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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청초 대학살의 기록들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등의 사서에는 청군의 만행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 나는 청조의 관방자료 내지 제 삼자의 서술을 토대로 이러한 만행들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서술했다.
1.청조의 관방학살기록자료
우선, 청조는 자신이 행한 학살에 대한 예고격인 자료를 발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청세조실록] 17권 순치2년 6월 병인중의 기록이다.
“ 이 포고령을 공표한 이후, 북경성 내외와 직속 각성에서의 모든 백성은 10일 안에 변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를 위반할 시,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自今布告之后,京城内外,直隶各省,限旬曰尽行剃完。若规避惜发,巧词争辩,决不轻贷”。并宣称:)
이와 동시에,
“변발령을 지켜서 투항하는 지역은 기존의 지위와 부를 보존하게 될 것이다. 만일 반항하는 지역은 대군을 출동시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살륙할 것이다.”
“所过州县地方,有能削发投顺,开城纳款,即与爵禄,世守富贵。如有抗拒不遵,大兵一到,玉石俱焚,尽行屠戮。
청조는 1649년 사천성에서 또 다른 포고령을 발하였고, 그 어감은 앞서와 유사하다.
“일반 백성과 반란군이 혼재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성주민을 죽이거나, 혹은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남겼다.”(民贼相混,玉石难分。或屠全城,或屠男而留女)
청조의 다른 관방자료인 [동화록] 5권 순치원년조에는
“본조의 명령인 변발과 만주복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용서없이 죽인다.” (不随本朝制度剃发易衣冠者,杀无赦)
진강지부의 포고에 의하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변발을 하지 않으면 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만일 한 가족이 변발하지 않으면 부락 전체를 몰살시킨다.”
(一人不剃发全家斩,一家不剃全村斩)고 하면서, 반항자의 머리를 잘라, 전체 백성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순치 2년(홍광원년 1645년), 강년순무 토국옥은 “변발하고, 복장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왕조의 제일 중요한 정책이고, 모든 지역에 걸쳐서 실시되어야 한다. 만일 귀족, 군인,일반 백성 등이 자신의 머리를 보존하고자 하면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것이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머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남산은 옮길 수 있으나, 이 명령은 바뀔 수 없다.”
(剃发、改装是新朝第一严令,通行天下,法在必行者,不论绅士军民人等,留头不留发,留发不留头!南山可移,此令不可动!)
이상의 청조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전성을 도륙한다.’,’도륙을 실시한다.’,’죽이되 용서하지 않는다’,’전가족을 몰살시킨다’(“屠全城”、“尽行屠戮”、“杀无赦”、“全家斩”、“全村斩”) 등의 흉악한 위협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하의 글에서 청조의 위협이 결코 입으로만 끝난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한족 대규모 학살|작성자 모피어스 ----------------------------------------------------------------------------------------------------------------------- 객관적 피해규모는 과연 어떻게 추산될까요 요새는... ? 맨 마지막 줄 인구통계로 추산하는건 오류가 있다고 판단 됩니다..
2.청군 입관 전의 대학살
우선, 청군 입관 전, 요동지역 한족을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의 기록이 초기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천명9년 정월 , 누르하치는 9차 명령을 내려서, 소위 ‘무곡지인’이라 하여 곡식의 수확량이 5금두를 넘지 못하는 가난한 한족 인구를 적으로 삼아 사로 잡아서 관내로 돌려 보내게 하였다. 최후로 정월 27일 명령을 내려, 각지에서 조사된 이 한족인구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했다. 즉, 공개적인 종족학살이었다.
천명10년 10월 3일, 누르하치는 한족을 비판하여 ‘간첩을 숨기고,굴욕을 겪는 데 익숙하며, 반란이 끓이지 않는다’며 팔기의 각 패륵과 총병관으로 하여금 병사를 대동하여, 촌락에 한족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곧장 사살하도록 했다.
제삼자인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3년 5월조에 요동인구의 참상에 대해 이렇게 써있다.
“비록 청이 요양을 획득했지만, 이 지역 주민중 이들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이 변경을 넘어 왔다. 적이 크게 이르자 주민 중에는 변발을 원하지 않는 의로운 자는 거의 압록강에 투신하여 죽었다”(时奴贼既得辽阳,辽东八站军民不乐从胡者,多至江边…… 其后,贼大至,义民不肯剃头者,皆投鸭水(鸭绿江)以死)
3. 청조 입관 이후의 대학살
1) 청조관방자료 및 제삼자의 자료
청조는 입관 이후, 자신들의 대학살을 적나라하게 인정하였다. 이것은 순치 7년 2월 청의대산서총독 동양량이 이르길,
“대동, 삭주, 훈원 삼성에서 이미 대학살로 인해 백성이 존재하지 않음”
청조의 자료 <명청당안>에 의하면, 순치 7년 11월 21일 모든 성주민을 도륙하여 겨우 5명의 범인만이 남아서 이들을 석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삭주지>에 따르면, “성을 도륙하여 마주치는 것은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대학살은 중립적인 제삼자의 자료가 있다. 이태리소속 예수회 수도사 마르티니(1614~1661)가 기록한 <달단전기>에 따르면, “대학살은 11월 24일부터 시작하여 12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일률적으로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들은 다른 말은 결코 하지 않고, 단지 ‘죽여라, 이 반란자들을 모두 죽여라’고만 외쳤다.”(두문개:<청대서인견문록>53페이지, 중국인민대학출판사, 1885년 6월판)
네덜란드의 사신 요한 니어호프는 <중국달단대한황제조정에 대한 동인도회사 파견원의 보고>에서 “달단의 전군은 입성직후, 모든 성내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모든 병사는 파괴를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부녀, 아동, 노인의 울음소리는 끓이지 않았다. 11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 각지의 거리에서 들리는 것은, ‘반란자들을 살해하라’는 소리였다. 도처에서 비명소리, 도살, 약탈이었고, 부자들은 목숨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저 무도한 학살자로부터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사도림 저, 이영칭 역 <남명사>131페이지, 상해고적출판사, 1992년 12월판)
“
2) 속세로부터 떨어져 있던 출가인이 기록한 대학살의 규모
<광주시종교지>에 따르면 청 순치7년(1650), 청군이 광주를 정벌 죽은 자가 70만명에 이르렀다. 교외의 오룡강에 진수화상이 사람을 고용하여 시체를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주의할 만한 것은 광주의 70만명 사망 기록은 당시 직접 시체를 수습한 스님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기록이고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이 숫자가 지금에 광주시 대불사 홈페이지에도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출가인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청조의 대학살을 경험한 후, 그는 “모든 현에 촌락이 없고, 촌락에는 집이 없고, 집에는 사람이 없다.사람은 모두 사라졌다.”고 적었다.
관방자료에 의하면,
북경지역“눈을 들어 보면, 논과 밭이 황량하다”(위주원, 통진민고소, 황청조의, 권1),하남성 “온통 황량한 풍경이고, 사람은 극히 적다”(이인룡, 간황의관미력소, 황청조의, 권4), 호광지역”천리를 둘러 보니, 인적이 끓기었다.”(류여모, 간황흥둔소,황조경세문편권34)
청조 최고위 통치자의 대학살 참여 증거
순치2년 11월 15일, 양주십일대학살의 실행자였던 예친왕 다석은 학살 중 미모가 빼어난 여인 103명을 획득하였다. 이들을 각각의 청조 최고위층에 헌납하였는 데,
순치제에게 10명, 섭정왕 도르곤에게 3명, 부정정친왕 치얼합랑에게 3명, 숙친왕 호격에게 2명, 영랑왕 아제격에게 1명을 바쳤다(<청초내국사원만문당안석편>중 197페이지).
3) 서로 다른 시기 인물들의 기록과 지방지의 기재
곤산대학살 : “모두 합해 성중 인물들 중 도살당한 사람이 10명 중 4명에 달하고, 침하에 떨어져 죽은 사람이 10명 중 2명, 도망친 자는 10명 중 하나이다.”<곤신양현속수합지>권 51,
“살륙이 끝나자, 성문으로 도망쳐서 물에 빠져 죽은 자, 부녀,어린이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곤산 정상에 중 료중이 부녀 천 명과 어린아이들을 숨겼으나, 수색하여 모두 죽이니, 피가 강처럼 흐르고, 폭포처럼 떨어졌다.”<연당견문잡기>
남창대학살 : “부녀는 각 팔기군으로 분배되어 졌고, 밤낮으로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칼에 맞아 죽는 자, 물에 빠져 죽은 자, 자살한 자, 10명 중 7,8명이 되었다.”(서세박<강변기략>)
광주대학살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 살아 남은 자가 드물었고, 도망친자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어재전<속명기사본말>)
남웅대학살 : “집집마다 제비집이 비워졌고, 시체는 산과 같이 되었다. 죽은 자는 머리가 잘려졌고, 산자는 포로가 되었다. 피는 땅을 덮어, 어미잃은 아이는 젖을 찾았다.”(청군문서 진잔규,<웅주점가가>)
가정대학살: “시민들 중, 목을 매달아 죽은 자, 우물에 빠져 죽은 자, 강에 빠져 죽은 자, 피범벅이 된 자, 사지가 잘린 자, 수족이 잘리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은 자, 뼈와 살이 찢겨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청병은 집 위를 달려서, 통행에 제지를 받지 않았다. 성내의 난민은 거리에 돌을 쌓아 막고자 했으나, 도망칠 수 없었다. 모두 강에 투신하여 죽었고, 강물은 시체로 넘쳐 제대로 흐르지 못했다. 대낮에 길에는 간간이 스스럼없이 행해졌고, 반항하는 자는 양손을 나무판에 못을 박아 강간했다. 청병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재물을 바치라 했고, 그 획득한 재물을 허리에 둘둘 감아, 만족하면 백성을 석방했다. 다른 병사를 만나면 또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 바치는 재물이 부족하면, 즉시 칼이 휘둘려지고, 재물이 다하면, 곧 죽음을 당한다.”([가정을유기사])
조주대학살: “병사들의 학살로 인해 시체가 십여만에 이르렀다.” 게양현 관음당 해덕화상 등이 시체를 수습해서 서호산에 화장해서, 유골을 서호남변에 묻었다. 복건성 동안현 학살 당한 자가 5만명에 달했다. 범천사 주지 석무의는 시체를 수습하여 절 동북쪽 1리밖에 묻었다. ‘무사정’이라는 정자를 지어서 ‘만가지 선이 함께 귀의한다’고 새겼다.
상숙대학살 : “길을 걸으면 다리 밑 하천을 말랐고, 퇴락한 집에 우물물도 말랐다. 곳곳에 시체만 쌓여 있으니, 오천여 구가 넘었다. 남녀 중 포로가 된자는 수를 세기도 어렵다. 연못 옆 나무에는 사람 목이 걸려 있는 데, 모두 마을 주민의 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양주대학살 : 이 일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명한 <양주십일기>이외, <양주성수기략>에도 이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고걸의 병사가 양주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호수주변으로 피난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 북쪽은 경계가 엄했으니, 성밖주민들은 모두 성안이 의지할 만하다 여겨, 성안으로 몰려 들어 갔다. 들어 가지 못한 자는 그 머리를 조아려 입성을 탄원하여, 애끓는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공은 마침내 문을 열어 그들을 받아 들였다. 성이 함락당하여, 예왕의 지휘하에 학살이 행해졌고, 7일이 지나서야 마침내 멎었다. 겨우 공의 시체를 수습했으나, 날씨가 더워서 시체가 변질되어 알아 보기 어려웠다.”([명계남략])
각지에서 변발에 반항하는 자는 분산하여 학살이 행해졌다. “가을이 되어 새 명령이 발포되어, 변발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해졌다. 명령 발표 후 마을에 변발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군대로 이끌려 와, 아침에 끌려온 자는 아침에 죽고, 저녁에 끌려온 자는 저녁에 죽었다.”(<진확집>권 30)
유명한 <강음성수기>에는
“모든 성내 주민의 살해가 끝나자 칼로 성문이 봉해 졌다. 성 내에는 어떠한 것도 남지 않았다. 절의 탑에 숨어 있던 승려 등 53명만이 남았다. 성을 지키기 81일, 성내에 죽은 사람은 9만 7천명, 성밖에서 죽은 사람은 7만 5천명에 이르렀다.”
4) 청군의 성폭행([양주십일]과 [강변기략] 중 항시 볼 수 있는 자료는 열거하지 않음)
순치 2년 7월 30일, 청군이 사진에 이르러 “보이는 자 마다 금은을 찾아 내어 노략질한 후 칼을 휘둘러 죽였다. 여인은 음행을 위하여 배로 보냈다.”,”주민을 마주쳐 끌고 가서, 숨긴 물건이 발견되면 배를 갈라 죽였다.”(<연당견문잡록>)
순치2년, 청군은 양주대학살을 행한 후, 무석에 이르러, “배안에는 모두 양주로부터 얻은 여인들이었다. 모두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하고, 화장을 했다.”(<명계남략>권4)
순치 원년(1644) 4월, 청병이 산서성 주질현에 이르렀을 때, 생원 손문광의 처 비씨가 사로잡혔다. 부인은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내가 금은을 마른 우물에 숨겼으니, 그것을 취하자” 청병이 기뻐하여, 우물주위로 데려가 물속을 살필 때, 부인은 몸을 던져 죽었다. 금도 부인도 잃은 청병이 화가 나 큰 돌을 던져 버리고 가버렸다.(민국 <주질현지>권6)
“청의 흥안총병은 부녀를 강탈하여 수가 100명에 이르렀고, 음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큰 침상을 만들어서 처첩 십여명을 함께 침상에서 차례로 탐했다. 다시 땅에 나무 말뚝을 박아, 첩들 하나 하나씩 음문을 그 뾰족한 말뚝에 박는 놀음을 한후, 시체는 강에 버렸다.”(<평관지> 권12)
청군이 강음에서 대학살을 한 후, 청에 반항한 부녀는 강간한 후 죽였다. 지방지에 의하면 그 수는 101명에 이른다.(도광 <강음현지>권 20 <열녀>)
5) 청이 노획한 한족 노예
숭정 11년 동지에서 12년 봄까지 청군이 기부에서 산동에서 획득한 한족 포로가 46만 2천 3백여명에 달한다. 숭정 15년 동지에서 16년 여름까지 청군이 획득한 포로는 36만 9천명에 달한다.(<청태종실록>)
청군은 입관이후 계속해서 백성들을 사로 잡아 포로로 삼았다. 순치 2년 8월 병부에 명하길,'포로들을, 이전 예에 따라 성을 공략하다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했다.
(<청세조실록>)
한족 노예들은 주인의 학대를 받았을 경우, 대량으로 자살하였다. 강희 초년, “팔기병 집안에서 매년 자살하는 자가 2천명이 넘었다.”([청사고]),이를 보건대, 청군의 입관이후,몇 십년간 자살한 한족의 수는 10만명을 넘었으리라 본다.
만주인의 혹독한 학대로 인하여, 대량의 한족 노예는 도망쳤다. “수개월 동안, 수만명의 노예가 도망쳤다.”<청세조실록>, 청의 통치자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626년 <도인법>을 제정, “도망친 노예를 은닉하면 참수형에 처한다. 그 이웃의 10집, 100집, 지방관도 처벌을 받을 것이다.” 이로 인해, 청조에 투항한 유명한 배신자인 정남왕 화종명조차, 도망친 한족 노예를 숨긴 이유로 강제로 자살했다.
4.대학살의 규모에 대해 추정
필자가 명청교체기 인구변천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명대 중국 인구는 최후로 행해진 공식 통계에 의하면, 51,655,459명이고, 조사시기는 명 광종 태창 원년이었다. (명 가종실록 4권)
청조 최초의 전국적인 인구조사는 청 세조 순치제 8년에 실시되었는 데, 이 때 인구수는 10,633,326명이었다. (청 세조실록 61)
청조가 전국을 완전히 통제한 청 성조 강희제 21년 (1682년, 입관후 48년) 전국 인구는 19,432,753명이었다. 이는 명 광종 태창 원년 인구의 단지 36%이다.
이상의 인구 숫자는 당연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인구에 따라 세금을 납부해야 했으므로 많은 인구수가 조사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명대 실제 인구를 대략 1억에서 2억 사이로 추정한다. 비록 청조에서도 이러한 인구은닉현상이 있었지만, 청군의 입관이후, 인구 감소는 최소로 잡아도 5천만이상이다. 48년 동안 새로운 세대들이 계속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청조 입관 직후 수년 간 인구 감소는 5천만명을 휠씬 상회할 것이다. 즉, 인구감소가 1억을 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수천만명이 청군의 입관 후에 학살당했다고 추정해도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첫댓글 우아... 어찌했든 인구의 절반이상을 잃었다는거네요.... 한족이 원,청같은 이민족 왕조에 적대적인 평가를 내릴법도 하네요..;
명나라가 내부분열과 스스로 약체화 되지 않았다면.. 청군의 저런 만행도 불가능했을듯요..그냥마구잡이식으로비교하자면 민간인까지 합쳐 전사자 교환비가 한 1대 100정도는 되는군효.
양주에서 청군이 저지른 학살은 매우 유명하죠. 남명의 장수인 사가법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순국하고, 자그마치 30만 명이 넘는 한족들이 청군에게 학살당해, 그 시체에서 나온 피에 현판이 떠다녔다고 했을 정도라는군요.
한번 당하기 시작하면 저렇게 피바다가 됐으니, 한이 골수에 맺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조선인은 얼마쯤 끌려갔나요?조선은 어떤 꼴을 당했는지 기록이 없습니까? 조선에게는 변발을 강요 안한게 다행이군요.어떻게 보면 수백년동안 쌓인 감정이 많은데 말이죠.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조선인 포로가 최대 60만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다른 기록들도 최소 10만에서 20만 명의 조선인이 청군에게 붙잡혀 갔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족히 수십만의 조선인이 청군의 포로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했고, 조선에 남아있던 가족들이 몸값을 마련해 찾아가도 몸값을 높게 부르는 바람에 찾아오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의 경우, 남자들은 조선영이라고 해서 청군 휘하의 외인부대에 소속되기도 했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노예가 되어 논밭을 일구거나 각종 공사장에 끌려 다녔습니다. 여자들의 경우는 청나라 귀족이나 군사들의 성노리개가 되어 더 비참한 생활을 살았습니다.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제가 쓴 <옛사람에게 전쟁을 묻다>의 "청에 끌려간 조선 포로의 삶"과 "환향녀, 비뚤어진 시각이 남긴 아픈 흔적" 부분을 참조하세요. ^ ^ ~
흠.... 좀 이상할지 모르나.... 전 청대의 역사에 대해 대체적으로 한족 편입니다.... 음 이글만 보면 당시 한족(그래도 당시 가장 귀한 명나라 시민권자들이었는데....)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군요... 뭐 극단적 비교로 , 북방민족극야만적 시각등으로 본다면 이글또한 칭기즈칸의 흥기시대 몽골의 잔육한 살육방식 과 쌍벽을 이룰만한 자랑스런 글
입니다. 그리고 20세기 전반기 일본이 저지를 최대의 만행보다도 더 값진 짓이고요...... 전 청나라 이꼴 현재 무형유형의 중국완성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잠깐 얘길 센다면...20세기가 시작된지 얼마지나지 않아...청조 최고 권력자 서태후는 만한통혼 금지를 폐지합니다.... 자 어떻습니다...이제 표면상 청제국은 보통의 중화제국이 되었습니다....(그전에도 차이나 엠파이어 였지만...) 뭐...뒤에 나올 중화민쿡, 인민공화국의 앞...그러니까... 원형이 되었죠... 더이상 한인들이 청나라인(아주 작은 범주로는 만주족등 팔기인)이 아니다...재외국민이다..이제 쓸모없는 말이 되었죠...이는 당시 메이지 일본등에서의 국민형성등과도
"만한금혼 폐지 -> 청의 중화제국화, 민족통합 -> 근대국민국가 형성" - 이렇게 보시는듯 한데, 청은 그 이전부터 스스로를 '중화제국'으로 자칭했습니다!!! "만주족의 무력 + 한족의 문화 = 새로운 중화" - 이게 청나라가 내건 '중화'였죠... 또 서태후가 그런 조치를 행한 후에도 '만한관계'는 여전했으며~ 기본적으로 서태후는 '만주귀족'과 '한족관료'의 알력을 이용해서 정권을 공고히한 사람입니다!!! 결코, '민족통합' 따위에 발을 들일 사람이 아니었어요...ㅡㅡ; '소수민족 차별'이 아직까지 살아있고, '근대국민국가'도 미완성인 나라가 중국입니다...ㅉㅉ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 청은 이것말고도 국적법이라든가? 입헌 절차등등까지도...완전히 새롭게 탈바꿈 하기 위해 변혁을 시도했죠..... 다음은....한줌 서양에 비해 무력이 강대한 중화제국에 관한것인데...... 비록 가설이지만....18세기 이전까지 서구가 중국을 침략하지 못한것은 당시 중화제국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스페인도...영국도.... 중국을 공격하지 못했죠...
18세기까지 서구국가들이 중국을 넘보지 못한 것은~ '항해기술 미흡' 등의 요인 이외에도, '중국 공포증'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청나라의 정성기인 '강건성세'에 중국에 왔었던 영국인 '맥카트니'는 "중국은 거지꼴의 노후한 대국"이라고 평했다지만, 당시 서양에는 중국의 직접적인 상황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고, 이것이 '과대평가'로 이어졌던 것이죠^^; 그러나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실체를 인식한 서구열강들은~ 앞다투어 중국침략에 혈안이 됩니다!!! 같은 아시아의 일본도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국 공포증'을 떨쳐버리고,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죠...ㅡㅡ;
근데....만주족은 중국에서의 싸움에서 여타 다른 경쟁세력을 물리치고 취후 승리자가 되었습니다...비록 결과적이지만...그럼 중국을 새로 접수한 만주족은 서구보다 무력이 강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명이 그렇게 약한것일까요? 아니면 이것은 어느정도 내전적인 요소가 있는지라....완전한 재외세력인 서구는 중국을 정복할순 없지만..(혹은 영토을 차지할수 없지만)만주족은.....천명등을 받아...중국을 차지할수 있는걸까요? (좀 다른 얘이지만......7세기 중국을 차지한것은(강력한 수를 대체한것은) 고구려가 아니라.....이씨 일가 였습니다...)
만주족이 중원에 들어오는 소위 '입관(入關)'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명나라의 '자멸'이었고, '한간(중국의 배신자)'들도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이자성의 난'이 진압되었다면~ 청나라의 '입관'은 한참이나 늦어졌을 겁니다... 명나라의 불행은 앞뒤의 적을 맞아야했다는 겁니다...ㅉㅉ 예컨대 숭정 10년(1637)에 양사창 등이 이끄는 관군 10여 만이 난을 거의 진압하고, 장헌충의 항복을 받기까지 했었고, "청과 화의하고 우선 난을 진압하자"는 의론이 있었지만, 반박되었죠ㅡㅡ; 이렇게 난이 평정되려는 찰나, 이듬해인 숭정 11년, 청군이 대대적으로 침범해와~ 관군이 철수하자 난이 되살아 나고...
게다가 청나라가 '입관'할 당시에는 명나라의 구심점인 '북경조정'이 붕괴되고, '대명천자'도 자결한 상태로~ 사실상 '지휘부'가 상실된 상태였기에 손쉽게 각지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겁니다!!! '남명정권'의 쓰레기들은 백성들을 단결시켜 "무지막지한 오랑캐"를 당적할 구심점의 역할을 하지 못했구요...ㅡㅡ;
끝으로.....청대 인민들은 살기 편한 시대였나 입니다... 그리고 만청시대 청 집권자의 극악무도한 행패질은 중국 역사에서 특수한 것인가? 아니면 기강이 엄벌한...혹은 소년천자 강희에게서 볼수 있는 선정을 베푼..... 냉정하고 좋은 시대 였는가 입니다.... 솔까 말....그럼 명나라 종실들은....최고 권력자는....꽃추 없는 나부랑이들은 당시 명대 백성들을 대규모 패죽이지 않았는가? 자세히 살펴보진 않았으나.....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명나라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혹한 관의 횡포에..... 반란군의 봉기에...... 배고픔등에
의해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물론 중국 역사상 많은 '대량도살'이 있었지만, 만주족처럼 단기간에 저렇게 많은 인구를 학살한 전례는 매우 드뭅니다... 명나라의 부패도 정말 병맛이지만, 청나라도 그 이상으로 썩어 문드러졌고, "가혹한 관의 횡포에..... 반란군의 봉기에...... 배고픔"은 마찬가지였어요...ㅡㅡ; 그러나 "어치피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해 봐도, 만주족의 '대량도살'은 명나라의 부패를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ㅡㅡ;;
몽골군을 빠뜨리셧군요.; 뭐 만주족은 학살을 점령, 통치를 위한 정책으로 썻지만 말입니다.
강건성세 시절에도 민란은 있었죠. 특히 건륭제 때부터 산동, 대만, 그 유명한 백련교의 난까지.. 명나라때나 청나라때나 백성들 힘들기는 매한가지니.
실상 따지고보자면 만주족이 발흥하기 이전에 한족에게 탄압 당한걸 생각하면 샘샘 아닌가요?
하기야 한족들도 기회만 닿으면 어떻게 저것들을 다 쳐 없앨까 궁리했겠죠.. 이이제이 전술 자체도 제압할 힘은 안 되고 견제는 해야겠고해서 나온 전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