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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어쩌구 저쩌구~~
원하는 것은 무었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었이든 될 수가 있어!!
아! 아! 대한민국 어쩌구 저쩌구~~“
광복 70주년!! 광화문앞 광장이 온통 시끄러웠다. 전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고 또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 나의조국!!! 정말 가슴이 뜨겁다. 태어나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60여년 살아오면서 이런기분
느껴본적이 또있었다. 2002년 월드컵 그 환호성이 지금도 귓가에 맴돌지 않는가? 그리고 2000년 새천년을 맞는 재야의 종소리에
다들 환호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때 2000년이라 부르지 않고 새천년이라 불렀으며 인류의 발명품중 가장 문명의 이기인
콤퓨터가 어쩌면 되려 우리를 공격 또는 장해를 일으켜 낭패스럽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속에서 신년을 맞았으나 다행히
아무일없이 지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았던가? 때 마춰 우리검악산악회도 새천년의 감격에 동참하고자 그당시 타산악인들이
가기를 꺼려하던(성공확률이 현저히 낮아서 선뜻 나서는 산악회가 없었다) Tibet Himalaya의 MT.Shisha Pangma(8,027m)를
목표로 원정등반을 다녀와 성공의 짜릿함을 맛보았었다.
2000년 9월의 어느날, 시샤팡마 베이스캠프(해발5300M) 전대원이 모였다. 뒷줄 좌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Cannuri(쿡) 故박영석, 이진근, 박장순, 장윤학, 김재봉, Zimba Sherpa(세르파), 최정희, 장세규(본인),
金廣男(중국CMA소속 통역 및 연락관-조선족출신), 권순재, 계속해서앞으로 강성규, 故이윤혁, 故이현조,
故오희준, 박정우, Zangbu Sherpa(사다), Karshang(키친보이), Pingzoh(포터)
"찌찌직 ~~~" " 베이스캠프 베이스켐프~~" "찌찌찍~~~" " 베이스켐프 여기는 어택조(Attack) 아니 베이스켐프 안들리세요???"
"쏘리 미안하다 듣고 있다 말하라" "저희는 지금막 정상을 밟았습니다.더 이상 올라갈곳이 없습니다." "그래!!! 우와아아~~
수고 많았다 현재 티벳시간 1시 28분이다.정말 수고 많았다.빨리 촬영 끝내고 무사히 하산하기 바란다 이상!!" "정상에서 바라본
좌우 파노라마 정말 죽여줍니다.정말 너무너무 멋지고 날씨또한 좋습니다..""그래그건 그렇고 지금 2조가 Camp 2에서 Camp 3 로
올라가고 있는데 인수인계 잘하여 그들의 정상공격에 차질이 없도록 도와주고 안전하게 하산하기 바란다 이상”"예!!!조금도 걱정마십시요!!!
이상 교신끝.........." 순간 와~~ 하고 Base-camp에서는 그동안 나름대로 자재 또는 숨겨 놓았던 만세소리와 박수소리로 왁자지껄했으며
서로가 얼싸안고 가지고간 샴페인을 터트리는등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 연출되었다.
본인이 원정대장으로 참여한 “대한민국 새천년(2000) 시샤팡마 원정대(2000 KOREA KUMAK/DONGKUK MT.SHISHA PANGMA EXPEDITION)은
2000년 8월 29일 출국하여 Nepal, Katumandu에서 식량, 장비등을 점검 및 구입 재포장하여 국경도시 Kodari를 경유 우정공로(友情公路)로
중국 Tibet, Jangmu(檣木 2300M)로 입국, Nyalam(耳+双 拉梖 3750M- 현지어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이라함) 에서 휴식후 3일간
캬라반을 하여 해발 5300M지점에 Base-Camp를 설치하였다.
그동안 Nepal/Tibet 사이 길이 폭우로 인하여 3군데나 끊켜있어 갖은고생 끝에 도착하여보니 프랑스팀과 스페인팀이 먼저 진을치고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가 오르려는 “더그스코트(Durg Scott)”가 아닌 “쿠르디카(Kurdica)” 로 중앙봉을 노려 우리와 겹치지않았다.
한편 그당시 지구반대편 호주
우리도 거기에 부응하여 그기간중(9/15-10/1)에 등정을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계속되는 악천후가 그때마다 발목을 잡아 수차례의 시도끝에
10월 2일에야 1차로 박영석대장, 강성규, 오희준, Jangbu Sherpa 4인이 5일만에 등정에 성공한후 하산하였고 2차공격에 이진근, 권순재,
이현조 3인이 고군분투하여 4일 오후6시20분경에 정상을 밟았다. 그러나 이등반은 이상하게 첮단추를 잘못낀것처럼 걸림돌이 이어졌다.
ABC에서 부터 같이올라가면서 속을 썩이던 Zimba Sherpa가 C2에서 석연치않은 컨디션 이상을 호소하며 하차하여 그로인하여 세대원은
필요이상의 짐을 지고 올라 체력소모가 많았으며, 정상공격당일도 아이젠끈 수리 때문에 새벽일찍 출발이 늦어졌고 또 판상 눈사태 때문에
등정이 늦어졌음 – 이대목은 정말 피를 말리는 상황이어서 B.C.에서는 수시로 웃다 울다하였다. 또 당시 SBS TV 특집다큐멘타리 “아! 시샤팡마봉”에
방영되어 많은 시청자가 공감을 표시하였음
그들의 2차 등정에 관하여는 여기에 새롭게 언급하는것보다 본인이 당시 모 잡지에 개재하였던글을 여기 그대로 인용해보았다.
- 전략 -
MT.Shisha Pangma(시샤팡마봉 해발 8,027M 세계14위봉, 그러나 주봉인 남봉은 난이도가 높아 등정자가 많지않음) 해발 5300M인 Base-Camp,
고배율 만원경앞에 앉아 하염없이 마른침을 연거푸 삼키며 나는 한쪽을 응시하고있었다. 반공황상태에서.........
(MT.Shisha Pangma남벽은 거의 수직벽의 난코스라서 약 10KM 떨어진 B.C.에서도 망원경으로 등반이 관찰됨)
뜬 눈으로
보이는 세(3)점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손에 들린 무전기로 그들을 다시 숨가쁘게 불러보지만, 들리는건
“찌찌직...”하는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B.C.는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동사하였다고.....
-중략-
2차 공격조는 위에 언급한대로 갖은 고난끝에 오후 6시 20분경에야 겨우 정상에 올랐으며
즉시 하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탈진하였고
정상공격을하여 가급적 일찍 하산하여야하며 해가 일단 떨어지면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함) 하산시 대피하려던 Camp IV(벽이 경사가
급하여 텐트를 설치하지못하고 눈에 굴을파 설동을 구축하였는데 이때문에 어두운 상태에서는 찾기가 더어려웠음- 그안에는 침낭,
메트레스, 버너, 비상식량등이 준비되어있음)을 찾지못하고 그냥 벽에 메달린체 입은옷 그대로 비박(노숙)하였다. 그러나 등정시 흘린땀은
그대로 얼어붙어 그들의 체온을 빼앗아 갈것이며, 새벽부터 하루종일 운행한 체력과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는몸은 이미 내몸이 아닐 것이다.
(고산에서는 수분소모가 평지보다 약4배정도많아 충분한 섭취가 필요하며 만약 부족시 바로 고산병으로 연결됨) 거기다 해발 8000M에 가까운
고도는 산소부족(지상의 약 30%수준)과 매서운 바람이 부는 설벽에 매달린 체감온도는 족히 영하 -30C는 넘을 것이다.
그런데 하염없이 울고있는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한명만이
겨우 움직이지만 2명의 움직임은 관찰되지않았다. 또다시 B.C.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1명만 살아있고 2명은 동사하였다고(이때 나는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간사한지 절감했다. 잠시전까진 한명만이라도 살아있기를 그렇게 간절히 원했는데 이젠 2명의 사망이 더 안타깝게 느껴지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 해가 더 중천으로가고 주위의 온도가 올라가니까 꼼짝하지않던
B.C에서는 또다시 박수소리가 요란하였으며 갑자기 바빠졌다. 무전교신이 숨가쁘게 진행되었으며 각자의 컨디션과 부상 및 동상등을 확인하고
나름대로의 처방과 격려를 하였지만 나는 또다시 절망이 엄습했다. 아는바와같이 그곳에서는 외부의 어떤 도움도 받을수없으며 또 본인의 생명은
오직 본인만이 책임져야하는곳인데 탈진한 상태에서 동상까지 걸린 그들이 2000여M 수직설벽을 과연 안전하게 하강하여 B.C.로 귀환할수 있을지가...
-중략-
그렇지만 그들은 기적을 이루어내고
또 동상 때문에 걷지못하여 셀파등에
엎혀온 세명의 대원들을 부둥켜안고 나는 감격에 겨워 엉엉울었다. 그중 특히 이현조대원을 부둥켜안고 두번울었다. 우선 그가 살아돌아와줘서
너무 고맙고, 둘째 위험에처한(동상) 동료들과 같이 무사귀환해줘 더더욱 고마워서... (귀국후 동상걸린 2명은 발가락 일부를
절단하여야만했다)
-후략-
눈을 감았다 뜨면 아직도 그때가 어제와 같이 생생히 느껴지는데, 야속한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
강산이 한번하고도
반(15년)이나 바뀌어서 그당시는 꽤나 큰소리 치고 세상 무서운줄 모르던 풋풋한 장년에서 어느덧 돌잔치 훨씬넘기고 뒷방이나
차지하고 앉자서 그냥 손주재롱에 기뻐나하는 보잘것없는 초로의 늙은이로 변해버렸는데 젊어서 부러뜨린 발목이 수시로 속썩여
등산은 켜녕 골프도 자주가기 어렵다. 대원들 또한 각자의 삶을 영위하려 해외이주 또는 경향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한번모여
기념행사는 말할 것도 없이 술한잔 하는것도 쉽지가 않다. 거기에 더하여 그중 4명 故박영석(2011년), 오희준(2007년), 이현조(2007년),
이윤혁(2009년)은 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또 사랑한 산에서 영원히 밥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생존해 있었다면 하나같이 한국산악계를
한단계 Up-Grade 시킬수있는 준재들이었으며 특히 세계 최초산악그랜드슬렘(세계 8000M 14좌 그리고 7대륙 최고봉 또 지구3대극점-남극, 북극,
에베레스트 / 오로지 그만이 달성했고 아직까지 이기록은 깨어지지않고있다)의 박영석대장의 안나프르나봉 실종은 어쩌면 대한민국 산악계의 크나큰 손실이며
또 그들이 그렇게 속절없이 떠나기엔 너무나 아까운 나이들이라서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너무너무 가슴이 아프며 뭔가 응어리지고 죄지은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편,
“~~~~~저만큼 가버린 세월~~~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내청춘은 고장도 없네~~ ”가 쓸쓸히 다가온다.
“아득히 솟아오른 저산정에 구름도 못다오른 저 산정에
사랑하는정 미워하는정 속세에 묻어놓고 오르세
저산은 우리마음 산사람 높고 깊은 큰뜻을
저산은 우리고향 메아리 소리되어 울리네
사랑하는정 미워하는정 속세에 묻어놓고 오르세, 오르세...”
졸필 읽어주어 감사합니다.
2015년 10월 일
장 세 규 재배
아지트인 Nepal-Kathumandu 소재 게스트하우스 Villa Everest를 뒤로하고 드디어 8000M를 향하여~~~
(뒷줄 좌에서 세 번째가 본인)
Nepal과 중국(Tibet)의 국경인 우정교(友情橋)
중국 Tibet 서장족자치구(西藏族自治區) 시샤팡마(希夏放嗎)Shisha Pangma 입구를 알린다.
시샤팡마봉 MT. Shisha Pangma (8,027M) 중국 티베트에 위치한 고봉으로 세계에서 8000M이상 14좌중에서 가장 낮은봉이지만 주봉인 남봉은
경사가 심하며 특히 일기변화가 극심한산으로 알려져있다. 초등은 1964년 5월 중국팀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8000M이상봉중
가장늦게 등정되었다.
Tibet 고원 Nyalam 뒷산에서 만난 스웨덴의 유명 산악인 Mr. M. Ljungberg, 우리는 만나자마자 금방 친구가 되었다.
Nyalam에서 Base-Camp까지 우리의짐 3.5 Ton을 3일 동안 수송하여야할 Yak 약 40여마리와 몰이꾼 10여명을 선발하고 있다.
그런데 그짐의 양은 장롱등의 가구류, 냉장고등의 가전제품을 제외한 대한민국 중산층의 이삿짐보다 훨씬많다. 일례로 소주만 하여도 500병이상이 필요하다.
상행 캬라반 2일째, 마침 추석을 맞이하여 그래도 나름대로 고향방향으로 차례상을 차렸다. 단 제주(祭酒)는 Johnnie Walkar
조상님 죄송합니다.
상행 캬라반 3일째, 해발 5000M를 넘으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좌로부터 김재봉,장세규, 이진근)
뒤쪽은 France팀, 우측(빨간텐트)는 Spain팀, 우리나라의 국격이 여기서도 빛난다.
그들이 보기에는 필요 이상의 너무나 많은 원정대원들, 그리고 어마어마한 장비와식량, 또 이에 동원된 수많은 포터 또는 야크때,
대한민국의 국격은 히말라야에서 최고조로 발휘된다.
드디어 베이스캠프도착, 텐트 12동을 설치하였다(해발 5300m)
주방텐트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대원들(이현조, 오희준, 강성규대원)
상기 3명중 2명의 Chef가 나에게 밥을 해주기 싫어(?) 조용히 아무말없이 내곁을 떠나가 버렸다.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는지 묻고싶지만 만날수없어 지금껏 참고있다.
아니 영원히 물을수없다.
BC의 오희준대원,
엄홍길, 박영석을 이을 다음세대 영순위산악인었다. 8000M급 고봉 14좌중 10좌를 성공시킨후 에베레스트 남봉에서
Korean Direct Route를 개척중 2007년 5월 16일 해발 7900M(일명 제비집)부근에서 눈사태와 낙석으로 자일파트너 이현조대원과
그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들이 에베레스트로 떠나기 전날 저녁식사를 그들과 함께 했다. (아니 본인이 쐇다-13명전원) (나는 당시 안나프르나봉 등반을 마치고 하산하여
귀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Kathumandu에서 체류중이었음) 특히 그와의 마지막 대화를 나는 잊지못한다 또한 그와의 마지막 약속을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지키지 못하고 있다. “형님 저희들은 대충 5월말이면 끝낼 것 같은데 아시죠 산에서 가장 먹고싶은 것이무었
인지???.......” “알다마다 이젠 대한항공 직항편이 개설되었으니 아이스박스에 얼음듬뿍체워 보내줄테니 부디 몸조심하거라”
그러면서 미국지폐 몇장씩을 그들의 손위에 올려주었었다. 그러나 결국 그돈은 이승에서는 한푼도 써보지도 못하고 저승길 노잣돈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며 그들에게 생선회를 보내려던 나의 꿈은 유보되고 그비행기편으로 그들은 유골이 되어 돌아왔다.
BC의 강성규대원
8000M급 6개를 성공한후 간염의 재발로 인하여 레이스를 접었다. 우리는 그에게 말한다. “간염 때문에 잘살고있으니 관리잘하라고...”
이말에는 많은뜻을 함축하고 있다. 나또한 애시당초 초장에 왼발목이 90도로 확꺽여버려 어쩌면 가늘고 긴 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현재 대한산악연맹 제주도 한라산 산악구조대장으로 봉사하고있다.
(BC)Base-camp에서 (ABC)Attack Base-camp로 이동하고있는 대원들
독수리 앞날개지점에 겨우설치한 Camp-1 그위로는 텐트한동 조차도 설치할 공간이 없어서 설동(雪洞)을 파서 해결했슴
Camp-I에서 저높은곳을 향하여 계속 ~~~
박영석대장의 정상사진, 동영상만 있고 그냥사진은 딱 이한장뿐임
정상에서 중앙봉을 뒤로하고~~ 이진근 대원
정상의 권순재대원과 이현조대원!!
정상의 이진근 대원
하산길의 박영석대장, 철인인 그도 정상공격후에는 지쳐서 쉬고 있다.
애절하게도 그와 술한잔 하고싶지만 그는 2011년 11월이후 한번도 나를 만나주지않고있다.
언젠가 지금은 아파트및 빌딩숲이 되어있지만 우리가 잘가던 별내 ㅇㅇ탕(동물애호론자들이
제일싫어하는 단어)에서 내게 한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있다.
"역시 술은 형님과 마시는게 제일 행복합니다............."
정상공격이 끝나고 Attack Base-Camp를 철수하고 있다.
B.C에서의 망중한(忙中閑)
첫댓글 장사장~대단하네!체력이되네~
세규옵빠!
온갖 정 속세에 묻어 놓고
오르세,오르세.
검악산악회 하면 산악인들은 다안다고 하는데 그 유명한 산악회를 이끌고 온 장회장
대단합니다. 박영석 엄홍길등 내노라하는 산악인들도 우리 장회장하면 깍듯하게 예의를 표하는데
66회 동기들만 알아주질 않는다고 앙탈인데 우리 모두 장회장의 업적과 공로를 치하하고 찬양합시다
검악산악회 장회장 화이팅!!! 66회 장세규 회장 화이팅!!!
장회장이 띄어난 업적이 훌륭한 문장과 함께 되 살아났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회한에 젖어 있을텐데 이제 내려 놓아도 됩니다. 너무 큰일을 해 내셨으니까요. 길이 길이 빛나리라......
우리의 당당한 세규친구 멋지고 든든하군요... 평생을 산과 함께하시는 모습 멋지십니다.
벌써 세월의 무상함을 논할 처지가 되었지만 그대는 그래도 우리나라 산악회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으니 인생무상은 아니외다. 그동안의 궤적을 한권의 산문집으로
구성하면 훌륭한 작품이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