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가 사상이 봉건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게 된 이유는?
유가 사상은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제후들은 전통적인 지배질서와 군신 관계를 거부하고 따로 나라를 세워 군주가 되었고, 그 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기들이 무시했던 유가의 가르침ㅁㅁ을 다시 끌어들여 군주에 대한 자기 식의 예의 법도를 인의예지로 내세워 그 예의 법도를 어기면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것으로 간주하여 백성을 핍박하였다. 이러한 핍박의 근거로서 늘 인용되는 것이 공자의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임금을 어버이처럼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그들 자신은 스스로가 과연 임금다운지 전혀 되돌아보지 않았다. 지배자 자신이 도덕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에게 도덕적인 태도를 요구할 때 백성들에게 그 도덕은 그저 억압의 수단으로 여겨질 뿐이다. 유가 사상은 춘추 전국 시대의 시대적 정황은 물론 이후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도 종종 패도적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봉건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안타까운 국면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경우 도덕은 행복의 원리이기는 커녕 고통을 증대시키는 억압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