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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1,915m) 당일 종주 □ 산행개요 o 산행일자 : 2006. 6. 4(일) 05:20 ~ 18:30 o 기상상황 : 흐린 후 맑음 o 산행인원 : 광주나사모산우회원들 o 산행개요 : 광주역(03:00) ~ 호남고속도로 ~ 석곡IC ~ 화엄사입구(04:10) < 아침식사(04:10~04:30) 및 준비운동(04:30~40)> ~ 성삼재(05:00) 성삼재매표소(05:20) ~ 노고단 ~ 천왕봉(14:30) ~ 대원사 ~ 유평매표소(18:30) 유평매표소(19:15) ~ 산청온천 및 뒤풀이(19:55~21:40) ~ 대전통영고속도로 ~ 88고속도로 ~ 동광주IC ~ 홈플러스(23:15) o 산행코스 : 총 44Km, 산행시간 13시간 10분 소요
o 산행 새벽 2시20분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챙겨 2시35분 집을 나섰다. 부름택시를 불렀으나 인근에 대기자가 없어 도로까지 걸어나가 택시를 잡고 광주역으로 출발하였다. 대형버스 2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3시가 조금 넘어서 출발하였다. 호남고속도로 석곡IC를 빠져나가 구례 화엄사 입구 주차장에서 찌게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준비운동 후 화엄사에서 출발할 팀과 성삼재에서 출발할 팀으로 나누었다. 성삼재에 도착하니 새벽 5시다. 지리산. 1967년 12월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산. 그 넓이가 4백 84㎢, 1억 4천평이 넘는 면적으로 계룡산의 7배, 여의도의 52배쯤 된다. 우리나라 단일 산으로는 최장 최대를 자랑하는 장엄한 넓이와 깊이를 지닌 산이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활처럼 굽은 25.5km의 주능선은 노고단, 반야봉, 토끼봉, 칠선봉, 촛대봉, 천왕봉 등 1천 5백 미터가 넘는 봉우리만도 16개나 이어진다.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에서 훨훨 일어난 거대한 산괴이다. 서쪽으로는 전남 구례군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시에 접하며, 동북쪽으로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 동남쪽으로는 경남 하동군에 접하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대의 단일 산악지대이다. 반란의 산 - 지리산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빨치산과 반란군일 것이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한달이상 노고단의 외국인 별장촌은 반란군 김지회의 근거지였다. 반란군이 물러가고 난 후 국군 토벌대가 다시 들어와 이곳이 또다시 빨치산 거점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 버렸다. 노고단고원이 황폐해진 직접적인 이유이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노고단 산장 서측에는 흉물스런 별장촌의 잔해가 남아있고, 외국인 별장촌은 노고단 남쪽 왕시루봉 기슭으로 옮겨져 다시 세워졌다. 6.25 이후 빨치산 잔당들은 또다시 지리산으로 모여들었고, 이는 국군 토벌대의 무차별 포격, 방화로 이어지고 만다. 피아골 산장터에서 한트럭분 이상의 인골(빨치산의 것으로 추정)이 나왔다는 사실은 얼마나 토벌작전이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1952년 빨치산 대몰살의 현장이었던 대성골, 거림골, 빗점골, 의신부락등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오늘날까지도 대성골의 숨은 골짜기에서 인골이 종종 목격되곤 한다. 당시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죄없는 양민이 국군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역사로 남아있다. 보통 사람들은 등정과 하산거리까지 합치면 최소 35km이상에 1박2일 20~25시간 이상을 걸어야한다. 그래서 지리산 종주는 아마추어 등산인들에게는『진자 산꾼』의 경지에 올라서는 관문 같은 코스이기도 하다. 지난해 7월, 무더위 속에 광주 백암산악회 회원들과 30리터 배낭을 짊어지고 1박 2일 성삼재를 출발하여 천왕봉에 올라 백무동까지 지리산을 종주한 이래 이번이 두번째 종주인 셈이다. 당일 종주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지만 종주를 끝내고 맛보는 짜릿한 기분을 생각하며 크게 호흡을 가다듬고 첫발걸음을 내딛는다. 성삼재 매표소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5시20분이다.
< 성삼재 ~ 노고단 : 4.7km > ⇒ 40분 성삼재에서 노고단 오르는 길은 넓은 완만한 경사로의 포장길이라 오르기에 편하다. 지난해보다 그래도 배낭의 무게가 가벼워 오르기가 수월하다. 섬진강과 무등산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라지만 희뿌연 날씨 탓에 시야만 흐리다.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굽이쳐 오르는 도로는 이내 갈림길이다. 편안한 포장길을 버리고 오른쪽 숲속의 지름길로 접어든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내리 비친다. 숲길 터널을 벗어나자 붉은 벽돌집의 노고단대피소가 나타나고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인파가 우리들을 맞이한다. 노고단(1,507m)은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주봉으로 꼽힌다. 지리산 종주의 시작점이며 북쪽으로 심원계곡을 남쪽으로 화엄사 계곡과 문수 계곡, 피아골 계곡에 물을 보태는 크나큰 봉우리다. 노고단 산자락의 끝에 천년 고찰 화엄사가 자리해 한층 위엄을 갖추었다. 노고단에 마치 호텔처럼 보이는 3층 벽돌건물의 호화산장이 들어선 것은 지리산의 본격적인 관광지 개발 서곡이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무장비 등산'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 점과 자동차를 타고 맨몸으로 노고단을 오르더라도 이 산장에 들르기만 하면 산상생활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게끔 한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 이 산장의 건립이 천은사~반선의 서부 지리산 종단 관광도로 개설과 연계되어 이루어 진 것도 그 때문이다. 노고단산장은 건평 115평의 본관 외에도 취사장 화장실 등의 부속시설과 5천여 평의 방대한 야영장을 갖추고 있다. 본관에는「노고단」,「반야봉」,「종석대」라고 명명된 2백명 수용의 대형객실 3개와 샤워실, 매점, 직원용 식당, 보일러실, 관리사무실이 들어 있다. 객실은 2층 침상으로 난방장치가 되어있는데다 침구도 제공된다. 이 산장의 객실에 들면 여관처럼 편안한 잠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단체산행이든 가족단위이든 전화예약(☏ 061-782-8663)으로 만사 OK라고 한다.
쉬지 않고 발길을 재촉했다. 대피소에서 노고단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가파른 오르막을 10여분 따르니 노고단이다.(06:00) 시원한 조망이 펼쳐지긴 했지만 뭔가 답답했다. 6월의 지리산의 산 밑과 위의 기온차가 심해 날씨가 뿌옇고 시야는 흐리멍텅하다. 동으로 천왕봉까지 뻗어 있을 주능선은 커녕 바로 코앞에 버티고 솟아 있을 반야봉조차 시야가 흐리다. 다만, 노고단 정상과 KBS중계탑만이 한눈에 조망되고 있었다. 해발 1,507미터인 노고단은 옛날에 지리산 신령인 산신할머니 노고(老姑)를 모시는 단(壇)이라 하여 노고단이라 불린다. 자연휴식년제 구간으로 한번에 100명씩 사전예약신청을 받아 탐방하는 노고단 정상 오르는 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노고단 안부능선 끝에는 정상의 돌탑과 동일한 형태의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 돌탑으로 달래고 주능선 길로 방향을 틀었다. 드디어 종주 능선길 25.5km의 들머리에 접어들었다.(06:00)
< 노고단 ~ 삼도봉 : 5.5km > ⇒ 1시간 15분 노고단에서 돼지령을 지나 임걸령 샘터까지의 길은 평탄한 오솔길이다. 지리산 종주 코스 중 가장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다. 산행이라기보다 달리듯이 하여 40여 분만에 임걸령 샘터에 도착했다.(06:40) 시원한 바람이 능선을 타고 넘는 임걸령은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3.2㎞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1,320m의 높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단의 능선이 동남풍을 가려주어 산속깊이 자리한 아늑하고 조용한 천혜의 요지이며 샘에서는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고 물맛 또한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날에 의적이나 도적들의 은거지였던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의적 임걸(林傑)의 본거지였다 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샘터에서 피아골쪽 암벽 밑에 막(幕)터가 있는데 이곳을 '황(黃)호랑이 막터'라고 부른다. 옛날에 약초를 캐는 황장사가 눈내리는 겨울밤 이곳에 천막을 치고 자다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6.25동란 때 빨치산들이 수없이 죽어 그 피로 골짜기가 붉게 물들었다하여 이름 붙여진 피아골로 내리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임걸령에서 반야봉을 향해 가파른 능선을 한동안 오르다보면 평지가 나오고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면 노루목 삼거리가 나온다.(07:00) 여기에서 1km를 오르면 반야봉이다. 반야봉(般若峰)은 그 높이와 관계없이 지리산의 제2봉이며, 지리산을 상징하는 대표적 봉우리이다. 주봉(1,732m)과 중봉이 절묘하게 빚어낸 지리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답게 노고단은 물론 멀리 천왕봉에서도 선명하게 조망돼 그 독특한 모습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많이 한다. 그 누가 보아도 두 봉우리의 정다운 모습을 보면 금방 지리산 사진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신비로운 낙조(落照)의 장관을 연출해 내는 지리산 8경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저편 너머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고 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주능선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천왕봉까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지루할 정도로 오르내려야 한다. 반야봉 갈림길에서 오른쪽 산허리를 돌아 삼도봉에 도착했다.(07:15) 삼도봉 정상에는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를 구분 짓는 삼각뿔이 세워져 있었다. 지리산은 우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라는 삼도의 큰 경계역할을 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경상남도의 산청군∙함양군∙하동군 등 3개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 등 5개 시와 군, 그리고 15개 면의 행정단위로 그 구역을 구분짓고 있다. 그 광활한 지리산 자락은 또한 이들 3개 도, 5개 시․군, 15개 면단위에서 계곡과 산등성이를 기점으로 해 수많은 자연마을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지리산의 역할은 경계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이러한 지리산의 특성을 단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산봉우리가 있다. 바로 경남과 전남∙북을 구분짓는 삼도봉이다. 반야봉 바로 아래 해발 1,550m로 지리산의 수많은 준봉 가운데 특이할만하게 눈에 띄는 봉우리는 아니다. 반야봉의 그늘에 가려 아주 이름없고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는 산세지만 지리산을 삼도로 구분하는 기점이라는 데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경남은 삼도봉~불무장대~통족봉~촛대봉~섬진강으로 이어지는 불무장등능선을 경계로 해 전남과 구분되며, 전북과는 삼도봉~토끼봉~명선봉~삼각고지~영원령~삼정산을 연결하는 능선을 경계로 하고 있다. 전남과 전북 경계는 삼도봉~반야봉~도계삼거리~만목대~다름재 구간으로 이 경우는 능선으로 경계선을 만들다 계곡을 건너 다시 능선이 경계선이 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삼도를 나누는 삼도봉의 지명은 그동안 삼도봉이란 지명으로 불리지 못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리산 일원에 이정표를 세우면서부터 삼도봉으로 명명됐다. 「낫날봉」「날라리봉」「늴리리봉」등 다양하게 불리던 이 봉우리가 삼도의 경계기점이라 해 「삼도봉」으로 명명되고 정착된 것은 매우 적절한 것 같다. 원래 이 봉우리는 정상 부분의 바위가 낫의 날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해 낫날봉으로 불렸다한다. 낫날이란 표현의 발음이 어려운 탓에 등산객들 사이에선 「낫날봉」이 「날라리봉」또는 「늴리리봉」등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조금 천박한 느낌의 날라리봉 등보다 삼도의 경계기점이란 뜻의 삼도봉이 훨씬 어울린다.
< 삼도봉 ~ 연하천대피소 : 5.0km > ⇒ 1시간 30분 삼도봉에서 화개재 내리막길에는 목재데크가 정갈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탐방객의 안전과 자연보호를 위해 지난 99년에 설치된 목재데크는 폭 1.5m에 길이 240m로 정확히 600계단을 이루고 있었다. 600계단의 나무등산로는 산행의 지루함을 없애주고 새로운 묘미를 안겨주었다. 조각품처럼 아름다운 나무계단을 지나 10여분 내리막을 타니 화개재다. 능선 왼쪽 길로 200m 내려가면 뱀사골 대피소와 뱀사골로 내리는 갈림길이다. 1978년10월8일 '반야봉산장'이란 이름으로 조립식 철제건물에 지나지 않았던 뱀사골산장은 그 후 보수 개축하여 지금은 80여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149평방미터 면적의 아담한 건물로 변했다. 1989년 12월 개통된 뱀사골 산장의 전화번호는 (063)626-1732번이다. 반야봉의 큼직한 덩치 아래에 위치, 샘물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뱀사골은 핏빛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피아골과 더불어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손꼽힌다. 그 옛날 수로가 발달했던 시절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온 장사치들이 이곳 화개재에 짐을 부리고, 지리산 북쪽의 상인들이 화개재를 넘어 뱀사골로 다니던 길이다. 탁 트인 조망이 시원스러운 화개재 역시 나무를 이용한 깔끔한 전망대 구역이 만들어져 있다. 앞쪽으로는 토끼봉과 멀리 명선봉이 한눈에 조망되고, 뒤로는 지나온 삼도봉이 우뚝 솟아 있다. 잠시의 틈도 없이 앞에 딱 버티고 서 있는 토끼봉(1,533m)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토끼봉은 계속 고도를 높이며 올라야한다. 주능선중 가장 길게 오르는 오르막이다. “이름이 왜 토끼봉일까?” 토끼봉이란 명칭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서가 아니고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卯峯)으로 부르는 것이다. 한편, 토끼봉은 정상초원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일명 '지보등'이라고도 불린다. 토끼봉 남쪽 능선길을 따라 20여 리 내려가면 칠불사(七佛寺)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 능선길은 가끔 하산시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토끼봉에서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구상나무숲을 내려서면 갖가지 잡목숲을 지나 완만한 능선안부에 이르렀다가 고목나무가 쓰러져 나뒹구는 경사길을 오른다. 능선 평지길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돌밭길을 서서히 오르면 총각샘 이정표 앞에 도착한다. 이제까지 오던 길은 울창한 수해를 이뤄 더없이 시원하고 청량감있는 행보가 이어진 길이었다. 총각샘은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에 있으며 커다란 벼랑 밑에서 신기하게 샘이 솟아나는데 지난 1970년 7월경 지리산악회 사람들이 수소문 끝에 발견한 샘이다.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서 이용하던 샘이었다고 하는데 이 소문을 듣고 재차 발견한 샘이다. 재차 발견한 사람이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이었기 때문에 혹은 심마니 노총각에서 각기 유래돼 총각샘이라 이름지었지만 명명할 때는 장터목의 산희(山姬)샘이 여성적이라서 이것과 대비시킨다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총각샘은 갈수기에 말라버리는 게 흠이라 한다. 총각샘으로부터 경사도 있고 힘도 드는 길이 나온다. 나무그늘 하나 없는 토끼봉에는 햇볕이 바로 머리위에서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내쳐 걷는다. 등산로는 다시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오른 만큼 다시 내려야하는 게 종주능선의 특징이다.
총각샘을 지나 미끄러운 바위벼랑을 기듯이 오르면 차츰 완만해지다가 명선봉 부근의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를 지나면 내리막 흙길로 변하고 잘 만들어 놓은 나무계단을 따라 내리면 지리산 주능선 샘 중 수량이 가장 풍부한 연하천산장(1,440m)에 이른다.(08:45) 명선봉 능선길은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하여 숲속에서는 낙엽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숲속 평지 연하천(烟霞泉)에 이르면 마치 요정들의 별천지에 온 듯하다 연하천산장에 도착하여 배낭을 풀고 물도 채우고 5분여를 휴식하였다. 지리산 주능선상의 명선봉(해발 1,462m) 바로 아래 자리한 연하천산장(☏ 063-625-1586)은 다른 산장들과 견주어 「첩첩산중의 고도」처럼 생각된다. 이 산장만이 바로 연결되는 하산 또는 등정 루트가 없기 때문이다. 연하천산장은 동쪽의 삼각봉이나 서쪽의 토끼봉을 거치는 등정 또는 하산 루트가 있다. 뱀사골입구인 반선에서 연하천산장에 닿으려면 뱀사골을 따라 화개재까지 12km를 오른 뒤 다시 주능선을 따라 토끼봉 면선 봉을 지나는 8km를 더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반선에서 이 산장까지 11km의 짧은 거리로 바로 오를 수 있는 직행루트가 숨겨져 있다. 이 코스의 열쇠는 뱀사골 지류에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는 와운마을이다. 이 마을은 뱀사골 입구의 와운교를 건너 편편한 오솔길 3km로 30분이면 닿게 된다. 와운마을 앞을 흐르는 계곡은 이 마을 동남쪽의 삼각봉과 면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면성봉 지맥을 감돌아 뱀사골에 합류한다. 뱀사골과 와운 지계곡 사이의 능선을 따라 연하천산장에 닿는 오솔길이 곧 직행루트이다.
산장 앞 귀퉁이 고사목에는 장난감 같은 작은 종이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취침시간 등을 알리기 위한 종인 듯 했다.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산장내부는 중앙 통로 양옆으로 2층 침상이다. 1층은 남자, 2층은 여자의 침실일 것이다.
< 연하천대피소 ~ 벽소령대피소 : 3.6km > ⇒ 1시간 05분 고사목 한그루가 어서오라고 환영의 인사를 하는 듯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삼각봉을 넘어서 조금씩 지쳐가고 있는 우리 앞에 고사목 가지사이로 형제봉이 우뚝하다. 저 봉우리만 넘으면 벽소령이다. 마지막 힘을 내 가파른 등산로를 타고 오른다. 등줄기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옷은 땀에 흠뻑 젖은 지 오래다. 가장 긴 오르막인 토끼봉보다 더 힘들게 형제봉을 넘어선다.(09:25) 큰바위 뒤로 드디어 벽소령 산장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산장의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금방 닿을 듯한 벽소령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한 굽이만 돌면 끝일 것 같은 등산로는 몇 굽이를 돌아도 계속 이어진다. 드디어 벽소령 산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09:50)
벽소령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km에 달하는 지리산 종주 등반코스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고도가 가장 낮은 산령(해발 1,340m)으로서 예로부터 화개골과 마천골을 연결하는 산령으로 유명하거니와 지금은 화개에서 마천까지 38km의 지리산 중앙부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횡단 도로다. 벽소령은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그 주위에 높고 푸른 산능들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루고 있다. 벽소령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마치 자신이 신선이 된 양 착각을 하게 한다. 산이 낮고 구름이 주위를 뒤덮고 있어 그런 느낌을 받을 것이다. 벽소령에서 가장 뛰어난 볼거리라면 밤하늘의 달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벽소령의 달은 지리 10경 중의 하나다. 벽소명월(碧霄明月).... 이 산장은 약 250여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전화가 없고 비상기 무전기로 지리산국립공원동부관리소와 연락하며, 시설이 깨끗하고 취사장이 있다. < 벽소령대피소 ~ 세석대피소 : 6.3km > ⇒ 2시간 15분 벽소령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바로 출발하였다. 얼마나 더 갔을까.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평덕봉(1,522m)을 지나 선비샘이다.(10:40) 잠시 목을 축이고 물병에 물을 채우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길을 재촉하니 11:15분 칠선봉(1,558m)에 도착하였다.
앞으로도 세석까지는 2.1km가 남아있다. 가파른 나무계단이 이어지고 한참을 가니 드디어 영신봉(1,652m)이다.(11:55) 바로 아래 세석대피소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고 평전위에 솟아있는 촛대봉이 눈에 든다. 12:05분, 세석산장 갈림길에서 왼쪽의 세석자연관찰로로 접어들었다. 지난해에는 성삼재에서 이곳까지 무려 12시간 이상이 걸렸는데.... 그리고 지난 5월21일 산악회를 따라 세석평전에 올랐을 때, 아직 때 이른 철쭉이었는데 이제사 만개하였다. 세석평전은 각종 희귀한 식물들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식물원을 연상케 한다. 그 중에서도 구상나무가 가장 눈길을 끈다. 반야봉 주변 구상나무 군락지가 아니라도 지리산 곳곳에 산재해 있어 지리산을 대표할 수 있는 나무가 구상나무다.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지리산, 한라산, 덕유산 등 높은 지역에서만 자라는 나무다.
세석산장은 신라 때 화랑도의 수련장으로 이용됐으나 6.25를 전후해서는 공산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평화의 땅으로 말끔한 모습의 산장이 서 있다. 세석산장도 장터목산장과 함께 전화가 가설되었다.(055-973-1600) 세석고원의 철쭉꽃이 유별나게 많고 아름다운 데는 여진이란 여인의 슬픈 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먼 옛날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온 호야(乎也)라는 남자와 여진여인은 대성계곡에서 보금자리를 열었다. 그들은 씨족사회의 모든 간섭으로 벗어나 지리산의 대자연속에서 인간적인 자유를 찾은 것. 이 한쌍의 남녀는 산채와 산과를 따먹으며 원앙새처럼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자녀가 없는 한가지 아쉬움이 따랐다. 어느날 남편이 없는 사이 검정곰이 나타나 여진에게 "세석평원에는 소원대로 아들딸을 낳게 해주는 음양수라는 신비의 샘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여진은 너무 기뻐 남편과 상의할 틈도 없이 단숨에 음양수 샘터로 찾아가 샘물을 실컷 마셨다. 그러나 곰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호랑이가 곰과 여진이 주고받는 말을 엿듣고 지리산 신령님께 고해 바쳤다. 지리산 신령은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것에 크게 노하여 곰을 토굴 속에 감금 조처하였고, 그 사실을 알려준 호랑이를 백수의 왕으로 군림하도록 특별 배려를 했다. 또 음양수 샘물을 훔쳐 마신 여진여인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려 평생 잔돌밭에서 혼자 외로이 철쭉을 가꾸게 하였다. 그날부터 여진은 뜻하지 않았던 스스로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며 세석평원에서 날이면 날마다 손발이 닳도록 꽃밭을 가꾸어 철쭉은 무럭무럭 자라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지게 되었다. 여진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아 유별나게 청초하게 아름답고, 또 여진의 슬픈 넋이 꽃잎마다 서려있어 애련하게 피고 진다는 것이다. 또, 여진여인은 밤마다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의 산신령을 향하여 죄를 빌다가 그대로 돌이 되었는데, 촛대봉의 앉은 바위가 바로 가련한 여진의 굳어진 모습이란 전설이다.
세석고원에선 지난 72년부터 매년 6월 첫째주 주말에 철쭉제를 열어왔다. 진주 산악회가 주최해 왔던 이 산상축제는 전국 산악인들의 큰 잔치로 자리를 잡았으나 철쭉밭의 훼손 등을 염려하여 88년까지 5년동안 중단을 했다. 이 기간에는 공식행사는 중단한 채 진주산악회원들만이 세석고원에 올라 산신제를 모셔 왔다. 철쭉제가 중단된 5년동안 철쭉밭이 거의 원상복구가 되었다. 89년6월3일 18회 철쭉제는 5년만에 부활시키고, 축제도 자연보호 경진대회로 성격을 바꾸어 '지리산 제모습 찾기'운동을 벌였다. < 세석대피소 ~ 장터목대피소 : 3.4km > ⇒ 1시간 40분 - 점심시간 20분 포함 세석을 지나 촛대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은 불과 0.7km이지만 매우 힘든 코스다. 촛대봉에 오르는 길목은 세석평전으로 때늦은 철쭉이 만개하였다. 봉우리 정상이 촛대처럼 생겼다하여 이름 붙여진 촛대봉이다. 해발 1,703미터로 설악산 대청봉보다 겨우 5미터 낮다. 멀리 천왕봉이 팔을 뻗치면 닿을 듯이 바라다 보인다. 촛대봉에서 보이는 세석의 묘미는 사뭇 대자연의 신비가 느껴지는 듯하다. 더욱이 6월의 촛대봉은 고산대 특유의 황량함이 감도는 곳으로 붉으스레한 철쭉꽃 봉오리들이 곧 철쭉의 향연임을 암시한다. 일명 세석골로도 구분되어져 불리는 골을 따라 시루봉, 촛대봉, 세석코스를 등반하는 묘미는 색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촛대봉 ~ 시루봉 구간에서 보는 천왕봉의 웅장함과 발아래 도장골의 아름다움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20분, 촛대봉에 도착하여 점심식사 준비를 하였다. 도시락을 꺼내 펼치니 새벽 4시에 먹은 이른 아침 탓인지 꿀맛이다. 많은 인파가 점심을 먹고 있다. 식사시간도 단 20분이다.
고만고만한 오르내림의 연속인 삼신봉과 연하봉을 오르내리며 지루한 줄 모르고 장터목으로 향하였다. 세석고원과 장터목 사이의 연하봉(1,730m)은 기암괴석과 층암절벽 사이로 고사목과 어울러져 운무가 이 봉우리에 머물다가 바람처럼 흘러가곤 하여 이곳에 앉아 있으면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천왕봉의 일출광경과 신비한 반야봉의 낙조를 영겁의 세월동안 간직한 채 대자연의 섭리를 알듯 말듯 인간에게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연하봉은 늘 그렇게 변함없이 지리산에 있다.
연하봉에서 잠시 휴식 후 내리막길을 800여m 내려가니 장터목산장이다.(13:45)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갯마루를 장터목이라 한다. 장터목은 해발 1,653m로 옛날 천왕봉 남쪽 기슭의 사천주민과 북쪽의 마천주민등이 매년 봄가을에 이곳에 모여 장을 열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장터가 섰다는 것은 지리산에 기대하고 삶을 영위했던 옛사람들의 강렬한 생의 의지를 엿보게 해 준다. 이곳은 남쪽의 중산리에서 9km, 북쪽의 백무동 마을에서 9km의 거리이다. 덕산이나 인월에서 등짐을 지고 올랐던 사람들에게는 그 거리가 더욱 멀고 힘이 들었을 것이다. < 장터목대피소 ~ 천왕봉 : 1.7km > ⇒ 45분 13시45분 장터목을 출발 가파른 등산로를 15분 올라서니 제석봉 고사목지대다. 예전에는 숲이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였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탐욕에 눈이 먼 인간이 저지른 자연파괴 행위가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라는 고사목 군락지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제석봉은 높이가 1,806m로 지리산에서 중봉(1,875m) 다음 세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천왕봉은 동쪽에 중봉을, 서쪽에 제석봉을 나란히 거느리고 있다. 제석봉은 옛날 산신의 제단인 제석단이 있어 더 한층 유명하다. 이 제단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했고 옆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항시 콸콸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명당임을 알 수가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석봉 일대를 뒤덮고 있는 고사목군락이다. 10만여평의 완만한 비탈에 고사목들이 서 있고 바닥은 풀밭일 뿐이다. 고사목 그 자체는 재난으로 생명을 중도에 마감한 나무들의 시체여서 살벌한 느낌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고사목들이 한두그루도 아니요, 10만여 평에 걸쳐 듬성듬성 서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특이한 경관이 되고 있다.
이곳은 전나무 구상나무들의 고사목 군락지로 고사목 자체가 귀중한 자연경관이다. 고사목의 훼손금지는 물론 이곳에서 야영과 취사행위를 금지한다. 등산로 이외 지역의 출입도 금지한다. 그러나 이곳의 고사목들은 해마다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방화로 한번 죽었던 나무들이 또 다시 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곳의 고사목들은 해발 1,700m 이상의 높은 곳에서도 재질이 뛰어난 나무들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편 50년대의 지리산의 아픔을 50년째 침묵의 증언을 하고 있는 것에도 많은 뜻이 있다. 제석봉에서 고사목 사이로 서쪽을 바라보면 반야봉과 노고단이 선명히 떠올라 있는 모습이 일품이다. 제석봉을 지난 능선을 내려가다가 오르니 거대한 바위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하늘로 올라가는 통천문이다.(14:20) 통천문은 자체가 천연 암굴로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못한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지금은 철제사다리를 놓아 등반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통천문의 위용은 시인 고은의 말에서 절정을 이룬다.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는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신선조차도 이 관문을 거쳐야 할 정도이니 우리 인간들은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천왕봉은 동쪽으로 개천문(일명 개선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이들 두 관문 이외에 천왕봉을 향하는 길목은 칠선계곡을 거쳐 마천에서 깎아지른 듯한 날카로운 비탈길과 멀리 대원사에서 치밭목∼중봉을 거쳐 오를 수 있는 험난한 두 길이 있으나 모두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듯 해야만 주봉에 닿을 수 있으니 천왕봉은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개천문은 법계사를 거쳐 정상으로 향하다 보면 나타나는데 원래 좌우로 두개의 바위기둥이 서 있어 위용을 자랑 했는데 한쪽은 벼락을 맞아 없어졌다한다. 하늘을 여는 문이라 해 개천문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개선문으로 알려져 있다. 천왕봉... 드디어 꿈에 그리던 천왕봉에 올라 우리의 땅을 내려다보니 가슴이 벅차다.(14:30) 지금까지의 힘들었던 모든 것을 잊고....... 바로 이 맛이야 !!! 아! 민족의 영산 지리산이여, 천왕봉이여 !!!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에서 발원된다는 지리산 천왕봉이여 !!! 지리의 천왕봉은 언제 찾아도 웅장한 모습을 달리 하고 있다. 때로는 어머니 가슴처럼 넉넉하고 아늑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짙은 운무에 돌풍이 몰아칠 때면 속인들의 분탕질에 분노하듯 준엄함을 보여준다. 천왕봉은 또한 구름바다 속을 헤치고 떠오르는 해돋이의 장관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대 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헤아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가 하면 화려한 석양 낙조를 연출해 삶의 이치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해발 1915m, 지리영봉의 제1봉인 천왕봉....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찾는 이를 알도록 한다. 거대한 바위를 예로부터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의미를 풀이해 천주라 불렀음인지 서쪽 암벽에 「천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남명선생이 일찍이 「萬古天王峰 天嗚猶不嗚」이라며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로 지리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듯 그 위용은 아직도 변함없다. 반야봉과 노고단 등 1백10여개의 우뚝 솟은 준봉을 거느리고 그 아래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하선경에 울창한 원시림과 골골마다 용솟음치듯 흐르는 물보라 등 태고의 숨결을 발아래 숨겨둔 채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행정구역상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이 경계를 이루는 천왕봉은 함양방면으로 칠선 계곡을 빚어내 물줄기를 토해내며 산청쪽으로는 통신골, 천왕골(상봉골)을 이뤄 중산리 계곡으로 이어지게 하고 있다.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은 세갈래로 헤어졌다가 진양호에서 다시 한데 모여 남강을 거쳐 낙동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면서 경남인의 젖줄이 된다. 운무에 휩싸인 채 말없이 억겁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천왕봉은 흐르는 물줄기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터전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이 아닐까 여겨진다. 천왕봉정상에는 현재 82년 여름 경상남도가 세운 1.5m높이의 표지석이 서있는데 전면에는「智異山 天王峰 1915m」, 후면에는「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새겨져 있다.
우리 민족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이곳 정상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스러운 모습을 하며 인간을 자연으로 부르는 천왕봉은 나무도 제대로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바위들로 이뤄져 있으면서도 큰 바위 틈새에서 샘물을 빚어내고 있으니 자연의 오묘함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해주고 있다.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가다 보면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한 이 샘물은 천왕샘으로 불리고 있는데 명산을 찾는 등 반객들의 갈증을 한꺼번에 해소해 주기에 충분하다. 천왕봉은 정상의 신비함과 수려함을 만천하에 자랑하기라도 하듯 뭇 인간들을 보내지를 않는다. 천하제일경이라는 천왕일출과 석양낙조를 빚어내는 천왕봉은 3대에 걸쳐 적선을 하지 않은 이에게는 천지개벽을 연상케하는 일출광경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속설과 함께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 천왕봉 ~ 치밭목대피소 : 4.0km > ⇒ 1시간 45분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5km의 주능선만 장장 8시간 30분 만에 완주한 것이다. 20여분을 관망하다가 다시 중봉으로 향하는 내림의 길을 택하였다.(14:50)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들중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가 바로 천왕봉과 마주하며 서있는 중봉(中峯 1875m)이다.(15:10) 중봉은 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원시림을 자랑하며 지리의 제일에 해당하는 절경을 간직하고 있으나 천왕봉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봉은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려 다시 하봉(下峯)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써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형성한다. 써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다시 국수봉으로 연결돼 구곡산까지 계속된다. 이 능선은 이른바 "황금능선"으로 불릴정도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산세가 험난한데다 울창한 산죽들로 인해 등산로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아 일반 등산객들은 잘 찾지 않는다. 천왕봉에서 시작된 이 능선을 분기점으로 해 형성된 비경의 계곡이 있는데 바로 중봉골이다. 흔히들 이 중봉골을 일러 "지리산 최후의 비경" "미답의 계곡" 등으 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아직 중봉골이 일반에 덜 개방돼 비교적 자연 그대로의 계곡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실제 이 계곡에는 아직도 그 흔한 등산로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고 있으며 아예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이 계곡 입구에 "등산로 아님"이란 안내판이 걸려있다.
중봉에서 바라보는 반쯤 운무에 잠긴 천왕봉은 절경이다. 중봉의 철쭉평전을 지나 표지판을 따라 써리봉으로 향하였다. 15:45분,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솓아있는 써리봉(1,602m)을 지났다. 계속되는 내리막을 따라 치밭목에 도착하니 16:15분이다. 치밭목대피소는 뱀사골산장, 연하천산장과 함께 개인이 운영하는 대피소이다. 곰취, 참취 등의 취나물이 밭을 이루고 있어 이 곳을 치밭목이라고 부른다. 아담하기도하고 허름하기도한 작은 산장으로 취사장이 없다. 50여명을 수용할 수 있고 침구는 대여하지 않으며 커피외에는 물품판매를 하지 않는다.
< 치밭목대피소 ~ 밤밭골 : 6.2km > ⇒ 1시간 45분 100m 옆에 있는 식수터에서 물을 담아 잠시 휴식후 길을 재촉하였다.(16:25) 아직까지도 해발 1,425m 지점이다. 한참을 내려가니 새재갈림길이 나타났다.(16:50) 계곡을 따라 내리막길의 연속일줄 알았는데 오르고 내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이제 지칠대로 지쳤다. 지리산에서 사람이 사는 골짜기로 제일 깊은 곳은 대원사가 있는 대원사계곡이다. 계곡이 넓고 깊어 수량이 많다. 경사가 완만해 가야시대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삶의 터전을 이룬 곳으로 남원의 달궁계곡과 동서 쌍벽을 이루는 골짜기다. 대원사계곡 상류는 조개가 발견 되었다고 해서 조개골로도 불린다. 가야말기에 구형왕이 들어와 유평위 외곡에 나라를 세웠고, 현대사에는 빨치산의 경남도당 자리가 있던 곳이다. 무제치기폭포를 지나 밤밭골에 도착하니 오후 6시가 되었다. 외딴집에서 선두그룹 몇 사람이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잠시 평상에 앉아 휴식을 취하였다. 여기에서부터 시멘트 포장길이다. 대원사까지는 1.5km, 유평매표소까지는 3.5km이다. 유평매표소에 도착한 것은 18:30분이었다.
하늘금을 이룬 지리산 종주 100리길... 멀고도 먼 길이었지만 그래도 아무런 사고없이 지리산 대종주를 마쳐준 모두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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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하도다 돌구름. 역시 자네는 산꾼이여....... 축하하네
대단하신 체력이여. 장랑스런 선배님입니다