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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바람에 쓰다 Written on the Wind>(1956) / 감독: 더글라스 서크
더글러스 서크의 <바람에 쓰다>가 '영화 100년, 영화 100편'에
선정되었다는 것은 좀 뜻밖의 사실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미국 영화사를 뒤적여 보아도 서크의 존재는 미미하다.
실제로 더글러스 서크는 영화사에서 재발견된 사람이다. 60년대 후반부터 멜로드라마 장르에 관심을 가진 영국의 문화이론가들이 서크의 영화에 주목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열적으로 할리우드와 브레히트적 영화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던 파스빈더가 서크의 <하늘이 허용하는 모든 것>(1955년)을 전범으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만들고,
서크의 단편영화 <버번스트리트 블루스>(1978년)에 배우로 출연하자 사람들은 그의 영화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대안적 영화를 생각하고 만들고자 하는 영화이론가들과 필름메이커들의 텍스트가 되었고 영화사의 중요한 한
장이 그에게 헌정된다.
덴마크에서 태어나 독일로 건너가 좌파 지식인으로 연극·영화
연출가가 된 더글러스 서크는 파시즘의 등극과 함께 할리우드로
망명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그에게 싸구려 스릴러나 멜로드라마 시나리오를 던져주며 돈은 많이 못 주지만 잘해보자고 당부했고, 그래서 만든 작품이 <히틀러의 미치광이>(1943년), <수수께끼 잠수함>(1950년) 등과 같은 저예산 장르영화들이었다. 브레히트의 할리우드에 관한 시 "아침마다 밥벌이하러 거짓을 사주는
시장으로 가지/희망에 부풀어 올라 나는 장사꾼들 틈에 끼지"는
서크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편의
시나리오를 팔고 할리우드를 따나야 했던 브레히트와는 달리 서크는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생존했고, 장르영화의 컨벤션을 전복하여 아이젠하워 시대의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능력있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1956년에 만든 <바람에 쓰다> 역시 시나리오 상으로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다. 석유재벌인 해들리가의 장손인 방탕한 카일(로버트 스택)은 여비서 루시(로렌 바콜)와 충동적으로 결혼한다. 친구 미치(록 허드슨)와 아버지는 이들의 결혼을 축복하지만 동생
메리리는 루시를 증오한다. 결국 메리리는 루시와 미치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오빠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카일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며 아내를 구타한다. 점차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 카일은 미치와 결투 끝에 권총사고로
죽게 되고, 영화는 미치와 루시가 새로운 삶을 찾아 집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재벌의 아들과 그의 가난한 친구 그리고 여비서의 삼각관계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주모티브인 이 영화를 의미있는 텍스트로 전환시킨 것은 전적으로 서크의 몫이었다. 사람들이 멜로드라마에서 기대하는 것이 감정의 분출이라는 점을 서크는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극적 주인공을 설정하고, 바로 그 주인공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 자아성취라는 강력한 미국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드러낸다.
50년대 미국사회의 비극은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을 채우지 못해 모순덩어리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는 것이
서크가 멜로드라마 장르를 우회해 건넨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는 신경질적인 노란색을 부각시켰으며, 로버트 스택에게는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은 발성법을 훈련시켜 관객들에게 청각적으로 고통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서크는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관객을 만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가 10여년 남짓 기다려야 했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어두운 노래를 불렀던 그의 영화들은 이제 그 어두운 시대의
지혜로운 기념비로 영화사에 서 있다.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
#36. <추적자 The Searchers>(1956) / 감독: 존 포드
가장 미국적인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아마도 존 포드가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그는 미국영화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고
미국인의 이상과 정서를 가장 잘 그린 감독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이민, 카톨릭, 공화주의, 개척사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관객들은 '존 포드'하면 서부극을 먼저 떠올린다. 사실 그가 만든 1백12편의 작품 가운데 서부극은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반적으로 존 포드의 작품은 서부극만이 기억된다.
그의 서부극은 무엇보다도 미국적 신화와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추적자>는 그 정점에 서 있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낭만적 서부극의 마지막 고별 작품이기도 하다. 남북전쟁이 끝난 몇년 뒤 형의 집을 찾아온 이던 에드워즈는 얼마 뒤 형의 가족이 인디언에게 몰살당하고 막내 조카딸 데비가 추장 스카에게
납치되자 5년에 걸친 추적 끝에 그를 찾아 돌아온다. 존 포드의
서부극이 흔히 그렇듯이 이 작품의 낭만적 성격은 미국인의 가슴에 언제나 전설처럼 남아있는 '고독한 서부의 사나이'인 이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과거 행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그가
그토록 애타게 데비를 찾아다니는 동기를 제공한 형수 마타에 대한 애틋한 사랑, 그리고 데비를 귀환시킨 뒤 다시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의 이던은 서부극의 낭만적 인물유형의 전형인 셈이다.
이러한 고독한 인물유형은 서부의 개척과 더불어 역사 속에서 전설처럼 점차 사라져가며 존 포드는 그 특유의 롱 쇼트를 통해 이러한 전설을 서정적으로 담아낸다. 광야를 배경으로 끝없이 데비와 추장 스카를 찾아 헤매는 이던 일행의 롱 쇼트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구도지만 사라져가는 서부의 낭만적 시대에 대한 아쉬움과 추억을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낭만적 성격 이상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인종, 결혼, 혈족, 종족 등과 같은 인류학적 이슈는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있다.
데비는 프롬의 신화분석학의 관점에서 보면 영웅과 악한의 싸움을 유도하는 중개인의 역할을 하는데, 포드에 있어 선과 악의 구분은 명확하고 또 단순하다. 백인문명은 선이고 인디언문명은 악이라는 것이다. 이던이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인 마틴을 싫어한다거나, 어렵게 찾아낸 데비가 이미 코만치 여자로 성장한 것을 보고 죽이려 하는 데서도 그러한 시각은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마사나 큰 조카딸 토리의 시체는 보여주지 않는 반면 마틴을 따라다니는 인디언 여자 루크의 시체는 전혀 주저함 없이 드러내 보이는 사소한 연출기법도 이러한 존 포드의 문명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이 만들어진 1956년의 미국은 흑백갈등이 심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작품이 의도적이었건 아니건 간에 당시의 흑백갈등의 문제를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또다른 인종갈등의 문제로 대체하거나 무마하는 역할을 하였으리라는 짐작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추적자>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그 서정성과 잘 짜여진 내러티브 구조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화감독들에게 숭배받는 '감독들의 컬트영화'로 남아있다. <필자: 김지석/영화평론가·부산예술전문대 교수>
#37. <파테르 판챨리 Pather Panchali>(1956) / 감독: 쇼티아지트 레이
인도의 영화작가 쇼티아지트 레이는 50년대에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와 더불어 아시아 영화를 세계정상으로 끌어올린 동양의 거장이다. 레이는 비부티 바네르지의 베스트셀러 소설 <파테르 판챨리>를 영화로 옮겨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레이는 프랑스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작가 장 르누아르가
1949년 첫 색채영화 <강>을 인도에서 촬영할 때 그와 만났다. 훗날 레이는 비토리오 데 시카와 장 르누아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좋은 집안의 후손으로 선조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레이는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가끔 집에 드나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레이의 첫번째 작품인 <파테르 판챨리>는 1956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인간 다큐멘트상을 수상했다. 뒤이어 2부 <아파르지토(정복되지 않은 사람)>도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올라섰다. 1952년부터 제작이 시작된 <파테르 판챨리>는 나중에 제작자금이 딸려 인도 정부의 지원금을 얻어 서부 벵골영화개발공사에서 제작을 끝냈다.
아푸라는 소년의 성장과정을 그린 이 '아푸 3부작'(3부는 <아푸의 세계>)의 1부인 <파테르 판챨리>는 벵골 지방 농촌에서 아푸
소년이 부모와 누나 두르가, 그리고 친척 아주머니 인디르와 함께 살며 겪는 이야기다. 무능력한 성직자인 아버지는 일찍이 집을 떠났고 보통여자인 어머니는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웠다. 계절풍 몬순이 몰아치는 벵골 지방의 찢어지게 가난한 삶에서 즐거움이라면 인디르 아주머니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어느날 남매는 동구 밖에 나갔다가 검은 연기를 뿜고 달려가는
기차를 보고 풍요로운 도시에 대한 동경과 설렘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아푸는 숲에서 인디르 아주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어
누나 두르가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죽는 비운을 겪는다. 두 사건으로 아푸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집을 나갔던 아버지는 참담한 실패 끝에 돌아와 가족을 갠지스강가의 도시 바라나시로 데려가기로 한다. 세 식구는 소달구지에
실려 마을을 빠져나간다.
레이는 시도 썼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화가이며
시인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재능을 이어 받아 포스터나 책표지,
만화그리기 등 미술에도 소질을 보였다. <파테르 판챨리>의 음악은 인도가 자랑하는 시타르 연주자 라비 샹카르가 담당했다. 한국에도 연주차 다녀간 샹카르와는 여러 작품에서 함께 작업했다.
영화는 인도 농촌의 빈곤, 그 속에서 자라나는 꿈많은 소년 아푸가 도시로 나와 결국은 소설가가 되어 겪는 장중한 인간 다큐멘트 3부작. 1부는 <자전거도둑>처럼 직업배우를 쓰지 않았다.
느린 템포의 음영짙은 흑백촬영과 음악 그리고 레이의 시적 상상력은 빈곤이 배경인 사실적인 이 작품에서 세계인들에게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느끼게 했다.
<파테르 판챨리>는 '길의 노래'라는 뜻의 인도말이다. 또한 이제까지 사티아지트 레이로 알려진 그의 이름의 정확한 벵골 발음은 쇼티아지트 레이이다. <필자: 안병섭/영화평론가·단국대 교수>
#38. <제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1957) / 감독: 잉마르
베리만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이 만들어진 것은 1957년의 일이었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쇠퇴기를 이미 지나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한무리의 청년 비평가들이 누벨바그의 전조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영국에서는 프리시네마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도 더이상 신을 말하지 않았고 유럽인은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대중문화의 중심은 고통의 세대에서 전후세대로 옮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처럼 보였다. 그때 베리만은 전혀 뜻밖에도 신의 존재와 부재에 대해서
질문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7의 봉인>의 시대배경이 중세인 것 만큼이나 중세적인 질문으로 보였다.
<제7의 봉인>은 14세기 중엽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기사 안토니우스 블록의 귀향기이다. 그는 청년시절을 무의미한 전쟁에
흘려보내고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의 귀향길은 '삶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있다. 영화의 서막을 여는 바닷가 장면에서 체스판을 뒤로 한 채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블록의 표정은 이미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사신이 찾아온다. 그는 체스게임을 제안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삶의 마지막 의미를 찾기 위한 시간을 유예받기
위해서이다. 마을은 페스트와 함께 마녀사냥의 집단적 광기가 휩쓸고 있다. 도처에 삶의 공포가 만연해있으나 신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에게 있어 유예받은 삶의 마지막 목표는 신을 감각하는 것이다. 그는 고해성사에서, 감각으로 신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신은 왜 불완전한 약속 뒤로 숨어버렸는지를 격하게 묻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신은 침묵을 지킨다'는 것일 뿐이다. 마을에서 벌인 두번째 체스판에서도 그는 이긴다. 그러나 그가 절망 속에서 찾는 신은 끝내 현전하지 않는다. 집으로 향하기 전 한무리의 마을 사람들과 숲을 지나면서 그는 다시 사신과 마지막 체스게임을 벌이나 그것은 그가 유예된
시간을 반납할 결심을 굳힌 후의 일이었다. 신은 아예 부재하든가 아니면 부재와 다름없는 침묵에 빠져있는 것이다.
잉마르 베리만이 이 절망적인 귀향기에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를
따서 '제7의 봉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아다시피 그것은 종말을 상징하는 7개의 봉인 중 마지막 봉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중세를 빌어 현재의 인류가 '제7의
봉인' 앞에 서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극단의 비관주의를 표출했거나 감히 다룰 수 없는 주제를 건드린 셈일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인간은 그 봉인을 그대로
덮어둘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가지지 못한 것으로 그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제7의 봉인>은 교리문답에
관한 것도 신학논쟁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결국 베리만이 강조점을 찍은 것은 사람들 사이의 단절이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참을 수 없는 공포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고 신을 부정하며 신을
침묵하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블록이 체스말을
쓰러뜨리며 광대 요프 일가를 구하는 영화의 마지막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 장면은 베리만의 예술가로서의 자기존재와 인간에
대해 마지막 믿음의 끈을 잡으려는 몸부림에 가까운 절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7의 봉인>은 중세적 주제가 아니라
현대의 삶의 공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 이정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