무나 완벽해서 좀 부담스럽다’는 음악가들의 평가다. 막상 안에 들어갔을 때 외형의 화려함과는 달리 콘서트 홀을 제외하고는 내부의 로비공간도 좁고, 특히 각층의 화장실이 협소했다. 비 효용공간이 너무 많았다.
캐나다 태생의 미국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두 작품을 보면서 ‘외화내빈(外華內貧)’ 을 생각한다. 겉과 속이 다를 때 누구든 실망과 좌절을 느끼기 마련. 이제 정치계절이 다가온다. 외화내빈, 과대포장, 속 빈 강정을 골라내는 일은 유권자의 몫이다. 그보다 새해를 맞으면서 나 자신은 외화내빈만을 추구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 자성해 본다.
(위 칼럼은 서울경제신문에도 기고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