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
헨리 8세(Henry VIII,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는 잉글랜드의 국왕(재위 1509년 4월 22일~1547년 1월 28일)이자 아일랜드의 영주(재위 1541년~1547년)이며, 1509년 4월 21일부터 서거할 때까지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튜더 왕가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등극하였다.
헨리 8세는 영국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치세 초반기에는 14세기 존 위클리프 이후 활력을 얻기 시작한 종교개혁을 강력히 억압하였지만,[1][2] 로마 교황청과 대립한 왕으로 더 알려졌다. 이 싸움은 결국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6세기 이래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던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로마 교황 대신 잉글랜드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우두머리로 자리 잡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비록 그가 임종하기까지 얼마간 영국 성공회 신자였다는 주장도 있고, 헨리 8세가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 두 번째 부인인 앤 볼린과 결혼하면서 로마 교황청에 의해 파문 당했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 동안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와 교리를 지지하였다.[1][3] 본격적인 잉글랜드 종교개혁 운동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였다. 또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통합을 이끌기도 하였다. 대중문화에서 그는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며 여섯 번이나 결혼한 군주로 유명하다.
초기 삶 (1491-1509)
헨리 8세는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에 있던 프라센티아 궁전에서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헨리에게는 여섯 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겨우 세 명 - 아서 (웨일스 공), 마거릿, 메리 -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남았다. 1493년, 아직 젖도 못 뗀 헨리는 드바 성의 성주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1494년에 그는 요크 공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그와 더불어 잉글랜드의 문장원 총재와 아일랜드의 총독으로 지명되었다. 헨리는 우수한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라틴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 당시 관례상 맏이였던 아서 왕태자가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것으로 예정되었던 탓에 헨리는 교회의 직분을 맡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아서의 죽음
그러나 1502년에 아서가 알려지지 않은 불치병(아마도 결핵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에 걸려 갑작스럽게 죽어버렸다. 그리하여 혼인관계를 통하여 잉글랜드 왕국과 스페인 왕국 간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헨리 7세의 노력이 잠시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였다. 죽은 아서 대신에 그의 동생 헨리가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운 웨일스 공과 그의 형제의 미망인, 즉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결혼을 허용해줄 것이 요청되었다. 당시 캐서린은 아서 왕태자와 결혼은 했으나 처녀성을 잃지는 않았다고 맹세하였다.
결국, 교황으로부터 관면을 받은 후 자신의 젊은 남편이 죽은 지 14개월 만에 캐서린은 새로운 웨일스 공이자 죽은 남편의 형제와 다시 약혼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1505년까지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동맹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졌다. 그리고 아직 젊었던 헨리는 자신의 약혼이 자신의 동의 없이 치러진다고 여겼다.
두 사람의 결혼은 1509년 헨리 7세의 임종 때까지 늦추어지다가 그로부터 2개월 후인 6월 11일에서야 결혼하였다. 그리고 1509년 6월 24일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헨리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로부터 2일 후, 헨리 8세는 선왕의 중신 가운데 평판이 좋지 않은 장관들인 리처드 엠프슨과 에드먼드 더들리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가장 죄질이 나쁜 반역죄로 고발되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럼에도, 1510년에 왕명에 따라 처형되었다. 이는 장차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헨리 8세의 주요한 책략이 된다. 이후 어린 시절 헨리의 개인교사였던 요크 대주교 토머스 울지가 헨리 8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1509-1525)
헨리 8세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으며, 그의 궁정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학구적이며 예술적인 혁신의 중심지였다. 그는 뛰어난 음악가, 작가, 시인이었다. 그가 작곡한 것으로 여겨지는 악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합창곡 Pastime with Good Company 또는 The Kynges Ballade이다. 또한, 그는 욕심 많은 노름꾼이었으며 주사위 선수였다. 특히 그는 운동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무예와 마상 경기, 사냥, 테니스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심이 투철하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를 비판한 《칠성사의 옹호》를 저술한 공로로 교황 레오 10세의 칭찬을 받아 ‘신앙의 옹호자(Defender of Faith)’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였다. 덧붙여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는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에게 대대로 물려받아 현재 영국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의 칭호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1511년 교황 율리오 2세가 프랑스에 반대하는 신성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새로운 동맹에는 수많은 나라가 신속히 참가하였는데,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까지 포함되었다. 헨리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진짜 이유는 프랑스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는 1511년 11월에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었으며 캉브레 동맹 전쟁에 말려들 경우를 대비하였다. 1513년, 헨리 8세는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잉글랜드군은 스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헨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루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잉글랜드를 침공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1513년 9월 9일에 플로덴필드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이때 전사한 스코틀랜드 병사 가운데는 스코틀랜드의 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들
역사가들은 엘리자베스 블런트와 메리 볼린 이 두 사람을 헨리의 정부(애인)로 확신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블런트는 헨리의 사생아인 헨리 피츠로이를 낳았다. 이 소년은 어린 나이임에도 1525년 6월 리치먼드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1533년에 그는 메리 하워드(앤 볼린의 사촌)과 결혼하였으나, 3년 후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죽었다. 피츠로이가 죽었을 무렵 헨리는 사생아에게도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부던히 노력하였다.
메리 볼린은 앤 볼린의 누이로 여겨지며, 1519년과 1526년 동안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리 볼린의 두 아이, 즉 캐서린 캐리와 헨리 캐리가 사실은 헨리 8세가 진짜 아버지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은 그에 대한 증거가 없다.
헨리의 중대한 문제 (1525-1533)
아라곤의 캐서린이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함과 더불어 헨리 8세의 조급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러던 중 1525년, 헨리 8세는 당시 캐서린 왕비의 젊은 시녀이자 한때 자신의 애인이었던 메리 볼린의 누이인 앤 볼린에게 눈독을 들여 그녀에 대한 소유욕을 갖게 되었다. 앤 볼린은 예전의 메리 볼린처럼 그늘의 왕비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을 유혹하려는 그의 시도에 저항하였다. 그녀의 매몰찬 거절을 받은 헨리 8세는 오히려 더욱 그녀에 끌리게 되면서 집요하게 그녀를 유혹하였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계속된 유혹에도 앤 볼린은 계속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헨리 8세에게 혼인을 무효화시키라는 제안을 했을 것이며, 그것이 아들을 상속자로 삼고자 하는 헨리 8세의 소원에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라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있다. 과거 헨리 8세의 아버지인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잉글랜드 왕국은 왕위를 놓고 내전을 겪은 전례가 있었다(장미 전쟁). 그러한 일을 잘 알던 헨리 8세는 왕위 계승을 탄탄히 하고 싶어했다. 그와 캐서린 사이에는 딸 메리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얼마 못 가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헨리의 사정을 파악한 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이 캐서린을 대신해 왕비로 등극하고자 하였다.[1] 얼마 후 그녀는 헨리 8세의 소망을 이용하여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4] 헨리 8세는 대리인 토머스 울지 추기경으로부터 독립하여 앤과 관련된 자신의 계획을 그에게 맨 처음 전하지도 않고 성좌에 호소하기로 하였다. 곧바로 왕의 비서인 윌리엄 나이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시켜 줄 것을 청원하고자 보내졌다.
혼인이 무효라는 주장의 근거는 캐서린은 아서와의 이전 결혼에서 순결을 잃었으며, 따라서 헨리 8세는 형수와 결혼한 셈이 된 것이기 때문에 레위기에 어긋나는 비(非) 성경적인 결혼이며 율리오 2세 교황의 관면은 효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혼인이 무효 될 경우에는 헨리 8세가 새로운 여성과 새로 결혼식을 해도 허락해달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여성은 사실상 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였기 때문에 나이트는 교황과 접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왕의 사절은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와야 했다. 헨리 8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압력을 받는 교황이 카를 5세의 숙모에 해당하는 캐서린의 혼인 무효를 거부할 것은 명백했다. 교황은 로마에서 직접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헨리 8세가 새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에 울지 추기경이 배신했을 거라고 확신한 앤 볼린은 그가 1529년에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헨리 8세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였다. 쫓겨난 울지는 앤에게 자신의 정권 복귀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울지는 앤을 국외 추방하려는 책략을 비밀리에 꾸몄으며 캐서린 왕비와 로마 교황청과의 연락을 취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헨리 8세는 울지의 체포를 명령하였으며, 1530년에 울지는 호송 도중 병에 걸려 죽었다. 울지를 대신해 대법관의 자리에 오른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새로운 정책에 협력하여 의회에서 울지를 탄핵하였고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이 불법이라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공포하였다. 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에 대해 반감을 품기 시작하면서 모어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1년 후 법원의 판결에 따라 캐서린 왕비는 궁전에서 추방되었으며, 그녀의 방의 새 주인은 앤이 되었다. 예전의 울지처럼 앤은 각료 임명 등 정치적 문제에서 대단히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앤은 윌리엄 워햄이 죽은 후 공석이 된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자기 가족의 개인 예배당 사제인 토머스 크랜머를 앉혔다. 이 결정은 프랑스 왕의 도움을 받아 로마로부터 인정받았다. 토머스 크랜머는 클레멘스 7세로부터 팔리움을 하사받았다.
날이 갈수록 잉글랜드 내에서 로마의 힘은 조금씩 약해져 갔다. 1532년, 앤의 지지자였던 법률가 토머스 크롬웰은 일찍이 의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비서장관과 주교 총대리의 지위를 제수받았다. 이후 토머스 모어가 대법관직을 사임함에 따라 장관들 우두머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두 번째 결혼
1532년 겨울, 헨리 8세는 칼레에서 프랑스 왕과 회담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결혼에 대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를 원했다. 칼레에서의 회의는 프랑스 왕국이 헨리 8세의 재혼을 위해 지원해주었던 이래 정치적 승리였다. 즉시 잉글랜드의 도버로 돌아간 헨리와 앤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앤은 곧바로 임신하였고, 왕실 관습에 따라 1533년 1월 25일 런던에서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올렸다. 행사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1533년 5월 23일,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혼인 합법성에 대한 결혼을 내리고자 던스터블 수도원에서 특별 법원을 소집하였다. 그곳에서 크랜머는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5일이 지난 1533년 5월 28일에는 헨리와 앤의 결혼은 정당하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1533년 6월 1일에는 앤의 이름이 왕의 배우자 목록에 오름에 따라 캐서린의 왕비 칭호는 박탈되었다. 1533년 9월 7일, 앤은 예상보다 일찍 출산하였다. 앤은 헨리 8세의 모후(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딴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를 낳았다. 교황의 판단을 거절한 의회는 1533년 계승법을 제정하면서 잉글랜드 왕국의 합법적인 왕비는 앤 볼린이라고 확정하였다. 그에 따라 캐서린의 딸인 메리는 서출로 신분이 격하되었으며, 왕위 계승 순서에서 엘리자베스 다음이 되었다. 특히 이 법안에는 ‘그 어떤 외국의 왕자 또는 유력자’도 거절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왕국의 모든 백성은 이 법안을 인정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만약 이를 거부할 땐 즉시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특히 헨리와 앤의 결혼을 무효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반역죄로 다스려 사형으로 처벌받았다.
잉글랜드 종교개혁 (1533-1540)
동시에 하원은 로마에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교서를 발표하면 가차없이 형벌에 처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왕의 동의 없이 교회가 어떤 규정도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 이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은 마지막으로 헨리 8세와 크랜머 대주교를 파문에 처함과 동시에 대주교의 혼인무효 판결은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앤과의 결혼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무익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황 대사를 잉글랜드에서 철수시킴에 따라 로마와 잉글랜드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자 잉글랜드에서는 몇몇 법률이 더 통과되었다. 1534년 성직임명법을 반포하여 국왕에 의해 지명된 후보만이 주교로 착좌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으며, 1534년에 국왕지상법(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단언하였으며, 위 법 조항을 거부하는 이는 1534년 반역법에 따라 왕에 대한 대역죄로 처벌하기로 승인하였다. 잉글랜드 신민들은 왕에게 “하느님 다음으로 높으신 폐하”를 의무적으로 말하게 하고 교황의 왕관 수여식을 “부당하고 무자비한 권리 침해이자 강요”라고 주장해 교황의 권위를 떨어뜨림으로써 파문에 응대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교회와 단절한 채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사적인 갈등
헨리 8세와 앤 볼린은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평온하고 사랑스러운 날들을 즐겁게 보냈지만, 헨리 8세의 바람기와 빈번한 불신 때문에 앤 볼린은 눈물과 격노를 함께 느끼며 힘겨워하였다. 반면에 헨리 8세는 앤의 끊임없는 성급함과 과격함을 싫어했다. 1534년 앤은 상상 임신 혹은 유산을 하게 되었고, 헨리 8세는 그녀가 자신에게 아들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1534년 성탄절 이전, 헨리는 비밀리에 크랜머와 크롬웰을 만나 캐서린의 복귀 없이 앤을 내쫓아 왕비를 교체할 방법을 상의하였다.
한편, 헨리의 종교 정책에 대한 반발은 잉글랜드 내에서 빠르게 진압되어갔다. 헨리 8세에게 항거한 무수히 많은 로마 가톨릭교도가 고문당한 다음 처형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띈 사람은 로체스터의 주교 존 피셔와 헨리 8세의 전직 대법관 토머스 모어였다. 그들은 둘 다 수장령에 대해 서약하는 것을 거부한 일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티번에서 참수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는 잉글랜드 백성 사이에 더 큰 반발심을 불러일으켜 전복 모의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주목할 만한 사건이 모어와 피셔가 처형된 날 같은 해 10월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은총의 순례이다.
헨리 8세는 봉기의 지도자 로버트 애스크를 왕실 연회에 초대하여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반역을 용서할뿐더러 평화적으로 해산한다면 그들의 요구 사항을 경청해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왕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을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헨리는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을 반역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에 왕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애스크는 다음해에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나 그들의 힘은 예전만 못했기 때문에 손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애스크를 포함한 지도자들 전원은 체포당한 후, 반역죄로 다스려 처형되었다. 이후 많은 수도원이 1539년 5월 의회의 승인에 따라 잇달아 강제로 해산되었다.
앤 볼린의 사형 집행
1536년 1월 8일 헨리 8세와 앤 볼린에게 아라곤의 캐서린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헨리와 앤은 밝은 노란색 옷을 차려입었다고 한다. 헨리는 캐서린의 죽음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기쁨을 드러내었다. 앤은 다시 아이를 뱄으며, 만일 그녀가 이번에도 아들을 낳지 못할 시 어떻게 될지는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헨리 8세는 경기에서 그만 낙마하여 심한 상처를 입었다. 한때 헨리 8세의 생명이 위험한 것처럼 보였다. 사고 소식을 들은 앤은 그 충격으로 15주간 잉태하였던 사내아이를 유산하였다. 그날이 1536년 1월 29일로 마침 캐서린의 장례식을 거행한 날이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본다.
앤의 연이은 임신은 필사적으로 아들을 몹시 바라는 헨리의 관심을 끌었다. 저술가 마이크 애슐리는 앤은 엘리자베스를 낳고 1536년 사내아이를 유산한 후 두 명의 사산아를 더 낳았다고 적고 있다. 대부분 1533년 9월 엘리자베스의 탄생이 유일하며 1534년 여름의 유산과 1536년 1월의 거의 4개월간 잉태한 사내아이를 유산한 것으로 볼 때 있을법한 증거가 된다. 앤이 마지막 유산에서 회복할 즈음, 헨리는 자신의 혼인이 마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헨리의 새로운 정부인 제인 시무어가 급격히 대두하였다. 앤의 형제에겐 거부된 가터훈장이 제인의 형제에게는 허락되었다.
앤은 자기 오빠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남자와 근친상간을 하고 반역을 조장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녀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남자들도 모두 고소당했다. 1536년 5월 2일에 앤은 포박당한 채로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그녀는 간통, 근친상간, 반역의 죄로 고발당했다. 비록 그들에게 불리한 증거는 불확실했지만, 법원에서는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죽음을 선고하였다. 조지 볼린과 다른 피고인들은 1536년 5월 17일에 처형되었다. 같은 해 5월 19일 아침, 피의 탑으로 끌려간 앤은 그곳에서 도끼를 한 번 내려치면서 신속하게 처형되었다.
왕자의 탄생
제인 시무어, 헨리의 세 번째 왕비
1536년 헨리는 앤을 처형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모시던 시녀 제인 시무어를 총애하여 약혼하였으며, 10일 후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세 번째 결혼과 동시에 헨리는 웨일스를 잉글랜드에 합병시키는 문서에 승인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강력한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그 후 1536년 개정된 왕위계승법에 따라 제인이 낳은 헨리의 아이들이 일차적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지며, 메리와 엘리자베스 공주들은 서출로 선언되었다. 제인은 훗날 1547년에 에드워드 6세가 되는 에드워드 왕자를 낳았다. 출산은 위험했으며 제인은 출산 후유증으로 1537년 10월 24일 그리니치 궁전에서 죽고 만다. 제인의 죽음 후, 헨리와 전 왕실은 장기간 동안 애도하였다. 헨리는 제인만을 자신의 ‘참된’ 아내로 생각하였으며, 그 이유는 그녀만이 그에게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아 주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훗날 헨리가 죽은 후 그 시신은 제인의 옆에 묻혔다.
말년 (1540-1547)
1540년에 헨리 8세는 성인의 유골과 유물을 모신 성소의 파괴를 인가하였다. 이번에 헨리 8세는 계승을 보다 확실하게 하려고 다시 한번 결혼하기로 하였다. 에식스 백작으로 승진한 토머스 크롬웰은 로마 교황청이 잉글랜드를 향해 공격해올 경우 중요한 동맹자가 되어 줄 개신교도인 클리브즈 백작의 누이인 앤을 권하였다. 궁정화가 한스 홀베인이 그린 앤의 초상화가 헨리 8세에게 보내졌다. 초상화를 본 헨리는 만족해하며 앤과의 결혼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에 도착한 앤을 본 헨리는 그림과 다른 그녀의 실제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플랑드르산 암말”이라고 부르며 멀리 하였다.
헨리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려고 또다시 혼인을 무효로 하고 싶어했다. 싸움을 원치 않았던 헨리와 함께 클리브즈 공작은 신성 로마 황제에 대한 항쟁에 종사하고 있었다. 클리브즈의 앤은 충분히 총명하여 헨리의 탐구를 방해하지 않았음에도 혼인 무효를 당하였다. 결혼 후 성생활에 관한 물음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헨리는 단지 밤마다 그녀의 방에 들어가 이마에 입맞춤만 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혼인을 무효로 하는 것을 막는 모든 장애는 사라졌다.
그 후 결혼은 종료되었으며 앤은 ‘왕의 누이’라는 칭호를 받고 메리 볼린의 가족들이 이전에 거주하였던 히버 성에 들어가 살았다. 동시에 헨리의 총애를 잃은 크롬웰은 그 뒤 그에게서 사권을 박탈당하고 참수되었다. 그가 창설한 교회 부섭정이란 독특한 자리도 사라졌다.
캐서린 하워드의 초상화,
한스 홀베인, 1540.
1540년 7월 28일, (크롬웰을 처형한 날과 같은 날) 헨리는 앤 볼린의 외사촌인 젊은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하였다. 그는 자신의 새 왕비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캐서린 하워드는 결혼 후 곧 몸가짐 관련 사전을 겪게 된다. 이전에 그녀는 프란시스 더햄과 비공식적으로 약혼하여 공공연히 잠자리를 같이하였으며, 왕비가 된 후에는 왕의 시종 토머스 컬페퍼를 총애하였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던 하워드 가문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 8세에게 캐서린의 헤픈 몸가짐에 대해 밀고하였다. 처음에 헨리는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크랜머가 캐서린과 관련된 문제를 조사하는 것은 허락했다. 심문받을 당시에 캐서린이 더햄과 이전에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것을 인정할 경우 그다음 헨리와의 결혼은 법적으로 무효가 될 수 있었으나, 그녀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더햄이 자신에게 강제로 불륜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더햄은 토머스 컬페퍼와 캐서린 왕비의 관계를 폭로하였다.
앤 볼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혼인이 공식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처음부터 무효하다는 판결이 내려짐에 따라 캐서린 하워드는 간통죄로 1542년 2월 13일에 처형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같은 해, 잉글랜드의 나머지 수도원들도 모두 폐쇄되었으며 수도원의 자산은 모두 왕실에 양도되었다. 대수도원장과 수도원 부원장은 상원에서의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오직 대주교와 주교들만이 교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포함되었다. 성직자로 구성된 상원의 고위 성직 의원은 귀족 의원과 더불어 잉글랜드 상원을 장악하였다.
헨리는 1543년에 유복한 미망인 캐서린 파아와 마지막으로 결혼하였다. 그녀는 헨리와 종교를 주제로 논쟁하였다. 종교적으로 개혁자였던 캐서린 파아에 비해 헨리는 보수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자칫 그녀의 파멸이 멀지 않았다고 여겨졌지만 그녀는 헨리에게 순종을 표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구하였다. 그녀는 헨리와 그의 첫 번째 두 명의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화해시키는 데에 앞장섰다. 그녀들은 아직도 서출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지만, 1544년 의회법에 따라 에드워드 다음으로 왕위계승자에 포함되었다.
죽음과 계승자
헨리 8세는 말년에 몸집이 엄청나게 비대해져 과체중(허리 치수가 54인치/137cm)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움직이려면 특별히 발명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의 몸은 곪은 종기로 뒤덮였으며 통풍까지 앓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1536년 마상 경기 도중에 입은 다리 상처를 그대로 둔 까닭에 더는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더러 점차 상처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 탓에 그의 죽음이 앞당겨졌으며, 결국 부왕의 제90회 생일날인 1547년 1월 28일 화이트홀 궁전에서 서거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5살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수도사들! 수도사들! 수도사들!”이라는 말을 남긴 다음 곧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윈저 성에 있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매장되었다. 그가 죽은 후 10년 이내에 그의 상속인 세 명이 연달아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세 명 모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1543년 왕위계승법에 따라 헨리의 유일한 적자인 에드워드가 왕위를 이어받아 에드워드 6세가 되었다. 당시 에드워드는 겨우 아홉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열여섯 명의 수행자들을 동반한 섭정 정치를 펼치게 된다.
출처: 위키백과 |
첫댓글 영국의 왕 중 가장 스켄들이 많은 왕으로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를 세운 왕으로 참으로 이야깃 거리가 많지요. 헨리 8세 가족들을 소재로 하는 영화도 엄청 많지요. '천일의 앤' '헨리 8세' 등 등 이야기의 소재가 끝도 없는 왕이었지요. 제가 자료를 찾아 편집해 올렸으니 많이들 읽어보시길...오는쪽에 링크 되어 있는 자료도 찾아가 보세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