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롤링거 왕조
메로빙거왕조를 이어 프랑크왕국의 후반을 지배한 왕조.
왕가의 계보가 대(大)피핀과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아르눌핑가(家)라고도 한다. 마스강 ·모젤강 유역의 대토지 소유자였으나 메로빙거왕조 후기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로서 세력을 펴나가 중(中)피핀, 카를 마르텔 때에는 다른 분국(分國)의 궁재도 겸임,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그의 아들 소(小)피핀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들 샤를마뉴는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여 로마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았으나 루트비히 1세의 사후 843년의 베르?窪뗀析? 870년의 메르센조약을 거쳐 왕국은 3개로 분열되었다. 이탈리아계(系)는 875년에, 동프랑크계는 911년에, 서프랑크계는 987년에 각각 단절되고 동프랑크에서는 콘라트 1세를 거쳐 작센왕조 독일왕국이 성립되었고, 서프랑크에서는 카페왕조 프랑크왕국이 성립되었다.
<샤를마뉴>
2. 카페 왕조
보통 중세의 직계 카페 왕조(987∼1328,14대)를 가리키나 광의로는 그 후의 방계, 즉 발루아 왕조(1328∼1498, 7대)·발루아 오를레앙 왕조(1498∼1515, 1대)·발루아 앙굴렘 왕조(1515∼1589, 5대)·부르봉 왕조(1589∼1793, 1814∼1830, 7대) 등도 포함한다. 직계 카페는 초대 위그 카페에서 비롯되어 처음에는 봉건사회 속에서 취약한 왕권을 갖는 데 불과했으나 12세기 전반(前半) 루이 6세 무렵부터 활발해져서 동세기 말부터 13세기에 걸쳐서 필리프 2세·루이 9세 시대에 집권화(集權化)하기 시작하여 국내로부터 영국 왕실의 세력을 크게 후퇴시키고 국내의 왕령화(王領化)를 적극적으로 촉진하였다.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 필리프 4세 때에는 권력도 증대하여 행정기구의 정비와 함께 사실상의 국가통일이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3. 발루아 왕조
1328년 카페왕조 직계의 왕 샤를 4세가 죽어 왕가가 단절되자, 3부회의 결의로 그의 종제(從弟) 발루아백작 필리프 6세가 왕위를 계승하고 발루아왕조를 개창하였다. 1589년 앙리 3세의 죽음으로 발루아 왕가가 단절되어 부르봉왕조로 교체될 때까지 13대의 국왕이 통치하였다. 그러나 직계 발루아가(家)의 상속은 관철되지 못하고, 직계 발루아가(1328~1498),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1515), 발루아 앙굴렘가(1515∼1589)의 3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왕조 때의 프랑스는 백년전쟁 ·이탈리아전쟁에다가 흑사병의 만연, 위그노전쟁과 같은 종교전쟁 등 파란 많은 시대였다.
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발단된 백년전쟁으로 대표되는 전반기는 흑사병의 유행이 가세하여 경제 ·사회적 혼란이 컸으며, 자크리의 농민반란, 파리에서의 에티엥 마르셀의 반란, 아르마냐크 대 부르고뉴의 귀족당파의 항쟁, 3부회의 발언권 증대 등으로 국왕의 권력은 지극히 불안정하였다. 그러나 샤를 7세 때를 전환점으로 하여 백년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프랑스에 있는 영국의 영토를 거의 되찾아 프랑스 국토통일을 실현하였다.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때 발루아왕조의 위세가 가장 컸는데, 강력한 경제정책과 행정기구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해서, 다음을 이은 부르봉왕조의 절대왕정을 준비해 놓았다. 비록 이탈리아전쟁은 실패하여, 이 전쟁 때부터 생긴 합스부르크왕가와의 적대관계는 이후 프랑스 왕정이 몰락할 때까지 지속되었지만, 이 전쟁을 통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들임으로써, 왕조 말기에는 프랑스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운동에 커다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4. 부르봉 왕조
이 왕조의 명칭은 부르봉 라르샹보시(市)에서 유래한다. 원래는 소영주(小領主)였으나 1272년 프랑스왕 루이 9세의 여섯번째 아들인 로베르와 부르봉가(家)의 베아트리스가 결혼을 함으로써 그들의 소생인 아들 루이 1세가 공작(公爵)이 되었다. 1488년 장 2세가 죽음으로써 그의 동생 피에르 2세가 영지를 계승하여 루이 11세의 왕녀 안느와 결혼하였다. 이들 사이의 딸인 수잔은 1505년 몽팡시가(家)의 샤를과 양자(養子) 결혼을 하였으며, 이 샤를은 원수(元帥)로서 프랑수아 1세의 휘하에서 이탈리아 전쟁 때에 활약을 하였다.
샤를의 사후에 다시 그 직계가 단절되었으나 그의 일족인 앙트완이 프랑수아 l세의 누이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에프타메롱의 저자)의 아들 잔 달브레와 결혼함으로써 부르봉가를 재흥케 하였다. 이들의 아들인 앙리 드 나바르가 바로 신교도의 수령으로서 1589년 프랑스의 왕위에 오른 앙리 4세이다. 이 이후 루이 13세, 루이 14세로 왕위가 계속되어 프랑스 절대왕정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루이 14세에 이어 루이 15세, 루이 16세가 잇달아 왕위에 올랐으나 1792년 혁명으로 폐위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몰락 후에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로 복위되었고, 다음 샤를 10세(부르봉왕조 최후의 왕)가 1830년의 7월혁명에 의해 퇴위할 때까지 부르봉왕조의 왕위가 지속되었다.
7월왕정 이후에도 샤를 10세의 가계(家系)는 계속되어 그의 손자인 샹보르백작은 파리코뮌 이후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스스로 사양하여 83년 그의 죽음과 함께 정통(正統)은 단절되었다. 더욱 부르봉가는 앙리 4세 이래 여러 외국의 왕가와 혈연관계가 깊었는데, 특히 에스파냐와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공(公)이 1700년에 왕위를 계승(에스파냐 왕 펠리페 5세)한 관계로 프랑스에서 왕정이 폐지된 이후에도 부르봉왕조는 계속되었다. 1931년에 공화(共和)혁명으로 인하여 퇴위한 알폰소 13세가 최후의 왕이다. 이탈리아에서의 부르봉가는 나폴리왕위를 계승하여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르사유궁전>
5. 메로빙거 왕조
명칭은 프랑크족의 1파(派)인 살리족의 부족장 메로비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당시 프랑크족은 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각각 소왕(小王)의 지배하에 있었다. 살리족은 민족 이동기에 라인강(江)을 넘어 독산드리아로 진출하였는데, 당시 브뤼셀 부근 데스파르굼의 왕이 메로빙거왕조의 조상인 클로디오로서 역사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왕(430)이다. 그의 아들이 왕조명의 바탕이 된 메로비스이며, 또 그 아들이 힐데리히 1세인데, 이 때 이미 살리족의 통일이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다. 그는 투르네왕국의 지배자로서 갈리아의 로마군과 결탁하여 서(西)고트 및 작센인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481년 뒤를 이은 그의 아들 클로비스는 살리족뿐만 아니라 리브아리족 ·상(上)프랑크족까지 병합하여 프랑크왕국을 건립하였으며, 루아르강 유역에 남아 있던 로마인 세력인 시아그리우스의 군대를 격파하여 이 나라를 멸망시키고 로마인의 갈리아 지배권을 타도하였다(486). 이어 서(西)고트왕국과 부르군트왕국을 토벌하고 아라망족을 정복하여, 갈리아 지방과 남서 독일지방까지 그 세력을 확대시키고, 가톨릭교로 개종하여(496) 로마 교회와의 제휴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511년 그가 사망하자, 왕국은 4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어 테우데리히 1세는 동부 및 샹파뉴를 소유하고, 클로도미르는 아키타니아, 힐데베르트 1세와 클로타르 1세는 남 ·북 갈리아 지방의 주요한 왕령지를 분할하여 각각 영유하였다. 그 중 테우데리히 1세는 튀링겐왕국을 멸망시켜 부르군트를 병합하였다(531). 그의 아들 테우데베르트 1세는 동진(東進)하여 바이에른 부족령을 차지하고, 북(北)이탈리아도 병합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신성한 자)라고 부른 최초의 프랑크 국왕이었으며, 또 메로빙거왕조 극성기의 마지막 왕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테우데발트는 북이탈리아 지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죽음을 기회로 튀링겐인의 반란 및 작센 부족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에는 이미 클로도미르와 힐데베르트 1세의 가계는 끊어지고, 그 후 클로타르 1세에 의해 재차 통일되었으나 그는 원래 클로비스의 네 아들 중 가장 무능하였다. 따라서 재통일기는 아주 짧은 시기로 끝났다. 여기에서 메로빙거왕권의 정복에 의한 팽창 발전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프랑크왕국은 그의 사후(561) 4명의 아들에게 재분할되었다. 특히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왕(分國王) 지기 베르트 1세와 네우스트리아 분국왕 힐페리히 1세의 대립은 그들의 왕비인 브룬힐다와 프레데군데 사이의 암투와 얽혀서 전국적인 내란을 야기시켰다. 613년 힐페리히 1세의 아들 클로타르 2세에 의해 재차 전국이 통일되었으나, 국내 호족(豪族) 세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어갔다.
원래 프랑크왕국은 로마와 같은 관료제 국가로 발전하였으나, 게르만족 고유의 재산 균분 상속의 원칙 때문에 항상 분열의 위기에 놓이고, 각 분국왕들의 싸움이 잦았으므로 대토지 소유에 바탕을 둔 귀족세력이 점차 강대해져, 클로타르 2세와 다고베르트 1세(623∼683)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상의 실권은 이들 귀족들 중 가장 세력이 강한 각 분국 궁재(宮宰)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카롤링거가(家)의 대두가 눈에 띄었다. 즉, 중(中)피핀 때에는 프랑크 전국의 궁재를 겸하였고, 그의 손자 소(小)피핀의 쿠데타로 751년 최후의 메로빙거가 국왕 힐데리히 3세가 폐위되고, 카롤링거왕조가 그 뒤를 이어 프랑크왕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써 메로빙거왕조는 단절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