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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선봉사(僊鳳寺)와 대각국사(大覺國師).
금오산(金烏山) 970고지 산정은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분지로서 농경지가 수천평이나 되고 물이 풍부하여 곳곳에 샘이 솟고 저수지와 습지가 있어 농사를 짓고 사는 산성마을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물이 산 중턱에서 높이 38m의 대혜폭포(또는鳴琴瀑泡)를 이루어 비단폭처럼 떨어진다. 산 주위에는 옹골찬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천연의 요새 금오산성(金烏山城)이 띠를 두르고 있는 등, 신령한 영산(靈山)의 기개가 확실히 서려 있는 산이다. 이런 산세 때문에 일찍이 고려시대에 와서 중국 오악(五嶽)의 하나 숭산(嵩山)과 비교되어 남숭산(南嵩山)이라 이름했다. 고려 의천(義天)이 남숭산 선봉사(僊鳳寺)에 온 그 때부터 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남숭산에 와서 마을을 이루어 천태신앙을 신봉했다고 한다. 그 증거로 지금도 숭산마을 농경지에서 고려시대 청자도자기편과 청동숟가락 등 유물들이 심심찮게 출토되어 이곳이 고려귀족마을이었음을 알려 준다. 선봉사(僊鳳寺)의 건립연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고려 제11대 문종(재위1046∼1083)의 4왕자 의천(義天) 대각국사(大覺國師;1055~1101)가 이곳 선봉사에 와서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선교일치(禪敎一致)로 통합하여 고려『속장경』을 정리하고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니 고려불교의 융성을 실현하였다. 그 제자들과 고려마을 귀족들과 함께 수행했던 천태도량 선봉사의 부지면적은 약 1만여 평(3만3,000㎡)에 달하는 대규모 절이었다고 전한다. 이 절터는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숭산마을 선봉사지(僊鳳寺址)이다. 서기1101년 대각국사가 남숭산 선봉사의 이름 없는 암자에서 입적하자, 서기1132년 고려 인종10년, 왕명으로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을 세웠다. 그 위치는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산1번지이다.
서기1238년 몽고의 병란으로 경주 분황사 구층탑이 소실 될 당시 고려불교 중흥지 금오산 일대 사찰과 숭산 고려귀족마을들이 파괴 소실되었고, 서기1592년 조선 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7년째 되던 해에 사명대사 유정(惟政:1544∼1610)의 승군이 ‘금오산성(金烏山城)’에서 왜군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이 때 선봉사와 숭산귀족마을은 몽고병란에 이어 다시 전소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선봉사와 숭산귀족마을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로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서기1922년 숭산마을 주민 유장열(劉章烈) 처사가 꿈속에서 화려한 관을 쓴 노인이 “국사비(國師碑)를 찾아라.” 라는 선몽을 받고 비를 찾아 나섰는데, 옛 선봉사지 위쪽 작은 암자 터 흙속에 묻쳐있는 석비(石碑) 모서리를 발견하고 흙을 파내니,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이라는 글씨가 나타났다. 처사는 그 옆에 ‘대각사(大覺寺)’라 이름한 절을 지어 지성으로 모셨다. 국가에서 그 비의 중요성을 알고 서기1963년1월21일 보물 제251호로 지정하고 지금의 비각을 건립했다. 그 후 서기1989년 성수 스님이 대각사를 인수하여 그 자리에 선봉사라는 옛 이름으로 개명했으나, 2010년 사찰명은 선봉선원(僊鳳禪院)으로 개명되어 재단법인선학원에 등록되어 있다.
(그림1) 지금의 선봉선원(僊鳳禪院)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
서기1101년 고려 숙종 6년 의천(義天)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입적한 후, 개성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와 금오산 숭산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 2곳에 석비가 세워졌다. 개성 <영통사대각국사비>는 서기1125년 개성 오관산(五冠山:靈通寺址)에 세워졌는데, 이 비는 의천이 처음 출가한 곳으로서 임금이 ‘국사(國師) 시호(諡號)’를 내리는 증시(贈諡)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였다. 반면에 금오산 숭산 <선봉사대각국사비>는 의천이 선봉사에 기거하며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을 통합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고 고려『속장경(續藏經)』을 편찬하여 고려불교를 융성시킨 평생의 공적을 찬양한 공적비로서 의천(義天)이 입적(入寂)한 선봉사의 작은 암자에 세워진 것이다. 개성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는 1125년 고려 인종3년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기록한 비문으로서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55호로서 황해도 개성 방직동 영통사지(靈通寺址)에 있었다. 의천은 불교경전인『속장경』을 출판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왕으로부터 대각국사(大覺國師) 시호 받은 기념비였다. 비문(碑文)에는 1086년부터 1,000여종에 달하는 4,769권의 많은 책을 출판하는데 기여한 의천의 경력을 기록하고 또 비를 세울 때의 공사관계자들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비는 사각판석에 앉은 거북의 등에 세웠는데 머리에는 우진각지붕형식이다. 이 비는 고려시기 출판기술과 건축술, 조각술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지금은 북한 고려박물관으로 이전되어 보존하고 있다.
(그림2) 개성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55호, 높이2.9m, 너비1.56m.
금오산 남숭산(南嵩山)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는 서기1963년 1월 보물 제251호로 지정되어 비각을 건축하고 본자리에 보관하고 있다. 이 비는 서기1132년 고려 인종10년 8월에 경상도 인동부(仁同府) 금오산(金烏山) 남숭산(南嵩山)에 세워졌다. 긴 장방형 대석 위에 거북돌 없이 그대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비신 상단에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이라는 양쪽에 봉황무늬을 새긴 제액(題額)이 중앙에 쓰여 있고, 비신 변두리에(周緣)에는 당초문양(唐草文帶)이 화려하게 음각되어 둘러져 있고, 당초문대를 얕게 새긴 개석(蓋石)이 얹어 있다. 비문(碑文)에는 대각국사가 문종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며, 법명은 석후(釋煦), 자는 의천(義天)이라는 것과, 송나라 유학에서의 구법활동을 한 것과 천태교(天台敎)를 확립하는 과정 및 교화하는 과정, 그 밖에 국사가 남긴 유교명(遺敎銘) 등이 실려 있다.
(그림3) (금오산)남숭산 선봉사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
(보물 제251호) 높이는 3.5m, 너비 1.2m, 두께 0.15m,
전문은 아래와 같다.
<남숭산선봉사해동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
(南嵩山僊鳳寺海東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
<서문(序文)>
[조산대부(朝散大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상서(尙書) 이부시랑(吏部侍郞) 지제고(知制誥)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은 신(臣) 임존(林存)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 천수사(天壽寺) 의학(義學)이며 월남사(月南寺) 주지 묘오(妙悟)와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신승(臣僧) 덕린(德麟)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과 더불어 전액(篆額)을 쓰다.]
<본문(本文)>
[인종(仁宗)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0년이 되는 1131년(인종9) 7일에 존(存)에게 명하여 해동 천태종 시조인 대각국사의 비명을 지으라고 하교(下敎)하였다. 이에 바로 표상(表狀)을 올려 이러한 중대한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사양하였으나, 어명(御命)을 어찌할 수 없어 감히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아뢰었다. “일찍이 듣건대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화장장엄(華藏莊嚴) 세계 가운데에 이미 드러낸 바이니, 제불(諸佛) 세계를 미래 겁(劫)이 다하도록 설명하여도 다 설(說)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오직 사바세계에 계시는 비로자나불이 곧 삼천 대천 세계에 두루 충만하시며, 비로법 중에 가장 친근함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일대사 인연으로 이 세상에 출현함이겠는가! 인도와 이곳은 멀지 않은 거리이니, 거대한 구름이 창공을 넓게 덮어 한줄기 비로 세상을 두루 젖게 하듯이, 같은 하늘 아래에 있으면서 어찌 고루 고루 덕을 입지 않는 곳이 있겠는가! 신라에 불법이 전래되면서부터 우리 태조께서 만세의 창업을 이룩함에 있어, 인도의 마후라 삼장법사(三藏法師)는 초청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찾아왔다. 이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장차 크게 왕성할 것임을 알고 더욱 원력(願力)에 의지하며, 완성된 정력(定力)과 신비한 공덕을 국사에게 전해주어 불교를 크게 떨치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역할로 삼았다고 믿어진다. 그리하여 중국 오대(五代)를 지나 송조(宋朝)에 이르기까지 가끔 명승(名僧)을 선발하여 바다를 건너 구법(求法)하게 하였으나, 기근이 심하여 겨우 일종(一宗)의 종지(宗旨)만을 얻어 그의 종도(宗徒)에게 전수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국사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왔으니, 오히려 문도학법(問道學法)하는 형식을 거쳐 선조의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이들을 전하였으니, 마치 우담바라(優曇鉢花; 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상상의 꽃)가 한 번 피어나는 것과 같구나! 국사는 문조(文祖)의 넷째 왕자이시니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휘(諱)는 석후(釋煦), 자(字)는 의천(義天)이다. 부모의 성스러움이 국사와 더불어 생전으로부터 전생의 인연을 심어 신묘하게 부, 모, 자의 인연이 하나로 합치 되였다. 국사는 태어 날 때부터 특이함이 있었고, 점차 장성하면서 예능을 행함이 마치 어른과 같았다. 11세 때 문종(文宗)의 오랜 뜻을 받들어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을 은사(恩師)로 삼아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그로부터 현수교관(賢首敎觀)인『화엄경(華嚴經)』을 수학하다가 경덕국사가 입적(入寂) 한 후에도 그 도제(徒弟)와 더불어 강의을 중지하지 않았다. 또한 국사는 여러 종파를 두루 통달하니 학자들이 함께 모여 상론(相論)함에 있어서, 도량(道量)이 탁월하고 비범하여 마치 깨달음을 얻은 노승(老僧)과 같이 여러 종파와 종론(宗論)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문종조는 우세(祐世)라는 호를 하사(下賜)하고 승통의 직(職)을 내렸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찾아오는 학인(學人)에게는 근황(近況)을 살펴 상황에 알맞은 설법을 해주었다. 성스러운 도량(度場)에서 사자후(獅子吼)로 많은 법문을 강설하여 인간 세상에서 천상에 이르기까지 한량없이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였다. 장차 자신이 얻고자 하는 법도(法道)는 이를 사람들에게 질문하여 상대 사람으로부터 얻으려 하였다. 일찍이 입송구법(入宋求法)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주청(奏請)하자, 문종(文宗)은 마음으로는 허락한 것 같으나 왕손(王孫)이라는 신분 때문에 공적으로 영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후 선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주청하였는데, 선종조에도 결정하기 어려워 이 문제를 군신회의에 회부하였으나, 이때에도 역시 대제(大弟)인 귀한 신분으로서 바다를 건너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숙종(肅宗)이 궁궐 밖 저택에 있을 때, 어느 날 국사와 함께 인예태후를 배알(拜謁)하고 이야기하던 중, 우연히 이 부분에 언급하여 이르기를, “천태삼관(天台三觀)은 최고의 참된 교법(敎法)이나, 나라에 이 종파가 아직 세워져 있지 아니함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므로, 신(臣)이 이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고, 숙종조(肅祖)도 또한 이를 지원해 주고자 하였다. 선종조 3년에 이르러 때가 다가온 줄 알고 다시 구법을 위한 출국을 요청하였는데, 이때에도 비록 군신회의에서는 거부당하였으나, 국왕과 어머니의 성스러운 마음은 국사(國師)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듯하였다. 국사는 마침내 송나라로 가는 선박에 오를 것을 결심하고 이를 결행하였다. 4월 8일에 드디어 바다를 건너 처음 밀주(密洲)의 경계에 도착하자, 송의 철종 황제(哲宗皇帝)가 이 소식을 듣고, 경사(京師)에 있는 계성원(啓聖院)에 맞아 머물게 하였다. 며칠 후 수공전(垂拱殿)에서 국사를 접견하게 되었는데 예우가 융숭(隆崇)하고 극진하였다. 이때 국사께서 고명한 대덕(大德)스님들을 두루 방문할 수 있도록 주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황제는 화엄법사(華嚴法師)인 유성(有誠)에게 명하여 별원(別院)에 머물게 하고, 국사가 가는 곳마다 수행하도록 하였다. 무릇 성인(聖人)은 자신의 굴욕을 꺼리지 아니하고, 항상 겸선(兼善)을 행하는 것이다. 공자(孔子)께서도 장홍(?弘), 사양(師襄), 노담(老聃), 담자(?子) 등을 스승으로 섬기고 배우지 않았던가! 국사는 밀주(密州)에서 부터 경사(京師)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법이라도 깨달았거나, 하나의 실천 수행이라도 하는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바로 찾아가서 적극적으로 자문하였다. 또한 진솔하게 청하여 제자(弟子)의 예로써 친견(親見)하고 새로운 종지(宗旨)를 문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따라서 현수(賢首)와 천태의 교판(敎判)의 상이(相異)한 부분과 양종(兩宗)의 깊은 이치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는 자세가 매우 진지했다. 그 후 상국사(相國寺)에 나아가 원소본원사(元炤本禪師)를 친견하였는데, 원소가 법상에 올라 설법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국사를 찬양하는 게송을 설(說)하였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만 리의 거친 파도를 타고, 육신(肉身)을 돌보지 않은 채 불법을 구하는 이런 훌륭한 재능을 본받았던가! 생각건대 인간 세상 에서는 참으로 드문 일이니, 마치 우담바라(優曇鉢花)가 불속에서 핀 것과 같구나!”라고 하였다. 또한 흥국사(興國寺)에 가서는 인도에서 온 삼장법사(三藏法師)인 천길상(天吉祥)을 만나 약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인도 불교의 현황을 자세히 문학(問學)하였다.
철종에게 표장(表章)을 올려서 항주(杭州)에 있는 정원법사(淨源法師)의 강하(講下)에서 수업하여, 이번 유학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주청하였다. 황제는 이를 받아 들여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을 보내 국사를 동반하게 하였다. 금산(金山)을 지나면서 불인료 원선사(佛印了元禪師)를 만나 뵈니, 이는 참으로 드물고 귀한 만남이어서, 마치 공자(孔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고 나서 ‘우리의 만남은 대화가 필요 없구나, 마주하면 바로 거기에 도(道)가 있도다’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이어서 곧 항주(杭州)에 도착하여 정원법사(淨源法師)를 참견(參見)하였다. 법사는 국사의 법기(法器)가 비상함을 보고, 늦게 만나게 된 것을 한탄하면서, “도를 전해 주는 것으로써 나의 중요한 역할로 삼는다.” 라고 하였다. 여항(餘杭)의 경치가 천하에 제일이므로 여러 종파의 노승(老僧)들이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은둔하여 연좌(宴坐)하고 있으나, 이들은 천하를 두루 살펴본 견문이 많은 대덕(大德)들 이었다. 국사는 왕족의 애착을 끊으며 권세를 잊고, 만리타국에서 불법을 구하니, 비록 도를 쌓고 덕을 간직한 채 입을 닫아 법을 전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히려 쌀통을 비우며 창고를 털어 시물(施物)을 가지고 줄지어 스님을 찾아오므로, 제종(諸宗)의 법의(法義)를 다분히 이렇게 얻게 되었도다. 다음 해인 1087년에 선종(宣宗)이 모후(母后)의 뜻을 송의 철종에게 전하여 국사를 환국(還國)하도록 명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하여 철종은 국사를 궐내로 불러 귀국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고별인사를 올하고, 귀국 길에 오르고자 하였다. 이때 천태종 승려인 자변대사(慈辯大師) 종간(從諫)이 부촉시(付囑詩) 한 수를 지어 수로(手爐) 및 여의(如意)등과 함께 증정하였다. 국사가 송나라에 가기 이전에 이미 자변대사의 고명(高名)을 들은 지 오래였다. 그리하여 이미 항주에 이르러서는 특히 자변(慈辯)에게 천태일종(天台一宗)의 경론을 강설해 주도록 청하였다. 항상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양걸(楊傑)과 그리고 여러 제자들이 함께 청강(聽講)하였으므로, 이에 부촉(付囑)하는 시(詩)도 지어 주었다. 수도에 이르니, 황제께서는 또 수공전(垂拱殿)에서 접견하면서 여기서 마지막으로 며칠 더 머물라고 하였다. 며칠 후 다시 궐내로 들어가 귀국 인사를 올리고, 다시 항주에 있는 정원법사를 찾아가니, 원하는 날에 화엄경의 대의를 강설해 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향로(香爐)와 불자(拂子)를 줌으로써 이를 부법(付法)하는 신표(信標)로 삼았다. 그 다음 천태산으로 가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부도(浮屠)에 참배하고 발원문을 지어 탑전(塔前)에서 서원(誓願)하여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대사께서 종합적으로 체계화한 오시(五時) 팔교(八敎)의 교판(敎判)에 대하여, 우리 해동(海東)에서는 대사의 성스러운 말씀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사옵니다. 본국에도 옛날 체관(諦觀) 스님이 있어서 천태교관을 전승하였으나, 종계(宗系)가 단절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제가 이제 분심을 발하여 몸을 잊은 채, 스승을 찾아 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미 자변대사(慈辯大師)의 강의를 받아 천태 교관을 배우게 되었사오니, 뒷날 본국에 돌아가 신명을 다하여 전양(傳揚)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명주(明州) 아육왕산(阿育王山) 광리사(廣利寺)에 가서 대각회련선사(大覺懷璉禪師)를 친견하였는데, 인종(仁宗)은 이 스님을 존중하여 복전(福田)으로 삼았다. 이에 국사는 회련선사에게 귀의하게 되었는데, 이때 국사가 회련선사에게 문법(問法)을 하자, 회련선사는 곧 법상(法床)에 올라 설법을 해 주었다. 그 내용은 국사가 본래 출국한 뜻과 합치되었다. 국사는 배를 타고 드디어 귀국길에 올랐다. 본국(고려)의 경계에 도달 하자마자, 곧바로 허락 없이 임의로 출국한 죄를 물어달라는 표상을 국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왕은 벌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포상(褒賞)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궁내에 영입하여 구법도상(求法途上)에 따른 고통과 어려움을 위로하였다. 국왕의 예와 태도가 융성하여 자못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도다. 국사께서 송나라에서 구법한 것은, 두루 선지식을 참방(參訪)하여 구법(求法)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보고 느낀 바를 마음 깊이 새겨 두었다. 그리고 국사가 구해 온 경서 중에 절반 이상은 아직 본국에 유통되지 않는 귀중한 경서(經書)들이었다. 구법 일행이 헤어질 무렵 주객 군신이 모든 선(禪), 강(講), 제공(諸公)들에게 이르기를, “옛 부터 바다를 건너 구법한 이가 많았다. 그러나 어찌 대사께서 한 차례 송에 가서 있는 것이 천태 현수(賢首)ㆍ남산(南山)ㆍ자은(慈恩)ㆍ조계(曹溪)ㆍ서천범학(西天梵學)등 제종(諸宗)을 일시에 전래함과 같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는 참으로 불법을 크게 떨치는 대보살의 실천적 행보(行步)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참된 의체(義諦)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울 뿐이다. 옛날 공자(孔子)께서도 위(衛)나라로 부터 노(魯)나라로 돌아온 후에 비로소 악정(樂正)과 아송(雅頌)에 각각 그 경지를 얻은 것과 같이, 국사가 송으로부터 귀국한 뒤에야 모든 종파의 교리가 각기 그 정법(正法)을 얻었다. 하물며 천태일종(天台一宗)은 비록 체관과 지종(智宗)의 승려에서부터 그 근원적 시원(始原)을 두기는 했으나, 이 땅에서 아직 그 종(宗)을 세우지 못하여 학통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태양과 같이 밝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 육바라밀(六波羅密) 등을 설(說)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여래는 다만 일불승법(一佛乘法)만으로써 중생을 위해 설하실 뿐, 여승(餘乘)인 이승(二乘)이나 또는 삼승법(三乘法) 등은 설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이승과 삼승을 회통(會通)한 원묘(圓妙)의 일법(一法)에 대한 참된 모습이 이미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에 갖추어 있고,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도 제일 의체(義諦)는 보처대사(補處大士)인 미륵보살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승받았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500여 년에 이르러 이단(異端)이 득세하자 용수보살이 『지도론(智度論)』을 지어 중도(中道)의 이치를 발명하였다. 그러므로 형계담연(荊谿湛然)이 이르기를, 하물며 삼관(三觀)이 따로 있겠는가! 본종의 영락일가(纓絡一家)의 교문(敎文)은 멀리로는 불경을 품수(稟受)함에, 법화(法華)로써 기본을 삼고 지론(智論)으로 계도를 삼았다. 용수보살로부터 형계(荊谿)에 이르기까지 천태의 9조(九祖)가 되었다. 그 교(敎)가 중국에서 크게 성행한지 이미 400여년이 되었건만, 이 땅에는 아직도 입종(立宗)조차도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무릇 여래께서 오랫동안 유지(遺旨)에 대하여 침묵하신 것은 장차 그 법을 감당할 만한 스님을 기다려 전법(傳法)하고자 함이니, 큰 임무를 맡을 만한 재질은 제종(諸宗)의 학문에 있어 고심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국사께서는 스스로 다짐하여 이를 자신의 역할로 생각하였다. 현수(賢首)와 천태(天台) 양종(兩宗)은 시절(時節) 인연이 도래하였으므로 구법하고 돌아와서 최초로 왕에게 올린 표상에 이르기를, “만리의 거친 파도를 타고, 여러 지역의 고승(高僧)들을 친견하여 두루 참된 교리를 심문(尋問)함은 오로지 부왕인 문종(文宗)의 성스러운 위력(威力)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천태종과 현수종지(賢首宗旨)까지도 깊이 연구하였사옵니다. 진수(晉水)와 고산(孤山)의 종지(宗旨)에 있어서는 외람되게 노불(爐拂)까지 전해 받았으니, 이는 기구(箕?)를 잘못 승사(承事)한 것이 아닌가하고 걱정이 되옵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도를 크게 떨칠 만 한 학승을 모집하였는데, 덕린(德麟), 익종(翼宗), 경란(景蘭), 연묘(連妙) 등이 각기 그의 도제(徒弟)를 거느리고 모여드니 모두 제자의 항렬(行列)에 속하였다. 태후께서 예전에 세웠던 큰 원력을 다시 발하여 가람(伽藍)을 창건하여 국청사(國淸寺)라 하고 불교를 크게 선양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원력이 이루지지 못한 채 1083년에 순종이 승하(昇遐)하고, 숙조(肅祖)가 왕위를 이어 불사 건축을 계속하였는데, 공사가 끝난 다음 국사를 초청하여 주지를 겸임하게 하였다. 국청사의 낙성법회에 국왕께서 친히 참석하시고, 천태종의 승려와 여러 종파의 고명한 스님 수천 명이 국사의 도풍(道風)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국사께서 법좌(法座)에 올라, 마치 부처님이 설법하듯 미증유(未曾有)의 설법으로 천태의 신묘한 법의(法義)를 강설하시니, 더없이 불법을 깨달은 스님의 능력은 중도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였던 것이다. 숙종이 다시 대원(大願)을 세워 천수사(天壽寺)를 창건하여 천태교관을 널리 창성하려 하였으나 낙성을 보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예종이 왕위를 이어받아 숙종의 대원을 완성하므로 영원히 삼한(三韓)을 비호하였으나, 아직도 사방에서 병란(兵亂)이 일어나 창생(蒼生)은 도탄에 빠져있다. 그러나 오직 이 나라 안에서만은 편안하여 아무런 근심이 없도다. 평화스럽게 닭 우는 소리 들리고, 개의 짖음이 사방에 들리는구나!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길쌈을 하면서 풍요를 잃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인력(人力)으로 이룸이겠는가! 이는 국사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이미 오래된 말세에 신명을 돌보지 않고, 멀리 해외에 가서 법보(法寶)를 전해 와 이 땅에 법륜(法輪)이 무궁하도록 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아울러 태후와 숙종, 그리고 인종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극한 정성을 발하여 오래도록 찬탄하며 지원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선대(先代)의 뜻을 계승하여 불사를 완성시켜 훌륭한 법문으로 하여금 늘 유지하게 하였으니, 이는 모든 부처의 가호(加護)이며, 하늘이 도운 바의 힘이 아니겠는가! 국사가 입적함에 책서(策書)를 보내 국사(國師)로 봉하고 시호(諡號)를 대각(大覺)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이 보다 앞서 이미 숙종이 ‘대각’이란 두 글자로써 국사의 호(號)를 삼으려 하였으나, 국사가 간곡히 사양하기를, “대각은 부처님의 덕칭(德稱)인데, 어찌 감히 외람되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 후 다시 담당기관으로 하여금 국사의 시호를 논의케 하였으나, 역시 ‘대각’이란 시호가 합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사실은 옛날 영공(靈公)이 죽어서 사구(沙丘)에 묻으려고 땅을 파던 중에 석곽(石槨)이 나타났는데,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영공이 이를 탈취하여 묻힐 것이다.’ 라 하였으니, 무릇 ‘영공이 다시 영공이 된 것은 이미 오래 되었다.’ 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로써 관조(觀照)해 보면, 국사가 이제 대각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이미 대각이 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또한 국사가 입송(入宋)하여 구법하는 도중 항주(杭州)에 있을 때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양걸(楊傑)이 말하기를, “어제 아침 잣죽을 먹고 있을 때, 정자사(淨慈寺)의 종본장로(宗本長老)가 오자 잣죽을 차려 드렸더니, 장로(長老)께서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내가 수년 전 용산사(龍山寺)에 투숙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한 그릇의 잣죽을 주거늘, ‘당신은 누구냐?’ 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동방 부동불국(不動佛國)에서 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오늘 이 잣죽도 그 때 꿈에 보았던 것과 꼭 같다.’ 라고 하였다. 이는 무릇 국사가 증득(證得)한 바의 탁월한 지관력(止觀力)은 모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사실로 이러한 증좌(證左)는 모두 국사의 신비한 법문과도 같구나! 대선사(大禪師)인 순선(順善)과 선사인 교웅(敎雄)과 유청(流淸)은 모두 국사의 법손(法孫)이다.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천태종은 이 땅에 유행하지 않던 것을 국사가 처음으로 제창하여 온힘을 다해 창립한 것이다. 저 달마대사가 진단(震旦)에 선종의 시조 격인데도 지금까지 한 개의 비석이 없으니!··· 만약 지금 비석을 세워 국사의 행적을 새겨두지 않으면 그 방임한 일로 후세에 우리들에게 돌아올 허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법손의 의견을 모아 국왕께 상주하자, 왕께서는 ‘국사의 덕을 존중하고 도를 흠모하여 유덕(遺德)의 깊은 뜻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국사의 비를 남숭산사(南嵩山寺)에 세우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법손으로 하여금 상속(相續)하여 주지(周知)해 그 유교(遺敎)를 전양(傳揚)하며 단절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국사의 위대한 업적을 간략하게 명(銘)하노니···
일체법이 공(空)한 것을 설(說)하려 하건 만은 분별심(分別心)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네.
모든 법은 공(空)했지만 그대로 현상일세 육경(六境)에 집착하나 본래가 가명(假名)일 뿐.
이 이치 어찌하여 다할 수 있겠는가! 현상계(現象界) 그대로가 본래는 없는 것을. 색(色)과 공(空) 그 자체는 한 몸에서 갈라진 것 이렇게 보는 것을 중도(中道)라 이름 하네. 법 따라 궁구(窮究)하여 본체(本體)를 발명(發明)하면 뚜렷한 원각(圓覺)자리 온 세상을 비추리라! 삼세(三世)에 두루 하신 일체의 부처님도 모두가 이 길 따라 정각(正覺)을 이루었네. 우리의 대각국사 서송(西宋)에 유학하여 천태의 삼지삼관(三止三觀) 교관을 전해왔네. 국왕이 명(命)하여 숭산(嵩山)에 터를 닦아 천태의 시조인 대각(大覺)의 비를 세운다. 남숭산(南嵩山)은 높이 높이 우뚝 솟았는데 비석도 산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하리! 문인(門人) 천수사(天壽寺)의 대지(大智)와 승려 덕천(德遷)은 비문을 새기다.]
<음기(陰記)>
[해동에 불교가 전래된 후, 약 300년 동안 모든 종파가 각기 서로 다투어 연창(演唱)하였으나, 천태종만은 중간에 단절되어 전하지 못 하였다. 비록 원효대사(元曉大使)가 전대(前代)에서 찬미(讚美)하였고, 체관스님이 뒤를 이어 전양(傳揚)하였으나, 지금까지 재흥(再興)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중흥의 시기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니, 마침내 우리의 시조 대각국사가 왕궁에서 탄생하여 지자대사(智者大師)의 탑전(塔前)에서 법등(法燈)을 전해 받고, 본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천태의 진종(眞宗)을 제창하셨다. 도덕은 외롭지 아니하여 문도로 넘쳐 나고, 구슬은 스스로 굴러들어 산을 이루었도다. 거돈사(居頓寺) 원공국사(圓空國師) 신측(神則)과 영암사(靈岩寺) 적연국사(寂然國師)의 고매한 달경(達境)과 지곡사(智谷寺) 진관선사(眞觀禪師)에게 수법(受法)한 5명(五名)의 권속(眷屬) 등 고명한 스님들이 왕의 명에 따라 함께 모였다. 그 밖에도 바로 대각국사의 문하에 투신한 수많은 학승 300여 명과 전 오문(五門)의 학도 1,000여 명도 함께 모였다. 1099년(숙종4)에 대각국사가 비로소 천태의 웅대하고 무한한 법의(法義)를 거양하면서, 우수한 학자 100명을 뽑아 봉은사(奉恩寺)에 머물게 하고, 천태종의 경론 120권으로써 시험을 보아 현량(賢良) 40여 명을 선발하였다. 이는 송 대 초기에 크게 행하였던 조계(曹溪)ㆍ화엄(華嚴)ㆍ유가(瑜伽)ㆍ궤범(軌範) 등과 같이, 이와 더불어 같았으니, 세상에서는 이를 일러 4대업(四大業)이라 하였다. 국사가 입적하신 후 앞의 5종문파(五宗門派)가 각기 차례로 본종(本宗)이었던 본사(本寺)로 되돌아갔지만, 오직 국사의 문하에는 보호해 주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1104(숙종9)년 6월에는 국사를 천태종 6법권(法眷)의 시조로 결정한다는 조칙(詔勅)이 내려졌다. 1086년(선종3) 5월에 국왕의 뜻에 따라 대각국사가 송나라에 가서 천태교를 전하여 왔다. 고려 초기에는 천태종의 대법(大法)이 유행하지 않았던 것을, 국사가 크게 일으키게 되니 시흥(始興)한 그 공덕이 지대(至大)하므로, 남숭산(南嵩山) 선봉사(僊鳳寺)에 해동의 천태시조인 대각국사의 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염려하는 것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천태종이 점차로 침체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1136년에는 국사의 입비(立碑)에 관하여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논의가 있은 후 바로 인종의 윤허(允許)가 내려졌다. 그리고 국사의 종계(宗系)가 계속 이어지고 국사의 빛나는 도덕이 실추하지 않도록, 그의 법자와 법손, 그리고 여러 직(職)의 명단을 음면(陰面)에 나열하여 후세인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게시하려 한다.
대각국사의 법자(法子): 대선사(大禪師) 덕린(德麟)
대각국사의 문생(門生): 선사(禪師) 순성(順成), 신웅(信雄),
삼중대사(三重大師) 이서(利?),
중대사(重大師) 신지(信之), 세청(世淸), 간영(幹英), 창연(暢連), 도능(道能), 형여(瑩如), 현준(賢俊), 관순(觀純), 지선(志宣), 도충(道沖), 학련(學連)
대각국사의 법자: 선사 익종(翼宗)
대각국사의 문생: 대선사 순선(順善), 교웅(敎雄),
선사 의관(懿觀), 석선(碩先), 유서(惟?),
삼중대사 당준(唐俊),
중대사 혜정(惠定), 신각(神覺), 원호(元浩), 각현(覺 玄)
대각국사의 법자: 선사 경란(景蘭)
대각국사의 문생: 선사 관호(觀皓),
중대사 혜평(惠平)
대각국사의 법자: 선사 연묘(連妙)
대각국사의 문생: 선사 유청(流淸), 양소(?素),
삼중대사 제승(齊承), 수겸(首謙),
중대사 관명(觀明), 계제(契濟), 서여(胥如), 영원(穎源), 홍윤(弘允), 존현(存玄), 영감(英鑒), 자성(資誠), 정륜(靖倫), 자진(資眞),
대사 안수(安樹), 지룡(智龍),
대선사 순선(順善)
대각국사의 문생: 삼중대사 자서(滋庶), 강진(講眞), 상령(尙玲), 각표(覺標), 각초(覺初), 자조(資照), 유고(惟古), 각관(覺觀), 영모(令模), 정웅(挺雄),
대사 승린(僧麟), 승원(承遠), 면조(沔照), 존기(存己),
대덕 탄순(誕純), 교간(敎干), 제기(齊己), 각진(覺眞),
대선사 교웅(敎雄)
대각국사의 문생: 중대사 경인(景仁), 중제(衆濟), 덕소(德素), 원백(元白),
대사 지성(知性), 해원(解圓), 숙명(淑明),
대덕 공변(工辯), 덕숭(德嵩), 덕성(德成), 사중(師中), 진탑(眞塔), 현묵(賢默),
선사 의관(懿觀)
대각국사의 문생: 중대사 지실(至實),
선사 현소(玄素), 남정(南挺), 담순(曇順), 석유(釋猷), 현석(玄碩), 상겸(尙謙), 처공(處恭), 준평(俊平), 형신(瑩神), 묘관(妙觀), 신조(神照),
대덕 관승(觀勝), 순고(純古), 관소(觀素), 선사 순성(順成)
대각국사의 문생: 삼중대사 수청(壽淸),
중대사 천언(天彦), 원승(元承), 국영(國英), 학현(學玄), 성진(性眞), 경충(景沖), 준기(俊機), 지충(智沖),
선사 유청(流淸)
대각국사의 문생: 중대사 녹만(綠萬), 도가(道可), 체진(諦眞),
대덕 승연(昇衍), 영택(靈澤), 당이(唐伊), 인지(仁智), 심지(心智),
선사 유서(惟?)
대각국사의 문생: 중대사 담린(曇麟),
대덕 원미(元美),
선사 신웅(信雄)
대각국사의 문생: 중대사 관승(冠承),
대사 제식(齊軾),
선사 회소(懷素)
대각국사의 문생: 대사 영엄(永嚴),
대덕 영존(永存),
삼중대사 이서(利?)
대각국사의 문생: 대덕 영간(領干),
삼중대사 석승(釋承)
대각국사의 문생: 대덕 선호(禪浩),
삼중대사 수청(壽淸)
대각국사의 문생: 대덕 신백(神白),
중대사 세청(世淸)
대각국사의 문생: 대덕 영순(領純)
사제(師弟)의 이름이 전후에 나열된 것이 꼭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먼 훗날 종파의 근본에 대한 문제에 동요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137년(인종15) 8월에 국왕의 뜻에 따라,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와 판관(判官)에 권농사(勸農使)를 겸한 문림랑(文林郞) 예빈주부(禮賓注薄)인 김표민(金表民), 천수사(天壽寺) 주지 홍진(洪眞), 삼중대사 수청(壽淸), 천수사 의학(義學)인 묘관(妙觀)과 중대사인 상령(尙玲) 등의 감독 하에 이 비석을 세우다.]
(기록) 숭오(嵩烏)의 송은(松隱) 유수(劉秀).
(그림4) 금오산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보물 제251호)
봉황무늬를 둘러친 비신 중앙에 [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 부분.
(그림5) 금오산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 주변 화려한 당초문양.
<의천(義天) 대각국사(大覺國師)>
김부식이 쓴 <영통사대각국사비명>을 보면, “을미년(서기1055년)9월 궁중에서 태어났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1933년 편찬한 <인천부사(仁川府史)>에는 “고려 숙종의 어머니이신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의 내향(친정)을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겼으며...., 여기서 대각국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대각국사는 인주 경원(현 인천시 부천 관교리)에서 탄생했다.” 는 기록도 있다. 그 출생지에 대한 기록이 전자인 궁중이 타당하다고 본다.
의천(義天)이 11세 때,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느냐?" 고 물었을 때 출가를 자원하였다.
서기1065년5월14일에 개경 영통사(靈通寺)로 출가하여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서기1085년4월 초파일 밤, 화려한 연등축제의 개경밤거리를 남루한 옷차림을 한 세 사람이 빠져나와 정주 항구(지금의 경기 개풍)에 도착하자마자 송상(宋商) 임녕(林寧)의 배에 몸을 실었다. 그는 고려 문종(文宗;1019~1083)의 넷째 아들이며, 즉위 석달만에 세상을 떠난 순종(順宗;1046~1083)과 당시 임금 선종(宣宗;1049~1094)의 동생으로, 고려 불교계 최고위직 승통(僧統)을 맡고 있는 의천과 제자 두 사람이었다. 이 내용은 [고려사高麗史)]의 한 부분에 ‘왕의 동생 후(煦)가 몰래 송나라로 빠져나갔다.’라는 것으로서 알 수 있다. 이름은 후(煦), 법명은 석후(釋煦), 자는 의천(義天)이였으나 송 철종 조후(哲宗, 趙煦; 1077~1100)의 이름을 피하여 자(字)인 의천(義天)으로 법명을 삼았다. 의천일행은 서기1085년 5월 2일 송의 밀주(密州) 판교진(板橋鎭;오늘날 산둥성 자오저우)에 도착했다. 송 철종은 5월 21일 영접사를 보내 의천을 수도 변경(汴京)으로 맞아들였다. 비록 밀항하여 도착했지만 고려 선종의 동생이자 고려불교 승통인 의천은 송나라 입장에서 국빈이었던 것이다. 당시 판교진은 고려 상인과 사신을 위한 시설인 고려정관(高麗亭館)이 있을 정도로 고려와 송나라의 교류의 거점이었다.
의천은 계성원(啓聖院)에 머물며 화엄종의 저명한 승려 유성법사(有誠法師)와 각엄사(覺嚴寺)에서 교류했고,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 출신 길상삼장(吉祥三藏)과 만나 산스크리트 불경에 대한 이해를 더했다. 또한 항주(杭州) 혜인원(慧因院)에 오래 머물며 밀항 전부터 서신을 주고받던 정원(淨源)과도 깊이 교류했다. 이에 따라 혜인원은 이후 혜인고려사 또는 고려사로 불리게 되었다.
의천은 항주 상천축사(上天竺寺)의 종간(從諫), 용정사(龍井寺)의 원정(元淨)에게 천태학을 깊이 배웠다. 항주는 10세기 이래 중국 천태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특히 당(唐)대 현수국사(賢首國師; 643~712)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다르고 같은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현수국사(賢首國師)의 법호는 국일법사(國一法師)이고, 이름은 법장(法藏)이다.
(그림6) 의천 대각국사(大覺國師) 영정.
의천은 이밖에도 많은 중국 승려들과 교류했는데, 그가 만난 중국 승려들 대부분은 선종(禪宗)이 득세하는 당시 중국 불교계의 현실 속에서 교종(敎宗)의 침체를 우려하는 입장을 취한 인물들이었다.
서기1085년 11월 송나라에 온 고려 사절단이 아들 의천의 귀국을 바라는 어머니 인예태후의 간곡한 뜻을 전해왔다. 이듬해 서기1086년 4월 의천은 항주로 다시 가서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중심 국청사(國淸寺)가 있는 천태산을 방문하여 고려천태종 개창을 명심한 뒤, 수집한 불서 3천권을 가지고 5월 12일 귀국길에 올랐다.
의천은 허락 없이 떠난 죄를 청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으나 오히려 귀국의 큰 환영을 받았다. 이후 의천은 개경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앞으로 간행할 [교장]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펴냈다. 이 목록은 지금까지도 불서 목록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에 속한다.
이 때 금오산 개령 갈항사(葛項寺) 신라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당나라 현수국사(賢首國師)에게서 배워 행하던 문두루비밀지법(文豆婁秘密之法)도 구도하니, “스승님이 환향하여 돌무더기를 거느리고 불경을 논의하고 강연하였으니, 그곳이 지금의 갈항사(葛項寺)이다. 그 돌 80여 개를 지금도 강사(綱司)가 전하고 있는데, 매우 신령스럽고 신기한 점이 있다. 그 밖의 다른 사적들은 모두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비문은『대각국사실록(大覺國師實錄)』에 있는 것과 같다.” 라는 기록이 있다.
<대각국사실록(大覺國師實錄)>을 보아 대각국사 의천이 1086년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었으나, 천태교학을 정리하기 위하여 남숭산 선봉사에 와서 천태교학을 완성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 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다. 그는 요, 송, 왜 나라에서 불교서적 4,000 여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모았으며,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간행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편집하였다.
의천은 원래 화엄종계통의 승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태교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禪)-교(敎) 두 종단이 서로 심각하게 대립하였고,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다. 이런 근본이념을 천태사상(天台思想)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의천은 불교전적을 정비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서기1097년 고려 숙종2년 2월에 개성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같은 해 5월에 의천(義天)이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天台敎學)을 강론하니,. 이것이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開立)을 보게 된 것이며, 그 뒤 서기1099년에는 제1회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였고, 그 2년 후에는 나라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이로써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한 종파(宗派)가 된 것이다.
1101년 고려 숙종6년 10월 5일, 남숭산 선봉사로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正道)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如來)께서 국왕과 대신들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遺訓)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이47세, 법랍36세로 입적하였다. 입적하신 곳이 지금의 금오산 숭산 선봉사 대각국사비가 서 있는 암자이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권,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23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3권,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3권 등을 남겼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그림7) 의천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저술.
<의천(義天)의 고려장경(高麗藏經)>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의 상권에는 경(經)에 관한 저술 561부 2,586권, 중권에는 율(律)에 관한 저술 142부 467권, 하권에는 론(論)에 관한 저술 307부 1,687권이 각각 수록되었다. 이를 모두 합쳐 1,010부 4,740권이 된다. 교장도감(敎藏都監)에서는 이 목록에 의하여 간행하였으며, 이를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이라고 한다. 고려속장경 인출본의 일부분은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남아있던 5종이 1925년 육당 최남선(崔南善)에 의해 발견되어 보물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고, 또 일부가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일본속장경에 편수되어 있으니 그 내용을 엿볼 수 있다. <고려속장경(續藏)>은 <고려정장경(正藏)>과 서로 짝을 이루는 용어로서, 고려정장경이 인도에서 찬술한 경-율-론 삼장의 번역본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일컫는 말이라면, 고려속장경은 고려를 비롯하여 송(중국), 왜(일본), 요(거란) 등 각 나라의 학승들이 찬술한 저술들을 일컫는 말이다.
고려속장경은 각 나라의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다양성, 사상적 독자성에 따라 불교가 수용되어 저마다 독특하게 만개한 것이므로 불교문화의 성숙과 변용의 측면에서 고려정장경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려정장경이 부처님의 설법을 주로 하여 성립된 것이기에 불상이나 불사리처럼 신앙의 대상으로, 즉 법보(法寶)로서 존경받고 숭배되는 반면, 고려속장경은 경-율-론의 가르침에 대한 문서로서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음으로 소홀히 취급되어 시간이 지나면서 찾는 사람이 없어 그냥 사라져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의천이 속장경을 찍어 냉 때 끼지 목판인쇄술을 활용했으나 목판의 갈라짐과 뒤틀림을 개선하기 위하여 고려는 국난타개의 밑음인 대장경을 간행하기 위해 금속활자(金屬活字)를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기1090년 고려 선종7년에 <고려속장경(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이 완성되었고, 서기1102년 고려 숙종7년(재위; 1095∼1105)에 금속활자가 만들어졌다고 전해 오지만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여 설득력이 약하다. 서기1232년 고려 고종19년에 고려속장경과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한줌의 재로 변함에 따라 무단정치 실권자 최충헌 아들 최우(? ~1249) 등이 강화도로 천도한 후, 서기 1234년 고려 고종21년(재위;1213 ~ 1259년)《고금상정예문(詳定古今禮文)》50권을 금속활자(鑄字)로 28부를 인쇄하여 관청들에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늘날까지 그 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기록상에《고금상정예문》은 세계 최초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서기 1377년 고려 우왕3년(재위;1374∼1388)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직지심경(直指心經)》은 실존하는 세계최고 금속활자 본이다.
(그림8) 고려정장경(高麗大藏經)은 의천의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과 짝이 됨.
[참고]
천수사(天壽寺)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전체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
고려 숙종 때 창건하였으나 당시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예종 때 크게 경영된 흔적이 보이는데, 『고려사』예종 원년(1106) 9월 10일조에 의하면, 평장사 윤관(尹瓘)에게 중창할 것을 명하였다.
원래 이 절 부근에는 약사원(藥師院)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대신들이 천수사의 절터가 불리하니 약사원을 헐고 그 자리에 천수사를 짓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예종은 1111년약사원의 자리에 천수사를 옮겨 짓도록 하였고, 1116년에 준공하여 숙종과 명의 왕후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이 절이 숙종의 원찰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예종·숙종·의종 등이 자주 행차하였으며, 1260년(원종 1)에는 고종 목주(木主)의 혼전(魂殿:임금이나 왕비의 국장 뒤에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전각)을 이 절에 옮겼다. 1276년(충렬왕 2)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이 절에 행차하였다. 특히, 이 절 주위의 풍치가 아름다워 사신을 맞이하거나 놀기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풍악을 울리면서 사신들을 맞이하고 전송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패망과 함께 이 절은 폐사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주춧돌만 남게 되었지만, 그곳이 교통의 요충지라는 중요성 때문에 그 일대를 천수원(天壽院)이라 하고 역원(驛院)을 만들었다. 1476년(성종 7)에 이예(李芮)가 이 절을 중창하고자 상소문을 올리기까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현재 천수원 부근에는 몇 군데 봉수가 남아 있다. 절터 서쪽에는 취적교(吹笛橋)라는 다리가 있는데, 김진사라는 사람이 피리를 잘 불어 달 밝은 밤에 뱀 모양의 두건을 쓰고 피리를 불다가 뱀으로 변하여 물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 동쪽에 있는 나복교(羅伏橋)는, 신라경순왕이 이 다리에서 왕건에게 투항하였는데, 그 때 신라 대신들 중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밖에 예종 때의 화가 이녕(李寧)이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를 그려 왕의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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